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1화 (151/187)

웃을려고 하는데, 나 스스로도 느낄 만큼 눈빛이 사나워진다.

난 말했다.

"지금은 경찰도 법도 교도소도 없어. 지금은 종말입니다. 그런 쓰레기들이 나대기 아주 좋은 때지."

"...그 사람들... 어떻게 됐어요?"

난 미소지었다.

"어떻게 됐을 것 같아요?"

마트 건물에 있는 사람 외에, 우리 동네에 다른 생존자 그룹은 없다.

성가연이 짐작이 된다는 얼굴로 말했다.

"...모두가 가해자는 아니었을거 아니예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 안에 여자도 있었고, 노인도 있었고, 애들도 있었어. 온전히 피해자들이라고 볼 수 있을겁니다. 좀비 웨이브에 휘말려 다 죽었죠."

성가연은 눈썹을 찡그리며 나를 바라봤다.

"...당신이 구할 수 없었어요? 그 가여운 사람들을."

난 웃었다.

"...내가 왜?"

성가연의 표정이 변했다.

내 되물음이 꽤 충격을 준 것 같다.

그러나 상관없다.

난 웃고는 말했다.

"내 말 잘 들어, 가연씨. 내겐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무슨 영웅 쯤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말이야. 난 영웅이 아니야. 그냥 당신들과 똑같이, 이 종말에서 살아남을려고 발버둥치는 그냥 한 사람일 뿐이라고."

난 성가연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공중으로 뛰어오르고, 총을 쏘고, 검을 쓰고, 활을 쓰고, 돌개바람 타고 다니니까 내가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할 사람같이 보여요? 아니야. 나도 목숨은 하나야. 내 모가지가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면 그 때도 내가 살 수 있을까? 한 열흘쯤 물 못 마시고, 밥 못 먹어도 내가 살 수 있을것 같냐고."

성가연은 나를 노려보며 달리 대답하지 않았다.

난 미소지으며 말했다.

"내가 나갈 때, 싸울 때 무슨 생각 하는지 말해줄까? 난 구원자가 아니다. 나는 모두를 구할 수 없다. 그게 내가 칼로 좀비들 찔러 죽이면서 하는 유일한 생각입니다."

성가연이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그래서 그 사람들 죽게 놔뒀어요?"

난 미소지었다.

"맞아요. 그리고, 물 갖고 장난친 놈들도 그렇게 될 거야. 거기 몇사람이나 있든, 누가 있든간에."

성가연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갸웃하더니 말했다.

"하지만 마을에서 사람들 구해서 원전으로 데려왔잖아요."

난 웃었다.

"원전 관리할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야. 나도 전기는 써야되잖아."

성가연은 입술을 열었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할 말은 많은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는 얼굴이다.

난 그런 성가연을 뒤로하고 화장실을 걸어나갔다.

이걸로 성가연하고의 관계는 대충 파탄난 것 같은데.

상관없다.

"다 죽이고 죽게 놔두겠다면, 그러면 바퀴벌레라는 사람들하고 다를게 뭐예요?"

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뒤를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놈들은 죽었고, 나는 살았다는거."

그리고, 걸어갔다.

그 때 이후로, 아침까지 내 주위에 성가연이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보초타이밍이 지나서 휴게실로 돌아와 특임대원들과 함께 쉬곤 했지만, 휴게실엔 내가 있다.

내가 없는 어딘가에서 쉬는 모양이다.

아까의 대화가 꽤나 불편했던 모양이지.

이렇게 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성가연의 나체를 보는 바람에 하루종일 널뛰던 심장도 몹시 진정되었다.

근처 마을에서 원전 관리할 사람들이 먹을 음식을 더플백에 가득 담아다 두어번 왕복하니 금새 오후가 되었다.

관리건물 앞에 특임대장 성규혁과 성가연이 특임대원들과 함께 모여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난 음식 가득한 더플백 두 개를 어깨에 메고 관리건물로 태연히 걸어갔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나를 발견하곤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성훈씨 오셨습니까. 하루종일 바쁘시군요. 몇 번째죠?"

"글쎄요. 두번짼가 세번짼가. 작전 준비는 잘 돼갑니까?"

특임대장이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일단 폭탄은 다 묻어놨습니다. 두시간 뒤에 작전 시작합니다."

"그래요?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특임대장 성규혁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게 없었다.

성가연과 있었던 일, 나눴던 대화는 그는 알지 못하는 눈치다. 다른 특임대원들도.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작전은 간단합니다. 건물 안에서 전력을 내리고, 네시간 뒤에 다시 켭니다. 그동안 밖으로 나가는 전기도, 철조망의 고압전류도 같이 꺼질겁니다. 철조망이 꺼져있는 동안 원전을 지키면 되는겁니다."

진짜 간단하네.

난 멀리 산을 내다봤다.

"짐승이 나타났다든가 하진 않았습니까?"

