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7화 (167/187)

그걸 어떻게 믿으라는거냐.

게다가 내 부하직원이 아빠라니.

도대체 믿을 소리를 해야 믿지.

시끄럽다!

시끄럽다고!

닥쳐!

벌써 일주일째다.

못 믿을 소리를 귀에서 계속 떠들어대니 일주일간 잠도 못 자고 죽겠다.

제발 그만해라.

진짜야 아빠.

내가 아빠 아들이야.

그 여자애는 아빠 딸 아니야.

기억 안 나?

15년 전에 엄마랑 싸웠잖아.

그래서 가출한적 있었지?

그때 엄마가 만나서 하소연 늘어놨던 사람이 누구게?

누구게? 누구게? 누구게?

누구게? 누구게? 누구게?

누구게? 누구게? 누구게?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내 일도 아닌데 기분이 참담해진다.

난 이마를 짚고는 페이지를 넘겼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아내와 그 놈을 지하실에 가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게 마지막 내용이었다.

백지뿐인 남은 페이지들을 넘겨보다 다이어리를 덮어버렸다.

못 볼 걸 봐버렸네.

그나마 우리 중에 박소장을 제일 생각하는 사람이 송중사인데, 이거 보여줘야 되는건가.

박소장한테 별 감정 없던 나도 읽고나서 기분 개좆같은데 송중사가 이걸 읽으면 어떤 심정일지.

"...쯧."

난 혀를 차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박소장이 환청과 환각에 시달린걸 우리 중에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이어리에 환청과 환각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원인이 뭔지 그냥 정신병이 도진건지 어떤건지 알려주는 부분이 있었다면 참고할 만 했겠지만, 그런거 없다.

박소장.

종말 이후 매일매일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환청과 환각까지 보이고 들리게 된 상황에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았을지 짐작도 안 된다.

괜히 이딴건 읽어갖고 씨발, 기분 좆같네 진짜.

명복을 빕니다, 박소장.

"성훈씨. 이제 전기 올립니다. 혹시 밖에 나간건 아니죠? 어딥니까?"

특임대장 성규혁의 목소리가 이어폰으로 들려왔다.

"식당요. 대원들은 다 돌아왔습니까?"

난 대답해주며 식당 안쪽의 쓰레기통을 향해 걸었다.

"네. 다들 귀환했습니다. 생존자들도 모두 확인했고요. 지금 올립니다."

"네."

끄덕이곤, 쓰레기통에 다이어리를 처박아 넣었다.

버려, 이런거.

노을조차 떨어져 어두워진 한밤중, 산과 들과 강은 그림자보다도 짙은 암흑이 되어 발아래를 물들였다.

타타타타!

두 개의 프로펠러가 내지르는 우렁찬 타격음이 치누크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다.

나와 특임대원들은 대형 헬기가 날개짓하는 요란 속에서 고요를 지키며 각자 눈을 감고 짧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시선이 느껴진다.

고개를 들어보니 특임대장 성규혁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톡톡, 하고 귀를 두툼하게 덮은 헤드셋을 두드린다.

난 헤드셋의 스위치를 올려 무전통신을 켰다.

"성훈씨. 컨디션은 어떻습니까?"

지직거리는 라디오에서 기계음이 뒤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곤 말했다.

"좋습니다. 힘내십쇼. 이번 작전이 마지막입니다. 이것만 끝내면 성훈씨 가족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내 가족.

오랜 시간을 연락 받지도, 연락해 오지도 않았다.

살아있을거라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

죽은 시체라도, 혹여 변해버렸다면 변해버린 모습이라도 나는 내 눈으로 봐야되겠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 남편하고는 이야기 해봤습니까?"

특임대장 성규혁이 고개를 저었다.

"해봤습니다만 별다른 정보는 얻지 못했습니다. 라디오 방송을 어디서 하는지, 방송하는 사람이 상수도원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몇명인지, 무장상태는 어떤지 같은 정보가 필요했습니다만, 그 사람은 그냥 청취자였어요. 아는게 없더군요."

그냥 청취자라...

