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3화 (173/187)

그 말을 들은 순간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할배 살아있습니까?"

"예. 일단은요."

살아있으면 됐다. 살려두고 고문하면 되니까.

살짝 다행을 느끼며 나는 말했다.

"그럼 이 미친새끼들 어디에 틀어박혀 있는지 모른다는 거군요."

성가연이 대신 대답해왔다.

"네. 우리나라 어디에 있는진 아직 알 수 없어요. 하지만 다른걸 찾아냈어요."

여전히 들려오는 폭발음 사이에 돌개바람의 엔진음을 뒤섞으며 달리는 사이 어느새 뚝섬한강공원을 지나쳤다.

"다른거?"

"네. 다른-"

그 때, 먼 앞.

밤하늘이 붉게 피어올랐다.

빛나는 붉은 구름이 공중으로 치솟아 오른다.

저건...

저기 있는건 아마도 정수장.

건물들과 아파트 유리창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박살나며 내게로 다가오는게 보인다.

"씹!"

난 즉시 돌개바람의 브레이크를 움켜쥐었다.

다음 순간, 굉음을 실은 충격파가 나를 덮쳤다.

순간적으로 돌개바람이 번쩍 들린다.

고막이 터질 것같다.

묵직한 음파가 온 몸을 뒤흔든다.

눈앞이 캄캄해진다.

"컥!"

충격이 온 몸으로 올라온다.

바닥을 구르고 있다는걸 뒤늦게 깨달았다.

쿠콰콰콰!

엎어진 돌개바람이 도로를 갉으며 빙글빙글 돌아간다.

쾅!

둔한 충격이 어깨로, 옆구리로, 허벅지로 올라온다.

그리고, 바닥에 충돌했다.

눈 앞이 번뜩거린다.

"하아, 후우."

몇 번 눈을 감았다 뜨며 숨을 들이켰다.

죽겠네 진짜.

어?

몸이 안 움직인다.

의식은 있다.

생각도 한다.

숨도 쉰다.

하지만 몸은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팔을 들어올려 간신히 땅을 짚었다.

무릎을 당겨 꿇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옆을 보니 커다란 트레일러 트럭.

헤드라이트와 범퍼가 거의 아작나다시피 움푹 들어가있다.

내가 들이받아서 저렇게 된 건가본데.

저렇게 들이받고도 용케 살아있네.

"하아, 하아."

숨을 헐떡이며 무릎을 올려 발을 딛었다.

몸을 가눌수가 없다.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다 트레일러 트럭에 손을 짚고 심호흡했다.

귀가 허전한데.

아.

이어폰.

바닥에 떨어져 있었네.

고장 안 났나?

비틀거리며 주워 귀에 꽂으니 성가연의 목소리가 곧장 들려왔다.

"성훈씨! 무슨 일이예요? 엄청난 소리가 났는데, 괜찮아요?"

이어폰 성능 좋은데?

난 어질한 머리를 붙잡고 숨을 고르며 성가연에게 대답했다.

"난 괜찮아요. 씨발것, 진짜 오지게 터뜨리네 개새끼들이."

빡친다 진짜.

욕을 지껄이며 몸을 돌려 멀리 바라봤다.

붉은 빛을 내뿜는 연기.

화염을 실은 먹구름이 하늘로 뭉게뭉게 올라가고 있었다.

저거 틀림없이 정수장이다.

안 가봐도 뻔하다.

입 안이 꺼끌꺼끌하다.

온갖 먼지바람에 폭발이 만든 매연을 실컷 들이마셔서 그런가.

입에 든 걸 모아 뱉아내는데, 성가연이 말했다.

"무사해서 다행이예요. 다치진 않았어요?"

"괜찮다고. 정수장은 아무래도 안 되겠어. 미친놈들이 이미-"

콰쾅!

멀리서 또다시 폭음이 들려왔다.

먼 거리.

그러나 충분히 몸을 뒤흔드는 굉음.

먼지와 매연을 싣고 불어닥치는 폭풍.

...또다.

난 이를 악물었다.

"다 터뜨릴 작정이야. 이미 다 터뜨렸거나."

이 광신도 새끼들 싸그리 모아서 모가지 썰어버리고 싶네.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난 머리를 흔들고는 멀리 엎어져 있는 돌개바람으로 걸어갔다.

"일단 돌아갑시다. 저 미친놈들이 우리 마트건물이나 서래마을쪽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정수장은 어차피 하나만 있어도 되잖아."

참 멀리도 굴러갔네.

