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5화 (175/187)

"성훈씨! 대통... 대통령께서."

말을 잇질 못한다.

말로 해먹고 살았던, 정치판에서 뼈가 굵은 비서실장이.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비서실장님."

비서실장 안준규가 내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앙다물고 있는 모양새가 금방이라도 소리를 지를 듯한, 혹은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이었다.

비서실장 안준규가 말했다.

"성훈씨도 수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 이런 사태가... 이 모든게 내, 나의 불찰입니다. 내가 좀 더, 더 확실하게 사람들을 감별했어야 했는데. 내가... 내가."

대통령의 죽음이 얼마나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지가 그의 얼굴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난 비서실장 안준규의 어깨를 짚어주곤 말했다.

"비서실장님은 잘못하지 않았어요. 이 모든게 천사교가 원흉입니다. 비서실장님. 지금 특임대장이 천사교 잔당을 데리고 여기로 오고 있습니다."

비서실장 안준규의 얼굴이 살짝 변했다.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약속하지요. 천사교에 대해 반드시 그 자가 알고있는 모든걸 알아낼 겁니다."

난 끄덕이고는 모텔을 올려다봤다.

검은 연기를 실은 화염이 창 밖으로 혀를 낼름거리고 있다.

그리고 그 안으로, 이제서야 소방호스에서 물이 뿜어나와 들어간다.

하지만 불은 쉽사리 꺼질 것 같지 않았다.

난 힘주어 말했다.

"내가 선봉을 맡죠. 어디 있는지만 알아내 주시면, 내가 가서 다 죽여 없애버리겠습니다."

천사교 잔당.

정수장에 있던 할배.

지금 내가 그 할배를 보면 곧장 온 몸을 칼로 난도질 해버릴 것 같다.

죽여버리라고 하면 얼마든지.

하지만 심신을 괴롭게 해서 정보를 얻어내는건 할 줄 모른다.

그건 비서실장같은 정치가나 군대에서 뼈가 굵은 특임대장이 나보다 더 잘 할수 있을거다.

비서실장 안준규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성훈씨에게 너무 많은 짐을 맡기는 것같아 마음이 좋지가 않습니다만, 시기가 시기인지라 그저 부탁드릴 수밖에 없군요."

"부탁 안 해도 됩니다. 그냥 어딘지만 내게 알려주세요."

비서실장 안준규의 얼굴과 옷. 이제 보니 여기저기 그을음이 묻어있다. 모텔이 터지면서 안으로 들어갈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가 그을음 가득한 얼굴에 다소 사나운 미소를 띄며 말했다.

"그러죠. ...이봐. 지금 대원들 다 어디있나?"

바리케이트를 지키던 특임대원이 다가왔다.

"좀비웨이브가 발생하고 있으니 준비하라고 성훈씨가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대원들 대부분이 중화기를 옥상 건물에 설치하고 있습니다."

비서실장 안준규가 나를 돌아보고는 미소지었다.

"노래방이 좋겠군. 나름대로 방음이 되니까. 저기 노래방이 있다. 일 끝나고 나면 대원들 시켜서 노래방에 잠금장치 달아둬."

"잠금장치 말입니까."

비서실장 안준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 노래방을 우리... 수용소로 쓰도록 하지."

확실히 고문할 작정이다.

사나워진 얼굴에 제대로 드러나 있다.

비서실장 안준규.

정보를 알아내는데는 문제가 없어보이는데.

비서실장 안준규가 내게 끄덕이고는 사나운 미소 띈 얼굴을 한 채 노래방이 있다는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대통령 시신은 아직 수습 못한다.

그에게서 건장한 남자 만큼의 전투력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고문실을 만들고, 고문해, 정보를 얻어내는 것.

거침없이 노래방을 향해 걸어가는 비서실장 안준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느꼈다.

이 사람은 대통령 민정우가 아니다.

전혀 다른 인종이다.

서래마을의 지도력, 꽤나 색깔이 많이...

변해버릴 수도 있겠는데.

