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송중사."
"대장님."
송중사가 특임대장 성규혁의 말을 가로막고는 말했다.
"전 앞으로 작전 안하겠습니다. 못하겠습니다."
목소리가 제법 떨린다.
진짜 울었나본데.
박소장하고 겨우 그 며칠 사이에 정이 그렇게나 든 건가. 틱틱거리고 해도 정이 많은 사람이었나, 송중사는?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래. 네가 그런 생각인걸 나도 앞으론 감안하겠다. 그리고 울지 마라, 새끼야. 사내놈이."
손을 얹는 소리.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네 잘못 아니다. 애초에 저렇게 죽겠다고 하는 사람을 어떻게 누가 막을 수 있냐. 너무 자책하지 마라."
아까 으르렁댄걸 보면 화낼 작정이었던 모양인데.
지금 하는 말은 또 다르다.
송중사 상태가 많이 안좋은가보다.
"왜, 왜 저렇게, 박소장님이."
진짜 정이 들었나본데.
늘 붙어다니고 하더니만.
원전에 도착했다.
난 혀를 차고는, 박살나 누워버린 철조망을 돌개바람으로 짓밟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전기를 아직 올리지 않았으니 다행이지.
관리건물 쪽으로 돌개바람을 몰아가보니 성가연과 특임대원들이 시체들을 들어나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환호를 지르던 사람들인데.
성가연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내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온다.
나도 끄덕여주곤, 곧장 관리건물로 들어갔다.
지하실 앞에 특임대장 성규혁과 송중사가 서 있다.
말없이 소리없이 눈물만 주륵주륵 흘리고 있는 송중사의 어깨에 특임대장 성규혁이 손을 얹고 있었다.
"성훈씨, 왔습니까. 고생했습니다."
"예."
그들에게 다가가 지하실을 내려다봤다.
피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그래.
목을 썰어봐서 알지.
세네사람쯤 머리와 목을 썰어버리면 몸에 있는 피가 울컥거리며 쏟아져 나온다.
저 정도로 웅덩이지는 거야 당연하다.
그런 내 눈에, 뭔가가 띄었다.
손바닥만한 다이어리였다.
"울지 마라, 송중사. 눈물 닦고, 가서 전기 올릴 준비해."
특임대장 성규혁이 송중사의 뺨을 토닥이며 그렇게 말했다. 난 그런 성규혁을 돌아봤다.
"일단 저기 쓰러져 있는 철조망부터 세워야 될겁니다. 오다 보니까 제법 넘어져 있더라고요."
특임대장 성규혁이 미처 생각치 못했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지금 대원들 보내겠습니다. 폭파팀. 한사람 위에서 경계하고 나머지 내려와."
그러며 내게 고개를 끄덕여 온다.
나도 끄덕여주곤, 지하실로 들어갔다.
기둥 옆.
일부러 놔둔건지, 날라와서 떨어진건지 알 수 없다.
묘하게 눈에 띄지 않는, 기둥 옆 그림자 속에 놓여있는 다이어리를 나는 집어들었다.
다이어리를 펼쳐보려는데 특임대장 성규혁이 내게 말했다.
"성훈씨. 우린 제어실로 가보겠습니다. 우리 대원들이 철조망 정리해놓고 나면 바로 전기 올릴겁니다. 알겠지, 송중사. 슬픈건 알겠는데 임무는 잊지 마라."
송중사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간 밤낮으로 붙어지내며 친했던 사람이 갑자기 자살하는 바람에 충격이 컸나보다.
혹은 가까웠던 지인의 죽음이 그의 자살로 다시금 떠오른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런 시기니까.
난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전기 올리고 바로 갑니까?"
"가야죠. 송중사는 당분간 여기 있어야 되고. 알지?"
송중사는 끄덕거릴 뿐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확실해 보인다.
뭔가 트라우마가 있는거다.
