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화 (142/187)

그만큼 이 자는 위험하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나만 그렇게 느끼나?

옆을 돌아보니 특임대장 성규혁도 나를 보고 있었다.

성규혁이 살며시 고개를 젓는다.

설득이 안 통할 것 같다는 제스쳐인건가.

그런거면.

나는 성규혁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흰 가운의 미친 남자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말했다.

"사흘이라고 하셨지요."

흰 가운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두터운 노트를 들어보이며 물었다.

"이 안에는 확실히 원전 관리를 위한 모든게 들어있는겁니까?"

흰 가운의 남자가 피식 웃었다.

"전문적인건 들어있지 않소. 기기를 다루는 법, 그래프와 수치가 어디까지가 정상범위인가, 수치가 정상범위에 머무르게 하기 위해선 어떻게 하면 좋은가 같은, 원전의 조작법을 매뉴얼로 만들어 놓은거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원전 매뉴얼을 송중사의 가슴팍에 탁, 얹었다.

얼떨결에 노트를 받아들고 휘둥그래진 송중사에게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네가 책임지고 이 분께 배워라. 책자 잃어버리지 말고."

"...예? 제가요?"

"그래. 사흘밖에 없으니 먹고 자고 똥싸는 시간 말고는 저 분 옆에 붙어있어야 될거다."

송중사의 안색이 변했다.

그런 송중사를 특임대장 성규혁은 눈에 힘주어 바라보고 있다.

옆에 있으면서 허튼짓 못하게 막으라는거군. 혹은 설득하거나.

...송중사가 그런걸 할 수 있나?

대통령 민정우가 직접 와서 사흘 밤낮을 설득해도 될까말까 같은데.

그렇다고 대통령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작전지에 직접 올리가 없고, 비서실장 안준규같은 사람들도 반대할테고.

자살하지 못하게 막으라는 의미가 더 큰 거겠지.

그런다고 죽겠다는 사람을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만.

송중사도 그렇게까지 눈치가 없지는 않은지, 특임대장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음."

특임대장 성규혁이 흰 가운의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친구를 좀 가르쳐주셨으면 합니다. 매뉴얼을 물론 충실하게 기록해 두셨을거라 믿습니다만, 직접 보고 몸으로 배우는건 또 다르지 않겠습니까."

흰 가운의 남자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대답하지 않았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사흘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책임하지 않다고도 하셨고요. 선생님이 안 계시더라도 원전이 정상적으로 가동할 수 있게끔은 되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걸 위해서 매뉴얼을 쓰신거고요."

그 말에 흰 가운의 남자가 피식 웃었다.

"매뉴얼을 쓴 건, 그래요. 사실은 밤에 할 일이 없어서 소일거리 삼아서 쓰기 시작한 거지만, 그런 마음도 없지는 않았지. 그래. 그럽시다 그러면."

그가 기대있던 패널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대신에 나에게도 조건이 있소."

특임대장 성규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뭡니까? 조건이란?"

흰 가운의 남자가 천천히,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나에게 총을 주시오."

특임대장 성규혁의 눈꺼풀이, 눈썹이 꿈틀거렸다.

송중사가 이를 드러내며 흰 가운의 남자와 특임대장 성규혁을 번갈아 쳐다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총을 어떻게 줍니까. 안 됩니다. 너무 위험해요."

흰 가운의 남자는 송중사가 뭐라고 말하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그저 특임대장 성규혁을 보고있을 뿐이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입술을 살짝 일그러뜨리더니 천천히 말했다.

"...총이라고 하셨습니까?"

흰 가운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떠날거라고 말했습니다. 빈 손으로 나를 보낼 생각은 아니겠지요?"

송중사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하, 하고 웃더니 말했다.

"아니, 죽는건 두렵지 않다면서요?"

"두렵지 않소."

흰 가운의 남자가 송중사를 지그시 바라봤다.

"나는 떠날 때 빈 손이면 곤란하지 않겠냐고 말했을 뿐입니다. 총이 있으면 좋겠군요."

그러며 한 손을 내밀었다.

