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3화 (183/187)

장갑이라면, 다시 기존 장갑의 업그레이드이겠군.

처음엔 유지장갑.

그리고, 그림자 전사 스킬, 잔영을 실체화 시켜주는 업그레이드, 달가림 장갑.

이게 아마 마지막 장갑 업그레이드일 거다.

나는 혼불 장갑에 손을 갖다댔다.

스화홧!

손에 낀 달가림 장갑에 하얀 빛이 물결치며 맴돌았다.

그리고, 메세지창이 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가온 장갑을 획득했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가온 장갑?

장갑 색깔은 확실히 바뀌었다.

어두운 보랏빛에서, 짙은 갈색, 혹은 흑갈색으로.

그래서, 뭔데?

봐도 모르겠다.

난 손에 낀 장갑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이것도 스킬과 연계되는건가 싶어 스킬창도 열어봤다.

번갈아 봐도 모르겠다.

"하... 설명 좀 제발 좀."

머리를 잠깐 쥐어뜯고는, 상태창의 전문화를 바라봤다.

혼석집행자.

혼석...집행자.

눈을 가늘게 뜨고는, 저장고를 열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혼석 - 29422]

[돌개바람] [] [] [] []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혼석, 2만 9천 422개.

"......"

엄청 모았네.

나는 혼석에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혼석 하나가 내 손에 들어왔다.

"...어."

만질 수 없었는데?

그동안엔 손을 대고 뭘 하고 해도 그냥 숫자 카운트였을 뿐, 만지거나 꺼낼 수 없었다.

지금 내 손에는 밝은 보랏빛이 은은히 감도는, 크리스탈을 깎아놓은 듯한 예쁜 돌 하나가 들려있다.

두께와 길이는 대략 새끼손가락 정도.

참... 예쁘게 생겼네.

이게 혼석이었구나.

가온장갑은 혼석을 만질 수 있게 해주는 거였어.

혼석을 들고있는 가온장갑도 은은하게 빛나고 있다.

환하지 않게, 마치 밤하늘 별빛처럼, 반짝이 붙여놓은 듯이 깜빡이며 빛나고 있다.

그런데, 그래서?

이걸 뭐 어쩌라는건데?

혼석을 쥐고 잠깐 보다가 도저히 감이 안 잡혀서 고개를 저어버렸다.

"몰라 씨발."

혼석을 도로 저장고에 갖다대니 파스스 사라지며 한개가 채워진다.

어쨋든, 새로운 전문화를 얻었다.

마지막 전문화.

스킬, 집중.

나는 지능에 스텟을 모두 부어 15를 만들고는 천천히 주먹쥐었다.

15분.

15분간 무제한.

...이번에야 말로, 죽여 없애주겠다.

나는 숨을 들이키며 허벅지에 꽂혀있는 잉그램의 빈 탄창을 꺼내들었다.

지금 이 때 탄창을 채워놔야 돼.

갖고 있는걸 전부 쏟아부어주지.

죽을 때까지 베고, 찌르고, 쏘고, 또 쏴서...

챠라라라라라-

"...어?"

손에 쥔 잉그램의 탄창.

저절로 채워지고 있다.

탄약이.

은은하게 보랏빛으로 빛나는 잉그램의 탄약.

그대로 굳은 채 탄창을 내려다보다, 반대쪽 허벅지의 빈 탄창을 꺼내들었다.

챠라라라라라-

채워진다.

탄창이.

탄약이.

자동으로.

"...인벤토리."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혼석 - 29362]

[돌개바람] [] [] [] []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줄어들었다.

29422에서 29362.

정확히 60개가 줄어들었다.

탄창에 들어간 탄약의 갯수만큼.

더플백 한귀퉁이에서 하나 남은 잉그램 탄약상자를 꺼내들었다.

챠르륵.

가볍다.

용산에 남아있던 미국인 가정집에서 루팅했던 잉그램 두 정과 탄약.

여러 임무를 거쳐오며 챙기지 못했었는데, 얼마 남지 않았다.

평택 미군부대에서 받은 그 많은 탄약 안에서도 잉그램에 들어가는 .45ACP탄은 찾을 수 없었다.

