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내겐 더이상 가족이 남지 않은게 아닐까라는 불안감이 엄습해 올라온다.
난 고개를 흔들어 불안감을 떨쳐내고는, 돌개바람을 몰아 해안가 도로를 달려갔다.
잠시 달려가자 키작은 아파트인지 빌리인지가 몇몇 모여있는 마을이 나타났다.
건물들이 하나같이 오래되고 낡아보인다.
잘 관리하고 써서 상태가 좋은 골동품들을 보는 것같다.
드문드문 모던하게 모델링 된 점포들이 보이긴 했으나, 대체로 아파트가 몇 채 있는 시골 동네다.
나는 트럭과 승용차 몇몇이 방치되어 있는 동네 한가운데 도로에 돌개바람을 세워놓고 주위를 둘러봤다.
조용하다.
고요하다.
돌개바람이 내는 드릉드릉 소리만이 나직하게 들려올 뿐이다.
하지만 아파트에도, 점포들에도 분명히 가득 들어차있다.
나는 돌개바람에서 내려 소환을 해제하고는, 검 한자루와 활을 두 손으로 뽑아들었다.
...여기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을까?
나는 숨을 들이켰다.
흐읍!
그리고, 외쳤다.
"계십니까! 아무도 안 계세요?! 계십니까!"
크롸롸라락!
짖어대는 소리와 함께, 와장창! 하며 점포들의 유리가 박살나며 좀비들이 뛰쳐나왔다.
나는 즉시 검을 내던졌다.
슈확!
내 손과 발 끝에서 그림자 전사가 튀어나와 검을 움켜쥔다.
저 놈들 다 죽여.
내 명령을 받은 그림자 전사가 곧장 좀비들에게 쇄도해 들어갔다.
"크아아아악! 크롸라라락!"
놈들이 내게 달려든다.
나는 검을 던졌던 손을 뒤로 돌려 화살을 무더기로 움켜쥐고 뽑아냈다.
가속.
[자동 시전 : 가속]
"크롸라-아--"
활에 화살을 걸어 당기자 마자 놓는다.
핏, 핏, 핏, 핏!
가속 두 번.
단숨에 열 몇발의 화살을 쏴 날리고는 나는 손을 멈췄다.
시골 마을이라 그런가, 별로 많지 않은데.
가속이 끝났다.
"크-앍!"
화살이 좀비들의 머리에 들이꽂힌다.
투퍼퍼퍼퍽!
내 주위에서 우르르, 와당탕 엎어지는 좀비들. 때마침 그림자 전사도 십여마리의 좀비들의 머리를 도륙내고 내게 되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손을 내밀어 검을 받아들고는, 옆으로 내쳤다.
촤륵!
피가 씻겨나간다.
허공으로 무너지며 사라지는 그림자 전사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주위를 둘러봤다.
조용하다.
나는 힘껏 외쳤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도우러 왔습니다!"
하얀 연기가 스스슷 피어오르는 검을 검집에 도로 꽂아놓고는, 가만히 서서 귀를 기울여봤다.
한참을 기다려봐도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
진짜 이 동네는 전멸했나본데.
한 번만 더 외쳐보고, 없으면 그냥 먹을거나 루팅해서 돌아가자.
나는 숨을 들이키고는, 힘껏 외쳤다.
"계십니까! 아무도 안계...!"
자박.
발소리.
뒤돌아봤다.
뒤쪽, 먼 전봇대.
노인이 한사람 서 있었다.
시커먼 피부, 주름살 가득한 얼굴.
무슨 백살은 되어보인다.
"...경찰이시오?"
이빨도 없네.
발음이 마구 샌다.
겨우 알아듣겠다.
경찰이라...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네.
선택받은자라고 하면 당연히 안되겠고.
나는 시커멓고 구부정한 할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부군입니다. 생존자 분들 구조하러 왔어요. 혼자 계십니까?"
할배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우리나라 정부가 아직 남아있소?"
"예. 일단은요."
시커먼 할배가 주름살 사이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우리 좀 도와주시오. 다들... 못 먹고 굶어죽고 있소."
...있었구나.
살아남은 사람들.
난 고개를 끄덕이곤, 유리벽이 박살나버린 편의점으로 들어가 과자와 음료 따위를 봉지 몇개에 한아름 담아갖고 나왔다.
할배는 제대로 서있을 기운도 없는지 전봇대에 매달려 내가 하는 모양을 그저 쳐다보고만 있었다.
난 할배에게 다가가 게토레이 하나를 까서 내밀며 말했다.
"일단 이거 드세요."
노인이 울면서 게토레이를 받아들었다.
"고맙소. 고맙습니다. 정말로 고마워요."
...살아남은 사람들, 여기저기에 아직 많이 있었구나.
