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 영애의 남동생이 되었다-28화 (28/140)

EP.28 황녀 (2)

교수가 들어오고, 강의가 시작됐다.

앞줄에 앉은 생도들의 긴장이 여기까지 느껴지는 듯 했다.

아이리스 황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은은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조용히 강의에 집중하는 제국의 인재들을 보며 흐뭇해 하는 것 같았다.

실상은 절대갑이 뒷줄에 있으니 바짝 긴장하고 있는 것 뿐인데도.

굳이 그런 사실을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다만 교수의 말과 필기 소리만 가득한 나머지, 옆자리의 데이지와 작은 담소를 나누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 게 좀 불편했다.

딱히 시끄럽게 해서 미안해서 따위의 이유가 아니라, 무려 체페슈의 공작이 입을 열면 눈치 빠른 이들이 아닌 척 귀를 기울일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까지 철면피를 깔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이 부분은ㅡ.”

그러니 자연스럽게 나도 강의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린네만이라는 이름의 나이 지긋한 교수는 마탑 출신의 학자였다. 마법 고고학이 전공이며, 따라서 강의명 역시 '고대마법'이었다.

다만 고대 마법은 쓸 수 있는 사람이 극히 적고, 재능을 타고나야만 쓸 수 있었다. 교수 역시 학자로써 고대 마법을 연구했을 뿐 사용하지는 못 한다고 했다.

물론 이렇게 이론을 배워둔 경우, 일정 경지 이상의 마법사가 고유마법을 개발할 때에 도움이 되곤 하니 배워두는 게 좋다고.

다만, 애초에 고유마법을 개발할 정도라면 그마저도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했다.

이 강의를 듣고 있는 생도 중 기사 뿐 아니라 마법사 생도들 중에서도 그게 가능한 이는 없으리라.

즉 ‘고유마법’ 강의는 그냥 지루한 이론 강의였다. 강의를 듣는 생도 대부분이 딱히 얻어가는 게 없는, 학점도 얼마 안 되는 교양.

나와 아이리스 황녀가 없었다면 아마 다들 대충 듣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다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나한테는 적성이 없나?’

평범한 마법에는 그닥 재능이 없는 몸이었다.

대신 「공空」특성을 통한 허무 속성의 마력으로, 오리지널리티 있는 고유 마법이 강점이니만큼, 특별한 재능을 요구하는 고대 마법에도 적성이 있을지 모른다.

나는 교수가 보여준 고대 마법진을 종이에 따라 그렸다.

원 모양과 육망성. 고대 멸망한 왕국의 언어. 도면 자체는 간단했다.

여기서, 마법사와 마법진 사이의 ‘감응’이 이뤄지면ㅡ, 마법진이 비로소 진정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안 되네.’

나는 마법진에 손을 올리고, 마력을 흘려보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잠잠하기만 했다.

‘그럼 이렇게.’

손 끝에 흑점이 맺힌다.

「부여」를 사용해, 「감응」과 「이해」, 그리고 흑점과 나, 마법진을 「연결」했다.

정석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내 고유특성을 사용한 것이니 편법은 아니었다.

흑점이 마법진으로 스며들자, 심플한 원과 육망성으로 그려졌던 마법진의 선 하나하나가 해체됐다.

분리된 선들이 점차 형태를 바꾸고, 기하학적 형태로 얼기설기 엉켜들었다.

말로 쉬이 표현하기도 힘든 형태. 그러나 이 순간, 나는 미리 부여해두었던「이해」를 통해, 이 마법진의 모든 요소를 이해할 수 있었다.

….

ㅡ.

머릿속으로 스며드는 광대한 지식.

단 하나에 불과하나, 강력한 고대 마법의 진정한 사용법을, 그것과 ‘감응’하는 감각을 비로소 깨닫는 과정이었다.

“….”

체감상 꽤 긴 시간이었다. 아득히 많은 지식을 머리로 체화한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주변이 조용했다.

…. 강의실 내부의 시선이 모두 나를 향해 있었다. 이름도 모르는 생도부터, 교수와 데이지, 그리고 황녀까지.

“…왜 그러십니까?”

내 질문에, 황녀가 멍한 얼굴로 답했다.

“체페슈공, 당신은 정말로….”

“전하?”

