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1화 (141/187)

그날 본 걸 떠올리고 있다.

"무슨 부엉이 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이상하길래 비맞으면서 산을 쳐다봤죠. 언덕이 하나 새로 생겨났더군요."

특임대장 성규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언덕...?"

흰 가운의 남자가 말했다.

"예.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어요. 움직이더라고요. 그러면서 뭐가 불룩 올라왔는데... 나는 그게 머리라고 확신합니다. 세상에... 그렇게 큰 게 있을거라고는."

그는 하염없는 얼굴로 나직이 말했다.

"처음에 말입니다. 난리 터지고 여기 남아있던 사람들끼리 합심해서 전기 철조망 둘러놨을 때는 산은 고려대상이 아니었어요. 저 건너 마을에 바글바글한 것들, 괴물들, 좀비들 들어오지 말라고 둘러놓은거죠. 그런데 놈들은 여기로 쳐들어오지 않았어요. 어딘가 건물이나 가게 같은데 틀어박혀서 꼼짝도 안하더라고요. 어차피 들어오지도 않는거 괜히 애써서 이런거 해놨나 싶었죠."

그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런데 그 날, 그걸 본 날 말입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전기 철조망을 둘러놔서 다행이다. 그래도 저게 여기까지 오는건 어느정도는 막아줄 테니까. 정말 다행이다 라고요."

송중사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물었다.

"...그래서 그게 뭐였습니까?"

흰 가운의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그냥 추측할 뿐입니다."

"추측이라도 들려주시죠. 어떤 정보라도 저희에겐 중요합니다."

특임대장 성규혁의 말에 흰 가운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예. 그... 처음 봤을땐 그 무슨 멧돼지 같은건가...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말도 안 되지 않습니까. 무슨 그런 멧돼지가 다 있습니까. 너무 컸어요. 너무 먼데다 비까지 와서 잘 볼수도 들을수도 없었지만 우는 소리도 무슨, 목에 가래낀 부엉이 소리가 났고."

...있을 수 있지.

거대한 멧돼지라는 거.

특임대장 성규혁이 나를 바라본다.

눈빛이 심각하다.

멧돼지라면 내 선에서 어떻게 해볼 수 있을거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고갯짓을 확인한 특임대장 성규혁이 희미하게 내게 끄덕여 보이곤, 흰 가운의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른 짐승은 보신적 없으시고요? 멧돼지 뿐입니까?"

흰 가운의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산을 안 봅니다. 무섭습니다. 다른게 더 뭐가 있는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특임대장 성규혁이 고개를 끄덕이곤 내게 나직이 말했다.

"...만약 평택때와 같다면, 틀림없이 놈은 다른 짐승들도 이끌고 다닐겁니다. 아무리 성훈씨라도 혼자서는 무립니다."

그 생각은 나도 하고 있었다.

멧돼지 하나 뿐이면 괜찮다.

내 선에서 해결 못할 것도 없다.

문제는 그 놈 말고 다른 뭐가 더 있는지를 모른다는거다.

크고작은 짐승들 수백마리가 떼로 덤벼들면 나 혼자서는 확실히 무리다.

나는 특임대장에게 나직이 말했다.

"...시간을 좀 들여서 저 산을 매일 청소하고 다니면 못 할 것도 없겠는데요."

그런 방식으로 서래마을을, 마트건물 주위를 싹 청소했었지.

성규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좋은 방법이긴 합니다만, 그 과정에서 멧돼지가 짐승들과 함께 여기로 쳐들어오게 되면 우리 대원들이 갖고있는 화기 만으로는 무립니다."

우리 대화를 듣고있던 송중사가 몸을 돌려 나와 특임대장에게 말했다.

"한 번 집에 다녀오는게 어떨까요? 미니건이랑 대전차로켓도 좀 갖고오고."

특임대장이 잠깐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여길 비워둘 순 없어. 우리가 떠나면 저 분이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이 안 된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

저 흰 가운의 남자는 미쳤다.

사람들이 왔는데 나를 버리고 가버렸어 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허공에 대고 대화하는 미친 사람이 어떻게 할지는 오직 신만이 아실거다.

신 같은거 믿지도 않지만.

그때 흰 가운의 남자가 물었다.

"평택이라고요? 아까 평택이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만."

특임대장 성규혁이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여기가 저희 첫 작전지가 아닙니다. 평택에도 다녀왔었습니다. 거기서... 말씀하신 멧돼지를 사냥했었고요. 이 분께서."