다른 곳에도 많이 있겠지.
난 할배가 게토레이를 마시는걸 바라보며 말했다.
"다들 어디에 있습니까? 갑시다."
할배는 연신 눈가를 훔치며 허름한 아파트 지하로 향했다.
배관과 펌프가 설치된, 청소용구 따위를 넣어두는 별도의 공간인 듯했다.
아파트 지하실 철문엔 손톱자국과 핏자국들이 가득했다. 아마도 좀비들이 긁어댄 흔적인것 같다.
할배가 철문을 열자, 후덥지근한 공기가 비릿한 악취를 싣고 내 얼굴을 훅 덮쳤다.
"후우읍."
내가 팔로 입가를 가리자, 할배가 미안한 듯이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미안합니다. 함부로 문을 열 수도 없고, 화장실도 없어요. 다들 여기에 모여있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문은 열어놔도 됩니다. 이 근처는 안전합니다."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으니 나올만한 놈들은 다 나와서 내 손에 죽었다고 보는게 맞다.
할배는 내게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할배가 문을 열어두고 안으로 들어간다.
따라 들어가자 어두컴컴한 지하실에 드문드문 사람 그림자들이 보였다.
...여자들, 어린애들.
십여명 정도가 여기저기에 누워있다.
다들 안색이 너무 안 좋다.
누워서 못 일어나는 여자도 있다.
어두운 곳에서 너무 오래 있었던 탓인지, 바깥에서 햇빛이 들어오자 다들 눈가를 가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버님. 아버님이세요...?"
눈부셔서 나를 아직 못 본 모양이다.
할배가 비틀비틀 걸어가며 말했다.
"그래. 정부에서 사람이 왔다."
"...정부에서...?"
여자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난다.
다들 씻지도 먹지도 못해 말도 못하게 초췌하다.
지하실 구석에 놓인 고무대야에서 지독한 냄새가 풍겨올라오고 있다. 저 고무대야가 일단 화장실이라고 정해놓은 것같다.
"후우."
난 숨을 내쉬고는, 그나마 깨끗한 지하실 중간에 두툼해져 있는 비닐봉지들을 내려놨다.
그리고 가득 챙겨온, 시원하다 못해 차가워 물방울이 맺혀있는 포카리스웨트 한 캔을 꺼내 땄다.
치익.
듣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소리.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포카리스웨트를 초췌한 여자에게 내밀었다.
밖에서 들어온 햇빛에 눈을 깜빡이던 여자가 내 손을 본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나는 말했다.
"이제 안심하세요. 정부에서 왔습니다."
정부라는 세력이 따로 있는거지만, 이런데선 이름 좀 빌리지 뭐.
여자가 나와 내 손의 캔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내 울상이 되어 눈물을 흘렸다.
캔을 쥐어주자 두 손으로 받아 아이에게 건넨다.
이제 두살 혹은 세살이나 됐나 싶은 애가 캔을 받더니 허겁지겁 입에 밀어넣는다.
안쓰럽네.
할배가 비틀대며 봉지에서 이온음료를 하나씩 꺼내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남자가 있으면 좋겠는데.
사람들 구하는 것도 구하는건데, 남자가 좀 필요해서 온 거라고.
그렇게 물으며 포카리 캔을 하나 더 내밀자, 아줌마가 머리를 조아리며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힘이 없다.
너무 굶었다.
캔을 못 딴다.
난 한숨을 내쉬곤 캔을 대신 따주었다.
치익.
탄산이었다면 훨씬 시원한 소리가 났겠지만, 지금 이 사람들한테는 이온음료가 더 적절하겠지.
아줌마가 고맙다는 듯이 내게 꾸벅 하고는 옆에 누워있던, 담요를 푹 덮고있어 그냥 이불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사람에게 몸을 기울였다.
아줌마는 그 사람의 입에 포카리를 조금씩 부어넣어 주었다.
남자다.
40대초? 혹은 30대 중후반.
꽤 건장한데, 이 사람도 너무 많이 굶었다.
아예 나라는 사람조차 인지를 못하고 있다.
"여보, 정부에서 사람이 왔어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희미하게 눈만 깜빡이며 아내가 주는대로 받아먹고 있을 뿐이다.
난 주위를 둘러봤다.
시원한 이온음료를 마시며 우는 여자들은 울고, 흐느끼는 여자들은 흐느끼고 있었다.
아이들은 허겁지겁 봉투에 매달린다.
비참한 광경이다.
눈 앞에 누워있는 이 사람 외에 다른 남자는 없었다.
할배가 음료를 들고 돌아다니며 주거니 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난 할배에게 물었다.
"여기 다른 남자는 없습니까? 남자들 다 어디갔어요?"
