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 영애의 남동생이 되었다-1화 (1/140)

Prologue 빙의 (1)

[푸른 장미 정원]이라는 여성향 미연시 게임이 있다.

흔한 역하렘 여성향 미연시로, 아르카디아 아카데미라는 가상의 학원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 판타지물이다.

평범하게 여캐가 나오는 걸 좋아하는 씹덕인 나로선 제목조차 모르는 게 정상이련만, 우리 부모님이 자식농사를 실패하셨는지 하나 뿐인 내 누이가 나 못지 않은 씹덕이어서 일상 중에 종종 접하고 말았다.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은 정보를 강제로 주입당하는 것이 유쾌하진 않았다. 그림 그려주면 돈 준다고 해서 혹 한 내가 병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림 그려주면서 이런저런 정보를 들어둬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 성격 같았으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을 여성향 게임의 정보를 직업 정신으로 귀담아 듣게 되었으니까.

어째서 평생 플레이 해볼 일도 없을 게임의 정보를 귀 담아 들은 게 다행이냐고 한다면 그야.

늘 그렇듯. 클리셰대로.

[푸른 장미 정원]의 세계로 빙의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작중 모든 루트에서 여주를 방해하는 악역 포지션인, '레티시아 체페슈'의 동생 '스칼렛 체페슈'로.

*

빙의한 지 대략 한 달 가량의 시간이 지났다. 스칼렛 체페슈라는 이름도 익숙하진 않아도 누군가 호명할 때 나를 부르는구나 하고 대답할 정도로는 적응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창백한 얼굴의 메이드에게 시중을 맡긴다. 핏기 하나 없이, 생명의 기척이라곤 조금도 남아있지 않아 마치 기계와 같은 그것들은 그야말로 시체와 다름 없다.

그야 구울이니까. 그리고 구울을 부리는 누님과 나는 흡혈귀고. 세안을 마치고 거울을 들여다보면 핏빛처럼 붉은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흡혈귀라서 그런지 입이 떡 벌어지는 미모였기에 만족스레 입꼬리를 올렸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몸만큼은 마음에 든단 말이지.

빙의하기 전 우리집 축생에게 듣기로는, 인간과 인간 비슷한 인외종의 화합을 뜻하는 상징적인 의미로 흡혈귀 중 가장 유서 깊은 가문 중 하나인 체페슈가 제국의 작위를 받아들였다고 했었다.

양지에서 당당히 혈액도 돈 주고 사먹는다고.

애초에 세세한 세계관 설정보단 캐릭터 위주로 서사가 굴러가는 여성향 게임이어서 그런지 작중에서 나오는 흡혈귀를 보면 은이나 십자가에도 약하지 않고 흐르는 물도 아무렇지 않은 듯 했다.

그나마 약점인 게 햇빛이라는데, 그마저도 고위 흡혈귀즈음 되면 햇빛 정도는 무시할 수 있다고.

이건 누나한테 들은 게 아니라 이 몸으로 직접 겪은 거다. 한낮에 정원을 걸어도 아무렇지 않더라. 피부가 조금 따끔따끔한 정도?

정해진 미래가 몰락만 아니었으면 그냥 개꿀 빨며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막상 게임의 어느 엔딩으로 가도 체페슈가 몰락하거나 아니면 아예 멸문한다는 걸 아는 입장에선 마냥 좋게 여길 수 없단 게 떨떠름하다.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맘이 없진 않으나, 그것도 일단 살아나가야 할 것 아닌가.

게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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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칼렛 체페슈

근력 ▶ 102 (44)

민첩 ▶ 121 (41)

체력 ▶ 105 (39)

내구 ▶ 84 (32)

마력 ▶ 214

상태: 탈력, 욕구

특성: 혈귀, 공空,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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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창, 하고 속으로 낮게 읊조리자 눈 앞에 뿅 하고 생겨난 반투명한 그것. 흔히들 전생 특전하면 생각나곤 하는 상태창이다. 실제 게임에서도 여주 시점에서 남캐들 호감도 관리하려면 나오는 상태창이기도 하고. 밑으로 쭉 이어져 있는 상태창을 넘기고 나니, 퀘스트 창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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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퀘스트 - 살아남기

▶ 언젠가 몰락할 운명의 당신! 운명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결말로 바꿔보세요!

보상: 결말의 난이도, 완성도에 따라 달라짐.