"쥐들이 이따금 나타나더군요. 옥상에서 경계중인 대원들이 계속 감시중이니 뭐가 나타나면 바로 알 수 있을겁니다. 성훈씨는 어때요? 나갔을 때 커다란 멧돼지가 또 나타나진 않았습니까?"

놈은 나타났다기 보다는 엎드려있다 나한테 뒤통수 후려맞은 셈이지만.

난 미소짓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나가서 산을 봤는데 아무것도 없더군요. 자잘한 놈들이 나무나 바위 같은데서 가끔 보이는 것 말고는 조용했어요."

특임대장 성규혁이 팔짱을 끼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라면 다행이군요. 네시간동안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게 가장 좋지만요."

난 피식 웃었다.

"그래도 멧돼지는 처리해야죠. 안 나타나면 안 나타나는 대로 난감한데."

특임대장 성규혁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정찰용 드론 갖고 왔습니다. 지금 두 개 띄워놨어요. 금방 찾아낼 겁니다."

오오, 드론.

난 미소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찾으면 얘기해줘요. 난 좀 쉬겠습니다."

그러며 특임대장과 특임대원들에게 살짝 목례하고 지나갔다.

성가연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래, 뭐.

그런거지.

난 웃고는 그녀를 지나가, 2층 회의실에 모여있는 생존자들에게 더플백을 건넸다.

기뻐하는 얼굴들과 감사의 말들.

특히 독버섯 아재가 요 하루이틀 사이에 건강이 상당히 회복되어 눈빛이 돌아와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아재가 그렇게 말하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몸은 아직 썩었지만, 눈빛이라도 돌아와서 다행이다.

"별 말씀을요. 쉬면서 많이 챙겨드시고, 약도 잘 드십쇼. 얼른 일어나야죠."

"예. 알겠습니다."

송중사는 가능한 빨리 서래마을로 돌아와 치누크를 담당해줘야 되니, 이 사람이 책임져주지 않으면 안 된다.

난 미소짓고는 방을 나섰다.

옆방.

원전 관리실.

박소장과 송중사가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진짜 꼭 이래야겠습니까? 그냥 여기 계셔도 되잖아요."

"이러지 말게. 난 떠날거야. 그저, 마지막으로 자네라는 사람하고 며칠 보낼 수 있어서 다행일 뿐이네."

"박소장님. 다시 생각해보십쇼. 저도 가족을 잃었습니다. 사람들 대부분이요. 박소장님이 겪은걸 저도 다 겪었단 말입니다."

송중사가 박소장을 설득하고 있다.

목소리나 어투가 꽤나 간절한데.

엄청 친해졌구나.

저 분위기에서 괜히 제3자가 들어가면 맥이 탁 끊긴다. 여긴 그냥 송중사에게 맡기자.

박소장이 떠나지 않으면 그게 가장 좋긴 하지.

박소장 중심으로 생존자들이 한자리씩 맡아서 일해주면 원전도 무리없이 정상가동이 가능할거고.

난 고개를 끄덕이곤 휴게실로 내려갔다.

난 그냥 쉬자.

멧돼지를 발견하든, 작전시간이 되든, 누군가는 나를 부르러 오겠지.

소파에 누워 잠깐 눈을 붙이며 작전시간이 되길 기다리는데, 얼마 되지 않아 성가연이 휴게실로 들어왔다.

"성훈씨. 자요?"

난 눈을 떴다.

"이젠 아니네요. 무슨 일입니까?"

누운 채 고개를 드니 성가연이 입술을 깨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할 말이 있어서요."

난 대답대신 그녀의 할 말이라는걸 기다렸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곤 말했다.

"난 당신이 틀렸다고 생각해요."

난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성가연이 말했다.

"난 당신이 영웅이라고 생각해요."

...뭐라고?

성가연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앞으로도 기대할게요. 오늘 작전 힘내요."

그리고 그녀는 휴게실을 나갔다.

문 닫히는걸 바라보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방금 내가 뭘 들은거지?

머리가 갑자기 복잡해진다.

"...하."

심장이 갑자기 널뛴다.

파탄나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뭐냐 이거.

"...아오, 진짜."

난 이마를 짚고 눈을 감아버렸다.

작전 개시까지, 약 두시간.

"후우..."

난 깊게 호흡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쉽게 되지가 않는다.

한참 그렇게 누워있는데,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성훈씨. 작전 개시합니다."

특임대원이다.

나는 눈을 떴다.

내가 일어나는걸 본 특임대원이 나가며 말했다.

"다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았어요."

대답하곤 무릎에 팔꿈치를 얹고 후우,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잠이 들긴 들었었나본데.

일어나 무장을 갖춰입고 나가니 건물의 정문 앞에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특임대장과 송중사가 계단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도저히 안 돼?"

"예. 도저히... 고집불통이네요. 오늘 밤에 간답니다."

그때 송중사가 나를 발견하곤 손을 들어보였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나를 보더니 말했다.

"성훈씨, 곧 작전 시작합니다. 몸 상태는 어때요? 괜찮습니까?"