끙, 하며 돌개바람을 일으키니 차체에서 하얀 연기가 파스슷 피어오른다.

유지장갑에 의해 복원되고 있다.

엎어지며 박살난 부분들이.

희미하게 빛나며 복원되는걸 바라보다 돌개바람에 올라탔다.

그때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성훈씨. 정수장보다..."

한숨소리.

뭐지?

특임대장 성규혁이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일단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서래마을에 일이 생겼습니다."

목소리가 침통하다.

난 멀리 우리 마트건물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천천히 액셀을 당겼다.

으르르릉-

"무슨일이요?"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한테 천사교에 대해 처음 제보해왔던 그 생존자들 말입니다."

고속으로 달리진 못하겠다.

아직 어지럽다.

제기랄.

"예. 대통령 방송 듣고 도망쳐서 찾아왔다고 했던가. 그 사람들요?"

"네. 그들이 지금 대통령을 인질로 잡고 있습니다."

눈썹이 꿈틀거린다.

"뭐라고요?"

특임대장 성규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특임대원들이 있어서 금방 해결될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일이 심각합니다. 지금 놈들은 부탄가스 한 박스를 들고 대통령과 함께 모텔방 안에서 농성하고 있습니다. 터뜨리겠다고 협박하고 있어요."

난 눈을 껌뻑이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사방에서 검은 연기가 올라오고 있다.

여전히 폭음도 들려오고 있다.

서울 어딘가는 아직도 터지고 있다.

난 멀리 우리 마트건물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수현이, 예은이, 은서, 이름모를 여자. 그리고 훈이 아재를 비롯한 남자들. 할매. 그리고 여자들.

못본지 한참 된 기분이다.

하지만 지금은...

못 가겠는데.

난 깊게 숨을 들이키곤 천천히 말했다.

"대통령을 인질로 잡았다. 원하는게 있는거겠죠. 놈들이 원하는게 뭡니까?"

그렇게 말하며 나는 고개를 돌려 강 건너편을 바라봤다.

이 길로 달려가다 다리를 건너면 서래마을.

서래마을로 가봐야...

눈 앞이 번뜩거린다.

액셀을 최대로 당길 수가 없다.

돌겠네.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성훈씨하고 통화를 연결시켜 달라는게 놈들의 요구사항입니다."

뭐라고?

"...나하고? 놈들이 나를 어떻게 알죠?"

"알 수 없습니다. 우리 특임대원들이 지금도 대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만, 성훈씨하고 통화하기 전엔 그 어떤 협상도 없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군요. 모텔 구조상 작은 유리창 말고는 내부를 들여다볼 수도 없는데, 차양을 닫아놔서 밖에서도 관측이 불가능합니다."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놈들과 통화 가능하겠습니까? 들어보니 폭발에 휘말린 것 같은데 상태는 괜찮습니까?"

난 다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번 심호흡을 해봐도 어지러운게 나아지진 않는다.

뒤늦게 온 몸에 뻐근한게 올라온다.

그정도로 받혔으면 보통 사람같으면 죽었을거다.

그만한 충격을 입고도 아직 움직인다는게 나 스스로도 신기할 정도다.

공간발톱을 발동했다면 무사할 수 있었을텐데.

늘 이동기와 공격보조로만 써와서 위기상황이 닥쳤을 때 대응할 수 없었다.

앞으론 유념해야 되겠는걸.

"성훈씨? 괜찮으십니까?"

난 돌개바람을 달려나가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괜찮아요. 놈들이 나를 어떻게 아는건지 나도 궁금하네. 나하고 얘기하고 싶어한다고? 그래요. 전화해 봅시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성훈씨. 정황상 놈들은 천사교와 한패거리인 것 같습니다."

천사교에 대해 제보해 온 놈들이 이 상황에 대통령을 인질로 잡았으면 한패거리가 아닐 수가 없지.

놈들의 정체를 진작에 파악하고 감시하거나 추궁하지 않았거나 혹은 못했던 점에 대해서 욕하는건 일단 나중일이다.

무슨 정보부 요원이 서래마을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간첩을 색출해야 된다는 생각 자체를 아마 아무도 못했을거다.

종말에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을 상대로 이런 짓을 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놈들이 한패거리라면, 아마도 알아낼 수 있는 여러가지 정보가 있을겁니다. 놈들의 아지트를 알아내는게 중요합니다. 최우선으로 대통령을 구출하는 것, 그리고 정보. 이 두가지를 고려하고 협상에 임해주십쇼."