"지금 당장 말이오."

송중사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흰 가운의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철컥!

쇳소리.

특임대장 성규혁이 허리의 권총집에서 피스톨을 꺼내 탄창을 빼내고 있었다.

그러며, 약실의 탄약까지 빼내곤 한 손으로 총을 제자리에서 팽이처럼 회전시켜 총구를 단숨에 붙잡는다.

타악.

...멋진걸.

확실히 총을 엄청나게 다뤄본 몸짓이다.

전문 군인은 몸짓부터 뭔가 달라도 달라.

특임대장 성규혁이 총구를 붙잡고 손잡이쪽을 흰 가운의 남자를 향해 내밀며 말했다.

"떠나는 건 사흘 뒤라고 하셨습니다. 탄약은 그 때 드리겠습니다."

이건 꽤나 신박한데.

총이라고 해서 나도 난감한 기분이었는데, 특임대장 성규혁은 그걸 이런 식으로 해결볼 작정인가보다.

흰 가운의 남자가 한방 먹었다는 눈으로 특임대장이 내민 피스톨을 바라보다, 헛웃음을 웃었다.

"그래요. 총을 달라고 했지 총알도 같이 달라고 하진 않았구만."

"대장님. 총 주면 안 됩니다! 너무 위험한 사람이예요! 위험하다고요!"

송중사가 특임대장에게 나서며 항의했다.

성규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흰 가운의 남자가 천천히 걸어와 성규혁이 내민 피스톨을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전혀 망설임도 없이 총구를 자기 눈에 갖다댄다.

안에는 어떻게 되어있는건가, 잘 보이나? 뭐 그런 태도다.

게다가, 걸치기 좋다고 여긴건지 엄지손가락은 방아쇠에 올려놓고 있다.

아무리 탄약을 빼냈다고 해도 방아쇠에 손가락 걸어놓고 총구를 얼굴에 갖다대는 병신새끼가 어디있냐고.

이 인간, 확실히 총 다뤄본적 없는 놈이다.

틱.

결국 올려놓은 엄지가 방아쇠를 밀어버렸다.

확신하는데, 일부러는 아니다.

그냥 어쩌다보니 공이치기를 해버린거다.

"엇."

흰 가운의 남자가 공이를 치는 틱 소리에 놀라서 총구에서 눈알을 뗐다.

자기 눈알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겨버린 인간을 바라보며, 나도, 특임대장도, 송중사도 표정이 변해버렸다.

뭐라고 설명이 안 되는 얼굴들이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눈을 가늘게 뜬 채 흰 가운의 남자를 위아래로 쳐다보다 나직이 말했다.

"...총구를 얼굴에 갖다대지 마십시오."

흰 가운의 남자가 특임대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요? 총알은 다 빼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그건... 하아."

특임대장 성규혁이 할 말을 잃었는지 탄식을 내쉬고 말았다.

송중사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흰 가운의 남자에게 말했다.

"총알이 있든 없든 함부로 사람을 겨누면 안됩니다. 군대 안 갔다 왔어요?"

흰 가운의 남자가 송중사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런건가요. 알겠습니다. 주의하지요."

"아니, 진짜 도대체 여기 혼자 있다가 아저씨, 예? 머리가 좀 돌아버린-"

특임대장 성규혁이 송중사의 어깨를 힘주어 잡아당겼다.

그리곤 흰 가운의 남자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실례지만 저희는 잠깐 내려가겠습니다. 대통령께 현장 상황을 보고드려야 됩니다. 말씀하신, 전기를 내리는 방법이라든가는 저희도 허가가 필요한 부분이라서 말입니다."

흰 가운의 남자는 송중사에게 폭언을 들었음에도 별로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그저 들고있는 총이 신기하다는 듯이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을 뿐이다.

얼굴에 호기심이 가득하다.

총 자체를 처음 만져보는거네.

흰 가운의 남자가 고개를 들어 성규혁을 바라봤다. 얼굴엔 미소마저 어려있다.

"예? 아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저는 여기서 여러분을 기다리겠습니다."