“그 신성한 빛은 마치…. …네? 그치만 분명 신성할 정도로 빛나는….”

내게 말을 하다 말고, 성검에 깃든 여신이 말을 걸었는지 황녀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데이지를 보았다.

“데이지.”

“네, 네”

“어떻게 된 거야? 왜들 그리 놀라.”

“방금 주인님이 반짝 빛났잖아요…! 모르셨어요?”

“내가?”

눈 감고 있어서 몰랐다. 온 신경이 머릿속으로 스며드는 마법지식을 녹여내느라 정신이 없기도 했고.

“막, 별빛 같이 반짝이는 빛알갱이가, 주인님 주변을 맴돌았어요. 아주 환하게.”

“그래…?”

뒤에서 자신들을 감시하듯 지켜보던 공작이 갑자기 발광하면 시선이 쏠릴 법 하지.

어렴풋하게나마 나에게 쏠린 시선의 의미를 파악하고서 고개를 끄덕이는데, 입이 떡 벌어져 있던 교수가 성큼 다가왔다.

총기로 빛나는 두 눈은, 평생의 염원이 눈 앞에서 이뤄진 듯 희번득거렸다.

“어, 어, 어찌, 어떻게 사용하신, 한, 하신 겁니까?”

모든 생도들은 평등하다. 실제로 평등한가는 제쳐두고, 아무튼 그렇다.

그렇다면 평등한 생도들의 위에는 누가 있는가.

교수다.

퇴역 기사단장, 은퇴한 궁중 마법사, 마탑의 원로 등.

내로라 하는 이들을 긁어 모아 만든 교수진이다. 어지간한 생도들의 신분으론 감히 반항할 수 없다.

다만, 그런 교수들이라도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는ㅡ, 아니지. 되려 눈치를 살펴야 하는 이들이 있다.

이종족의 구역을 제외하고서, 인간의 거주구역이라고 할 법한 영토는 모조리 집어삼켜 대륙 일통을 이룬 아르카디아 황실의 적법한 구성원과ㅡ, 황실의 대륙통일을 주도한 일곱 공작이다.

즉.

교수는 눈 앞에서 벌어진 일에 눈이 돌아가서 냅다 달려들긴 했으나, 막상 마주하고 보니 상대가 자기보다 몇 단계는 더 높은 위상인 나였다.

교수가 돼서 생도에게 극존칭을 사용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평대를 하자니 명목상으로만 평등이지 현실적으로 내 위상이 너무 높다.

결국 한 바퀴 돌아 공손한 어투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빛무리 따위가 발광할 줄 알았다면 혼자 있을 때 시험해보는 건데. 마법을 사용한 것도 아니고 내 특성으로 감응이 가능한지 확인만 하려 하던 게, 생각보다 일이 커지고 말았다.

“감응이 이뤄졌습니다.”

“오, 오…! 이럴 수가…!”

교수는 눈물이라도 흘릴 기세였다.

아니. 이미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질린 듯 보고 있으니 아예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내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하, 한 번만. 한 번만 더 보여주실 수 있으신지요? 제 평생의 소원입니다….”

앞에서 이쪽을 돌아보는 생도들의 얼굴이 가관이다.

교수란 인간이 생도에게 매달리는 광경에 황당해 하면서도, 또 흰 머리 무성한 노인네가 평생의 소원이라며 애절하게 매달리니 또 얼마나 간절하면 그럴까…, 하는 표정이었다.

아마 대상이 나란 점도 작용했을테지. 누가 무릎 꿇더라도 이상할 것 없는 몸이니.

“후.”

이렇게까지 시선이 쏠리니 매몰차게 내칠수도 없었다. 옆에서 황녀도 보고 있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체페슈 공작 전하…!”

교수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교수는 희희낙락 교탁으로 돌아갔다. 자리로 돌아가고 나서야 자신의 행동을 떠올린 듯 했다. 그리곤 추태를 보였다는 듯 험험 헛기침을 하곤,

“잠시 소란이 있었군. 다시 진행하겠네.”

애써 태연한 척 강의를 이어갔다.

다만 처음과 달리 강의에 집중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범생처럼 열심히 필기하던 황녀마저, 흘끔흘끔 나를 옆에서 지켜보았지 필기하는 손은 멈춘 지 오래였다.

난감했다.

