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7화 (187/187)

"다른 부대들 말이야. 얼마나 남았을까?"

"모르지. 일단 접촉해봐야지."

특임대장 성규혁이 한숨을 내쉬더니 탄창을 베레타에 집어넣었다.

철컥.

"연락할 수 있었던 기간이 너무 짧았어. 적어도 며칠 더 있었다면 충분히 정보교류를 할 수 있었을텐데. 서로 어떻게 지내나 물어보고 앞으로 서로 협조해서 잘 해봅시다 정도밖에 얘기가 안 됐는데 테러가 터졌어."

"연락이 안 돼요? 수기사하고?"

내 질문에 특임대장 성규혁이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됩니다. 지금은요. 좀비웨이브가 그 지역 변전소를 건드렸는지 전기가 다 나갔다더군요. 그래서 꼭 필요한 일 아니면 연락 안 합니다. 무전기 배터리 아낀다고요."

"수기사쪽에 전기가 끊겼다고요?"

"네."

특임대장 성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부대가 보유하고 있는 비상발전기로 어떻게 버티고 있다고는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지금 전차 연료도 아슬아슬한 상황이라. 서둘러 가봐야죠."

그래서 흑표전차를 최대로 보유한 20사단이 아니라 수기사로 먼저 가는 거였구만.

창 밖 멀리서 산이 다가오고 있다.

산과 산, 그리고 그 너머에 또 산.

산 너머 산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숲이 우거진 봉우리와 봉우리가 서로 어깨동무하며 느긋하게 앉아 다가온다.

허리께에 너울대는 아침안개와 더불어 참 운치있는 풍경이긴 한데, 부대 상황은 풍경과는 퍽 다르겠지.

난 고개를 끄덕이곤 물었다.

"유튜브에 대통령 담화 동영상 그거, 다시 올리시죠? 누가 보고 또 연락 할텐데요."

"안 됩니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고개를 저었다.

난 갸웃하곤 물었다.

"왜요? 동영상 없습니까?"

성가연이 내게 대답해왔다.

"네. 그 때 모텔 터졌을 때 대통령과 함께..."

"아아... 그럼 안준규 비서실장이라도 동영상 찍어서 올리지 그래요?"

"그것도 이젠 안 돼요."

난 고개를 갸웃하곤 그녀를 바라봤다.

"왜 안돼죠?"

성가연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성훈씨. 유튜브, 이제 안 돼요. 구글도요. 네이버도 다음도, 다른 외국 포털도 전부 다 끝났어요."

"...어? 진짭니까?"

특임대장 성규혁을 돌아보니 내게 고개를 끄덕여 온다.

성가연이 말했다.

"네. 성훈씨네 마트 건물에서 우리 박대위님 치료받을 때 있죠. 아마 다음 날이었나, 네이버가 먼저 닫혔어요. 그 다음엔 다음, 그리고 얼마 안 지나서 구글, 야후같은 외국 포털도 순차적으로 먹통이 됐구요."

테러의 여파다.

천사교의 폭탄테러와 뒤이은 좀비웨이브가 국가와 도시 인프라를 아작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당장 수기사만 해도 전기가 나가버렸고.

"...하..."

난 다시 이마를 짚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물었다.

"전화는요?"

"전화는 아직 됩니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나 갈지 모릅니다. 지금이라도 끊어질 수 있다고 보는게 좋습니다."

쯧.

전화까지 먹통되면 골때리는데.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수기사에 무전기가 충분히 있을겁니다. 전차에도 자체적인 무전설비가 있고 말이죠. 어쨋든 합류만 하면 나아질 겁니다."

무전기.

이러니 저러니 해도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이렇게 급히 출동하는 거였군.

군용 무전기라.

그래, 그거라도 있어야지.

난 고개를 들고 특임대장 성규혁을 바라봤다.

"무전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미군들은 미국으로 잘 갔답니까?"