하지만 그런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

난 소방호스로 모텔에 물을 끼얹고 있는 남자들과, 그걸 보는 군중들을 잠시 바라봤다.

그리고 몸을 돌려 바리케이트로 올라갔다.

다리 건너 한참 올라가면 우리 식구들이 있는 마트 건물.

지금 와서 돌아갈 수 없다.

스텟이 회복되지 않았고, 한강 전체가 불어나듯 시커멓게 번져나가고 있다.

여기 있으면서 이동스텟을 회복시키고, 돌아간다.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타타타타-

멀리서 헬기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사교 잔당을 움켜쥔 특임대원들이 서래마을에 내릴 것이다.

폰을 꺼냈다.

멀리 한강을 바라보며 수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오빠아! 어디야? 지금 어디야?"

수현이 목소리.

오랜만에 듣는 것같다.

그립네.

목소리를 들으니 보고싶어진다.

난 바리케이트에 서서 멀리 한강을, 실시간으로 시커멓게 번져나가고 있는 한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들 괜찮아? 다친덴 없어?"

"응! 우린 괜찮아. 갑자기 차가 터지고 저 옆동네는 주유소가 터졌대. 지금 사방에 검은 연기가 막 올라오고 있어. 오빠 어디야? 지금 어디야?"

돌아가고 싶네, 씨발.

난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지금 서래마을이야."

"서래마을? 서래마을이래! 응. 오빠 언제 와? 지금 오면 안 돼?"

돌개바람 달려서 돌아갈까.

쏴아아.

물줄기가 모텔을 때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물방울이 부슬비처럼 내려 얼굴에, 머리칼에 달라붙는다.

사람들 소리.

외치는, 다급한, 서두르는 소리들이 뒤에서 들려온다.

마트 건물은 수현이가 중심이 되어, 일꾼을 자처한 사람들과 같이 사방을 보강해놨다.

방어하기에 적합한 높은 건물이라 대비만 잘 해두면 농성하는데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여긴 다르다.

있는 거라곤 바리케이트 뿐이다.

특임대원들과 생존자 남자들의 수가 꽤 괜찮게 있다곤 해도 사방이 트여있다 시피 되어있는데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사각도 지나치게 많아서 좀비웨이브가 사방에서 몰려올 시 막아내기가 힘들다.

나 한사람 있고 없고가 다를 만큼.

"남자들은 뭐 하고있어?"

"...지금 다들 옥상에서 총 붙잡고 있어. 은서 언니도 같이. 나도 갈려고 했는데 나랑 예은이는 그냥 밑에 있으래."

수현이의 목소리는 약간 침울해져 있었다.

난 미소지으며 말했다.

"훈이 아저씨하고 준혁씨 같은 사람들이 지뢰하고 주위에 다 깔아놨지?"

"응. 주위 건물이랑 주택 같은데다 휘발유 가득 넣은 말통 갖다놓고 크레모어? 그거 무선으로 조종하는거 같이 넣어놨대. 뭐가 오면 주위 건물들 다 터뜨릴거래."

...오오.

나름대로 대비는 잘 하고 있었던 모양이네. 좀비웨이브를 한 번 겪어봤던 사람들이라 그런가.

우리쪽 사람들이 비록 인원수는 적어도 더 잘 버틸 수 있다.

마트 건물의 방어력은 서래마을에 비하면 월등한 수준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좀비웨이브를 버틸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오빠 못 와? 언제 와?"

물론 돌아가고 싶다.

그런데 이동 스텟이 모두 회복되어도 한 번에 돌아갈 수 있을까.

난 검자루에 손을 얹어놓고 멀리 시선을 던졌다. 좌우로 길게 이어져있는 도로.

가로등 불빛 환한 도로가 점차 검게 물들어가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규모 좀비웨이브가 몰아닥칠 거라는 것이 눈에 뻔히 보인다.

"금방 돌아갈거야. 가능한 빨리 돌아갈게."

"으응... 알았어..."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싶네.