그의 표정에 떠오른 오래된 상처를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가기 전에, 특임대장님. 내가 구해 온 사람들 있지요. 일가족."
"아, 예. 아까 성훈씨가 데려오신 분들 말이죠."
"그 남편하고 이야기 좀 해봐요."
"남편요?"
난 끄덕이곤 말했다.
"이상한 말을 하더군요. 이 모든게 다 미국이 세균병기를 터뜨려서 일어난 일이라나. 그걸 라디오에서 들었대요."
특임대장 성규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바라본다.
"무슨 말입니까? 라디오? 세균병기요?"
"그냥 같잖은 음모론입니다.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아무튼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라디오 말미에 항상 이런 말을 했다더군요. 물은 생명입니다 였나?"
특임대장 성규혁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이번엔 송중사도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본다.
"...물은 생명입니다...?"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관련 있을 것 같지요? 그 놈들하고."
특임대장 성규혁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간다.
그렇게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송중사를 한 번 바라보곤 내게 말했다.
"남편이라고 하셨죠. 제가 직접 얘기해보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관련이 없다고 하면 오히려 이상하지.
물은 생명입니다 따위의 공익광고 캠페인같은 소릴 이런 시기에 누가 지껄이겠냐고.
끄덕여주니 특임대장 성규혁이 송중사를 데리고 계단으로 걸어갔다.
피웅덩이가 고여있는 컴컴한 지하실.
난 다이어리를 들고 지하실을 나와 식당으로 들어갔다.
폭탄을 터뜨려댄 탓인지 테이블과 의자에 먼지가 수북하다.
창문을 열어 환기시키고는 의자를 하나 당겨앉아 다이어리를 내려다봤다.
특임대원들이 철조망을 수습하고 전기를 올릴 때까지, 그리고 특임대장이 남편을 취조할 때까지 시간이 있다.
그 시간동안 난 할 일이 없다.
그런 내 손엔 다이어리가 있다.
누구건지는 명확하다.
겉면에 낙서처럼 휘갈겨놓은건 틀림없이 박소장의 필체다.
겉면을 넘기니 달력이 나온다.
누구 생일, 무슨 기념일, 누구 애 백일이니 원전 행사니 하는게 가득한 달력을 휙휙 넘기니 박소장의 일기가 나왔다.
일기를 매일 썼던 사람은 아니네.
한 달에 두세번쯤.
생각날 때마다, 아니면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소일거리 삼아서 자기 얘기로 페이지를 채우는 취미가 있었던, 박소장은 그런 사람이었다.
딸이 어느새 중학생이 되어서 감개무량하다는 내용, 아내와 사소한걸로 다퉈서 기분이 안좋다는 등, 일상적인 이야기 이외에도 자작시나 영화 리뷰 같은것도 군데군데 써놨다.
종말 이전에 이 사람은 이렇게,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 만한 내용이 다이어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건 별로 중요하지가 않아.
나는 페이지를 휙휙 넘겼다.
그리고, 내가 찾던 날짜를 발견했다.
5월 27일.
종말이 시작된 날.
박상은 한울원전 소장은 그 날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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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7일.
새로 생긴 부대찌개집에 가서 먹고싶다고 해서 먹고 오라고 직원들을 내보냈는데 돌아오질 않는다.
연락해도 받지 않는다.
아내가 딸과 함께 원전으로 왔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다. 이웃집에 팔십 된 노인이 자기가 애지중지 키우던 개를 산채로 뜯어먹는걸 봤다니 믿기 힘들다.
112에 신고를 했는데 아무도 받지 않는다.
119도 응답하는 사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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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고개를 들어 식당 창문 너머 지하실쪽을 바라봤다.
저기 있던 시체들 중에 어린 여자애랑 남자 여자가 있었다고 했었지. 아마 여자랑 여자애는 마누라랑 딸인 모양이지?
그럼 남자는 누구지?
