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7화 (147/187)

"괴로운 일이 있는 사람들이 죽고싶다 말은 해도, 정말로 죽고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살아야 될 이유 같은건, 살면서 찾아내면 돼요. 괴로운 일 떠오를 때 마음이 힘들어도 말입니다. 맛있는 음식은 여전히 맛있고, 재미있는 영화는 여전히 재미있잖아요."

눈빛 어두운 박소장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피었다.

"...편하게 사는군요. 비아냥은 아닙니다. 그저 당신이 부럽습니다. 그렇게 살 수 있다는게."

난 어깨를 으쓱했다.

"어렵게 살지 않을려고요. 원래부터 그렇게 속 깊은 생각 하면서 사는 사람도 아니었고. 종말 첫 날 터졌을 때 사방에서 쫓아오는거 따돌리고 도망쳤던게 가끔 꿈에 나올 때 있거든요."

난 피식 웃었다.

"그러다 눈 떠보면 옆에 애인이 누워있어요. 아니면 여기던가. 아니면 미군기지던가. 현실이 와닿죠. 아, 나는 살아서 여기까지 왔구나. 그러면 또 일어나서 하루를 살아가는 겁니다."

허리에 감겨있는 리프팅벨트.

거기에 걸려있는 검 두자루.

난 검 손잡이를 매만지며 박소장을 바라봤다.

"이 놈들이랑 같이요."

박소장은 그저 내 말을 듣고만 있었다.

뭔가 사연이 있다면 후련하게 털어놔줬으면 좋겠는데,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말할 것 같지 않다.

그의 시선이 점점 옆으로 돌아간다.

한 지점에서 멈춘다.

그는 그 허공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또 환각이 보이나본데.

쯧.

난 혀를 차고는 물었다.

"소장님. 소장님?"

박소장이 나를 돌아본다.

난 고개를 저었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 예."

박소장이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알고 있습니다. 여기 있는 애는 제..."

그는 입을 다물고는 말을 이었다.

"제게만 보일 뿐이고, 실제로는 없다는걸요."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은건가, 이 사람?

그 때, 저 아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온 첫 날 들었던 그 소리다.

우우아아- 아아아아-

난 눈살을 찌푸리곤 계단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런데 저건 무슨 소립니까?"

박소장이 눈을 여러번 깜빡이며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고는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그게... 그, 저의 부끄러운 일이 지하창고에 들어있습니다."

난 고개를 갸웃했다.

"부끄러운 일요? 뭡니까?"

박소장이 씁쓸한 얼굴로 미소지었다.

"실은 저 아래에 있는건 핵연료입니다. 운송기에 들어있죠."

내 눈이 둥그래진다.

난 갸웃하며 물었다.

"핵연료요?"

박소장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안전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운송기에 들어있습니다."

"그걸 왜 저기에?"

박소장은 쓴 표정으로 웃고는 말했다.

"자살할려고 했습니다. 운송기를 저 아래에 두고 저 스스로를 가둔 뒤에 열어버릴려고요."

난 놀란 눈으로 박소장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잃었다.

그런 짓을 하면 이 건물 전체가 피폭되는거잖아.

박소장이 묘한 얼굴로, 미소짓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포기했어요. 걱정 마세요. 이제 그런 짓 안 합니다. 그냥... 그냥 떠나야죠."

"아니, 그보다, 그럼 저 소리는요?"

"아아. 그건..."

박소장이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운송기를 열려다 말았거든요. 일단 방사선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만, 내부에서 수증기가 새나오고 있어요. 아, 운송기 내부의 냉각수는 노심에 직접 노출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냥 수증기예요."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증기가 새나오면서 나오는 소리로군요. 그러면 냉각수를 채워야 되지 않습니까?"

박소장이 끄덕이며 말했다.

"네. 채워야죠. 제가 매일 채워넣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저 이외에 다른 인원은 저 안에 들어가지 않는게 좋아요. 나중에 송중사한테 냉각수 채워넣는 방법도 알려주고 하겠지만, 일단 지금 당장은 함부로 들어가거나 운송기에 손대지 않는게 좋습니다."

그는 눈썹을 찡그리며 힘주어 말했다.

"제가 이미 열려다 방치해놓은 물건이라 잘못 손대면 피폭됩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생각해주세요."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혼의 문신이 내게 있긴한데, 이게 방사선 피폭까지 막아주는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실험해보고 싶지도 않다.

이 사람이 하는 말이 미심쩍긴 한데, 그렇다고 모험을 해보기엔 여긴 핵연료로 작동하는 원자력 발전소란 말이지.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혀 알겠지 않다.