스텟은 풀충전 상태다.

난 웃고는 말했다.

"자다 일어나서 그런가 눈이 좀 따끔거리네요. 몸은 괜찮아요. 그런데..."

난 송중사에게 물었다.

"박소장 오늘 밤에 간다고요?"

송중사가 끄덕이더니 곧 갸웃하며 말했다.

"예. 그런다고 하는데..."

"하는데?"

송중사가 살짝 불편한 얼굴로 특임대장의 눈치를 살피곤 내게 말했다.

"일단 간답니다. 가는데, 하는 태도는 떠나는 사람 같지가 않아요. 짐도 딱히 챙기지 않고, 아무것도 안 하더라고요."

특임대장 성규혁이 고개를 저었다.

"짐은 떠날때 챙기면 되는거야. 어차피 홀로 떠나기로 한 거면 딱히 짐 챙길것도 많지 않을거고. 가려는지 아닌지 마음이 중요하다."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사람 마음이니까 바뀌려고 하면 얼마든 바뀔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오늘 밤까진 시간 있으니까 설득은 계속 해 봐요."

송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특임대장 성규혁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가시죠, 성훈씨. 가자."

우린 특임대장을 따라 나섰다.

관리건물의 정문 앞엔 특임대원들과 성가연, 박소장, 그리고 내가 구해 온 생존자들이 모여있었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웃고는 말했다.

"우리 대원들만 모이면 되는데 다들 오셨군요."

생존자 할배가 멋적게 머리를 긁적였다.

"다들 모이라고 하기에..."

생존자 쪽에는 여자들과 할배 뿐이었다. 난 갸웃하며 물었다.

"아저씨는 아직 회복이 안 된 모양이지요?"

얼굴이 익숙한 마누라 아줌마가 말했다.

"예. 남편은 아직... 하지만 기운은 많이 차렸어요. 이젠 혼자서 씻기도 하고요. 덕분입니다. 감사해요. 고맙습니다."

"별 말씀을요. 남편분이 빨리 회복되길 바랍니다."

하루종일 누워있으라고 구해 온 건 아니니까.

아줌마가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열심히 먹이고 있어요. 남편도 빨리 일어나고 싶다고 하고요."

특임대장 성규혁이 끄덕이곤 말했다.

"남편분 잘 돌봐드리시길 바랍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한 시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박소장님."

박소장이 특임대장을 바라본다.

그림자진 눈과 어두운 안색.

처음 봤던 때의 그 얼굴이었다.

특임대장은 그가 뭔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박소장은 그런 얼굴로 희미하게 미소짓고는 시선을 돌려버렸다.

특임대장이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곤 특임대원들에게 말했다.

"다들 작전내용은 숙지하고 있겠지만, 다시 한 번 얘기한다. 작전은 간단하다. 전기를 내리고, 네시간 뒤에 다시 켠다. 그 시간동안 철조망으로 보호하고 있는 지역을 지키면 된다."

특임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규혁이 박소장에게 물었다.

"다시 한 번 확인하겠습니다. 원전 쪽은 제대로 잠가놓았습니까?"

박소장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대답은 송중사가 대신했다.

"예. 제가 박소장님하고 같이 다니면서 전부 제대로 잠가놨습니다. 근처에서 우리 지뢰 같은게 좀 터져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짐승들은 무슨 수를 써도 들어가지 못할 거고요."

그러자 생존자 그룹쪽의 안색이 대번에 변했다.

할배가 목소리를 떨며 물었다.

"포... 폭탄을 원전에다 터뜨린다고요?"

이런 작전을 할 거라는걸 처음 들은 모양이다.

송중사가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예. 걱정 마십쇼. 저 원전들, 두께만 1미터가 훨씬 넘는 강화 콘크리트로 보호하고 있어요. 비행기가 직격으로 떨어져도 무사하게끔 설계 된 건물들입니다. 지뢰나 크레모어 정도로는 흠집밖에 못 냅니다."

흠집은 난다는 소리네.

생존자 여자들과 할배가 서로 쳐다보며 웅성거린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그런 그들에게 말했다.

"뭔가 쳐들어오지 않으면 폭탄은 터지지 않을겁니다. 향후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조치이니 양해 바랍니다."

할배가 손을 발발 떨며 말했다.

"해... 해야 된다면 해야 되는 거겠지요. 하지만 원전에다가 폭탄을... 바, 박소장님. 괜찮은거지요...?"

박소장은 할배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살짝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예. 폭발시 화력과 파편의 파괴력은 오차범위 내에서 다 계산되었습니다. 우리 원전은 충분히 견딥니다."

"그... 그렇다면 안심이라지만요..."

그렇게 대답하는 할배도 여자들도 전혀 안심되는 얼굴이 아니다.

할배가 말했다.

"전, 전기를 내린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저 전기 울타리도 끊기는거 아닌가요...?"

특임대장 성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끊깁니다."

할배가 낯빛을 흐리며 말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