튜토리얼 - 목표 설정 (??? 0/1)

▶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메인 퀘스트를 달성하기 위한 첫 걸음으로, 작은 목표를 하나 설정 후 달성하세요.

보상: 설정한 목표의 난이도에 따라 달라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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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하고 있는 건 메인 퀘스트 항목이다. 보상이 내가 만들어낸 결말의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는 건, 내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이니까.

이것을 통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진 모르겠으나, 그나마 가장 가능성 있어 보이는 것이 이것 하나 뿐이었다.

나는 다른 걸 고를 처지조차 못됐다.

일단 최우선요소는 누님이 황자에게 반하는 일을 막는 것이었다.

원작이 진행되는 건 누님이 3학년일 때고, 내가 아는 설정상 누님이 황자에게 반하는 건 2학년 1학기 때 중간이니 아직 막을 수 있었다.

두 달 뒤에 내가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누님이 2학년으로 올라가니까. 그 외에도 마탑주에게 반하거나 북부 대공에게 반하거나 하는 루트도 있지만 그 루트로 진입하는 분기점은 2학년 2학기라 아직은 괜찮다.

일단 황자한테 반하는 일을 막는 것만 생각하자.

그렇게 생각하니, 퀘스트창에 있던 튜토리얼의 문구가 바뀌었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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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토리얼 - 목표 설정→ 레티시아 체페슈의 호감도를 올리자!

▶ '레티시아 체페슈'의 호감도를 올려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반하는 일이 없게 만들자!

▶ 달성 조건 - 레티시아 체페슈의 호감도 70 이상 (61/70)

기한 - 아르카디아 아카데미 입학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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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미연시 아니랄까봐 퀘스트도 꼭 이런 걸 주네.

내가 거절할 시간도 없이 자동으로 등록된 퀘스트창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취소할 수도 없었기에 대충 고개를 끄덕여 퀘스트창을 끄고는, 묵묵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구울 메이드가 건네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주어진 명령대로 움직이는 구울이라 눈치 볼 필요 없이 편하게 행동해도 되는 건 마음에 들지만, 그래도 역시 메이드라고 하면 생각나는 야릇한 로망 같은 게 있으니 좀 아쉽기도 했다.

누님만 괜찮다면 다음에 인간 메이드라도 들여볼까.

실없는 생각따위를 하며 식당으로 향했다. 문 앞에 서서 내가 다가가자 허리를 슬쩍 숙인 구울 메이드를 지나 들어서자, 나를 꽤 기다리고 있었는지 부루퉁해진 얼굴의 누님이 있었다.

누님은 우아한 몸짓으로 테이블 위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탁탁 두드렸다. 테이블을 두드리는 행위 자체가 우아한가에 대해선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늦었네.”

“미안.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거짓말. 아침이라 또 한참 비몽사몽하다 왔겠지. 내가 말했잖아? 인간들 사이에서 어울리려면 아침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그렇다. 실제로 아무리 고위 흡혈귀가 햇빛에 강하다한들, 본질적으론 달빛을 받으면 강해지고 그림자 속을 넘어다니는 밤의 귀족이거늘.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흡혈귀가 식사를 위해 일어나 움직이는 건 체페슈 뿐.

3대 혈귀라 불리는 체페슈, 드라쿨레아, 노스페라투 중 인간과의 교류에 대표로 나선 체페슈이기에 인간들의 습성에 맞춰주는 것이다.

누님은 아카데미 학생이기도 하고. 마찬가지로 나도 곧 아카데미에 입학해야 하니, 아침에 활동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누님이 닦달하길래.

솔직히 아침에 약해진 것은 사실이라 누님의 잔소리에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누님도 엄한 표정을 풀곤,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한 차례 내쉬었다.

“그래. 잘 알고 있다니까 더 말하진 않을게. 아픈 곳은?”

“거의 다 나았어. 걱정 마.”

내가 빙의했던 날.

스칼렛 체페슈의 몸에 큰 이상이 생겼다고 한다.

열이 날 리 없는 흡혈귀의 몸이 피가 끓을 정도였다고. 내가 빙의한 부작용인지, 아니면 그 정도로 몸이 안 좋아진 상태라 내가 빙의가 가능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기존의 스칼렛 체페슈와 나는 명백히 다른 타인이므로, 빙의 직후에 누군가에게서 의심을 사기 전에 그냥 기억이 없다고 선수를 쳤다.

