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난 미소짓고는 성규혁의 등을 툭, 쳤다.
"잘 해봅시다."
멀직이서 걷고있던 성가연이 고개를 힐끗 돌린다.
눈이 마주쳤다.
눈썹을 찡그리더니 시선을 홱 돌려버린다.
난 피식 웃어버렸다.
재밌는 여자야.
방파제를 따라 걷다보니 점차 원전 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공사중인듯 싶은 넓은 부지와 그 너머 건물들.
그리고 아마도 원전이지 싶은, 규칙적으로 늘어선 돔이 딸린 건물들.
방파제를 벗어나 공사중인 부지가 있는 도로를 따라 걸어갔다.
조용하다.
하지만 조용하지 않다.
거리엔 까맣게 굳어버린 피가, 그리고 손과 발 따위가 드문드문 널려있어 섬칫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특임대원들도 말이 없어졌다.
특히 꽤나 가벼운 기분으로 출동했지 싶은 송중사는 더욱 얼굴이 굳어버렸다.
전시관을 지나, 푸른 유리가 둥글게 데코되어 있는 홍보관.
전부 '였던 것'이 되어, 개박살난 잔해들을 사방으로 흩뿌리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죽은 시체들이 절찬리에 썩어가며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그들을 지나 네모난 건물, 교육센터에 다다랐을 때 우린 걸음을 멈췄다.
한울 원전 교육센터부터 원전까지, 철조망이 어설프게 드리워져 있다.
철조망을 지탱하는 쇠파이프는 콘크리트 바닥을 깨부수고 들어가 있었고, 그나마 바짝 세워지지 않아서 군데군데 흐늘거리며 늘어져 있다.
급조한 철조망이다.
그러나, 원전 전체에 걸쳐 광범위하게 둘러쳐 있어 어마어마한 인력이 들었을 것이란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종말이 터진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이 세워놨겠지.
송중사가 철조망에 다가가려 한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그를 팔로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주변에 돋아난 풀을 한웅큼 잡아뜯어 철조망에 뿌렸다.
파지직! 지직!
성규혁이 혀를 차고는 나를 돌아봤다.
"고압전류 펜스입니다. 그냥은 못 들어가요."
송중사가 혀를 내밀곤 성규혁을 돌아봤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성규혁이 멀리 턱짓했다.
그가 가리킨 곳은 산 쪽으로 둘러쳐놓은 철조망.
시커먼 무언가들이 철조망에 군데군데 달라붙어 있었다.
짐승도 있고, 사람도 있다.
시커멓게 되어버린걸 보면 저렇게 된지 이미 한참 된거다.
너무 멀고, 너무 작아서 놓칠수도 있는 부분이었음에도 특임대장은 그걸 발견했다.
꽤 관찰력이 출중한데.
난 내심 감탄하며 천천히 철조망으로 다가가봤다.
보기엔 그냥 철조망이다.
가까이 간다고 무슨 털이 곤두서거나 그러진 않는다.
성규혁이 다가와 말했다.
"이런걸 해놓은걸 보면 안에 사람이 있는겁니다."
"혹은 있었거나. 지금쯤 죽었을지도 모르죠."
내 말에 성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철조망을 잘라내는건 별 문제가 아닌데, 이걸 잘라내면 저 쪽 구역으로는 전기가 전부 끊어질 것 같군요. 이건 틀림없이 산에서, 외부에서 뭔가가 침투해 들어오는걸 막으려는 겁니다. 잘라내는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이곤 철조망을 바라봤다.
높이는 대략 2미터 이상.
...나는 이걸 뛰어넘을 수 있다.
나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한 번 들어가볼까..."
산 사람이 있는지, 좀비들이 있는지, 아니면 이도저도 아닌 그냥 시체들이 있는지.
확인해봐야 되겠지.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 때, 교육센터의 창문이 열렸다.
나는 손을 멈췄다.
창문 너머로 보인건 분명히 사람이었다.
좀비도 아니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는건 놈들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창문이 닫혔다.
그리고, 사람의 형체도 사라졌다.
뭐지?
쳐들어가볼까, 아니면 기다려볼까.
...쳐들어가는건 언제라도 할 수 있다.
난 성규혁과 대원들을 돌아보곤 대기하라고 손짓했다.
잠시 기다리자 교육센터의 정문이 열리고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이 나타났다.
간신히 흑발을 유지하고 있는 듯한 장년의 남자.
바짝 말라, 온통 주름살진 얼굴로 그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자는 우릴 바라보고, 우리도 그를 바라본다.
