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9화 (159/187)

"어쩌다보니 이렇게 된거죠. 내가 뭐 노리고 한 것도 아니고."

"아니예요."

성가연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성훈씨는 영웅이에요."

난 웃고말았다.

"또 그소립니까?"

"그럼요. 몇번이든 말할건데요? 불만 있어요?"

참 끈질기네 이 여자도.

대답대신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고 있는데 특임대장 성규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자. 그런 얘기는 둘이 있을 때 하고, 작전중에 단체 보이스챗으로 그런 말은 하지 말자, 가연아."

이번엔 성가연이 웃는다.

방금 전까지 있는대로 화력 쏟아부으면서 살육을 벌이고도 웃을 수 있다니.

확실히 원전은 위기에서 벗어나긴 했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성훈씨. 가연이가 아까 얘기했지만, 치누크가 다시 오려면 몇시간은 걸립니다. 지금 사정으론 저희가 지원을 해드리기도 힘들군요. 거기 상황은 온전히 성훈씨에게 맡기겠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그래요. 해 떨어질 때까지만 버티면 되는거 아닙니까. 그 때 보죠."

쿠쾅, 콰쾅!

괴물곰이 뛰어오는 소리가 확연히 커졌다.

놈들이 마을로 들어왔다.

"슬슬 말 그만해야 될 것 같군요."

특임대장 성규혁이 대답해왔다.

"알겠습니다. 이쪽 상황은 수시로 전달드리겠습니다."

성가연도 한마디 덧붙였다.

"무사히 와야돼요, 나의 영웅 씨."

...돌겠네, 이 여자.

괴물들이 들이닥치고 있는데 농담을 하고있냐.

난 소리내지 않고 웃었다.

쾅, 쿠쾅!

확실히 놈들이 마을에 들어왔다.

꺾어지는 도로라 당장 눈에 보이진 않지만, 저기에 있다.

하지만 날 발견할 수 있을까?

시원한 컵커피에 빨대를 꽂아 빨아먹으며 느긋하게 밖을 내다보는데, 시야에 뭔가 잡혔다.

고개를 돌려 건너편 아파트를 바라봤다.

그냥 평범한, 수십년쯤 된,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 아파트다.

...아무것도 없는데?

뭐였지?

아파트를 잠시 바라봤지만 눈에 띄는건 없었다.

난 갸웃하곤 다시 도로로, 마을 입구로 시선을 옮겼다.

들개, 고양이를 비롯한 여러 큰 짐승들이 쥐떼와 함께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다.

뛰지는 않는다.

대가리를 홱홱 저어가며 사방을 살피는 모양새가 확실히 수색을 하고 있는 태도다.

놈들도 짐승들이니 내 냄새를 맡을 수도 있을텐데.

건물 옥상이라 힘든가?

아니면, 괴물이 되는 바람에 냄새로 추적한다는 특성을 잃어버린건가?

혹은 바람 탓일수도 있고.

이유가 어떻든, 놈들은 현재 내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난 담배를 바닥에 비벼끄곤, 몸을 숙인 채 옥상벽을 따라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여기서 가능한 오래 버텨야 하니 놈들 눈엔 띄지 않는게 좋겠지.

그렇게 걸어가는데, 뭔가가 또다시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난 즉시 걸음을 멈추고 옆을 돌아봤다.

건너편 아파트.

뭐가 움직였는데?

좀비인가?

아니면 먼저 도착한 작은 짐승?

뭐지?

내 시선을 사로잡은건 3층 혹은 4층.

아파트를 잠시 바라보는 사이 짐승들은 벌써 마을 대부분의 길목을 장악해버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난 뭐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는지를 깨달았다.

건너편 아파트 4층.

커튼쳐진 베란다에서 뭐가 움직이고 있다.

사람 그림자다.

아직 밝아서 쉽게 눈에 띄진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저기서 사람이 움직이고 있다.

난 그림자를 잠시 바라봤다.

그리고 혀를 찼다.

"쯧."

좀비 아니다.

진짜 사람이다.

여자, 그리고 아이.