특임대장 성규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소식은 모릅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글쎄요. 한창 바다 위에서 항해하고 있지 않을까 싶군요. 태평양 쪽으로 빠졌다가 하와이 경유해서 다이렉트로 가는게 빠를테니."

"무전으로 연락하고 그러진 않나보군요?"

특임대장 성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요전에 그쪽 부대장하고 이야기를 좀 해봤는데, 일단 미국으로 가기만 하면 위성이나 통신시설 같은건 손쉽게 확보할 수 있을걸로 예상하고 있더군요. 통신망 확보하고 나면 연락 한다고 하길래 그러라고 했죠."

"그래요?"

"네. 미국 뭐, 아시다시피 워낙 총기도 많고 괴짜도 많아서. 심심해서 취미로 좀비 아포칼립스 벙커 같은걸 만드는 사람도 많다잖습니까. 땅덩어리도 넓고. 제법 살아있을 겁니다."

음.

결국 사람이 제일 중요하지.

종말을 이겨내려면 충분한 생존자와 화력, 그 두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그런데 그 쪽에서 통신망을 확보한다 해도 우리 쪽 인프라가 작살이 나버렸으니, 제대로 연락이 될지 의문이네.

턱에 손을 얹고 그런 생각을 하고있는데, 갑자기 궁금해졌다.

심심해서 취미로 좀비 아포칼립스 벙커를 만드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졸라 궁금하네.

한 번 만나보고 싶다.

어쨋든 특임대장 성규혁의 말이 맞다.

미국, 워낙 땅덩어리가 넓어서 좀비웨이브가 일어나도 한국처럼 궤멸적인 타격은 입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말대로 생존자가 상당히 있을거다.

그러면 희망은 있는거지.

난 몸을 일으켜 구조헬기의 좌석 시트에 기대앉았다.

모든 전문화 최고레벨을 찍은 지금, 도시 하나 정도는 나 혼자서도 문제없이 처리 가능하다.

그런 나와, 우리나라의 기계화보병사단과, 미국 본토의 협력이라면 세계를 정상화 하는 것도 불가능이 아니다.

대통령 선거라든가 총사령관 임명이라든가 하는 귀찮은 일들이 남아있긴 한데, 그건 뭐, 니들이 알아서 하고.

난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그래요. 많이 살아있으면 좋죠."

살아있으면.

내 가족도.

...살아있을까.

창 밖을 내다봤다.

어느새 산등성이를 날아올라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곧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이다.

"성훈씨."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사단 접선하고 연료도 확보하고 나면 국토수복과 더불어 항구를 확보할 겁니다. 그 때 성훈씨도 고향에 돌아가실 수 있겠죠."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성가연이 물었다.

"항구 확보하고 나면 제주도에 어떻게 가요? 누가 배 운전할 수 있나요? 항구 근처에서 사람 찾아야 되나?"

그때 조종석의 박대위가 대답했다.

"아니, 헬기로 가시죠."

난 조종석을 돌아봤다.

박대위는 태연하게,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제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연료만 확보하면 완도나 목포 쪽에서 날아갈 수 있을겁니다. 날씨만 좋다면 말입니다."

잠시간 아무도 말을 못했다.

박대위는 서래마을에서도 고급인력이다.

제주도에 나를 데려다주면 언제 돌아오게 될지 모른다.

성가연이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특임대장 성규혁도 미소지었다.

"고향 가실 때 특임대원 필요하십니까?"

특임대원들.

국토수복을 한다고 했다.

한반도에서 할 일이 엄청나게 많을거다.

난 고개를 저었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그래요. 언제든 말씀하세요."

느껴진다.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게.

내가 헬기를, 이들을 필요로 하는 만큼, 이들도 나를 필요로 하고있다.

그렇다면.

사양할 이유는 없겠지.

난 고개를 끄덕이곤 미소지었다.

"신세지겠습니다."

"신세는 우리가 졌죠. 성훈씨한테."

특임대장 성규혁의 표정.

그리고 성가연의 눈빛.

