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성가연이었다.
뭔가 대화를 나누며 걸어나오던 중, 성가연이 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덜컹 뛰어오른다.
젠장.
난 숨을 들이키곤, 한숨을 쉬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다른데로 돌리게 된다.
우릴 본 특임대장 성규혁이 손을 흔들며 크게 말했다.
"어이, 송중사. 오늘 일과 끝났나?"
"예, 대장님."
송중사가 특임대장 성규혁에게 손을 흔들어주곤 걸었다.
"어흠."
난 헛기침을 한 번 하곤 송중사를 따라갔다.
아, 불편하네.
성가연 시발.
관리건물로 다가가자 특임대장 성규혁의 얼굴이 보인다.
그는 미소짓고 있었다.
...왜?
혹시 여동생한테 뭔가 들은건가?!
내 면상에 죽빵 갈기기 전에 일부러 미소지어서 방심시키려는 작전인가?!
그런 생각을 애써 숨기며 나도 미소지어보이곤, 살짝 목례하고 지나가려 했다.
그때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아까 다시 나갔다는 이야기는 가연이한테 들었습니다. 또 음식을 구하러 다녀 온 겁니까?"
"아, 예."
그렇게 대답하곤 두툼한 더플백을 살짝 들어보였다. 그리고 다시 목례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성가연이 내 팔을 붙잡는다.
"어디가요? 이리 와요."
"......"
씨발.
혼내지 마라.
내 잘못 아니야.
일부러 보려고 문 연 것도 아니고, 남자 샤워실에 여자가 들어있을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고.
문짝에 써붙여놓은 것도 아니면서.
아오 찌질해져.
성가연이 당기는 대로 주춤대며 몸을 돌리자, 특임대장 성규혁의 웃는 얼굴이 내 앞에 나타났다.
아니, 그는 그냥 그 자리에 서있을 뿐이었다.
나 혼자 그렇게 느낀거다.
나한테 얼굴 디민 것 같다고.
젠장.
왜 죄 지은 것같지?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성훈씨, 아직 모르시죠?"
난 대답하지 않았다.
하고싶은 말은 차고넘친다.
당신 여동생인줄은 아는데, 내가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고. 라고 항변하고 싶다.
성가연이 말했다.
"당연히 모르지. 나가 있었잖아. 누가 연락한 것도 아닌데."
뭐를? 씨발, 뭐를?
특임대장 성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성훈씨. 대통령께서 방송을 시작하셨습니다. 직접 현장에 나가지 못하시니, 방송을 통해서라도 생존자들을 구하고 싶으시답니다."
...어?
난 성가연을 돌아봤다.
그리고, 특임대장 성규혁을 돌아봤다.
두 사람의 표정을 보건대, 샤워실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해선 서로 얘기가 안 된 모양이다.
마음이 놓인다!
난 알아들었다는 제스쳐를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이고는, 방금 들었던 말을 다시 되새겼다.
방송을 시작했다고?
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방송? 무슨 방송요? 방송국은 접수 못했을텐데. 유튜브?"
"네. 유튜브로요. 보시겠습니까?"
특임대장 성규혁이 휴대폰을 내게 내밀었다.
화면을 보니 라이브는 아니다.
성가연과 얘기하면서 보던 중이었는지, 중간까지 재생되어 있었다.
성규혁이 재생버튼을 누르자, 허름한 책상에 앉아 두 손을 모으고 있는 대통령이 나타났다.
"-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와 같은 사태는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 많은 분들이 소중한 가족과 사랑하는 이를 잃었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 민정우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는 내렸던 눈을 들어 카메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제 아내를 사랑했듯이, 여러분도 잃은 가족을 사랑하셨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것은 제가 겪었고, 여러분이 겪었듯이, 너무나, 나라를 잃은 것보다 더욱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대통령 민정우의 눈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단호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저는 살아있습니다. 여러분께선 살아계십니다. 우리는 세상이 무너져내린 한 순간에도 이렇게 눈을 뜨고, 살아서 숨쉬고 있습니다."
대통령 민정우가 숨을 크게 들이키고는 말을 이었다.
"저는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우리 인류는 이렇게 무너지지 않는다고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부디 이 방송을 보시는 여러분께서도 희망을 잃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는 옆을 잠시 바라봤다.
그리곤 미소지으며 다시 카메라로 시선을 옮겼다.
"제 옆엔 창문이 있습니다. 오늘은 산책을 다녀왔어요. 제가 즐겨 다니는 산책로가 여기서 잘 보입니다."
난 고개를 갸웃했다.
산책?
뜬금없이 산책이라니, 무슨 얘길 할려고...
난 그 순간에 깨닫고 탄성을 냈다.
대통령 민정우가 말했다.