커튼을 조심스럽게 붙잡고 밖을 내다보고 있다.

아이가 뭔가 보채니, 여자가 아이를 붙잡고 사라진다.

그리고 또다른 그림자.

커튼 근처로 가까이 오진 않는데, 셋 중에선 제일 덩치가 커 보인다.

아마도 남자.

...젊은 부부?

"미친."

내가 고래고래 소리 질러댔을 땐 왜 안 기어나오고 거기 있는거냐.

수개월을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은거지?

집에 비축해놓은게 많았나?

아니, 그보다.

난 도로쪽을 힐끗 바라봤다.

짐승들이 몰려들고 있다.

고개를 숙이곤, 그대로 벽에 기대 앉았다.

...못볼 걸 봤다.

난 무릎에 팔을 얹고는 벽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쟤들 저기서 다 죽겠네..."

"네? 뭐라고 말했어요?"

성가연이 대답해왔다.

난 속삭이듯 말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으응. 알겠어요."

그러곤 다른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도 원전 주변 수습하고 폭탄 재설치할 자리 만드느라 바쁘겠지.

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소리에 집중했다.

뭔가가 오면 즉시 반응할 수 있도록.

4층에 있는 사람들, 지금까지 어떻든 잘 살아남았다. 적어도 안 죽는 요령 정도는 있다는 거겠지.

그러면 이번에도 별 일 없을거다.

아마도.

신경쓰지 말자.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두시간이 넘었을 무렵.

하늘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아직 밝다.

하지만 곧 노을이다.

난 하늘을 올려다보며 밖에서, 아래에서 들려오는 짐승들의 소리를 들었다.

놈들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감도 못 잡고있다.

그저 길거리를, 건물과 건물들을 돌아다니며 이따금 짖어댈 뿐이다.

와작, 콰작! 하며 씹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온다.

좀비을 괴물짐승이 잡아먹는 소리겠지.

난 내 허벅지를 내려다봤다.

두 정의 잉그램.

탄약이 없다.

아디다스 백팩 갖고다닐걸 그랬지.

그랬으면 탄약도 좀 챙겨다닐 수 있었을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있는데, 짐승들이 짖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르다.

몇시간째 들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난 몸을 일으켜 밖을 내다봤다.

그리고, 이를 드러내며 한숨을 쉬었다.

건너편 아파트, 4층.

세 가족이 살고있는 집.

베란다 난간과 창살에 쥐들이 매달려 있었다.

들켰다.

크고 작은 사람 그림자 셋이 커튼 속,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어지럽게 움직인다.

그리고 쥐들도 시끄럽게 짖어대고 있다.

아파트 아래로 덩치 큰 짐승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개들, 고양이들, 멧돼지들.

난 거길 바라보다, 천천히 몸을 돌려 벽에 기대어 앉았다.

사람 냄새를 맡은건지 어떻게 찾아낸건지 모르겠는데, 이미 들켰고, 들켰으면 끝난거다.

저런거 내가 알 바 아니지.

...말로 할 뻔했네.

말했으면 아마 또 성가연이 뭐냐고 물었을테고, 난 아마 거짓말로 대답했을거다.

아무 일 없다고.

그래.

아무 일 없는거다.

이이이익! 끼이이익!

으, 아악! 아아악!

짐승이 짖는 소리와, 공포에 질린 여자의 비명소리. 그리고 아이의 울음소리.

점점 커지는 큰 짐승들이 으르렁대는 소리들.

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미 원전 관리할 사람은 구했어.

그러게 내가 저기서 소리지를 때 나오지 그랬냐.

눈치도 없이 그 때 나오지 않았으니까 오늘 이렇게 짐승들한테 잡아먹혀 죽는거야.

아아앙- 으아아앙-

아악! 아아악!

베란다 쇠창살을 아직 짐승들이 못 뚫은 모양이지.

괴물이 되면서 쓸데없이 덩치가 커진 탓이다.

난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머릿속으로 성가연의 목소리가 스쳐지나간다.

-나는 당신이 영웅이라고 생각해요.

