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 복학
* * *
수정이와 지우가 떠난 늦은 저녁 나는 이현이와 함께 아무 말 없이 길을 걸었다.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하게 길을 걷기를 잠시.
박이현은 지금까지 그와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처음은 그저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 있구나라는 생각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타인에게 별로 관심이 없던 그녀는 이성을 보아도 연애 대상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아니. 그 전에 왜 사람들이 사귀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서로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하는데 가족이라면 모를까 다른 사람과 그런 감정이 생긴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 생각하기를 몇 년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 고백을 받았다.
상대는 고등학교 때 자주 마주쳐 꽤 친해진 기명하.
성인이 되고 나서 연애에 대해 내심 궁금했던 그녀는 고백을 수락했고.
자신도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까 생각하던 찰나 양다리도 아닌 세 다리를 걸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여자 친구들의 연락처를 자신의 휴대폰에 저장해 그들에게 알려주었다.
연락을 보내고 그에게 헤어지자는 통보를 보내려 할 때 다른 여자 친구들에게 복수하자는 답이 찾아왔다.
원래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충분히 일리가 있어 그녀도 참가했다.
우연히 아는 학교 선배를 만나 이진석이라는 사람을 처음 만난 날 그녀는 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기보다 잘 생긴 사람을 만난다고 하면 자존심이 상하겠지.’
그녀는 선배와 헤어지는 타이밍에 접근해 연락처를 보내자 선배는 그 날 저녁 바로 연락을 보내왔다.
그 후 자신의 사연을 말해주자 그는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었고 다음날 남자 친구 대행이라고 데이트까지 했다.
이진석과 한 데이트는 즐거웠다.
사귀고 나서 몇 번 만난 기명화와의 무미건조한 데이트와는 달리.
그와의 데이트는 그녀에게 다채로운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자신이 잘 보지 못하는 공포영화를 그와 함께 보며 끝까지 볼 수 있었다.
기명하와 했을 때 압도적으로 이겨 지루한 다트 게임을 그와는 비슷한 실력으로 치열하게 할 수 있었다.
자신이 얻지 못했던 것을 그는 얻어줄 수 있었다.
그와 함께 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함께 있으면 즐거워, 기명하와는 달라, 함께 있으면 든든해.’
동갑인 기명하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연상의 매력은 그녀의 마음에 상당히 크게 와닿았다.
평생 가족을 제외한 타인에게 기대감을 품이 않았던 그녀는 처음 그에게 기대라는 감정을 품게 되었다.
자신에게 어떤 새로운 것을 보여줄 수 있는지.
어떤 새로운 것을 알려줄 수 있는지.
자신과 데이트를 한 날 그는 즐거웠는지.
그런 기대감을 품고 있을 때 그는 기명하와 헤어지는 날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신에게 폭언을 하는 그를 단번에 제압하는 거친 남성의 모습.
또 헤어진 자신을 위로해주는 모습.
별로 힘들지 않았지만 믿음직스러운 그에게 자신도 모르게 약한 소리까지 했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이진석이라는 남자에게 커다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언제나 가족과 자신을 생각하던 마음속에 이진석이라는 남자가 자리 잡게 되었다.
‘선배는 뭐할까.’
그날 이후 그녀는 그가 오늘은 무엇을 할지 궁금해졌다.
그가 밥은 잘 먹었을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평생을 타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던 그녀는 아직 그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오빠는 좋아하는 취미가 있나요?”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소화시키기 위해 걷고 있을 때 박이현이 뜬금없이 내 취미를 물어보았다.
“나는 게임하는 거 좋아해.”
“게임이요?”
“응, 이현이 너는 좋아하는 취미가 뭐야?”
혹시라도 그녀가 내가 좋아하는 게임에 대해서 자세히 파고들까봐 역으로 질문했다.
“저는 혼자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해요.”
“주로 어떤 걸 하는데?”
“휴대폰을 보거나 책을 읽거나 산책 하는 거요.”
서로 주제를 변경해가며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을 때 그녀에게 시선을 돌린 나는 살짝 떨리고 있는 그녀의 손을 봤다.
겨울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3월이라 날씨가 쌀쌀했는데 얇게 있고 있어서인지 추위를 타고 있자.
나는 입고 있던 가디건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덮어주고 말을 이었다.
“이 정도면 소화가 다 된 거 같은데 슬슬 마시러 갈까?”
갑작스레 나와 대화를 하고 있다가 가디건을 덮어주자 그 자리에서 멈춘 그녀는 추운지 얼굴을 발갛게 만든 채 말을 이었다.
“네.”
어디서 술을 마실지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 박이현은 선배가 덮어준 가디건을 꽉 움켜쥐었다.
‘따뜻해...’
방금까지 선배가 입고 있어 따뜻하게 올라오는 온기.
섬유유연제 향과 함께 섞여 나는 그의 체향.
그 모든 것이 그녀에게 포근하게 다가왔다.
박이현이 이진석이 준 가디건에 심취해 있을 때 목적지를 정한 이진석이 말을 걸었다.
“여기로 갈까?”
“네?”
많이 추운지 내가 준 가디건을 꼬옥 쥐고 있는 그녀에게 내가 생각한 곳을 말해주자 잠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녀가 되물었다.
“여기 앞에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술집이 있는데 거기로 갈까?”
“아...네 좋아요.”
내가 말한 술집에 도착한 우리는 자리에 앉아 간단한 안주와 술을 시켰다.
박이현과 함께 앉아 술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따로 궁금했던 것을 그녀에게 물었다.
“그놈한테 연락 왔어?”