어떻게 저런 눈으로, 저런 얼굴로 나를 볼 수 있는건지 모르겠다.

그만큼 그들은 신뢰와 믿음을 담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박대위가 말했다.

"성훈씨."

조종석을 돌아보니, 박대위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헬멧에서 내린 검은 바이저 너머, 그의 눈이 보인다.

"당신은 내 목숨을 구했소. 서래마을도 당신이 있어 다시 살아날 수 있었어요. 대통령께서도 살아생전에 당신의 활약을 전해들을 때마다 기뻐했었소."

박대위는 내게 미소를 보이곤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봤다.

"신세라든가 그런 말은 당신이 할 말이 아닙니다. 당신이 어딘가에 가야 되겠다면, 내가 당신의 날개가 되어주겠소. 그 뿐입니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이를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박대위님이 그런 말도 할 줄 알았습니까? 그동안 말 못하고 살아서 얼마나 답답했습니까 그래."

박대위는 어이없다는 듯 후, 하며 달리 대답하지 않았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웃더니 내게 말했다.

"성훈씨. 원전 작전 끝나면 고향에 갈 수 있도록 돕겠다 했던 약속, 결과적으로 어기게 되어 미안한 마음 뿐입니다."

난 피식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같이 원전 험지에서 그 짐승들 상대로 굴러놓고 미안하다느니 그런 말 하지 맙시다. 낯간지럽게."

특임대장 성규혁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아까 고향 가실때 우리 특임대 필요없다 하셨는데, 성훈씨. 나는, 우리는 성훈씨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너무 잘 압니다. 우리가 없어도 된다 했으니 믿겠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씀드리죠."

그는 들고있던 베레타를 내려다보더니, 내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당신 식구들. 마트 건물 사람들. 털끝만큼도 다치지 않도록 우리가 지키겠습니다. 그러니 고향 갈 때 안심하고 다녀오세요."

성가연도 나를 바라본다.

뭔가 흘겨보는 것 같은 시선이지만, 그러나 이내 고개를 끄덕여 온다.

이건 고마운걸.

수현이, 예은이, 은서, 소은이.

그리고 아직도 이름을 모르는 그 여자.

내 여자들과, 내 사람들.

모두를 이 훈련된 군인들이 지켜준다면 마음이 놓인다.

같이 싸워 왔으니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뭘 할 수 있는지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난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세집니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웃었다.

"신세는 우리가 졌다니까요."

앉아있던 다른 대원들도 웃었다.

큰 소리는 내지 않는다.

그저, 숨소리같은 웃음소리가 이어폰을 타고 흘러 들어온다.

이번 비행길은 나쁘지 않은걸.

그때 박대위가 말했다.

"수기사에 도착했다. 다들 준비해."

산으로 둘러싸인 수도기계화사단.

갈색의 긴 지붕건물 앞, 가로수가 늘어서 있는 연병장 주위사방에는 버스와 택시, 트럭과 승용차 따위를 늘어놓아 두터운 벽을 세워놨다.

나무와 쇠파이프를 박아 단단히 고정시켜둔 차량의 벽에는 굵은 철사와 날카로운 철조망을 엮어 방어력을 보강해두었고, 자기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다고 뽐내기라도 하듯, 철조망 곳곳에 시체들이 걸려있었다.

이애애애앵-

헬기소리 너머로 우렁찬 사이렌소리가 고막을 괴롭힌다.

부대를 감싸고 있는 마을 전체가 울부짖는 것같다.

우르르릉- 우루루룽-

사이렌소리에 호응하듯, 산 전체, 마을 전체를 뒤덮은 좀비웨이브가 일제히 짖어댔다.

환장하는 소리들 가운데, 우리가 탄 구조헬기가 연병장으로 서서히 착륙해 내려갔다.

타타타타-

"머리 좋네."

특임대장 성규혁이었다.

그가 성가연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 사이렌 때문에 좀비웨이브가 이 쪽으로 몰려들지 않고 있어. 분산효과를 줄려고 저걸 다 설치해놨나 본데."