그리고 날 어떻게 아느냐까지.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사고당해서 정신도 없는데 인질범이랑 협상까지 해야되고 참 나.

그때 성가연이 말했다.

"아, 저. 있잖아요. 지금 이 자들 태블릿이랑 폰이랑 우편물 같은거 다 수거해서 보고있는데, 이상한게 있는데요?"

"이상한거?"

"네. 오빠, 이거 봐. 이 아저씨. 어디서 본 적 있는데 누구지?"

특임대장 성규혁이 음, 하더니 말했다.

"가운데 있는건 일본 총리 마츠모토 소우이치로다. 옆에 있는 사람들은 누군지 모르겠군."

일본 총리?

특임대장 성규혁이 아, 하더니 말했다.

"묵주를 들고있는데? 옆에 있는 남자 여자들 전원 종교인들이다. 총리니까 여러 분야 사람들이랑 사진찍을 일이 많았던 거겠지."

성가연이 말했다.

"응. 그런데 이 사진이 왜 여기에 있냐구?"

일본 총리가 종교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천사교가 장악한 정수장에 있었다.

우연이라고 보기 너무 힘들다.

난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일본 총리 맞아요? 마츠 뭐시기 그거."

"확실합니다. 마츠모토 소우이치로 일본 총리요."

성가연이 물었다.

"아무리 봐도 이상해서 말씀드려 봤어요. 이 사진, 이번 사태랑 관련 있는 걸까요?"

없다고 하면 오히려 놀라버릴걸.

특임대장 성규혁이 나직이 말했다.

"성훈씨. 천사교라는거, 제대로 파헤쳐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지금 서래마을 쪽에서 계속 연락이 오고있는데, 더 지체할 수 없어요. 지금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가아아앙-

제기랄, 온 몸이 뻑적지근해.

뒤늦게 올라오는구만.

넘어질 것 같아서 돌개바람도 시원하게 내달리질 못하겠다.

난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그래요."

"성훈씨. 놈들의 아지트.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 무엇보다도, 대통령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내가 무슨 협상가냐고.

테러리스트랑 무슨 대화를 어떻게 해야되는지 내가 알게 뭐야.

"이야기해보죠."

"네. 지금 연결합니다."

특임대장 성규혁의 말이 끝나자 마자 후욱, 하고 숨소리가 들려왔다.

낯선 숨소리.

난 돌개바람에 앉아 눈을 깊게 깜빡이곤 천천히 떴다.

"...나하고 얘기하고 싶다 했다고?"

후.

숨소리가 멎었다.

웃음소리가 낮게 깔렸다.

굵고 허스키한 중년 남자의 목소리.

"어이, 한성훈이. 왜 그랬냐 너."

읍, 으읍! 하며 숨막힌 소리가 너머로 들려온다.

대통령 같은데.

입에 수건 같은걸 감아서 묶어놓은 모양이다.

그런데, 왜 그랬냐 라고?

"누구냐 너?"

누구지?

짐작되는 바는 너무 많은데.

깝치던 문신충들 양아치새끼들 학교다닐때 오지게 패고다녔는데, 그새끼들중에 하나가 나한테 원한을 갖고 있다든가?

그런데 이 새끼는 천사교잖아.

나이도 많고.

중년 남자가 말했다.

"우리는 잘 살고 있었다. 네 놈이 우리 대가리를 칼로 썰어놓고 눈을 조지기 전까진 말이야. 니가 그딴 짓을 해놓는 바람에 우리끼리 싸움이 나서 결국 거기서 쫓겨나듯 도망친거야."

그는 으르렁대듯 말을 이었다.

"잘 살고 있었어. 가게들 털고, 여자들 따먹으면서, 이따금 병신새끼들이 좀비들한테 물리면 그것도 대가리 깨 가면서 야, 씨발. 이게 사는거구나. 통쾌하게 남자답게 사는게 이런거구나. 그렇게 생각했었다고."

...알겠다.

이 씹새끼 하는 말 들으니 감이 온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안 나온다.

놈이 말했다.

"사무실에 앉아서, 나이 사십이 넘도록 상사한테 조인트 까이면서, 스트레스 풀자고 후배들이랑 마사지 좀 받으러 다녔다고 씨발년한테 이혼 당해 가면서 아득바득 살아왔다고. 좃같은 씨발 세상아. 그러다 마침내 사람답게 좀 산다 했더만 한성훈이 이 씨발새끼야. 니가 다 조져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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