지금 있는 탄약을 다 쓰면 잉그램은 버려야 되는 무기였다.

몰려있는 놈들을 1,2초만에 제압할 수 있는, 탄약을 광역적으로 한 순간에 뿌려대는 이 유용한 무기를.

이만큼 탄을 난사해버릴 수 있는 무기는 미니건 정도 뿐일거다.

...미니건이라.

...나쁘지 않은데.

문제는 혼석을 어마무시하게 소모해버릴 거라는 점이지만.

일단 이건 천천히 고민해보자.

나는 혼석으로 채워진 탄창을 잉그램에 대고 밀어넣었다.

철컥.

흐윽, 크윽, 흐윽.

박대위의 숨소리가 갈수록 거칠어진다.

이를 악물고 헬기를 운전하고 있는지 억눌린 숨소리가 헤드셋으로 들려온다.

나는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한 손에 잉그램을 쥔 채 밖을 내다봤다.

구조헬기는 한강을 지나 용산을 너머, 우리 마트 건물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저고도로 서행하며.

이 어두운 새벽에 부상당한 몸으로 헬기를 낮게 날고 있다는건 실로 묘기에 가까운 일이다.

목숨 내놓고 날고있는거다.

박대위는 그런 티도 내지 않고, 그저 이를 악물고 헬기를 운전해 날아갔다.

아무래도 안 되겠는걸.

이 사람, 이 이상은 무리다.

게다가 박쥐괴물이 우리 마트건물 근처에 있다.

난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박대위님."

박대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려 했던 모양인지 큭, 하며 신음을 얕게 흘릴 뿐이었다.

이미 말할 기운도 없다.

몸통 뼈가 여기저기 박살난 상태인데 진통제 한 번 맞았다고 멀쩡해질 리 없지.

악화될 뿐이다.

난 말했다.

"우리 마트 건물에 도착하면, 옥상에 내려요."

"흐윽, 크윽. 조, 좀비 웨이브. 흐윽, 흐윽."

목소리를 떨고있다.

난 고개를 저었다.

"옥상에 일단 내립시다. 나머지는 나한테 맡겨요."

"하, 하지만. 큭, 흐윽. 조, 좀비 웨이브. 허, 호, 혼자. 흐윽."

나 혼자 처리할 수 있다.

라는 말은 지금 상황에 하기 어렵다.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혼자 그게 되냐? 고 물을게 뻔하니까.

난 열려있는 문 밖을 내다봤다.

박쥐 특유의 찢어지는 괴성은 들려오지 않는다.

좀비웨이브의 진동하는 으르렁 뿐이다.

난 말했다.

"수현이가 말하길 박쥐괴물이 저기에 있다고 했어. 일단 놈을 처리 안하면 어차피 좀비웨이브 몰이도 못해요. 치누크때랑 마찬가지로 추락하게 될 겁니다."

사실은 여기서 그냥 뛰어내려 좀비웨이브와 박쥐괴물에게 들이닥쳐도 된다.

하지만, 자기 목숨 걸고 헬기를 띄운 박대위를 여기서 죽게 하고싶지 않다.

박대위는 숨을 잠깐 헐떡이다 신음하듯 말했다.

"오, 옥상. 흐윽. 크윽."

설득된걸까.

그는 더 말하지 않았고, 나도 더 말하지 않았다.

콰콰콰콰콰!

공기를 거세게 두드리는 프로펠러를 들으며, 우리는 마트 건물을 향해 그렇게 날았다.

중형마트가 아래로 지나간다.

바퀴벌레가 태어난, 썩은 음식물에 몰려들듯 뜯어먹고 자란 바로 그 중형 마트.

그리고 인라인 동호회가 사용했던 신문사.

철물점과 미용실.

위에서 내려다 봐도 눈에 훤히 들어온다.

저 모든 곳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새삼 감회가 새롭다.

좀비 하나 하나를 보며 두려워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저 아래, 중형마트와 신문사와 철물점과 미용실과 단독주택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엄청난 물량의 좀비웨이브.

봐도 두렵지가 않아.