"음모론에 심취해 있는 인간이죠. 원전에 남겨두고 떠나도 괜찮은지 모르겠군요."

내가 구해온거긴 하다만.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송중사가 서래마을 본부랑 하루 세번씩 연락을 주고받기로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거나 연락이 두절될 시 특임대원들이 출동할 겁니다. 무장도 기본적인 방어를 위한 개인화기 몇개만 남겨놓고 다 치누크에 실었고요."

그가 팔짱을 끼더니 페트병을 꺼내 뚜껑을 땄다.

프로펠러가 열심히 공기를 때려대느라 치누크 내부는 끝없이 덜컹대고 있었다.

결국 특임대장 성규혁은 페트병 뚜껑을 놓쳐버리곤 욕을 내뱉았다.

그 모양새를 보면서 피식 웃고있는 와중, 물을 들이킨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생존자 중에는 무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세사람 밖에 안 됩니다. 나머진 대부분 여자들이라 큰 문제는 없을겁니다. 철조망에 전기도 켜놨으니 어지간히 덩치 있는 짐승이라도 함부로 들이대지 못할거고요."

"대부분은 우리가 다 터뜨려 죽여놓기도 했고 말이죠."

화려한 폭발쇼였지.

작전 당시 폭약을 터뜨려댄 광경이 떠오른듯 특임대원들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성가연이 웃으며 말했다.

"애인들 기다릴텐데 못 만나서 어떡해요?"

어?

난 갸웃하고는 그녀를 바라봤다.

"상수도원에 바로 가는겁니까? 서래마을에 안 들리고?"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바로 갑니다. 상수도원 위치는 이미 파악했고, 때마침 밤이기도 하고, 치누크에는 무기와 폭약이 가득 실려있고. 작전하기 좋은 타이밍이죠."

그건 생각 못했네.

진짜 속전속결인걸.

그래서 컨디션 괜찮냐고 물은거구만.

수현이, 예은이, 은서.

보고싶긴 한데, 그래.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물 갖고 장난치는 놈들 두고 하루이틀 여유부릴 이유는 없지.

난 끄덕이곤 물었다.

"박소장 일가 화장은 잘 했습니까?"

성가연이 말했다.

"글쎄요. 아직 잘 타고있을거예요. 유해는 송중사가 거둬서 바다에 뿌리기로 했어요."

아까운, 안타까운 사람이었다.

원전도 혼자 수개월을 버티며 관리해 왔을 만큼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마지막에 그렇게 가버리다니.

"애인중에 누가 제일 보고싶어요?"

난 성가연을 바라봤다.

특임대원들도 모두가 나를 보고있다.

눈에 맺혀있는게 참 짖궃다.

거기다 묘하게 웃고있는게 그냥.

난 황당해져서 한 번 웃어버리곤 물었다.

"치누크로 작전지까지 어떻게 갑니까? 오토바이 구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오토바이도 구하긴 해야겠죠. 지금은 상수도원 근처에서 레펠강하로 내린 다음 침투합니다."

침투한다고?

난 성가연과 특임대장 성규혁을 번갈아 바라봤다.

"무장상태가 어떤지도 모르고 몇명이나 있는지도 모른다면서요? 바로 침투합니까?"

정찰 같은것도 없이 바로 들이댄다고?

특임대장 성규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특임대원들을 돌아봤다.

"이동하는 동안 한시간 휴식하고 브리핑 할 생각이었는데 그냥 지금 하죠. 서래마을 본부에선 상수도원 문제가 빨리 해결되길 바라고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침투와 장악이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지금 단톡에 상수도원 청사진 올렸다. 다들 건물구조 확인하고, 작전 내용 잘 숙지해. 일단 들어가면 HVT 확보하고 작전지 상주인원들 모두 구속한다. 저항하는 자는 즉시 사살해. 이건 교섭작전도 구조작전도 아니다. 침투하고, 장악한다. 알겠나?"

HVT?

그게 뭔데.

성가연이 물었다.

"HVT는 누굽니까?"