아무리 마트 건물 방비가 튼튼해도 이래갖고는...

아, 그렇지.

"수현아 잠깐만."

전화를 끊고 성가연에게 전화했다.

"네, 성훈씨. 무슨 일 생겼어요?"

"아뇨. 지금 오고있습니까?"

묻지 않아도 들린다.

전화기 속에서, 또 먼 하늘에서.

타타타타-

한 대의 헬기가 내는 소음이 가까이서 또 멀리서 미묘하게 엇갈리며 들려 온다.

"네. 천사교 집사 데리고 가는 중이에요. 이 노인, 집사였대요. 지금까지 알아낸건 겨우 그거 하나예요. 우리 오빠가 패가면서 심문했는데도. 사이비 종교에 너무 심취한 인간이라 아예 말이 안 통해요."

그도 그럴 것이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봤던 90년대 후반, 세기말의 사이비종교 광신도들.

자기 재산 다 갖다 바치면서 넋나간 얼굴로 괴상한 춤을 추며 소리를 질러댔던, 인간인가 싶을 정도의 광기.

천사교 교도들은 거기에 결코 모자라지 않다.

오히려 더 광적일 정도가 아닐까 싶다.

자살폭탄테러를 태연히 저지를 정도이니 몇 대 얻어맞은 걸론 놈의 입을 열 수 없을 것이다.

"아까 비서실장님한테 전화 왔었는데 무슨 수용소? 지금 만들고 있다면서요?"

"아아, 네."

난 뒤를 힐끗 돌아봤다.

불끄고 구경하는 사람들 뿐, 특임대는 아직 안 보인다.

"건물 옥상에 중화기 설치하는거 끝나고 나면 바로 노래방을 수용소로 만들거라고 하더군요."

성가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대통령님 추모할 시간도 없이 곧바로... 참, 진짜."

성가연 뿐만이 아닐거다.

나도 대통령의 죽음이 아쉬움으로 느껴지는 마당이니 서래마을 인원들은 오죽할까.

하지만 지금은 할 일이 있다.

난 밤하늘 아래 밤하늘처럼 새카맣게 물들고 있는 길과 거리를 바라봤다.

얼마 남지 않았어.

놈들이 모이고 있다.

"그래서 말인데, 가연씨. 나도 일단 서래마을 방어에 힘을 보탤 생각인데 우리쪽 사람들 어떻게 되는가도 좀 알아야 되겠거든요. 수현이 단톡방에 초대 가능합니까? 실시간으로 상황 좀 알고싶어서."

"아, 네. 물론이죠. 오빠한테 지금 얘기할게요. 잠깐만요."

전화가 끊겼다.

간단한 신호음과 함께 단톡방 음성채팅이 열렸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성훈씨. 지금 수현씨 초대했습니다. 들립니까?"

내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수현이가 놀라며 말했다.

"와! 안녕하세요! 다들 단톡방으로 대화하고 계셨구나. 안녕하세요오! 다들 무사하신가요?"

밝게 인사할 상황은 아닌데 수현이는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특임대원들을 향해 말을 걸어왔다.

성가연이 웃더니 말했다.

"네, 안녕하세요. 성훈씨가 수현씨랑 다른 애인분들 걱정을 많이 하나봐요. 꼭 좀 초대해 달라고 하셔서."

아니, 웃으면서 말할 상황이 아니라고.

수현이가 맑게 웃더니 말했다.

"우와, 지금 소리가 엄청난데 무슨 소리예요?"

"헬기에 타고있어서 그렇습니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수현씨. 그쪽에 큰 피해가 없었다는건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다친 사람이 없어서 다행입니다. 성훈씨도 그 쪽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어하고 신경 많이 쓰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 상황이 수현씨도 아시다시피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가능한 빨리 성훈씨가 돌아갈 수 있도록 저희도 노력하겠습니다. 조금만 참아주세요."

수현이가 코먹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에... 오빠, 있어?"

"어."

"빨리 와야돼? 알았지?"

"알았어.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얘기해."

"으응."