“아니요, 그때 헤어진 날 바로 차단했어요.”
“잘했어.”
다행히 놈이 찝쩍거리지 않는다는 것에 내가 만족하고 있을 때 박이현이 추가로 말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연락이 왔었다고 들었어요.”
“뭐라고 왔대?”
딱 봐도 즐거운 팝콘 각이 느껴져 묻자 그녀는 자신의 휴대폰을 열어 대화내용을 보여주었다.
내용의 첫 시작은 미안하다는 말로 시작해 자신은 절대 너를 잊을 수 없다, 네가 최고다 같은 상투적인 말로 도배가 되어있었는데
재미있는 점은 한 사람에게 보낸 내용을 똑같이 복사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보낸 것이었다.
‘이 새끼 진짜 병신인가?’
바람 폈다는 걸 다 같이 알았으면 서로 연락처 정도는 가지고 있을 텐데 그 상황에 복붙한 내용을 보낸다?
이건 진짜 생각 없이 사는 수준이었다.
딱 봐도 험난한 군생활이 눈에 보이는 놈을 잠깐 생각한 나는 그녀에게 휴대폰을 건네주며 말했다.
“원래 이렇게 모자란 놈이었어?”
“고등학교에서는 여자애들한테 꽤 인기 있었어요.”
“걔가?”
“네, 키도 크고 얼굴도 괜찮다고 좋아하는 애들이 있었어요.”
‘하는 짓이 병신이어도 잘생기면 땡인 건가?’
처음 만났을 때 삭발인 걸 감안해도 꽤 생겼다는 것을 기억한 나는 역시 외모가 최고라는 생각을 했다.
더 이상하면 분위기가 좋아지지 않을까 걱정한 나는 대충 여기서 끊기로 하고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아! 그러고 보니 이번에 수강신청 잘 했어?”
“아니요...이번에는 망했어요.”
수강신청 얘기를 듣자마자 방금 전까지 남자친구에도 무표정을 유지하던 박이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무룩해졌다.
“얼마나 놓쳤길래?”
“하나 빼고 다 놓쳤어요...”
수강신청 할 때 아무리 인기 있는 수업이 껴 있더라도 정한 수업 두세 개 정도는 들을 수 있는데 상당히 경쟁이 빡센 것 같았다.
“경쟁이 심한 수업들이야?”
“네...작년에는 수업을 잘못 골라서 너무 힘들었어가지고 이번에 편한 걸로 신청하려다 다 실패했어요.”
시무룩한 그녀의 표정에 잠깐 고민한 나는 과는 다르지만 혹시 겹치는 교양이 있는지 물어봤다.
“혹시 교양으로 어떤 강의 신청했어?”
“저 심리학 제2외국어 컴퓨터요.”
“어? 나도 심리학 듣는데.”
“오빠도 들으세요?”
“응.”
나와 겹치는 교양이 있다는 말에 시무룩해져 있던 박이현의 갑자기 밝아졌다.
다행히 분위기 반전에 성공해 술과 안주를 함께 마시며 대화를 하고 있을 무렵 이제 슬슬 취기가 도는지 박이현의 눈이 슬슬 풀리기 시작했다.
“이현아 이제 그만 마시고 갈까?”
“네에...오빠한테 하나 물어보고 싶은 거 있는데 이거만 물어보고 갈게요.”
“뭔데?”
몸에 도는 취기 때문에 가누기가 힘든지 고개가 푹 숙여진 박이현이 내게 질문했다.
“오빠 여자 친구 없다고 하셨는데 이상형이 어떻게 되나요?”
갑작스러운 이상형 질문에 잠깐 당황했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고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했다.
‘평소 이상형을 말할까 포장한 이상형을 말할까...’
질문한 사람이 한울이나 지우면 당연히 젖탱이랑 엉덩이 빵빵하고 예쁜 여자라고 말하겠지만.
이제 알게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많이 친하지도 않은 그녀에게는 말하기 좀 그래서 포장해 말했다.
“나는 키가 좀 크고 성격이 잘 맞는 여자가 좋아.”
“얼굴은요?”
“얼굴은 그냥 너무 못생기지 않을 정도면 상관없어.”
“기준이 너무 애매하네요...”
“원래 이상형이라는 게 다 그런 거지, 이제 일어나자.”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아직 내 가디건을 덮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걸을 수 있도록 부축을 해준 뒤 계산을 마치고 가게에서 나왔다.
“택시 잡아줄 테니까 타고 갈 수 있지?”
“…네.”
‘너무 티 났을까...?’
아직 이진석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더 이상 그에게 할 질문이 떨어진 박이현은 자신도 모르게 아쉬움이 가득 담긴 말투로 말했다.
다행히 이진석은 택시를 잡느라 알아듣지 못했는지 평범하게 말하며 그녀를 배웅해주었다.
“오늘 재밌었어, 다음에 보자.”
“네. 오빠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잘 가.”
그렇게 늦은 밤 마지막 남은 박이현을 택시에 태워 보낸 후 차를 찾으러 학교로 돌아가 대리를 불러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한 나는 술에 취하지는 않았지만 오랜만에 늦게까지 밖에서 놀아서 그런지 정신이 피곤했다.
“아...이래서 인싸들은 이해할 수가 없어.”
하루 종일 밖에서 친구들과 돌아다니며 노는 인싸들에게 한 마디 해준 뒤 샤워실로 들어가 씻고 침대에 누운 나는 그대로 잠에 들었다.
[병신...]
머릿속에 울려 퍼진 시스템의 소리는 듣지 못한 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