"혹시라도 밖에 나가는 것이 두려우십니까? 길은 비어있습니다. 건물에 들어가지만 않는다면, 조용히 움직인다면, 여러분을 막을 것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길은 비어있습니다."
사람들을 회유하고 있는거다.
오라고 손짓하는거다.
이 사람은, 밖이 두려워 안에 갇혀있는 사람들을 밖으로 끄집어내려는거다!
난 대통령 민정우를 바라보며 숨을 가다듬었다.
호흡이 거칠어진다.
함부로 사람들을 끌어내는건, 당연하지만 위험하다.
길거리에서 물어뜯겨 죽은 중딩을 내 눈으로 직접 봤다.
아니, 결과적으론 내가 죽인거지만.
하지만 계속 집에, 무슨 창고 따위에 갇혀 지내도 죽는건 마찬가지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구조받지 못하고 끝까지 어딘가에 스스로 갇혀지내는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모조리 죽는다.
대통령은 그들을 전부 밖으로 끌어낼 작정인거다.
대통령 민정우가 말했다.
"여기는 서래마을입니다. 여기는 안전합니다. 바리케이트를 둘러놓았고, 농사를 짓고 있으며, 군인들이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여기선 모두가 안전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대통령 민정우는 미소지었다.
"거기에 선생님 계십니까? 음악하는 분은 안계신가요? 건설업에 종사하시는 분은요? 요리가 주특기인 분 거기에 안 계십니까?"
그는 부드럽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여기엔 집이 있습니다. 이웃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르쳐야 할 학생들이, 여러분이 요리할 야채와 고기가, 여러분이 힘써 쌓아올릴 모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필요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우리는 다시 우리의 삶을 이어나가고, 재건해 나아갈 수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대통령 민정우의 두 손이 펴졌다.
그가 말했다.
"저는 여기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겠습니다. 꼭 여러분을 뵙고 싶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필요합니다. 여기는 서래마을입니다."
대통령 민정우가 다시 옆을 바라보곤 미소지었다.
"오늘 날씨가 참 맑더군요. 일기예보는 더이상 볼 수 없지만, 제 생각엔 당분간은 맑은 날이 이어질 것 같습니다. 저는 내일도 산책을 나갈 겁니다."
그리고, 영상은 끝났다.
영상 말미에, 그리고 영상 아랫쪽 코멘트에 연락처가 기입되어 있다.
난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웃더니 말했다.
"방송이라고 해야되나. 녹화편집된걸 올린거긴 합니다만, 어떻게 생각합니까?"
"역시 대통령이라고 해야되나."
난 피식 웃고는 말했다.
여운이 생길 정도다.
"호소력 하나는 진짜 대단하군요. 당장이라도 사람들을 집 밖으로 끌어낼 수 있을거라고 봅니다. 연락은 좀 왔습니까?"
특임대장 성규혁이 습 하며 숨을 들이키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예. 여럿 왔다더군요. 전라도에서도 강원도에서도, 충청 경상에서도. 전국 각지에서, 심지어 북한에서도 보고 연락이 왔답니다."
"북... 북한에서도요?"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하긴, 당연한 것이다. 북한이라고 종말을 피해갈 순 없는 노릇이니.
이젠 북한이든 남한이든, 국경이고 휴전선이고 그냥 없어져버렸지만.
특임대장 성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데리러 갈 순 없지만 올 수 있는 사람은 다 오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그런데?"
특임대장 성규혁이 성가연을 바라본다.
성가연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이상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대요."
"이상한 전화?"
성가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동영상 내리라고. 요즘 세상에 무슨 정부고 대통령이냐면서, 필요 없다고 당장 동영상 내리라고. 협박했다더군요."
"...협박?"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진다.
난 갸웃하며,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미친 인간이 다 있네. 무슨 협박요? 협박은 이렇게 안하면 저렇게 해버리겠다가 협박 아닙니까? 협박할 꺼리가 있나?"
특임대장 성규혁이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게, 협박이 제대로 성립이 됩니다."
난 특임대장 성규혁을 바라봤다.
표정을 보니 농담이 아니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그거, 서울시 상수도원에서 걸려 온 전화였어요."
...뭐라고?
난 신음하듯 물었다.
"...상수도원이면..."
특임대장 성규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수도관리국 말입니다. 물을 틀어쥐고 있는 놈들이 협박한 겁니다."
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물?
물이라고?!
성가연이 말했다.
"대통령께선 동영상을 내리지 말라고 하는데, 비서실장님 생각은 좀 다른가봐요. 대통령과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더라고요. 상수도원측 사람하고 연락해서 오늘 자정까지 동영상은 내리는 걸로 하기로 했다고..."
난 한숨을 내쉬었다.
허리에 저절로 손이 올라간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온다.
난 메마른 웃음을 뱉아내곤 말했다.