"예.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그러며 송중사의 어깨를 붙잡고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간다.

나가던 와중에 내게도 눈짓을 보낸다.

난 고개를 끄덕이곤 그들을 따라나섰다.

틱, 철컥.

뒤에서 총을 만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또 공이치기를...

저러면 총에 안 좋을텐데.

계단을 내려가는데 송중사가 붙잡힌 팔을 휘둘러 빼내곤 특임대장에게 항의했다.

"총을 왜 주신겁니까? 저 사람 못 보셨어요? 정말로 위험한 인간이라고요. 저런 인간은 우리 서래마을에서도 못 봤고, 여지껏 살면서 한번도 못봤어요. 소름끼친단 말입니다. 어떻게 저런 인간한테 총을 줍니까?"

특임대장 성규혁이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네 말이 맞다. 저 사람은 정상이 아니야. 위험하다고 하면 총이 있든 없든 이미 위험한 사람이다. 총은 도구에 불과해. 폭력은 사람한테서 나오는거지 도구에서 나오는게 아니다."

송중사는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벌린 채 대꾸하지 못했다. 그런 송중사에게 특임대장이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네 역할은 저 사람이 허튼짓을 못하게 옆에서 감시하고, 원전관리를 배우는거다. 현장에 나왔으면 내 지시를 따라라."

송중사는 아직도 납득이 안 되는지 씩씩거렸으나, 대꾸할 말을 찾을 수 없는지 고개를 돌려버렸다.

"전 현장하고는 영 안 맞는 모양입니다. 앞으론 작전에서 저를 빼주십쇼."

특임대장 성규혁이 허리에 손을 짚고 송중사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한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쓱쓱 비비곤 말했다.

"가자. 가시죠, 성훈씨."

1층 입구로 내려가니 성가연이 특임대원 한명과 함께 경계를 보고있었다.

우릴 돌아보는 그녀의 눈빛이 그리 좋지 않다.

그야 그렇겠지.

방금 있었던 대화를 전부 들었을테니.

그녀는 귀에서 이어폰을 빼내며 우리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이제 어떡할거예요?"

"대통령께 보고드려야지."

성가연은 답답하다는 얼굴로 특임대장을 바라봤다.

"보고는 드리는데, 작전 어떻게 할거냐구요. 전기 내릴거예요?"

"내려야 돼."

특임대장 성규혁이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얼굴이 꽤나 피로해 보인다.

"저 직원분 말이 맞아. 전력소모를 줄여서 전력공급기간을 가능한 늘려놔야 돼.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다른 생존자 그룹들 찾아내고 국가기능을 정상화 할 때까지 전가는 끊기면 안 된다."

송중사가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문제는 저 정신나간 사람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거죠. 전기를 내린다 까지는 그렇다 쳐요. 그럼 그동안엔 저 전기울타리도 무쓸모가 된다는건데 그 다음에는요? 저 사람이 그 때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압니까."

송중사가 특임대장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저보고 붙어있으라고 하셨죠. 예. 옆에서 배우긴 하겠습니다. 그런데요, 저 인간이 이상한 짓 할려고 들면 저는 바로 저 자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겨버릴 겁니다. 진심으로요."

특임대장이 송중사를 바라봤다.

"그건 네가 판단할 일이지. 쏠 상황이라고 판단이 되면 쏴라."

특임대장이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전기가 내려가면 위험해질 수도 있어.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만, 전기를 내리고도 아무 일도 없을만큼 우리가 운이 좋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은 안 든다. 그 상황에 누군가 위험요소로 변한다면, 먼저 제거한다. 이건 인명구조작전이 아니야. 발전소를 확보하고 전력량을 조절한다. 그게 우리 임무다."

성가연과 특임대원, 그리고 송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특임대장이 나를 돌아보며 턱짓했다.

잠깐 이야기 좀 하자는 제스쳐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좀 떨어진 곳까지 걸어가 내게 말했다.

"성훈씨. 좀 힘든 부탁을 드려야 되겠습니다."

무슨 말을 할 지 이미 짐작했다.

"멧돼지 말이죠."