흰 가운의 남자의 눈이 둥그래졌다.

그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이 그 커다란 짐승을 사냥했다고요?"

으음.

때마침 공간발톱을 얻어서 죽다 살아난거지만, 결과적으로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어깨를 으쓱했다.

흰 가운의 남자가 감탄하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뭘로 한 겁니까? 그 검으로요? 설마? 그 짐승한텐 그냥 이쑤시개 정도일건데."

으음.

설명하기 난감하네.

난 특임대장을 힐끗 돌아봤다.

내 시선을 눈치챈 특임대장이 흰 가운의 남자에게 물었다.

"말씀하신 방법은 일단 알겠습니다만, 두번째 방법이 있다고도 하셨던것 같은데. 두번째는 뭡니까?"

흰 가운의 미친 남자가 말했다.

"두번째 방법은 이 발전소의 전력을 꺼버리는거요."

...확실히 그것도 방법이긴 하네.

뭐가 얼마나 있는지 모르는 산 속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야 확실히 안전하긴 하다.

하지만...

난 고개를 갸웃했다.

"발전소 전기를 내려버리면 철조망은 어떻게 되는겁니까?"

흰 가운의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꺼지는거지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철조망이 더이상 발전소를 보호해주지 못하게 된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두번째 방법이 좋지 않겠습니까? 산 속에 들어가는건 아무래도 위험부담이 너무 큰 반면에, 철조망에 전기를 끈다고 곧장 산에서 괴물들이 내려온다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송중사가 그 말에 맞장구쳤다.

"맞습니다. 어쩌면 전기를 내리고 아무 일 없을 수도 있죠."

흰 가운의 미친 남자는 그 말을 듣더니 웃었다.

그의 웃음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그는 일어나더니 창 밖을 가리켰다.

"저기 좀 보시겠습니까?"

특임대장 성규혁과 송중사가 서로 쳐다보더니 창가로 다가갔다.

"뭘 보라는 겁니까?"

"저기요."

흰 가운의 남자가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가 가리킨 곳을 바라본 두 사람의 안색이 변했다.

"저건..."

뭐지?

뭘 봤길래 안색이 변한거냐.

나도 두 사람에게 다가가 창 밖을 내다봤다.

멀리 보이는건 산.

가까이 있는건 철조망.

철조망 곳곳에는 여러 크고작은 짐승들이 숯이 되어 매달려 있었다.

감전된지 오래된 놈들이다.

먼 철조망 한 켠에 허벅지만한 크기의 쥐들이 모여있다.

그중 하나는 철조망에 매달려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온 몸에서 연기를 뿜어올리며 철조망에 달라붙어 있는 놈. 저 놈은 방금 걸려든거다.

흰 가운의 남자가 말했다.

"여러분이 들어오는걸 보고 내려 온 겁니다. 적어도 제 판단에는요. 아마 산 중턱 어디에 있었던 거겠죠. 근처에 있었다면 진작에 철조망을 갉아서 뚫고 들어왔을겁니다."

송중사가 침을 삼키곤 흰 가운의 남자를 바라봤다.

"저 놈들이 올거라는걸 알았습니까? 알면서 전기를 끈 거예요?"

흰 가운의 남자가 웃고는 말했다.

"산은 무서워서 자세히 관찰 안합니다. 하지만 이 근처는요. 솔직히 이제 TV도 안되고 폰으로 뭐 볼 것도 없는데 밖을 내다보는 것 말고 할 게 있겠습니까."

그는 쥐떼를 턱짓하곤 말했다.

"저 놈들은 이 근처에서 수시로 보이는 놈들입니다. 이따금 산 속으로 들어가서 며칠씩 안 보이기도 하고, 어쩔땐 과감하게 내려와 철조망을 건드리다 한두마리씩 걸려 죽기도 하지요. 나는 저 놈들이 근처에 없다는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전기를 내린겁니다. 안그랬으면 여러분이 무슨 협박을 하든 전기를 내리지 않았을거요."

송중사가 갸웃하더니 말했다.

"...말씀하시는게 꼭 쥐떼들이 지령 받으러 돌아갔다가 다시 내려와서 명령을 수행하고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군요."

특임대장 성규혁이 고개를 저었다.

"저 놈들은 짐승들이다. 명령체계가 있을리 없어. 우두머리를 따라다니는 놈들이야 있겠지만, 그래봤자 쥐떼가 무슨 명령을 수행하고 있다고 보는건 너무 멀리 간 거다."

