박대위가 구조헬기로 실어날라준 무기들.
엄청난 양의 탄약과 총기류들은 그대로 건물의 방어구축에 이용되었고, 폭발물은 인근 건물과 점포, 단독주택 등에 설치되었다.
반포로 향하는 도로를 제외한 다른 길목에 지뢰밭이 형성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와 같은 과정은 서래마을도 마찬가지라서, 내가 오가는 반포대교쪽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뢰밭이 되었다.
뭐가 됐든 덤벼보라는 식이다.
눈이 있는 사람이면 지뢰가 터질 일은 없다.
땅에 묻어놓은 것도 아니고, 도로 여기저기에 대놓고 뿌려놨으니까.
지뢰를 밟는건 앞뒤 안가리고 뛰어다니는 좀비들과, 괴물짐승들 뿐이다.
다행히도 지뢰밭을 형성한 이후 아직 폭발한 일은 없다.
특임대원들이 주변을 청소해놨고, 나도 마트 건물 주변을 대부분 쓸어놨으니까.
돌개바람을 타고 서래마을로 들어서니 바리케이트에서 경계를 보던 특임대원이 문을 열어주었다.
"성훈씨 오셨습니까."
"네. 밤새 별 일 없었죠?"
저장고를 속삭여 열고는, 돌개바람을 소환해제해 집어넣었다.
특임대원이 웃더니 고개를 젓는다.
"네. 별 일 없었습니다. 그나저나 그건 참, 볼 때마다 놀랍군요. 현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난 대답없이 웃어주고는 모텔 쪽으로 걸어갔다.
아, 그렇지.
난 뒤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산부인과 의사분 하나 있지 않습니까? 구조한 사람 중에."
"네. 있습니다. 모텔 708호에 묵고 계십니다. 아마 아직 주무시고 계실 것 같은데..."
산부인과 의사를 왜 찾는지 묻고싶은 눈치다.
난 대답없이 목례해주곤 모텔로 걸어갔다.
모텔 앞에선 성가연이 특임대원 하나와 함께 경계를 서고 있었다.
성가연이 웃으며 나를 맞아주었다.
"오셨어요? 오늘은 어딜 가실건가요?"
난 어깨를 으쓱하곤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아마도 병원이겠네요."
난 살짝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708호에 계신 분은 아직 자고있습니까?"
그러며 모텔로 들어갔다.
성가연이 살짝 놀라며 따라왔다.
"그 분은 왜요? 혹시 애인분께서...?"
난 엘리베이터를 호출하곤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 종말 이후에 좀 안좋은 일을 당한 여자들이 있어서."
"...아아."
성가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더니 고개를 저었다.
"경찰도 감옥도 없어졌다고 인간이길 포기한 놈들이 있었나보네요."
난 피식 웃었다.
"의외로 많을지도 모르죠. 말 그대로, 이젠 경찰도 감옥도 없으니까요."
성가연이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그럼 708호 그 분한테... 수술이라도 부탁드리게요?"
난 엘리베이터 올라타 7층을 눌렀다.
그리곤 갸웃했다.
"글쎄요. 제가 판단할 일은 아닌 것같고, 우선 여자들하고 만나게 해주고 싶군요."
성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일 하시는거예요."
"제가 뭐 하는게 있습니까. 그냥 여자들이 그런 일 당한게 유감이죠."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708호에 도착해 노크하니 곱게 나이들었다는 인상의 중년 여자가 문을 열어주었다.
"네...?"
"혹시 산부인과 의사 되십니까?"
"아, 네... 맞긴 한데..."
산부인과 의사가 놀라며 나를 바라봤다.
"아, 성훈씨였군요? 죄송해요. 방금 일어나서."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매만졌다.
난 미소짓고는 말했다.
"실례지만 좀 상담드릴 일이 있어서요."
갸웃하는 산부인과 의사를 바라보며 나는 여자들에게 있었던 일을 얘기해줬다.
그녀의 표정이 점점 바뀐다.
웃지도, 화내지도 않는 얼굴.
무표정에 가까운, 어쩌면 그녀의 본업인 산부인과 의사로서의 얼굴이 되어있었다.
"그 분들은 어떻게 하고싶으신건지 혹시 아시나요?"
"모릅니다. 하지만 의사선생님이랑 이야기는 아마 하고싶어 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찾아온 겁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혹시 모르니 준비는 해두는게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운영하던 병원이 이 근처에 있거든요. 여기 안전구역 너머에 있긴한데, 거기 좀 봐주실래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특임대원들하고 같이 나가서 청소해두죠."
"네. 전 준비 좀 하고 말씀하신 마트 건물에 한 번 가볼게요."
난 갸웃했다.
"지금 바로 가실려고요?"
"가야죠. 그 분들 지금도 우울하고 불안할텐데."
난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그러면 특임대원들에게 얘기해놓겠습니다. 가는 길은 깨끗하게 청소해놓긴 했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네. 고마워요."
서래마을에서 마트 건물까지는 지난 일주일간 완전히 쓸어놨다.