평소에 오빠라고 반말해대더니 브리핑중엔 또 존댓말이다. 직책에 대해선 확실히 존중해주고 있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상수도원 관리자. 그리고 라디오 방송 진행자. 이렇게 두 명이다. 우선순위는 HVT 확보가 아니라 장악이다. 눈에 보이는 사람은 먼저 모조리 구속해. 케이블타이 다들 확실히 챙겨. 저항이 있을수 있으니 고려하고, 군에서 훈련했던 대로만 하면 된다."

상수도원 청사진을 보고있던 특임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가연이 끄덕이다 내 표정을 보곤 미소지었다.

"HIGH VALUE TARGET. 주요목표를 말하는 거예요."

한국말로 해라.

젠장.

난 입꼬리를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있었어. 설명 안 해줘도 됩니다."

알게 뭐야 그딴거.

성가연이 그런 나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난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고는 특임대장 성규혁에게 물었다.

"대통령은 뭐라고 합니까?"

민정우 성격에 사람들 막 죽이는걸 찬성했을 것 같진 않은데.

물론, 나는 좃같은 놈들 얼마나 죽든지 신경 안 쓴다만.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별다른 말씀은 없었습니다. 원전 때와 마찬가지로, 현장에 나가있는 대원들의 판단이 가장 정확할 것이니 믿고 맡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작전은 온전히 우리에게 맡긴다?"

다 죽여버려도 상관 없겠네 그러면.

특임대장 성규혁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말했다.

"성훈씨. 이번 작전에서 성훈씨는 지원팀이 되어주셨으면 합니다만, 괜찮겠습니까?"

"지원팀이요?"

특임대장 성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안으로 침투해 들어갈 겁니다. 그 과정에서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또 그런 짐승들이 발생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인간들은 우리가 대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대한 짐승들은, 솔직히 말씀드려 성훈씨에게 맡기고 싶습니다."

약간 아쉬운걸.

하지만 특임대장 성규혁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괴물이 갑자기 튀어나왔을 때 근거리에서 또 원거리에서 즉살해버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 뿐이다.

난 팔짱을 끼고는 별로 마음에 안 든다는 제스쳐를 보였다. 그랬더니 특임대장 성규혁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괴물 전담 지원팀입니다. 맡아주시겠습니까?"

난 팔짱을 끼고는 특임대원들을 돌아봤다.

좀비, 괴물짐승 상관 없이 뭐가 들이닥치든 용맹하게 싸운 전사들.

죽게 두긴 아깝다.

난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사람도 괴물같은 짓 하면 괴물이라고 쳐도 되겠죠."

특임대장 성규혁이 웃었다.

성가연과 특임대원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었다.

성가연이 말했다.

"성훈씨가 칼부림하는거 한 번 보여주면 분노 조절 장애 있는 사람도 분노 조절 잘해가 될걸요."

두목 바퀴벌레 팔 썰고 눈에 칼 박아넣었던 기억이 나네. 그거 본 놈들 죄다 쫄아서 얼어붙었었지.

그때 조종실에 있던 김대위가 말했다.

"머리가 있는 놈들이면 우리 특임대원들한테, 특히 성훈씨한테 개길 생각은 못 할겁니다. 그 거대 괴물한테 크레모어 쑤셔넣고 터뜨리는거 옥상에서 봤는데, 와. 진짜 깜짝 놀랐다니까요. 대통령도 성훈씨가 괴물 처치한거 듣고는 놀라서 껄껄 웃더라고요. 대단한 사람이라고요."

화려한 피분수 쇼이긴 했어.

김대위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우리편이라서 정말 다행이다 라고 대통령이 말하는데, 확실히 공감되더라고요."

특임대장 성규혁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가 미소짓고는 말했다.

"성훈씨의 적이 된다는게 어떤건지는 놈들도 곧 깨닫게 되겠죠."

"저항하면 말이에요."

성가연이 특임대장 성규혁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항한다면. 저항하는지를 잘 보고 있어야 되겠지. 그런 면에서 작전명 꽤 괜찮게 지은 것 같습니다."

작전명?

난 못들었는데.

성가연이 말했다.