흰 가운의 남자가 갸웃하며 성규혁을 바라봤다.

"정말 그럴까요."

성규혁은 입을 다물었다.

확신할 수 없는거다.

종말 이후 짐승들의 행동양식이 어떻게 변해버렸는지 특임대장이라고 어떻게 알까.

나도 모르는데.

흰 가운의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창 밖을 내다봤다.

"나는 저 놈들이 그냥 짐승들이라고 생각 안합니다. 내가 무슨 동물학자도 아니고 잘은 모르지만, 그냥 쥐떼는 아닌것 같아요. 나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저 놈들이 이 발전소를, 나를 관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언제 자는지, 언제 먹는지, 언제..."

그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관찰한다고?

그의 말에 성규혁도 송중사도 창 밖 멀리 쥐떼를 새삼 다시 돌아보았다.

송중사가 중얼거렸다.

"...관찰하는것 같다고 보면 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들이 그러는 사이 흰 가운의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젠 식량도 거의 다 떨어졌어. 앞이 깜깜합니다. 언젠간 먹을걸 구하러 나가야되겠지요. 그러지 않는다면 여기서 굶어죽을테니. 저 놈들은 그걸 기다리고 있는거요. 그렇게밖에 생각이 안 들어. 그러다 내가 전기를 완전히 내리는 날에는, 놈들은 여기로 쳐들어 올 겁니다. 그래서 나를..."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전부... 내 손으로..."

줄어드는 목소리와는 반대로, 눈빛은 난폭하게 번뜩이기 시작한다.

...정말로 섬뜩한 인간이다.

만약 이 사람이 지금 여기서 나는 연쇄살인마입니다 라고 고백해도 나는 온전히 믿을 수 있다.

성규혁과 송중사도 어느새 흰 가운의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칼자루를 쥔 내 손이 점점 오므라든다.

돌격소총에 얹어놓은 성규혁의 손가락이 천천히 방아쇠로 들어간다.

"...선생님?"

흰 가운의 남자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아. 예? 제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의 눈빛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그를 위아래로 살펴본다.

몸짓과 손짓에 여전히 긴장이 맺혀있다.

잠시 그런 태도로 흰 가운의 남자를 바라보던 성규혁이 이내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풀어냈다.

"말씀하신 식량 문제는 저희가 어떻게든 해드릴 수 있을겁니다. 저희 군장에도, 타고 온 헬기에도 어느정도 식량이 들어있고요."

흰 가운의 남자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나눠주시겠다는 겁니까?"

성규혁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송중사가 아, 하더니 말했다.

"대장님. 밖에 저 짐승들 있으면 우리 헬기 위험한거 아닙니까?"

특임대장 성규혁이 송중사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곧 몸을 돌리며 귀에 손을 갖다댔다.

"가연아. 다 들었어? 대위님들한테 발전소 안에 식량 투하하고 돌아가시라고 전해줘. 그래."

특임대장의 말을 들은 송중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송중사가 말했다.

"그냥 다 같이 돌아가는게 어떻습니까? 전기를 내리는거 물론 좋기야 하겠는데요, 꼭 지금 당장 해야되는건 아니잖습니까. 좀 더 준비를 갖추고 나서 나중에 해도 되는거 아닙니까?"

흰 가운의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건 안 됩니다."

송중사가 흰 가운의 남자를 바라보며 인상을 썼다.

"왜죠? 선생님. 우릴 보십쇼. 들고있는 총 보이십니까? 이게 우리 무장의 전붑니다. 수류탄 몇발하고요. 그거갖고 저 산에 짐승들 다 감당 못할겁니다. 산 속에 들어가는건 고사하고, 전기를 껐을 때 혹시나 밀고 들어와도 다 방어가 안 될 거라고요."

흰 가운의 남자는 말없이 송중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빛이 살짝 처연하다.

그가 말했다.

"...여러분이 떠나면, 나도 여길 떠날겁니다."

"...예?"

송중사의 눈썹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갸웃하며 물었다.

"간다니, 어디로 가십니까?"

흰 가운의 남자가 성규혁에게 시선을 옮긴다.

그가 느릿하게 말했다.

"저는 말입니다. 이제 할만큼 했어요. 나는 이제 지쳤습니다. 혼자서 여기에 있는 것도, 계속 나한테 말 걸어오는 있지도 않은 어린애를 보는 것도. 몇달을 여기에 갇혀 혼자서 이만큼 해 왔으면 이제 된 거 아닙니까? 얼마나 더 해야되는 겁니까?"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더 하기 싫습니다. 나는 이제 더 못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떠나면, 나도 이 발전소를 떠날거요. 아니, 그렇지 않아도 진작에, 오늘이라도 나는 여길 떠날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완전히 썩어 문들어져버렸는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흰 가운의 남자에게 말했다.