아예 기억이 날아간 백치가 된 게 아니라, 실생활에 필요한 기억이나 내가 누구인지, 누님은 누군지 정도는 기억해도 그 외는 흐릿한 정도라고.

게다가 그 이후 한달 동안 저택에 박혀 생각을 정리하느라 방 밖에도 잘 안 나왔으니 누님 입장에선 걱정이 될 수밖에.

한달동안 식사 할 때가 아니어도 매일매일 거르지 않고 방에 찾아와 기억을 잃었다는 내가 혹여 기억을 되찾지 않을까 많을 것을 알려주던 누님이다.

그러고보니 호감도가 이미 60이 넘었었나.

게임 설정 상 호감도 50 이상부터는 어느 정도 마음이 있는 수준이라고 하던데. 가족이라 기준을 다르게 잡아 조금 높게 나온 거라고 쳐도 생각보다 높았다.

슬쩍 누님을 쳐다봤다. 걱정스러운 듯 나를 보는 누님의 시선에 애정이 묻어있었다.

누님은 모르게 은근슬쩍, 그러면서도 착실하게 그녀의 몸을 훑어보았다.

실제 나의 누님은 아니어도, 스칼렛 체페슈의 입장에선 명백히 친누님인 레티시아의 호감도를 올리라니, 퀘스트라지만 그래도 되나 싶었는데.

오히려 반대로 생각하면 내가 하기 싫더라도 퀘스트니까,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게 아닐까? 비록 기억을 잃었다는 내게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준 누님이어도, 손 대고 싶지 않아도 이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조금 솔직하게 굴자면, 지금까지 겨우 참아오던 것을, 퀘스트라는 명목 하에 참지 않기로 했다.

EP.1 빙의 (2)

식후로 나온, 와인잔에 채워진 혈액을 목으로 넘겼다. 피를 마시는 것도 슬슬 익숙해졌다. 요즘은 좀 맛있는 거 같기도 했다….

일단 흡혈귀라고 해서 인간의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기호식품의 영역으로, 영양분을 얻기 위해서는 꼭 혈액이 필요했다.

이 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빙의 직후 완전히 허약해진 내 몸을 빨리 회복시키기 위해선 혈액 섭취가 필수였기에, 한 번도 피를 먹어보지 못한 나도 비위고 뭐고 24시간 내내 혈액팩을 쪽쪽 빨고 있었다. 옆에서 누님이 빤히 보고 있는데 안 먹을 수도 없고. 덕분에 지금은 그냥 토마토 주스나 와인 마시듯 마시게 됐다.

피를 목구멍으로 넘기곤 자리서 일어났다. 비록 내가 누님의 호감도를 올리기로 마음 먹기는 했으나,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일단 방금까지만 해도 식사 중이었고, 이지를 상실했다곤 하나 구울 메이드들이 보고 있는 와중에서 뭔가를 하기엔 누님이 허락할 것 같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기억을 잃었다 믿고 있는 누님은 매일같이 내 방으로 찾아왔으므로, 무언가를 하려면 그 때에 해도 늦지 않았다.

오히려 단 둘이 침실에 남는 상황이므로 사고를 치기에도 적합한 환경이리라.

그러니 내가 고민해야 할 것은 언제 어디서가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할 지였다. 그녀가 내게 호감을 품고 있다한들 어디까지나 사이 좋은 남매지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한 명의 남자가 아니라 기억을 잃어 보살펴줘야 할 동생으로 보고 있을테니.

실제로 무력으로도 내가 많이 밀린다.

그것은 그녀의 상태창만 봐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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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티시아 체페슈

근력 ▶ 142

민첩 ▶ 156

체력 ▶ 122

내구 ▶ 141

마력 ▶ 133

상태: 불안

특성: 혈귀, 형形, 가주(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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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해진 스칼렛 체페슈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스탯이다. 아니, 온전한 몸상태로 돌아오더라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다. 스칼렛 체페슈의 특성 중 공空 특성이 개사기 특성이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레티시아의 형形 특성도 만만하진 않다.