한국어가 제대로 되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못 믿겠고, 미심쩍다.

애초에 환각을 보고 환청을 듣는 사람이 하는 말을 어떻게 곧이 곧대로 믿을 수 있겠냐고.

하지만, 피폭이라.

이 사람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방사선을 갖고 실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안 든다.

종말 전에 체르노빌이란 외국 드라마를 봤는데, 피폭된 인간이 죽는거 진짜 끔찍하더만.

피부란 피부는 죄다 벗겨지고 눈에서 피 질질 흘리면서.

으 씨발.

떠올라버렸어.

박소장이 어설프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예. 위험합니다."

위험한건 당신이고.

하지만 더이상 실랑이 할 생각이 없어서 난 고개를 끄덕이곤 계단을 내려갔다.

사람들 죄다 굶어서 누워있는데다, 전기 내렸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여러가질 생각해보면 역시 약국은 한 번 털어야 된단 말이지.

"성훈씨, 일찍 일어나셨군요. 나가십니까?"

입구에서 보초서던 특임대원이 나를 보곤 인사해왔다.

난 끄덕이곤 말했다.

"네. 약국 좀 다녀올게요."

간단히 얘기해주곤 걸어가는데 못내 마음이 찜찜하다.

지하실 그냥 쳐들어가볼까.

말하는 태도도 그렇고 영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저 사람.

...쯧.

봐서 그냥 들어가던가 해보자.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철조망이 슬슬 가까워져 온다.

손을 들어 공간발톱을 발동시키려다 생각이 바뀌었다.

또 땅에 내려서면 신발 밑창 다 갈리겠지.

난 대신 돌개바람을 소환해 올라탔다.

그리고, 철조망 위를 겨누어 손을 움켜쥐었다.

스홧!

공간에 빨려들어가는 것같다.

돌개바람과 함께 단숨에 철조망을 뛰어넘어, 속도에 못이겨 앞으로 날아간다.

겨우 지면에서 수미터 떨어져 있을 뿐인데, 너무 빨라 고속열차에 타고있는 것같다.

손에 쥔 액셀을 힘껏 당겼다.

가아아앙!

땅에 닿자, 뒷바퀴가 좌우로 미끌린다.

카칵, 카카카!

머리칼이 잔뜩 휘날린다.

아침햇살에 눈이 부시다.

나는 그대로 돌개바람을 몰아 도로를 달려나갔다.

먼지를 휘날리며 잠시 달려나가자, 어제 그 마을이 나타났다.

그대로다.

길에 시체 수십구가 늘어져 누워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아무도 없는 거리와 고요한 풍경은 그저 그렇게 거기에 있었다.

시체 몇 구를 돌개바람으로 짓밟고 나아가 약국 앞에서 멈춰서서 잠시 숨을 돌렸다.

"후우."

공간발톱으로 뭘 뛰어넘을 땐 돌개바람 위에서 하는게 낫겠는걸.

운동화로 딛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등에 맨 더플백은 두개.

길이만 거의 1.5미터에 달하는 대형 더플백이다.

여기 가득 쓸어담으면 웬만큼은 쓰겠지.

약국은 유리벽이 박살나있었다.

들어가보니 역시 아무도 없다.

어제 내 손에 모조리 죽은거다.

지익, 지이익.

더플백 지퍼를 둘 다 열어놓고는, 약국 안에 있는걸 모조리 쓸어 담았다.

붙이는 파스, 뿌리는 파스, 소독제, 영양제, 피임약, 소화제, 박카스 할 것 없이, 눈에 보이는대로 우르르 꺼내 담았는데, 더플백이 너무 커서 한참을 담아도 다 못 담을 정도다.

더플백 하나는 식량을 담을까?

아니.

지금은 약국이다.

먹을거야 또 나오면 돼.

더플백 두 개를 가득 채우고 약국을 나섰다.

그리고, 나는 걸음을 멈췄다.

...느낌이 이상한데.

왜 갑자기 느낌이 쌔한건지 모르겠다.

난 선 채 귀를 기울여봤다.

나무토막을 젓가락으로 두드리는 것같은...

아주 희미한,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희미한 소리.

타칵, 타칵대는 소리.

어느 한 지점에서 들려오는게 아니다.

산발적으로 이곳저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고개를 들어 거리를 바라봤다.

왼쪽으로, 또 오른쪽으로.

아무것도 없다.

서있던 차들은 그대로 방치되어 있고, 늘어선 건물들도 유리벽이나 창문이 여닫히는 일없다.