페이지를 넘기니, TV와 폰으로 세상에 종말이 찾아왔음을 인지하고 당황하며 두려워하는 심정이 가득하다.
우리 마트 건물에도 여자가 굶어죽어 있었지.
두려워 문 밖에 나가지도 못한 채 그렇게.
박소장 일가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종말 이후 원전에 남아있던 몇몇 직원들, 그리고 외부에서 살려달라고 찾아 온 사람들이 공사중이던 터에서 시멘트 따위들을 가져와 철조망을 세우고 했던 이야기가 이어졌다.
와중에 한 단락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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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조망을 세운다고 이 모든 것들에서 안전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한가지 희망적인 변화는 이런 비극 속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더이상 자살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손발을 바삐 움직이는 것 만으로도,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사람은 희망을 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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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한 박소장이 이 때는 희망을 말하고 있다.
뭐가 달라진거지?
페이지를 넘기며 철조망이 세워지는 이야기와 매뉴얼을 작성하기 시작한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희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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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게 없다.
먹을걸 구하러 나간 사람도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찾겠다고 나간 사람도 소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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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 페이지.
날짜가 많이 지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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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뭐든지 먹을 수 있다.
뭐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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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먹었는지 예상은 된다.
난 들고있던 다이어리를 잠시 내려놓고 창 밖을 내다봤다.
특임대원들이 철조망을 세우고 돌과 흙을 받친 뒤 물에 갠 시멘트를 들이붓고 있었다.
서래마을, 그리고 마트건물 식구들.
수현이, 예은이, 소은이, 그리고 정은서.
박소장이 겪었던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씁쓸한 기분으로 나는 다이어리를 다시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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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8일.
딸이 더이상 먹지 않는다.
먹은것도 없는데 다 토해낸다.
내 얼굴이 보기 싫단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6월 20일.
딸이 자살했다.
묻을 데가 없다.
지하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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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실에 이후로는 아무것도 씌어있지 않다.
종이가 몹시 구불구불 구겨져있다.
젖었다 마른것 같은데.
심하게 울었던거군.
이후로 아내가 매일 화내고, 원전의 사람들이 줄어들어 몇명 남지 않게 되는 과정이 며칠 간격으로 짧게 나왔다.
몇 페이지를 넘기니 눈에 띄는 문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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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지하실에서 말했다.
그런데 딸이 아니란다.
나한텐 아들이 없어.
점점 미쳐가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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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도 없다.
시기상 대충 6월 말 혹은 7월 초 같긴 한데 모르겠다.
나는 페이지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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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보이지?
나는 아들이 없어.
그렇게 생각하려 해도, 지금 이 순간에도 태훈이는 내 앞에 서 있다.
나를 보라고 애원하고 있다.
아니야.
너는 진짜가 아니야.
원래 태어났어야 되는데 아내가 낙태했다니, 거짓말이다.
너는 교통사고로 사산됐어.
마누라 입원한 것까지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그 때 사고 수습하느라 보험사에 경찰서에 얼마나 큰 일이었는데.
시끄럽다.
거짓말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환청에 이어 환각까지 보이기 시작한건가.
여전히 날짜는 없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지하실에서 계속 이상한 소리가 들려 내려가보니 태훈이 말대로다.
딸이 살아있다.
이불에 감아서 묶어놨는데, 분명히 움직인다.
그런데 태훈이는 묶은걸 풀지 말라고 한다.
왜?
너 또 거짓말하지.
너는 진짜가 아니야.
내 딸이 진짜야.
그것 봐 아빠. 내 말 맞잖아.
풀지 말라니까.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뭐지?
박소장이 직접 쓴건가?
아니, 필체가 다른데.
어린애가 쓴 것처럼 글자가 구불구불하고 서투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왜 나 무시해?
나 여기 있어.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미친.
난 입술을 구기며 페이지를 넘겼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내 딸이 내 딸이 아니라고?
남의 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