시체냄새를 제외하곤 그저 고요한 길일 뿐이다.
하지만 종말에 의사 혼자 길을 가도록 둘 순 없는 노릇이다.
지금 시기에 의사는 귀중한 자원이란 말이지.
아랫층으로 내려가 성가연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성가연이 말했다.
"제가 직접 모셔다 드릴게요. 성훈씨는 병원을 확보해 주세요."
"직접? 혼자서요?"
성가연이 웃더니 말했다.
"아뇨. 바리케이트에서 뭐 나타나는 것도 없는데 앉아서 시간만 죽이고 있는 대원이랑 같이 갈거예요. 어차피 옥상마다 저격수들 배치해놨으니 잠깐 다녀오는 정도는 괜찮아요."
그러더니 나한테 고개를 까딱해보인다.
"그 쪽 사람들 여지껏 한번도 못 만나봤잖아요? 성훈씨 애인도 한 번 만나보고 싶고."
...으음...
네명인데.
하나는 아직 이름 모르지만, 어쨋든.
설명하기 힘들다.
딱히 못가게 할 만한 이유도 없고, 못가게 하면 괜히 이상하다.
난 어깨를 으쓱하곤 모텔을 지키던 다른 특임대원에게 말했다.
"들었지요? 지금 갑니다. 민간인이라도 상관없으니 몇사람 저한테 붙여주세요. 시체만 들어나르면 되니까."
"알겠습니다."
특임대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 * *
[레벨이 올랐습니다.]
"후우."
난 엎어져있는 시체들을 바라보다 턱에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한 때 베이커리였던, 곰팡이와 파리 구더기가 가득한 점포를 나와 길을 되돌아갔다.
이걸로 서래마을 안전지역 인근의 산부인과와 그 근처 건물들까지 깨끗하게 쓸어놨다.
조용히 왕복하는 정도로는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것이다.
안전지역에서 사람들이 몰려나와 내가 쓸어놓은 산부인과 건물에서 시체들을 들어나르고 있었다.
내게 손을 흔들어주는 사람들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주고는, 상태창을 열어 포인트를 민첩에 넣었다.
이것으로, 레벨 18.
민첩, 32.
"...느리단 말이야."
안전지대를 확보해놓느라 초반에 바짝 몰아서 사냥하고 나서는 딱히 킬카운트를 올릴 일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산부인과와 몇몇 건물들 이외엔 진작에 쓸어놔서 렙업을 할 만한 꺼리가 없다.
그저 조용하고 평온한 일상일 뿐이다.
미군에게 받아 온 무기를 사방에 설치하고 배치하느라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걸렸으니 그냥 논 것만은 아니지만.
점심 무렵.
마트 건물 근처에도, 서래마을 안전지대 근처에도 더이상 좀비들이 없으니 돌개바람을 타고 좀 멀리까지 나가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서래마을로 돌아오니 모텔 앞에 성규혁을 비롯한 특임대원들이 모여 대통령 민정우의 말을 듣고있는게 보였다.
"아, 성훈씨. 마침 잘 오셨습니다."
대통령이 나를 발견하곤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다가가니 노신사 민정우가 내 손을 잡고는 웃으며 말했다.
"오늘도 우리 안전을 확보해주시느라 수고가 많으셨군요. 피에 젖지 않은 날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난 어깨를 으쓱하곤 말했다.
"병원을 확보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 있습니까? 다들 앞에 모여있는건 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요."
대통령 민정우는 아까부터 꽤나 밝은 표정이었다.
그가 말했다.
"방금 일본 총리와 전화가 연결되었습니다."
난 놀라며 그를 바라봤다.
"일본 총리요?"
대통령 민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본도 우리 못지 않게, 아니, 우리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라더군요. 자위대도 궤멸했고, 사실상 통솔 자체가 안되는 모양입니다. 그러니 총리도 그저 이름 뿐이죠. 나처럼 말입니다."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군대가 궤멸했다는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군함에 타고있던 승무원들 중 한두명만 변해버려도 군함 전체가 무쓸모가 된다.
일본 특유의 강점인 해상자위대고 뭐고 궤멸하는건 순식간이었을거다.
아마 그건 미국, 중국 할 것 없이 세계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였겠지만.
대통령 민정우가 말했다.
"한가지 다행인것은, 일본 총리가 말하기를 미국 대통령도 아직 살아있다더군요."
미국 대통령도?
그거 의외인걸.
하긴, 국가지도자 정도쯤 되면 경호인력부터 만만치 않을테니, 경호원에게 당하거나 스스로 변해버리지 않는 이상에야 살아남을 확률이 민간인보다 높긴 할거다.
당장 대통령 민정우도 살아있고 말이지.
대통령 민정우가 말했다.
"일본 총리는 지금 벙커에 있다고 하고, 미국 대통령은 민병대를 모아서 국토를 수복할 계획이라고 하더군요."
"민병대요?"
대통령 민정우가 성규혁을 힐끗 돌아봤다.