어쨌든 무력으로도 내가 밀리고, 기억을 잃었다는 설정 덕에 모성애도 자극 될 테니 누님에게 내가 어떤 인상일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잘 쳐줘봐야 잘 생긴 내 동생…. 정도겠지. 사실 빙의 전 우리집 또라이를 생각하면 누님이 동생인 나를 그런 식으로라도 생각한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지만, 나름 미연시 세계 속 아닌가. 사이 좋은 남매란 판타지에 불과하지만 정작 내가 있는 세계부터가 검과 마법의 판타지 세계라는 걸 생각하면 사이 좋은 남매도 있을 법 하지 않을까.

중요한 건 지금 이대로 가다간 남매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아카데미에 가게 돼서는, 누님이 황자에게 반해버릴지도 모른단 것이다. 퀘스트도 깨고, 누님이 다른 곳에 괜히 눈 돌리지 않도록 적어도 사이 좋은 남매 수준의 관계에서는 벗어나야 했다. 아카데미에 가기 전까지.

이대로 방에 가서 가만 기다리고 있으면 누님이 찾아오겠지. 그럼 누님에게 있어선, 매일 반복하는 일과 중 하나를 실천하는 것 뿐일 것이다. 설렘도 없고, 아픈 동생에 대한 걱정만 한 가슴 품고 오겠지.

나는 조금 자극을 주기로 했다.

“누님.”

“응. 왜?”

“이따 내 방은 몇시즈음 오려고?”

“시간 나면 가겠지? 왜, 누나가 기다려지니? 심심해?”

내 물음에, 귀여운 동생 보듯 누님이 싱그럽게 웃었다. 이런 누님이 게임에선 악독한 악역으로 나온다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사랑이 뭐길래 그런걸까. 솔직히 그녀가 내 혈육으로 보이진 않았다.

이곳이 이제 내가 살아가는 현실이라 할지라도, 분명 한달 전만 해도 이곳은 내게 게임 속 세상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난 그녀를 한 명의 여자로써, 침대에 자빠뜨리기 위해 작업을 치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미래를 생각했더니 어딘가 기분이 이상해져서,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답했다.

“심심하진 않은데, 누님이랑 같이 있는 시간이 좋아서.”

“어차피 매일 같이 있는데 뭘.”

“단 둘이 있는 시간 말이야. 너무 짧은 거 같아. 마음 같아선 온종일 누님이랑 같이 있고 싶어.”

“…….”

툭 던진 말이다.

이런 말 한 번 했다고 무언가 변화가 있으리라 기대한 것은 아니고, 갑작스런 변화 대신 조금씩 밑밥을 던지기 위해 뱉은 말이었다.

아주 약간의 진심을 첨가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녀의 반응이 이상했다. 뺨이 살짝 붉어지고, 꾹 다문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평소 같았으면“누나가 그렇게 좋으니?”하고 대답했을 그녀가 아무 말도 없자 의아해진 내가 입을 열었다.

“왜 그래?”

“……그, 온종일이라는 건. 음. 잘 때도 같이 자자는, 그런….”

“아.”

무슨 오해를 했는 지 알 것 같았다. 그럼에도 이상한 점은 남아있었다. 나는 참지 않고 묻기로 했다.

“같이 자는 게 무어 어때서. 오히려 누님은 누나랑 같이 자고 싶었느냐며 좋아라 할 줄 알았는데.”

그랬다. 내가 아는 누님이라면, 되려 신나서 그러자고 할 사람이었는데.

본디 하얗다 못해 창백한 얼굴이라 아주 옅은 홍조마저 진해보였다.

그 반응이 부끄러움인지, 아님 다른 무엇인지는 모를 일이나, 적어도 누님이 동요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상했다.

“그, 그렇지. 음.”

그런데도 누님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이젠 아주 손부채질로 얼굴을 식히고 있을 지경이었다.

자신이 지금 동요하고 있다는 걸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이 여자가 왜 이럴까.

나는 더 추궁할 수 있었으나, 그랬다간 누님이 도망갈 거 같아 그만하기로 했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서, 어쩔 줄 몰라하는 누님에게 다가갔다.

툭.

“이상하게 왜 그러지. 나 방에 들어가서 한숨 잘테니까, …한, 두 시간? 두 시간 뒤즈음 와. 그 정도면 올 수 있지?”

누님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 치자,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방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

레티시아 체페슈는, 당황했다.