서로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송규태 중사가 답답한듯 갸웃거리더니 한걸음 나서서 외쳤다.
"어이! 거기요! 이거 좀 열어주지?"
흰 가운의 남자는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다.
못 들었을 리는 없다.
송규태 중사가 다시 외쳤다.
"귀머거린가, 진짜! 어이! 전기! 전기! 끄라고!"
그 때, 희미한 소리가 바람에 실려 불어왔다.
으르르르-
특임대장 성규혁이 송중사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소리 지르지 마라."
송중사도 산에서 불어오는 은은한 소리를 들었는지 뜨끔한 얼굴이었다가도, 이내 철조망을 삿대질했다.
"답답하잖아요. 내 말 뻔히 들어놓고, 저 인간 저거."
"알았다. 이제 닥쳐라."
특임대장 성규혁은 이제 송중사의 멱살을 콱 붙잡고 밀어붙이며 윽박질렀다.
송중사는 나직이 뭐라고 투덜거리면서도 더이상 소리지르진 않았다.
나는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있다.
저 산에도.
펜스에 달라붙어 새카맣게 타버린 짐승들은 그저 떠돌아다니다 멋모르고 걸려 뒤진 놈들일거고, 놈들의 우두머리는 버젓이 저 산에 있는거다.
어떤 놈일까.
멧돼지일 가능성이 아무래도 높겠지.
박쥐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 흔한 짐승이래봤자 뻔하니까.
대원들도 긴장했는지 총구를 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성가연이 나직이 말했다.
"미니건 갖고올걸 그랬어."
"들 수나 있고?"
성규혁이 그렇게 여동생에게 핀잔주고는 내게 말했다.
"성훈씨. 어떻게 할까요? 펜스 잘라냅니까?"
난 시선을 돌려 교육센터 앞에 서있는 흰 가운의 남자를 바라봤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고, 안 되면 잘라버리죠."
그러며 허리에서 검을 꺼냈다.
스르릉-
흰 가운의 남자는 아직도 그저 서서 우릴 보고있을 뿐이다.
얼굴이 몹시 어둡다.
무슨 열흘쯤 굶은 사람같다.
표정도 없다.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를 바라보며, 나는 검으로 철조망을 가리켰다.
그리고,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내리베는 시늉을 했다.
내 검의 손잡이는 나무다.
전기가 통하지 않는다.
이거, 잘라버린다.
내가 하는 모양을 본 흰 가운의 남자가, 마침내 움직였다.
한 걸음, 한 걸음씩.
우리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대원들은 산을 향해 총구를 겨눈 채 그 자를 바라봤다.
나도 검을 움켜쥐고 흰 가운의 남자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정적 속에서 나직한 발소리만이 귀에 닿는다.
흰 가운의 나이든 남자.
그가 다가왔다.
맙소사.
가까이서 보니 더 실감나게 생겼네.
눈밑, 코밑, 광대뼈가 심하게 그림자져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다.
모아이 석상이 저 얼굴보단 더 생동감 있겠다.
그는 나를 보고있다.
마치 나 이외에 다른 사람들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나를 본다.
하지만 나를 보는게 아니다.
나를 관통해 내 뒤의 그 무언가를 보고있는 것같다.
눈이 아니라 그저 구멍 두 개다.
뭐 이런 얼굴이 다 있지?
흰 가운의 나이든 남자가 풍기는 분위기 탓인지, 특임대장도 성가연도 송중사도 특임대원들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무슨 일을 겪으면 사람 얼굴이 이렇게 되는걸까.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먼저 말을 꺼낸 것은 흰 가운의 남자였다.
"당신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입니까."
억양도 높낮이도 없는 괴이한 말투.
국어책을 읽어도 이보단 생동감 있겠다.
살아있는 사람들이냐고?
버젓이 눈 앞에 두고 무슨 소리지?
특임대장 성규혁이 남자를 면밀히 살피며 말했다.
"우린 정부군입니다.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을 확보하고 시설의 정상가동을 목표로 임무를 부여받고 파견되었습니다. 실례지만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여기 직원입니까?"
흰 가운의 남자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눈알이 돌아가지 않고 고개만 돌아가는 것이 몹시 괴상하다.
죽은 생선눈깔같은 눈으로 그는 성규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부 같은건 없습니다. 우리 세상은 끝났어요."
듣고있던 송규태 중사가 나서며 말했다.
"대통령이 살아있으니 정부도 살아있는거 아뇨. 그러니까 우리는 정부군-"
"조용히 해."