성규혁이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총기가 많은 나라입니다. 민간인들도 상당수가 총을 다룰줄 압니다. 수정헌법 2조부터 민병대를 상정하고 있으니까요."
수정헌법 2조가 뭔데?
라는건 너무 모르는 것 같으니 그냥 묻지 말자.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대통령 민정우가 말했다.
"무기소유의 권리를 헌법으로 보장하는 나라라니, 여지껏 그런게 부러웠던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지금은 그가 부럽군요. 우리도 총을 자유자재로 얻을 수 있었다면 지금의 위기도 좀 더 수월하게 극복할 수 있지 않았겠나 생각합니다."
난 웃고말았다.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그렇게 생각하셨을까요?"
대통령 민정우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시기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야 그렇겠지.
난 고개를 끄덕이곤 물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되는겁니까? 미국에서는 아직 우릴 지원해주지 못할텐데요."
대통령 민정우가 고개를 젓더니 미소지었다.
"오히려 우리가 그들을 지원해야 할 처지에 가깝다고 할 겁니다. 우리에겐 그들에게 없는게 있어요."
그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바로 당신입니다."
...으음.
선택받은자가 나 이외에 또 있을 것 같진 않다.
있다고 하면 한 번 만나보고 싶긴 한데, 설마 나 말고 또 있을까.
난 피식 웃고는 말했다.
"설마 저보고 미국에 가라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대통령 민정우가 고개를 저었다.
"설마 제가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우리에겐 아직 당신이 필요합니다. 마침 여기 계시니 말인데, 그 이야기를 우리 믿음직한 대원들과 상의하고 있었어요."
"그 이야기? 어떤 이야기 말씀이십니까?"
대통령 민정우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성훈씨. 무기를 확보했고 또 당신의 활약으로 우리는 이제 안전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겁니다. 하지만 안전으로는 아직 부족합니다. 우리에겐 전기와 물이 필요해요."
...전기와 물.
핸드폰 충전도 해야되고, 똥싸면 물도 내려가야 된다.
마시고 씻을 물도 당연히.
대통령 민정우가 말했다.
"다음 목적지는 원자력 발전소입니다. 그 건으로 우리 대원들과 상의중이었어요."
대통령 민정우의 시선을 받은 성규혁이 고개를 끄덕이곤 내게 말했다.
"원자력 발전소는 서해와 동해쪽 연안에 분포해 있습니다. 모두가 전략적으로 가치가 높은 목표물이라 방공 방호시설이 충실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대통령 민정우가 말했다.
"그 말은 즉, 거기도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을거라는 얘기지요."
그러며 내 손을 두 손으로 잡는다.
이 노신사는 참 늘 느끼지만 손이 따뜻하단 말이지.
그가 말했다.
"이번에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전기는 나도 필요하다.
없으면 곤란한게 이만저만이 아니지.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원자력 발전소.
차후에는 물도 확보해야 하고 밀가루라도 만들려면 제분소도 필요하고 이것저것 필요하겠지만, 역시 당장 확보해놓지 않으면 안되는건 발전소다.
대통령 민정우가 말했다.
"우리 대원들, 우리 특임대장과도 방금 이야기했습니다만, 역시 작전 선봉장은 성훈씨가 맡아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사지에 밀어넣는 것같아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미안합니다만."
난 피식 웃었다.
"제 걱정은 마십쇼. 지금은 발전소만큼 중요한것도 없지 않습니까. 반드시 확보해야죠. 작전은 언젭니까?"
내 말에 대통령 민정우는 한시름 놓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성훈씨가 작전의 중심입니다. 제 마음같아선 가능하면 빨랐으면 합니다만, 언제가 편하겠습니까?"
난 미소짓고는 대원들을 돌아봤다.
다들 준비는 되어 있는 것 같은데?
"저는 지금도 좋습니다만."
그러자 특임대원 성규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은 제 대원들 몇이 의사분과 함께 성훈씨 구역에 가 있습니다."
아아.
의사.
...성가연 그 여자, 내 애인 만나보고 싶다고 했었던가.
으, 살짝 불편해지는데?
난 웃고는 물었다.
"성가연씨 놔두고 가면 어떻게 될까요?"
내내 표정이 없던 특임대장 성규혁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금새 피어났다 사라졌다.
"총을 쥐고있는 특전사를 화나게 하는건 별로 좋지 않다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대통령 민정우가 웃는다.
...할 말 없네.
난 고개를 끄덕이곤 대통령 민정우에게 말했다.
"그럼 내일 아침 일찍 가는걸로 하시죠. 아침 일곱시까지 오겠습니다."
"그래요."
대통령 민정우가 그제야 잡고있던 내 손을 놓아주었다.
"성훈씨 덕분에 우리 모두가 안전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고, 부탁이니 다치지 말아주세요."
난 웃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안 다칠거라는 약속은 못 드리겠군요. 하지만 작전은 반드시 성공시킬테니 염려마시죠."
대통령 민정우는 대답없이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