"...개미친새끼들이 다 있네."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성훈씨. 지금 당장은 어차피 우리가 할 수 있는게 없습니다. 원전 작전은 그대로 진행하라고 대통령께서도 지시하셨고, 송중사도 그것 때문에 열심히 배우는 중이고요. 작전은 내일 오후에 시작합니다."
"...오후요?"
특임대장 성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송중사 말로는 매뉴얼에 있는 것 까지라면 내일 오후쯤이면 대충 다 배울 수는 있을 것 같답니다."
성가연이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그렇게 말한적은 없지만요. 오빠가 내일 오후까지 다 떼라고 명령한거죠. 그 두꺼운걸 겨우 사흘만에 어떻게 떼냐고?"
특임대장 성규혁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시한부 사흘이라는건 어차피 서로 알고 있었잖아. 박소장이 얘기한 기일은 내일 밤이고요. 시간이 없습니다. 상수도원 건도 생긴 마당에 그 이상 지체할 수도 없고요. 그래서 작전은 내일 오후 네십니다. 아직 밝을 때 해치워야 되겠죠. 어두워지면, 여기 가로등이 있긴 해도 싸우는 도중에 깨질 수도 있고."
하...
상수도원이라...
미친 씹새끼들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산통깰려고 드네.
난 고개를 끄덕이곤 침을 탁 뱉았다.
"좆같네 진짜. 상수도도 원전처럼 배우는데 시간 오래걸리고 복잡해요?"
성가연이 갸웃하더니 물었다.
"모르겠네요. 왜요?"
난 몸을 돌려 걸어가며 말했다.
"그냥 다 죽여버릴려고."
물을 갖고 협박해?
이건 다 죽이겠다는 소리나 다름없다.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봤다.
기분이 더럽긴 더럽나보다.
눈빛이 사람 하나 잡아죽일 것같다.
"후우..."
깊게 심호흡하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상수도원.
지금 기분으로선 협박에 가담한 놈이 아니라도,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내 손으로 다 찔러죽일 것같다.
하지만 기분이 얼마나 더러워도, 작전이 코앞이다. 못 움직인다.
거기 있는 놈들. 몇명인지, 혼자인지 모르겠지만 협박이 통했다고 오만해져 있겠지.
그 기분, 며칠 안에 내가 잡쳐주지.
나는 거울을 바라보며 천천히 심호흡했다.
"진짜 다 죽일거예요?"
성가연의 목소리.
옆을 돌아보니 그녀가 화장실 문에 팔짱끼고 기대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오전엔 남자 샤워실에 있더니, 이번엔 남자 화장실까지 접수하려고 저러나.
그런 생각을 하자 웃음이 나왔다.
난 세면대를 붙잡고 고개를 숙여 웃음을 감추곤 말했다.
"...남자 화장실입니다."
이유를 모르겠네.
빡친게 확 풀리는데.
웃겨서 그런가.
성가연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샴푸 냄새인지, 은은한 여자냄새가 밀려든다.
아까 봤던 몸이 떠오른다.
심장이 널뛰려 하길래 세면대 물을 틀어 얼굴에 끼얹었다.
성가연이 말했다.
"거기 몇명이나 있는지, 왜 협박했는지, 협박에 가담한건 누구인지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아이들이 있을 수도 있어요. 무작정 다 죽이는건 답이 아니예요. 그렇게 생각 안해요?"
얼굴에 물을 끼얹다, 난 피식 웃고 말았다.
난 몸을 일으켜 성가연을 바라봤다.
뚝, 뚝.
물이 턱 끝으로 떨어진다.
...예쁘네.
그런데, 나하곤 생각이 꽤 다른걸.
난 말했다.
"바퀴벌레들이 있었죠."
성가연이 갸웃하며 나를 바라본다.
난 미소지었다.
"진짜 벌레들이 아니라 사람들입니다. 하는 짓이 바퀴벌레같아서 바퀴벌레들이라고 불렀어요."
"...아아."
성가연은 고개는 끄덕이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건지 이해는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난 말했다.
"종말이 터지기 전엔 아마 적당히 무례하고, 적당히 제멋대로고, 적당히 사람들 눈살 찌푸리게 하는 짓만 골라서 하는, 그래서 인터넷에서 조리돌림이나 당하고 사는, 그러면서 뻔뻔하게도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그런 인간들이었겠죠. 주변에서도 흔히 있지 않습니까? 그런 쓰레기들은."
성가연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난 웃고는 말했다.
"그런 놈들이 뻗대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살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그래도 법과 질서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좃같이 굴면 경찰이 출동한다는걸 그 병신들도 아니까, 좃같은 인성 적당히 눌러가면서 살았겠지. 와중에 나대다 뉴스에 나오고 하긴 했지만, 그건 그냥 일부고요."
슬슬 표정관리가 안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