"이번 작전은 매눈이예요. 주위사방 잘 살피라고 비서실장이 지었어요."

작전명 매눈.

난 피식 웃고는 손에 든 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상수도원 청사진.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냥 문마다 다 열어제끼고 잠겨있으면 박살내고 들어가버리면 되지 뭐.

"목적지까지 10분 전. 반복한다. 목적지까지 10분 전."

잡음이 섞인 라디오스런 김대위의 목소리가 헤드셋으로 들려왔다.

김대위의 말에 특임대장 성규혁이 대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들었지. 안전벨트 풀어. 장비 챙겨."

앉아있던 시트의 벨트를 풀고 일어난 대원들이 치누크 뒤쪽 화물칸에서 개인화기와 탄약, 폭약을 방탄조끼의 유틸리티팩에 넣고 챙겼다.

케이블타이같이 생긴 군용수갑도 너댓개씩 허리에 채우는 모양새를 보고있자니 성가연이 내게 말했다.

"성훈씨는 뭐 챙길거 없어요? 탄약은 충분해요?"

이미 치누크에 앉아있는 동안 잉그램과 대물저격총 탄창은 다 채워놨다.

한울원전에서 겪은게 있어 여분의 탄약을 좀 챙기고 싶지만 등 다리 허리에 무장이 가득해서 어디 채워넣을데가 없다.

"난 괜찮아요."

성가연이 내게 미소짓고는 부착형 폭탄 C-4를 방탄조끼의 윗쪽 유틸리티팩에 넣는다. 확실히 원전 작전 때와는 작전에 임하는 무장수준이 다르다.

원전을 확보하고 정상가동하는게 목표였던 원전작전때는 가벼운 개인화기 정도만 들고 들어간 반면, 지금은 방탄조끼와 헬멧, 야시경을 비롯해 각종 개인장비를 모조리 챙기는 모습이다.

보조병기 글록19를 허벅지에, 주무기로 소음기 장착한 MP5를 띠를 걸어 목에 메고, 방탄모까지 착용하니 확실히 특수부대의 위엄이 눈에 보인다.

무장만 봐도 확실히 실내의 근접전투를 고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방탄모를 들어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던 성가연이 날 돌아봤다.

"왜 그렇게 봐요?"

난 웃었다.

"아뇨. 새삼 느끼는데 특수부대 정말 멋지네요."

야간침투를 고려한 흑복에 검은 방탄조끼에 검은 병기와 야시경 장착된 방탄모까지 착용한 모습은 현대판 흑기사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성가연이 웃더니 말했다.

"그럼 성훈씨도 입어요. 흑복이랑 방탄복 아직 남아있을건데."

"아뇨. 전 됐습니다."

난 허리의 검에 손을 얹었다.

"난 이걸로 충분해요."

그러자 성가연이 끄덕이고는 상자를 하나 열었다.

여분의 군복이 여럿 들어있는 상자였다.

그녀는 허벅지에서 군용 대검을 꺼내 군복의 어깨부분 패치를 잘라내고는 그걸 들고 내게 다가왔다.

"그럼 이거라도 어깨에 붙이자구요."

미군 치누크와 미군 장비들이다. 당연히 여분의 군복도 미군 군복이고, 그녀가 잘라낸건 미국 성조기가 프린팅 되어있는 패치였다.

성가연이 패치를 한 번 보더니 웃었다.

"우리 군부대도 언제 한 번 레이드 다녀와야 되겠어요. 태극기 놔두고 성조기 붙이고 다니자니 참... 자요."

클립을 패치에 꿰어 내 티셔츠 어깨부분을 당겨 꽂는다. 그걸로도 약간 부족한지 공구상자에서 호치키스를 꺼내 아예 네모난 패치 사방을 집어버린다.

"뭐죠 이건?"

미국 국기를 내 어깨에 왜 붙이는데?

성가연이 말했다.

"피아식별 해야죠. 여기 부분이 야시경 끼면 빛나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야시경 가뜩이나 잘 안보이는데 이거 없으면 안돼요. 더구나 당신은 혼자 떨어질 일이 있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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