그저 고요하다.

나는 숨을 들이키고, 힘껏 외쳤다.

"계십니까!"

생존자가 있을거란 생각은 안 한다.

있다면 어제 나왔겠지.

그리고, 뭔가 있다면 얼른 기어나와라.

그런 생각으로, 나는 다시 외쳤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정부에서 나왔습니다!"

고요하다.

내 목소리만이 건물과 건물에 부딪히며 우렁차게 메아리칠 뿐이다.

그리고, 소리도 멎었다.

아주 희미하게 타칵대던 소리가 더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신경 거슬리게 하네.

"...쯧."

혀를 차고는, 돌개바람을 소환해 길을 되돌아 달려나갔다.

돌아가는 길 역시 고요했다.

하지만 마을을 벗어나, 멀리 산이 보이고, 산아래 듬성듬성한 나무와 수풀들이 나타나자 또다시 느낌이 쌔하다.

...누군가 나를 뚫어지게 보고있는 것같다.

가아아앙-카카카!

돌개바람을 세우고, 즉시 활을 뽑아 화살을 매기곤 수풀을 향해 겨누어 당겼다.

빠아아아-

...보인다.

붉은 빛들이.

내가 겨누자, 곧장 사방으로 흐트러진다.

나무 뒤로, 바위 뒤로.

"...마음에 안 드네 진짜."

덤빌려면 덤비던가.

멧돼지든 뭐든 이 자리에서 죽여 없애버릴테니.

뭔데 똘마니 시켜서 사람을 쳐다보게 만들고 있는거냐.

활을 들어 산을 겨누었다.

드문드문 붉은 빛들이, 아주 희미하게 보인다.

하지만 나무들과 바위들에 가로막혀 이따금 나타났다 사라질 뿐이었다.

뭘 쏜다고 적중시킬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렇다고 산 속에 쳐들어가자니, 내가 죽일 수 있는 그 이상으로 바글댈지도 모른다.

특임대원들의 지원을 받아서 싸우는게 제일 좋은데, 여기선 힘들다.

"쯧."

당겼던 시위를 풀고, 활을 도로 꽂아넣고는 원전을 향해 돌개바람을 달렸다.

지금 내가 레이드 한 번에 죽일 수 있는 수는 정확히 400마리.

...한번에 수천마리씩 죽일 수 있다면 아무 망설임 없이 산 속으로 쳐들어갔겠지.

그게 안되니 어쩔 수 없다.

능력이 있지만 한계가 분명한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원전으로 되돌아가니 성가연이 건물 입구에 나와있었다.

"약국 다녀오셨어요?"

더플백 두 개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계 잘 서는게 좋겠습니다. 밖에 놈들이 나를 감시하고 있더군요."

성가연의 안색이 변했다.

"뭔가 나타났나요?"

"아뇨."

난 지금 기분이 살짝 더럽다.

아침부터 박소장때문에 찜찜했는데, 나갔더니 짐승들이 따라다니면서 쳐다보고 있고.

난 입술을 비틀며 고개를 저었다.

"나타났으면 좋겠는데 안 나오더군요. 이번엔 북쪽으로 가봅니다."

"부구리 쪽으로 가보시게요?"

"부구리?"

성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위에 있는 동네. 원전 나가면 바로 있어요."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곤, 빈 더플백 두 개를 주워들었다.

"다녀올게요. 이번엔 먹을거나 좀 챙겨와야겠군요."

"성훈씨."

돌개바람에 올라타 뒤돌아봤다.

성가연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조심히 다녀와요."

...미녀잖아.

웃으니까 더 예쁘네.

난 헛기침하곤 돌개바람을 달려 북쪽으로 나아갔다.

철조망을 뛰어넘어 도로를 달리니 바로 코앞에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키작은 단독주택들과 몇몇 점포들 뿐인 시골동네.

난 동네를 한 번 둘러보곤 서쪽으로 도로를 타고 달려나갔다.

지금 내가 원전을 다시 나온 이유는 오직 한가지다.

먹을걸 구하러 나온 것도, 식량을 가지러 나온 것도 아니다.

나를 쳐다보고 있는 놈들.

놈들이 어디에 바글바글한지 알아내기 위해서다.

잠시 돌개바람을 달려 나아가자, 제법 큰 마을이 나타났다.

아파트도 있고, 미용실에 편의점도 있고 있을건 다 있다.

도시라고 부를 만한 규모는 절대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엔 확실히 사람이 산다는 티는 나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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