성가연이 거리를 내다보더니 말했다.

"아니면 사람들을 구조할려고, 저 괴물들 밖으로 끄집어 낼려고 저렇게 해 놓은 것일수도 있구."

그럴 수도 있겠네.

나한텐 좀비웨이브 같은건 그냥 시끄러울 뿐이다만.

타타타타-

헬기가 서서히 내려선다.

드르르륵!

특임대장 성규혁이 문을 당겨 열었다.

바닥을 때려대는 공기압 너머, 먼지바람을 팔로 막고 선 사람들.

특임대장 성규혁과 성가연, 그리고 특임대원들이 하나씩 구조헬기에서 내렸다.

헬기 프로펠러의 동력이 멈춰 점진적으로 멎어들어가는 소음과 광풍 속에서, 나도 땅을 밟고 내려섰다.

연병장 위, 수많은 발자국들.

...축구를 한 건가?

설마.

뒤에서 불어오는 먼지바람을 맞으며 나와 특임대원들은 연병장을 걸었다.

족히 수백명은 되어 보인다.

기계화보병사단이 민간인을 많이 구조했다고 하더니 정말이었어. 군복 차림의 군인들도 많고, 어림잡아 3분의 2가 민간인이다.

서래마을과 마트건물 세력을 합친 것보다 많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걸 보는건 정말 오랜만인데.

게다가 다들 만면에 미소를 띄고 손을 흔들며 우릴 환영해주고 있다.

젊은 여자들도 아이들도 노인들도 한결같이 환한 얼굴이다. 좀비웨이브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나쁘지 않은데.

기이이잉-

넓은 연병장을 걸어가는 동안 헬기의 프로펠러가 멎었다.

먼지바람이 멎으니 저 쪽에서도 몇몇 사람들이 걸어온다.

대여섯명의 젊은 군인들이 흰머리 가득한 장년의 남자를 뒤따르며 걸어오는데, 다들 체격이 보통이 아니다.

특히 흰머리 난 아재는 수염을 길러 꽤나 근엄해 보인다.

철컥, 하며 문 닫히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온다.

박대위가 헬기에서 내려 따라오는 모양이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밝은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정부군 특임대 대장 성규혁 대위입니다. 사단장님 이십니까?"

흰머리와 수염의 장년의 남자가 미소띈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사단이라고 할 만큼 남지는 않았네만, 그래. 내가 여기 사람들을 맡아서 책임지고 있다. 박광진 원사네."

특임대장 성규혁이 그의 손을 맞잡고 말했다.

"반갑습니다 박원사님. 만나뵙고 싶었습니다."

"그래. 특히 이런 시기엔 살아있는 사람들끼리 힘을 서로 보태야지. 만나서 반갑다, 성대위."

흠.

원사가 대위한테 반말하네.

서로 다른 부대 소속이라 그냥 나이로 예우해주는 건가?

뒤에 서서 그런 생각을 하고있는데, 특임대장 성규혁이 나를 돌아봤다.

"아마 대통령께, 또 비서실장에게 들으셨겠지만 바로 이 분이..."

"아, 저 분이 한성훈씨로군."

박광진 원사가 수염을 어루만지며 내게 다가왔다.

풍채도 그렇고 위압감이 있는 노인이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활약이 대단하시다고."

그러며 내게 손을 내민다.

난 그의 손을 맞잡고 고개를 까딱했다.

"한성훈입니다."

손이 두껍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느껴질 정도다.

굳은살이 얼마나 박혔는지 가죽장갑을 움켜쥔 것같다.

박광진 원사가 환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친근하게 두드렸다.

"이렇게 젊은 분이 대통령도 구하고 사람들도 구하고, 정말 훌륭합니다. 성훈씨같은 분이 열 명만 있어도 우리나라를 원래대로 만드는게 훨씬 수월하겠지요."

나 같은 사람 열 명?