특임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래마을에, 대통령께 보고드리면서 대위님들 편으로 중화기를 갖다달라고 할겁니다. 대전차로켓 포함해서요. 하지만 우리만으론 무립니다. 그냥 짐승들 같으면 크레모어나 지뢰 같은거 여기저기 묻어놔도 되겠지만, 그 멧돼지는..."

평택 미군부대에서 마주쳤던 거대한 멧돼지.

그 괴물이 떠오른 듯, 특임대장은 말끝을 흐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 괴물 멧돼지, 지붕에서 미니건 여러대가 일제히 탄을 박아넣는데도 아랑곳없이 벽을 들이받고 기둥을 무너뜨려댔다.

내가 공간발톱으로 자유낙하 가속을 받아 충격파를 내부에서 터뜨리지 않았다면 아마 그 때 거기 있었던 사람들은 다 죽었을거다.

...그나저나 마음에 걸리는데.

흰 가운의 미친 남자, 분명히 무슨 부엉이 소리 같은게 들렸다고 했는데.

멧돼지가 부엉이 소리 같은걸 내나?

...모르지 뭐.

괴물이 되어버렸으니 무슨 소리를 내든 지가 알아서 내는거겠지.

난 그냥 죽이기만 하면 돼.

난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놈은 내가 알아서 하죠. 특임대장은 작전 성공시키는것만 생각하세요."

특임대장이 한시름 놓은 얼굴로 미소짓더니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기 말고 다른 원전도 한번씩 껐다 켜야되는거 아닙니까?"

특임대장이 미소짓고는 말했다.

"그래야 되겠죠. 지금은 일단 여기 작전 성공시키는 것만 생각하고 싶군요."

"그래요. 그럼 대통령께 보고드리세요. 전 좀 나갔다 오겠습니다."

특임대장이 갸웃하더니 내게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난 걸어가며 그를 힐끗 돌아봤다.

"마을에요. 살아남은 사람들 있나 좀 봐야되겠어."

"지원은 필요 없으십니까?"

이 넓은 원전을 고작 열명이 커버하고 있으면서 나한테도 사람을 붙여주려고?

됐네요.

"괜찮아요. 이따 봅시다."

나는 돌개바람을 소환해 올라타고는, 곧장 철조망을 향해 달렸다.

가아아앙-!

뒤에서, 옆에서 성규혁과 특임대원들이 어어! 하는 소리를 낸다.

고압전류가 맹렬하게 흐르는 철조망.

가까워진다.

난 한 손을 들어올려 철조망 위 공간을 움켜쥐었다.

돌개바람이 보이지 않는 언덕을 타고 오르듯 철조망 위를 단숨에 지나쳐 나간다.

공중을 날아 도로에 착지한 순간, 뒷바퀴가 땅을 드르륵 긁는다.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뒤로하고, 나는 그대로 마을까지 돌개바람을 몰아 내달렸다.

확실히 편리하다.

이동수단이 확보되니 이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다.

계기판 같은게 없어 최대시속이 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빠르다.

장거리 이동도 문제가 없다.

...장거리 이동이라.

한울 원전.

분명히 담수정화시설도 갖추고 있었다.

그렇다는 말은, 치누크를 활용하면 식수원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먹어도 되는 담수인지는 모르겠네.

원자로 냉각수로 활용한 물만 아니면 일단은 담수니까 먹어도 되지 않을까?

혹시나 있을 다른 생존자그룹을 생각하면 상수도도 확보를 하긴 해야 되겠지.

하지만 어쨋든 한울 원전은 물과 에너지, 둘 모두를 충족하는 시설이다.

여길 확보하고 나면 상수도는 좀 두고 가족을 찾으러 다녀와야 되겠어.

전기와 물은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왔지만, 더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다.

레벨이 낮아 살아남기 급급했던 시절엔 떠날 수가 없었고, 충분히 강해졌을 땐 이동수단이 없었다.

지금 내겐 모든게 있다.

이번 임무가 끝나면 나는 떠난다.

가족만 찾고 다시 돌아오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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