여자와 애들이 여기서 이 꼴인걸 보면 짐작은 된다만.
할배가 눈가와 콧가를 손등으로 쓱쓱 닦아내며 말했다.
"애들 마누라들 여기다 두고 먹을거 구하러 간다고 나가서는 소식이 없지요. 아마도 다들 죽었을거요."
...그렇겠지.
눈 앞에, 거의 인사불성이 된 이 남자 말고는 없는거다.
난 물었다.
"그동안 뭐 먹고 산 겁니까?"
할배가 구석에서 검은색 봉지를 하나 들고왔다.
안에는 귀뚜라미, 메뚜기, 지렁이 같은 것들이 들어있었다.
할배가 말했다.
"요 앞에 냇가에서 미꾸라지 잡아다 먹기도 하고요. 송사리 같은걸 먹기도 했지요. 그나마도 계속 잡아먹었더니 이제 찾을수가 없어서요. 이렇게 먹고 지냈습니다."
...벌레를 그냥 씹어먹고 살았다고?
난 혀를 차고는 누워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이 분은 어쩌다 이렇게 된 겁니까?"
할배가 고개를 저었다.
"벌레는 도저히 못 먹겠다고... 나가서 버섯 같은걸 실컷 따서 왔더군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먹으면 안되는 버섯이예요. 그걸 이 미련한 녀석이 실컷 먹고 우리도 먹으라고 갖고 들어왔지 뭡니까."
...야생에서 버섯을 마구 캐먹었다라.
무모하다고 해야되나 용기라고 해야되나.
할배가 말했다.
"먹어서 죽는 버섯은 아닌 모양이었나봐요. 한참을 토하고 설사를 하고 그러다가 저렇게 누워지낸지 거의 보름쯤 됐지요."
...쯧.
난 혀를 차고는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요? 살아남은 사람들 더 있습니까?"
할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없을거요. 난리 터지고 한동안 동네가 어지럽다가 어떻게 무사한 사람들끼리 연락이 닿아서 여기서 모인겁니다. 젊은 남자들은 하나둘씩 나가서 안들어오고, 점점 줄어들다가 지금 이것밖에 남지 않은거지요."
할배는 그렇게 말하며 눈물을 주륵주륵 흘렸다.
"죽어도 내가 먼저 죽어야 되는데 그 젊은 놈들이..."
난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살아남은게 어딥니까."
남편한테 포카리를 먹이던 아줌마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정부에서 오셨다고 하셨지요? 사람들 얼마나 살았나요? 인터넷에선 전세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하던데, 사람들은 많이 살아있나요?"
난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답변은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만, 일단 자리를 좀 옮겼으면 좋겠는데요. 움직일 수 있으십니까?"
초췌한 안색의 아줌마가 난처한 얼굴로 남편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저희 남편은..."
"걱정 마시고. 자, 일어납시다."
아줌마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아이의 손을 잡았다. 여자들도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선다.
벌레와 지렁이를 먹고 버틴 여자와 아이들.
남자들이 좀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아예 없는 것보단 훨씬 낫다고 보는게 맞겠지.
여기도 근처에 농지가 많고, 할배도 있으니 나름대로 농사도 지을 수 있을테고.
나는 누워있는 아재의 어깨를 두드렸다.
"제 말 들리십니까?"
남자는 핼쓱해진 얼굴로 입을 한두번 열었다 닫았다 했지만 말은 없었다.
설사를 심하게 했다고 했었나.
탈수증에 영양실조가 겹친 것 같은데.
포카리 한 캔 먹여놨으니 그래도 죽지는 않겠지.
죽지 않길 바란다.
송중사가 이것저것 배우겠지만, 결국 정부측 사람이야. 당장 치누크 정비할 사람이 송중사 뿐이라고.
그렇다는건, 여기 계속 머무를 수 없다는거다.
원전엔 사람이 필요해.
생존자를 찾아내러 나온 유일한 이유는, 원전을 관리하게 만들 사람이 필요해서다.
당신들의 생명이 소중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원전을 맡아서 관리해줘야 되겠어.
여기 여자들도 시키면 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여차할때 손에 총 들고 방아쇠를 당겨버릴 수 있는, 군사훈련이 된 인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당신은 높은 확률로 군필자일 것이고 말이지.
그러니, 죽지 말고 살아라.
"좀 들어올릴테니까 참아요."
난 핼쓱해진 남자의 무릎과 어깨를 안아 들어올려 일어섰다.
체력 업적 스킬 덕분에 거의 힘들이지 않고도 들어올릴 수 있다.
혹은, 이 남자가 너무 메말라버렸거나.
난 남자를 안고 뒤돌아섰다.
할배와 여자들, 아이들이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