*

강의가 끝났다.아이리스 황녀가 할 말이 있다는 듯 눈치를 주긴 했으나 무시했다.

앞으로를 생각하면 친해져야 할테지만, 지금 얘기를 해봤자 고대마법의 건으로 귀찮아질 것 같았으니까.

연구실을 찾아가자, 다크써클이 퀭한 조교가 좀비마냥“으어어” 하는, 피로에 절은 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린네만 교수 계십니까.”

“헉…, 안 졸았습니다 저! …아, 손님이시군요. 교수님은 안쪽에 계십니다만…, 제가 전해드릴테니 손님의 성함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스칼렛 체페슈가 왔다고 전해주십시오.”

“스칼렛 체페슈, 알겠, 네?”

피곤에 찌든 조교의 눈이 내 가슴팍을 향했다. 각자 자신의 가문을 상징하는 휘장을 달아둔 곳이었다. 제국에 모르는 이가 없을 까마귀 모습의 휘장과, 내 얼굴을 잠깐 오가던 조교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공작 전하…!”

“호들갑 떨지 마시고 교수에게 왔다고 전하세요.”

“네, 네!”

보니까 며칠은 못 잔 거 같은데, 얼굴 하나 못 알아봤다고 문책할 생각은 없었다.

모든 생도는 평등하다는 말이 아무리 의미 없다고는 하나, 원칙적으로 최대한 그렇게 운영하려고 하곤 있으니.

나 역시 그것을 존중하기로 했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조교가 헐레벌떡 되돌아왔다. 창백한 인상으로 저렇게 뛰니 금방 쓰러질 것 같은데.

“헉, 허억…, 그, 들어오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 수고하세요.”

“헉….”

내가 목을 슬쩍 숙여 목례를 하자, 조교의 안색이 하얘졌다. 그냥 내가 눈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에 무리를 주는 모양이라 빠르게 눈 앞에서 사라져 주기로 했다….

교수 연구실로 들어가자, 교수가 나를 반겼다. 흰머리가 인상적인 린네만 교수였다.

“오셨습니까!”

단 둘이 되니 아주 극진한 태도였다.

밖의 조교의 상태를 본 직후에, 그를 그런 꼴로 만들었을 교수가 이렇듯 굽신대고 있는 상황이 조금 아이러니 했으나, 나라고 해결해줄 수 있는 건 아니었기에 따로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교수는 싱글벙글 웃으며 나를 자연스럽게 상석으로 안내했다. 나도 자연스럽게 상석을 차지했다.

“그래서. 제가 뭘 하면 됩니까?”

이렇듯 나와 교수 사이는 확고한 상하관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교수는 내게 연구 제의를 해 왔다. 그만큼 스스로의 분야에는 진심인 사람이란 뜻이겠지.

“흠흠. 일단 한 번만 다시 재현해주시겠습니까?”

“이것 말입니까?”

나는 「이해」하였던 마법진을 다시 손 위로 그렸다.

「달의 은총」.

흡혈귀인 내게 참으로 어울리는 종류의 마법이라고 생각했다.

손 위로 그려진 마법진이, 이미 한 번 감응을 통해 펼쳐졌었기 때문인지 곧바로 빛무리로 화해 내 몸을 맴돌았다.

달빛을 머금은 듯한 빛무리 덕에, 마치 밤시간이 된 듯 몸에 활기가 도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마법이었다.

“오오…. 살아생전 두 눈으로 직접 고대 마법을 실현하는 것을 보게 될 줄이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교수는 거의 광신도와 가까운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솔직히 좀 부담스러웠다.

*

용사 아이리스는 자신의 기숙사로 돌아왔다.

아까부터 머릿속에서 자꾸 웅웅 울리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내 은혜를 받았으면서, 다른 여신한테서 은총을 또 받아? 나쁜놈!』

“진정하세요, 여신님.”

아까부터 잔뜩 성이 난 여신을 어찌 달래야 할 지 고민하면서도, 아이리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여신님의 은혜를 입어 악마를 토벌한 체페슈공이야말로 진정한 용사일텐데. 어째서 숨기는걸까.’

자신보다도 더욱 뛰어난 용사일터인 스칼렛에 대한 존경심을 속으로 갈무리하며, 아이리스는 여신을 달래기 위해 진땀을 빼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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