닥쳐, 성가연.

난 영웅이 아니야.

으아아앙!

거기 유부녀.

애 우는소리 좀 그치게 못하겠냐.

콰장창!

유리가 깨졌다.

창살이 더 못버틴 모양이지?

아아악!

여자 비명소리.

그럼 잡아 먹히던지.

"...쯧."

난 일어나 옥상 벽을 짓밟곤, 힘껏 뛰었다.

벌어진 쇠창살 틈새로 쥐들이 비집고 들어가려 한다.

공중에서 추락하며, 손을 내밀어, 힘껏 움켜쥐었다.

베란다가 번개처럼 확대된다.

콰직! 콰장창!

벌어진 창살 틈새.

괴물쥐들이 몸을 비집어넣는 틈새로, 나는 정확히 들이꽂혔다.

피와 살점과 박살난 뼈 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려, 촤악 하며 천장과 벽을 물들였다.

"으아악!"

"꺄아악!"

온 몸이 피칠갑되어 천천히 일어서는 내 귓가로 공포가 스며든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떠보니, 부엌에서 남편이 아내와 아이를 껴안고 새파랗게 질린 채 나를 보고있었다.

"...쯧."

난 혀를 차고는 즉시 검을 뽑아들었다.

이이익! 끼이이익!

내가 뚫고 들어오느라 창살이 거의 개박살났다.

틈새는 더욱 벌어져 쥐가 아니라 고양이라도 대가리 들이밀고 들어올 수 있을 정도다.

뒤돌아보니 역시 쥐들이 서로 부대끼며 우르르 들어오려 하고있다.

난 검을 앞으로 휙 던졌다.

슈확!

그림자 전사가 내 손에서, 발에서, 턱 밑 그림자에서 뻗어나와, 검을 움켜쥐며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저 놈들 죽여.

간단히 명령하곤 한마디를 덧붙였다.

짐승들만.

사람들은 놔둬.

내 명령을 들은 그림자 전사가 숙였던 고개를 번뜩 쳐들고는 쥐들에게 들이닥쳤다.

쑤걱! 퍼걱!

검을 베고 찌르는 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몸을 돌려 부엌을 바라봤다.

애를 포함한 세사람 모두 새파랗게 질려서 온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다.

"으, 아아! 아아!"

눈이 마주친 여자가 흠칫하며 비명을 질렀다.

왜 사람을 보고 그렇게 비명을 지르는거야...

피를 뒤집어 써서 그런가?

하도 피를 덮어쓰고 다녔더니 이젠 찝찝하지도 않다.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소리 지르지 말고. 놈들이 듣습니다."

내 목소리를 들은 여자가 파랗게 질린 채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애는 여전히 울고있을 뿐 내 말을 들은 것 같지가 않다.

남편이 겨우 정신 차리고 애 입을 틀어막으며 나를 올려다봤다.

"다, 당신은... 그, 그 미친 놈들중에 하나가 아니군요?"

"아닙니다. 정부에서 왔습니다."

그렇게 대답해주며 뒤를 힐끗 돌아봤다.

베란다쪽은 그림자전사에 의해 거의 정리되었다.

놈들이 날고기어도 아무런 어그로 없이 칼을 쑤셔대는 그림자 전사를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쥐 같은거야 커져봤자 쥐지.

"저, 정부... 그, 그럼 요전에 저 밑에서 소리지르던 사람이 바로..."

난 고개를 끄덕이며 남편에게 시선을 돌렸다.

"예. 접니다. 그때 왜 안 나왔습니까? 한참 소리질렀는데."

그때 나왔으면 이렇게 귀찮은 짓을 안해도 됐을텐데. 하여튼 눈치없는 사람들은 진짜.

남편이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

"그, 그, 미친 놈들 중에 하난줄 알았어요. 그 미친 놈들 저 밖에서 사람 잡아먹고 다니잖습니까. 우, 우리를 꾀어내려고 속임수를 쓴다고 생각했어요."

...뭐라고?

반박할 꺼리가 하도 많아서 순간 말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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