타타타타!

헬기소리가 가까워진다.

거의 다 왔다.

헬기소리가 좀비웨이브의 어그로를 실컷 끌어당길 것 같긴 한데, 온 사방에서 증식하고 있는 실정이니 굳이 어그로 끌 필요도 없이 여기도 곧 좀비웨이브의 사정권에 들어간다.

멀리, 빛을 깜빡여 자기 존재감을 알리며 날아오는 치누크.

난 치누크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대원들한테는 특임대장이 잠깐 부재할 거라고 말은 해뒀습니다. 천사교 잔당한테 이것저것 많이 알아내길 바랍니다."

그러자 성가연이 앗 하며 말했다.

"성훈씨. 그거 기밀..."

기밀?

난 코웃음쳤다.

"지금 상황에 기밀 같은게 뭐 있습니까. 어차피 살아남은 사람도 몇 안 되는 마당에."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음. 폭탄테러를 자행한데다 대통령까지 죽인 놈들이니 늦든 빠르든 어차피 알려질 일이야. 사람들이 핸드폰 쓰는 것까지 막을 순 없으니 아직 돌아가는 커뮤니티가 있다면, 아니면 유튜브에라도 누가 올릴거고 그러면 외국 커뮤니티에서도 다들 알게 되겠지. 외국에 생존자 그룹이 있다면."

"민정우 대통령 돌아가셨어요?!"

수현이가 그 말을 듣곤 크게 놀라버렸다.

난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어. 특임대장이 말했지만, 여기 상황이 많이 안좋다. 수현아. 너 블루투스 이어폰 갖고있어?"

"아, 으응."

"그거 끼고, 거기 상황 계속 알려줄래?"

"응, 알았어."

수현이가 걱정이 많이 되는듯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천사교라고요? 처음 듣는데 도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죠? 왜?"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수현이는 말을 이었다.

"왜 지금? 이렇게 힘든 시기에도 다들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왜... 왜 지금 이런 짓을 하는걸까요?"

나쁘지 않은 질문이다.

물론 나는 답을 갖고있지 않다.

답을 갖고 있는 놈은 곧 고문당할 예정이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죠. 우리가 알아낸 거, 그 쪽 그룹에도 전부 전달하겠습니다. 성훈씨를 통해서든 단톡을 통해서든. 그러니 수현씨, 연락 끊지 말고 저희와 계속 소통해주십시오."

"네에, 알겠습니다."

헬기가 왔다.

육중하고 두터운 군용헬기가 체육공원쪽으로 서서히 날아들어 착륙을 위해 고도를 낮춘다.

땅에 내려선 치누크의 문이 열리고, 특임대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머리를 숙이고 서둘러 걸어온다.

하지만 치누크 프로펠러는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엔진의 힘을 받은 프로펠러가 굉음을 내며 회전하고 있다.

왜지?

천사교 할배의 목덜미를 붙잡고 바리케이트로 달려오는 특임대원들.

난 그들을 바라보며 크게 말했다.

"김대위하고 박대위는 왜 안 내립니까?"

특임대장 성규혁이 바리케이트 위에 서있는 나를 올려다보며 큰 소리로 대답해왔다.

"대위님들은 치누크 몰아서 좀비웨이브를 몰이할거라고 합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데.

헬기로 좀비 웨이브 끌고 어디론가로 가버리는 묘기는 예전에도 겪어봤었지.

"그래요. 그러면 우리쪽에도 좀 부탁합니다!"

"네. 이미 그쪽으로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김대위와 박대위.

나쁘지 않아.

치누크가 좀비 웨이브를 죄다 몰아서 어디론가로, 인천 너머 바다 괜찮겠네.

아무튼 여기 놈들 죄다 쓸어다 치워준다면 그게 제일 좋겠지.

특임대원들이 도착했다.

바리케이트가 열린다.

그리고, 치누크는 다시 한 번 하늘로 날아올랐다.

두터운 군용 헬기 너머, 한강.

그리고 강 건너, 용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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