거리는 수현이가 설명해주었던 그대로였다.

주유소를 비롯한 건물 여기저기가 허물어지고 불타오르며 검은 매연을 하늘로 뿜어올리고 있다.

그리고 좀비웨이브는 불나방처럼 홀리듯 그 안으로 들어간다.

불이 붙은 놈들이 온 몸을 비틀며 괴성을 질러댄다.

그 괴성에 이끌린 놈들이 더욱 어그로를 먹고 다시 들어간다.

그 짓을 반복한다.

지성이 있는 생물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들을 저 놈들은 하고있다.

벌레와 동급이다.

우루루룽!

콰콰콰콰콰!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와 좀비웨이브의 으르렁 속에 희미하게 섞여있는 소리.

이에에에엑-

있다.

워낙 소리가 중구난방이라 어디에 있는지 짚을 순 없다만, 분명히 근처에 있다.

괴물박쥐.

놈은 말 그대로 괴물이다.

사람을 잡아먹고 성장하는 괴물이다.

마침 여기엔 엄청난 양의 좀비웨이브가 장악하고 있으니 놈에겐 뷔페나 다름 없을거다.

근처 어딘가에서 좀비웨이브를 집어삼키고 있는거겠지.

그래.

잡아먹어라.

잡아먹고 또 잡아먹어서 내 앞에 나타나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잉그램을 꾸욱 움켜쥐었다.

콰콰콰콰!

헬기가 마트건물 옥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마트건물 옥상은 엉망진창이었다.

가꾸던 텃밭은 헤집어져 있고, 여기저기 피와 살점이 널려있다.

중화기 몇 개는 고정대가 망가져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는데, 수현이 말대로 한 차례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는게 눈에 보인다.

저기 묻어있는 피.

아마도 한태의 피겠지.

난 헤드셋 한쪽을 들어 귀에 꽂은 이어폰을 누르며 말했다.

"수현아. 수현아, 들려?"

"으응, 오빠! 헬기소리 들리는데 서래마을에서 오셨어?"

"아니, 나야."

바람에 머리가 휘날린다.

슬슬 머리 자를 때가 됐는걸.

"오빠야?! 오빠 왔어?!"

서서히 가까워지는 옥상을 내려다보며 난 미소지었다.

"어. 헬기 타고왔어."

말하고 얼마 안 되어 옥상 출입구가 벌컥 열리더니 사람들이 우르르 뛰쳐나왔다.

난 앉아있던 시트에서 안전벨트를 풀고는, 활짝 열어둔 승객칸 문틀을 붙잡고 섰다.

수현이가 보인다.

예은이, 소은이.

은서.

훈이 아재.

준혁씨와 태영씨와 할매와 여자들.

모두가 옥상 출입문으로 우르르 뛰어나오고 있었다.

나를 본 사람들의 얼굴이 환해진다.

눈물을 그렁거리며, 두 손을 들어 활짝 웃는다.

"오빠!"

"성훈씨!"

"서, 선생님! 선생님!"

두 팔을 저으며 나를 향해 환호하는 마트건물 사람들.

난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얼마 나가있지 않았는데도 꽤 오랜만에 보는 것같다.

어려웠던 시기, 약했던 시기를 같이 처음부터 헤쳐 왔던 사람들이라 그런가.

그래.

돌아왔구나.

콰콰콰콰콰!

헬기가 천천히 옥상에 내려앉았다.

아직 프로펠러가 사납게 회전하고 있음에도 사람들이 내게 몰려들었다.

"오빠! 성훈이 오빠아!"

수현이가 왈칵 안겨든다.

예은이와 은서도 다가와 내 팔과 손을 붙잡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훈이 아재와 준혁씨도 울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천사교 자폭테러에 이은 좀비웨이브, 괴물박쥐의 습격 때문에 다들 고생을 이만저만 한 게 아닌 얼굴이다.

"오빠, 오빠아!"

나를 붙잡고 울려고 하는 수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말했다.

"이제 괜찮아. 이제 괜찮을 겁니다."

기이이잉-

헬기 프로펠러가 느려지고 있었다.

훈이 아재가 말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