나 뿐만이 아니라 특임대원 모두가 표정이 살짝 변했다.

이 사람, 나를 모른다.

그냥 대통령이나 비서실장한테, 나라는 젊은 사람이 있는데 활약을 많이 하고 있다, 정도의 가벼운 정보나 얻은 수준인게 틀림없다.

게다가, 나같은 인간이 또 있다손 쳐도 그게 선하거나 아군일거라는 보장 따윈 어디에도 없다.

재앙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적으로 돌아서게 되면 나와 어떻게 싸워 이겨야 되는지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고 말했던 특임대장 성규혁.

그가 웃으며 말했다.

"성훈씨같은 분은 성훈씨 한 사람으로 충분합니다. 열 명이나 있으면... 하하."

수현이가 녹화했던 영상을 성규혁과 성가연은 봤다. 모르긴 해도 그밖에 많은 사람들이 돌려봤을 것이다. 아마 비서실장도.

그 날, 마트 건물을 에워싼 좀비웨이브와 악마괴물을 내가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조금 과장하자면, 나라는 인간의 위력은 핵폭탄 급이다.

그걸 박광진 원사가 제대로 알았으면 나같은 인간 열 명 같은 소린 안 했겠지.

나는 말없이 미소지었고, 특임대원들은 뭔가 묘한 얼굴로 웃고 있으니 박광진 원사가 자기가 말실수했나 싶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요? 활약이 대단한 사람은 어떻든 많으면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허허. 자자, 일단 들어가십시다. 들어가서 이야기하지요."

그러며 걸어간다.

선두에 박광진 원사와 특임대장 성규혁이 걸어가고, 수기사 군인들과 특임대원들이 각자 세를 이루어 걸었다.

특임대원들은 자연스럽게 나를 중심에 두고 호위하듯 걸었는데 그 모습을 본 군인들과 박광진 원사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내가 어느 정도의 인물인지를 확실히 이 사람들은 제대로 파악을 못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전기가 끊겼다고 들었습니다만, 지내시기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박광진 원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불편하지. 절대 없으면 안되는게 물과 전기 아니겠나. 하고 많은 것들 중에 하필 전기가 나가는 바람에 냉장고도 못 돌리고 있어."

"어렵겠군요. 그러면 식사도 힘드실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음. 전투식량이 좀 여유로웠으면 좋았겠지만 그런건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동나버렸어. 그래도 쌀이나 국수, 뭐 밀가루 같은 게 아직 남아서 그럭저럭 버티고는 있네. 그 쪽은 좀 어떤가? 자네들도 힘들지?"

"아뇨, 저희는..."

특임대장 성규혁이 나를 살짝 돌아보며 말했다.

"도심지에 위치해 있으니까요. 성훈씨와 함께 마트나 편의점 같은걸 정리하거나 하면서 음식을 구하고 있습니다. 평택 쪽에서 야채를 보내주는 분들도 계시고요. 저희는 꽤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

통조림은 꽤나 유통기한이 길지.

스팸 김치찌개는 몹시 맛있음.

냉동이지만 굴이나 조개살 같은 것도 마트 뒤적거리다 보면 흔히 나오고, 적어도 내 손이 닿은 사람들에 한해서는 먹는건 처음부터 아무 문제가 없다.

박광진 원사가 끄덕이더니 말했다.

"좋은 일이군. 좋은 일이야. 그 사이비 종교가 사방을 터뜨리는 바람에 난 행여나 우리처럼 다른 세력도 다들 힘들어지지 않았겠나 생각했거든. 무사히 잘 지내고 있다니 다행일세."

"네. 감사합니다."

박광진 원사가 특임대장 성규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대통령께서는... 사람들 피해도 제법 있다고 비서실장에게 들었다만. 장례는 잘 치루었나?"

특임대장 성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요즘 같은 때에 국장 같은건 할 수 없으니까요. 합동장례를 약식으로 치렀습니다."

"잘 묻어드렸고?"

"화장했습니다."