그녀의 동생은, 전형적인 '귀족'이었다. 오만하고, 또 그만큼 품위도 있고, 능력도 있는 자. 체페슈의 가주로서, 당당하게 군림하는, 위대하던 체페슈의 핏줄 속에서도 다시 없을 재능을 타고난 자…. 드라쿨레아나 노스페라투의 늙은 원로들만 아니었어도, 10년 안에 혈귀의 왕이 됐어도 이상하지 않을 동생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동생이 어려웠다. 너무 완벽해서. 그것은 두려움이나 질투, 시기…, 그런 것들과는 달랐다. 동경이었다. 그녀 자신보다 한참은 어린 동생에게 품기에 적절한가 싶다가도, 동경할 수밖에 없는 자였다.

그랬던 동생이 바뀌었다.

한 달 전, 그녀의 동생이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죽은 듯 잠들어 있을 때. 그러다 동생이 깨어났을 때. 그렇게 마주한 동생이 어딘가 달라져 있다는 걸 느꼈을 때….

그녀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처음엔 경계했다. 달라진 동생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였을까. 거리를 두려 했다. 동생이 깨어난 날 밤, 그녀를 불러 자신이 기억을 잃었노라 털어놓기 전에는.

약해진 몸, 잃어버린 기억. 처량한 모습으로 자신에게 모든 걸 털어놓은 동생의 모습은 가련했다. 동경하던 동생 대신, 보살펴주어야 할, 사랑스런 그대가 있었다.

동생은, 체페슈의 가주는, 미워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기억을 잃은 자신이어도 자신은 그녀의 동생이니, 미워하지 말아달라고, 좋아해줄 필요는 없으니까 미워하지는 말아달라고 그리도 몇 번이고 속삭이던 동생의 모습은 지금도 잊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가슴을 꼭 부여잡았다. 두근두근. 그 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속이 콱 막히고는 해서.

그녀는 지금의 동생이 좋았다. 난생 처음 해보는 가주 대리역도 처음엔 어려웠으나, 매일 밤 그녀를 맞이해주는 동생을 보면 그런 것 쯤 다 잊게 되었다.

동생은 기억을 잃었어도 그녀의 동생이었다. 다른 얘기가 아니라, 매일 밤 그녀가 찾아가 얘기해주는 것들을 무척 빠르게 스펀지마냥 흡수하는 걸 보면 그랬다.

그녀가 동경하던 동생이었다. 동시에 그녀가 아끼는 동생이었다.

처음에는 모성애라고 생각했다. 약해진 동생을 볼 때마다 가슴이 간질거리는 그것이.

하지만 그게 아니란 걸 깨달은 것도 금방이었다. 매일 밤 그녀의 손길에 편히 머리를 기대는 동생을 볼 때면, 혹은 가볍게 이마에 입 맞춤 할 때면, 동생이 나른하게 웃어줄 때면…. 아랫배가 꾹 당기는 것을.

잘 자란 인삿말을 나누고 방을 나서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확인해보면, 어느샌가 허벅지까지 습기로 가득차 있음을 어찌 모른 척 할까.

다만 그녀는 그것이 사랑이라 여기지 않았다.

너무 고귀하고 사랑스런 동생이었다. 게다가 남매였다.

사랑이 아니라, 동경하던 이가 한 없이 약해져 자신에게 기대는 것으로부터 쾌감을 느끼는 그녀 자신의 변태적인 기호일 뿐이라 여기기로 했다.

변태년. 그녀는 매일 밤 잠들기 전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그러고도 참지 못해서, 손장난질을 치고.

그리고.

결국 그러기를 며칠, 동생에게 아카데미 생활에 익숙해지려면 아침에 적응해야 한단 말로 밤이 오기 전에 재워놓고서.

…. 그녀는 퍼뜩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거, 아침엔 생각하지 않기로 했는데. 상스러워. 매일 밤이면, 달빛을 받고, 활성화 된 피와 욕구에 그만 참을 수 없게 된 생각들로 몸부림 치다, 결국 참지 못한 대신 밤이 아닌 시간만큼은 참아야겠다 다짐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러는지.

그녀는 발개진 얼굴을 식히려 손부채질을 마구 했다. 열이 식질 않았다. 갈증이 나고…. 이상한 소리를 하고서 자리를 비운 동생이 앉았던 자리가 보였다.

…이건 다, 동생이 이상한 소리를 해서니까.

굳이 따지자면, 그렇게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변명이었으므로.

비척비척,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난 그녀가 동생이 앉았던 자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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