"여길 나가면 당신 죽어. 밖에 사람들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지 않을텐데. 라면 한봉지 구하기도 전에 물어뜯길거요."

내 말을 들은 흰 가운의 남자가 힘없이 웃었다.

"그게 뭐 대수랍니까. 안그래도 목매달고 죽을까 생각도 하루에도 수백번씩 하고 사는데. 이제... 됐어요."

송중사가 어처구니가 없는지 헛웃음을 웃고는 말했다.

"아니, 이때까지 잘 살아남았으면서 정부군이 오니까 이제 죽겠다고요? 무슨 소립니까 도대체?"

"정부군?"

흰 가운의 남자의 얼굴에 혐오감이 피었다.

"정부군이라 했습니까? 뭐가 정부군입니까? 우리나라에 정부가 어디에 있어요? 뭐, 살아남은 몇명중에 정치가도 있고 그러면 정부군이 됩니까? 뭘 통치하는 정부인데요? 통치할게 남았어요? 사람들 다 죽었다고. 다 괴물이 됐다고! 다 죽는동안 뭘 한 게 있다고 이제와서 정부군이야!"

송중사가 이를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특임대장 성규혁이 송중사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그리곤 한걸음 나서며 말했다.

"선생님. 진정하시죠. 선생님이 안 계시면 이 발전소는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지면 정말로 끝납니다."

"말했지요. 아까 분명히."

흰 가운의 남자가 눈을 부릅뜨고 성규혁을 노려봤다.

"나는 할만큼 했어. 더 하기 싫습니다. 죽는다고? 그딴걸 내가 신경쓸 것 같습니까?"

성규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잘 해오지 않았습니까.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흰 가운의 남자는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그는 주름살 가득한 얼굴로 어둡게 웃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성규혁을 바라봤다.

"사흘 드리지요. 전기를 내리든 안 내리든, 사흘입니다. 사흘 뒤에는 나는 떠날거요."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비릿하게 미소지었다.

"가능하면 전기를 내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게 좋을겁니다. 사태가 터진건 초여름이었어요. 그 때 사람들이 돌린 에어컨들은 지금까지도 신나게 잘 돌아가고 있지. 여름철 전력 소모량을 일년 내내 유지하겠다. 하. 행운을 빌겠소."

송중사가 이를 드러내며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특임대장에 가로막혀 달려들 수는 없었다.

송중사가 말했다.

"당신 도대체, 방금까지 혼자 전기를 열심히 만들었느니 그딴 소릴 해놓고 이제와서! 무책임하다고! 어? 무책임하잖아!"

흰 가운의 남자가 송중사를 바라본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책상 위에 놓여있던 두터운 노트를 들어 송중사의 발치에 던졌다.

탁.

흰 가운의 남자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나는 무책임하지 않소."

그는 눈을 흐릿하게 뜨고 중얼거렸다.

"나는 기다려왔소. 누가, 누군가 제발 나타나주기를. 그래서 내가 떠나거나 죽을 수 있게."

흰 가운의 남자가 송중사의 발치에 던져놓은 노트를 가리켰다.

"거기엔 원전 관리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소. 내가 쓴거요. 담수 처리와 폐기물 처리까지 가능하도록 모든걸 다 매뉴얼로 만들어놨어요. 물론 제대로 교육받지 않고 원전을 다루는건 위험하지. 하지만 그 매뉴얼대로만 하면 어지간해서는 사고는 나지 않을거요."

흰 가운의 남자가 천천히 눈을 들어 우리를 바라봤다.

"...사흘입니다."

공기가 무겁다.

우리 셋과 흰 가운의 남자 모두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우리는 그를, 그는 우리를.

나는 다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는 안다.

이 남자, 위험하다.

촉이라면 촉이다.

대놓고 죽이겠다, 혹은 자살해버리겠다고 으름장 놓으며 협박해대는 얼간이들 따위는 예전에도 코웃음쳤고 지금도 그럴테지만, 눈 앞의 이 남자는 다르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없는 눈이다.

만약 이 남자가 품 속에서 칼을 꺼내서, 지금 이 자리에서 아무 망설임 없이 자기 목을 찔러도 나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들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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