박광진 원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요즘은 그런 시대지. 사람 묻는게 어디 쉽겠나."

특임대장 성규혁이 씁쓸한듯 미소짓더니 멀리 차고를 바라보며 물었다.

"수기사 쪽도 디데이에 피해가 컸나보군요. 원사님이 사단장을 하고 계실 거라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 전차장이셨습니까?"

"하."

박광진 원사가 헛웃음을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 나이에 무슨 전차장이야. 작년에 은퇴했었지. 이 동네에 살다가 아들 보러 잠깐 부대에 왔는데 그 사달이 났어. 그 날, 디데이? 자네들은 그 날을 디데이라고 하나보군. 디데이가 지나고 혼란스러운 상황 수습하고 나서 알았는데, 사단장이 부사관을 물어 뜯었다고 들었다. 다들 미쳐 돌아간거지. 내 후임도 그 날 뜯겨 죽었고. 쓸 만한 놈들 대부분이 당해버렸어. 그리고 어쩌다 보니 내가 사단장 노릇을 하게 된 거지."

따라 걷던 수기사 군인이 머리를 젓고는 말했다.

"아닙니다 아버지. 아버지 아니었으면 그 날 다 죽었습니다. 전차로 뛰어! 그 날 그렇게 외치셨잖습니까. 다들 쫓고 쫓기면서 혼란에 빠져 있는데 아버지가 외친 그 한마디에 다들 일사불란하게 전차와 장갑차로 뛰어가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박광진 원사가 웃더니 군인의 어깨를 짚으며 특임대장에게 말했다.

"내 아들일세. 만기전역 한 달 앞두고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참."

군인이 특임대장 성규혁에게 경례하며 말했다.

"병장 박건입니다."

"특임대장 성규혁이다. 고생 많았다."

박건이 나를 돌아보며 목례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음.

난 뭐 딱히 해줄 말이 없네.

가볍게 목례로 화답해줬다.

박광진 원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단장 그 사람, 부하들한테 좀 엄하긴 해도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도대체 세상이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어. 죽어버린 젊은 놈들이 너무 아깝다. 자네 쪽에선 알아낸게 없나?"

특임대장 성규혁이 다소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희로써도 이유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저..."

"그저?"

그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가설이긴 합니다만, 저희는 세상에 종말이 도래했다고 생각합니다."

박광진 원사와 박건, 그리고 수기사 군인들의 얼굴이 제각각 변했다.

당황스럽다는 표정과 납득했다는 얼굴, 그리고 절망스럽다는 감정을 실어 각기 변하는 태도들.

"...종말이라?"

"네."

박광진 원사가 안쓰러운 눈으로 아들 박건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들 가설이 틀렸으면 좋겠군. 나야 이미 살 만큼 살았고, 마누라도 제 명에 갔다지만, 내 아들은... 이 젊은 목숨들은 아직 살아갈 날이 창창하지 않느냐 말이야."

특임대장 성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종말이 아니길 바랍니다."

박광진 원사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그래. 어차피 아직 확실히 알 수 있는건 없으니 섣불리 단정지어 놓고 생각하지는 않기로 하지."

나는 확실히 아는데.

지금은 종말이다.

하지만, 굳이 말로 꺼내진 않았다.

나서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금은 확실히 종말이라고 단언하고 나면 여러 귀찮은 종류의 질문들이 들어 올 것이고, 당연하게도 내겐 그 어떤 해답도 없기 때문이다.

박광진 원사가 말했다.

"어쨋든 이렇게 만나게 된 거야 참 잘 된 일이긴 하다만, 앞으로 어쩔 생각인가?"

특임대장 성규혁이 끄덕이고는 말했다.

"말씀하셨잖습니까. 아직 살아갈 날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고. 그러면 저희같은 군인들이 할 일은 하나 뿐이죠."

박광진 원사는 대답없이 그의 말을 기다렸다.

특임대장 성규혁은 미소지었다.

"저희는 국토를 수복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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