흰 가운의 남자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송중사의 표정이 이상해진다.
내 표정도 그리 다르지 않을거다.
흰 가운의 남자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대화중이다. 잠시라도 좀 가만히 있어.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손님들께 무례하구나!"
성가연의 얼굴에 공포가 피었다.
하긴, 여자들은 저런거 무서워하지.
성규혁이 심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그의 시선만 봐도 뭘 말하려는지 알겠다.
이 남자는 미쳤다.
흰 가운의 남자가 송중사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실례했습니다. 아까 뭐라고 하셨습니까? 대통령께서 살아 계시다고요?"
성규혁은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흰 가운의 남자를 살폈다.
그가 심각한 눈으로 흰 가운의 남자를 바라보다 나직이 말했다.
"...선생님. 괜찮으십니까?"
흰 가운의 남자가 눈을 몇 번 껌뻑거리더니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성규혁이 물었다.
"지금이 몇시인지 혹시 인지하고 계십니까?"
흰 가운의 남자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열한시가 좀 넘었군요."
"지금 서 계신 곳은 어디입니까?"
"한울 원자력 발전소요. 그런데 이런건 왜 묻는겁니까?"
성규혁은 돌격소총에 손을 얹은 채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 흰 가운의 남자의 행색을 주시하며 살피는 것같다.
흰 가운의 남자는 와이셔츠와 넥타이, 구두 차림에 흰 가운을 입고있을 뿐, 무슨 물건을 소지하고 있지는 않아보였다.
성규혁이 말했다.
"선생님께선 방금 허공에 대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건 알고 계십니까?"
흰 가운의 남자의 눈썹이 천천히 오므라든다.
그러며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된다는 태도다.
그러더니 옆의 허공을 쳐다본다.
그리고는 성규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애가 안 보입니까?"
성규혁은 고개를 저었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자 흰 가운의 남자의 얼굴에 표정이 생겼다.
바싹 말라 깊게 패여있던 주름살이 더욱 짙어진다.
이빨이 드러난다.
눈가가 가늘어진다.
...웃는 얼굴이야 저거?
모양새를 보면 분명히 웃는 얼굴이 맞는데, 어두운 안색은 그대로라 섬칫하다.
성가연이 흠칫하며 물러서더니 내 뒤에 섰다.
흰 가운의 남자가 그런 얼굴로 성규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미친게 아니었군요!"
그러며 몸을 굽힌다.
두 손을 내민다.
초라한 행색에 그렇지 않은 중년 남자의 얼굴을 보며, 나는 아연해졌다.
아니, 당신.
확실히 미쳤는데.
괜찮은건가 이거?
흰 가운의 남자 너머로 둘러봐도 다른 인기척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건지, 못 나오는건지는 모르겠으나, 당장 눈 앞에 있는 사람은 이 흰 가운의 남자 뿐이다.
문제는, 옷차림이나 행색이나 아무리 봐도 여기 직원 같다는거다.
만약 이 원자력 발전소에 직원이 이 미친인간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면 문제가 크다.
기계를 다뤄야 될지 모른다며 송중사가 오긴 했지만, 본인도 얘기했다시피 원자력 발전소따윈 모르는, 그냥 정비공일 뿐이다.
이 거대한 시설을 누가 돌봐야 되지?
난 성규혁을 바라보며 꽤나 난감한 기분을 느꼈다.
성규혁도 표정을 보니 그런 심정은 마찬가지였나보다.
흰 가운의 남자가 기뻐하며 팔을 휘저었다.
"나는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그럴 리가 없잖아!"
남자의 목에서 쇳소리가 난다.
마음껏 소리를 지르고 싶은 모양인데, 쉬어버려 그냥 긁는 소리로밖에 안 들린다.
남자는 환하게 웃으며 쇳소리로 긁어대며 한참을 기뻐하더니, 갑자기 숨을 헐떡거리며 비틀거렸다.
이마를 짚으며 숨을 가다듬은 흰 가운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성규혁을 바라봤다.
"아아, 그래요. 아직 못 들어오겠군요. 잠깐만요. 전기..."
그러더니 몸을 돌려 휘적휘적 걸어간다.
그렇게 몇 걸음 걷다가 우뚝 멈추곤 뒤돌아보며 그가 말했다.
"신호하면 철조망 밑으로 기어서 들어오면 됩니다. 철조망을 훼손하진 말아주세요."
우리는 흰 가운의 남자가 그 말을 남기고 걸어가는걸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