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2 대수림 (3)
악마.
지금 들려선 안 될 그 단어에 당황하면서도, 겉으론 평정을 유지했다.
“마족과의 계약이라. 싹수부터가 노란 놈이었군. 관련된 서책이 있다면 더 가져오도록.”
이만 가봐라.
내 명령에 까마귀가 그림자 속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하.”
나는 긴장이 풀려 한숨을 탁 뱉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악마라는 단어를 전혀 생각도 못 한 곳에서, 생각도 못 한 시기에 들어버렸으니, 순간 머리가 굳어버리는 줄 알았다.
서열 33위의 악마 가프.
스토리상 가장 처음 등장하는 악마이며, 그 등장 시기는 여주인공인 루나 테일러가 입학하고서 한 달 뒤이다….
그것이 내가 아는 정보였다.
아무리 내가 아는 대부분의 정보가 쓸모 없어졌다고 한들, 설마 당장 기한이 1년이나 남은 시점에서 악마의 흔적이 발견 된다?
‘번거롭게.’
처음엔 결투 자리에서 쳐죽일 셈이었거늘, 계획을 바꿔야 할 판이다.
물론 놈을 살려둘 생각은 없다. 다만 그 시점을 뒤로 좀 늦추는 것 뿐.
쯧.
그래도 일단 놈에게서 최대한 정보를 뽑아내야 했다. 고문을 하든, 아니면 구울로 만들어버리든 해서.
여왕도 더 이상 제 자식을 챙기려 들진 않은 것 같으니 놈의 신병은 내 것이라고 봐도 될 테지.
주의해야 할 건….
‘죽여버리지 않게 힘조절인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철저히 밟아줄 셈이었거늘.
나는 아쉬움에 혀를 찼다.
그렇다면 죽이지 않고서 최대한 괴롭히고 싶어도, 주변의 시선을 아예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 날은 아이리스도, 안나도 모두 참관하러 올테니까.
주말.
태양이 가장 높이 떠 있을 시간, 나는 눈살을 찌푸린 채 양산을 쓰고 투덜거리는 누님을 대동하여, 결투장으로 향했다.
소문이 퍼졌을텐데도, 그 날 내가 들었던 모욕까지도 알려진 듯 구경하러 온 참관인은 아이리스와 안나, 사샤와 크리스티나 뿐.
구경거리 삼기에는 내가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왔군.”
내가 오기를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길다란 금발을 뒤로 넘긴 놈이 내 뒤에 서 있던 누님을 바라보며 상쾌하게 웃었다.
나는 불쾌했다만.
“거기서 기다리시오, 레티시아 공녀. 놈을 쓰러뜨리고, 당신을 데려가겠소.”
“불쾌해.”
역겹다.
누님도 같은 감상인지, 내 옷자락을 잡고 놈을 살벌하게 노려봤다.
불쌍한 누님을 내 뒤로 숨기고, 나는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글쎄. 어미한테서도 버려진 고아새끼가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모르겠구나.”
“…뭐라?”
“듣지 못하였는가. 과연. 그 길쭉한 귀는 장식이었나? 그런 청력으로 어찌 숲의 엘프를 자처하는지 모르겠군. 아니, 정녕 엘프가 맞나?”
“네놈…!”
“어미도 아비도 없으니 과연 엘프가 정말 맞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겠군. 참으로 기구한 삶이로구나.”
“이 새끼가!”
드디어 고귀한 척 있는대로 폼을 재던 놈이 이성을 잃고 내게 덤벼들었다.
이거지.
어딜 역사라곤 30년밖에 안 된 정글 촌뜨기 주제에.
“크아악! 죽여버리겠다!”
놈의 주변에 돌풍이 불었다. 바람의 상급정령인 듯 했다. 상급정령을 부리는 것만 봐도 나름의 소질은 있는 듯 하나ㅡ.
차르르륵.
그림자가 촉수처럼 일렁거렸다.
“「부여」”
나는 들으라는 듯 읊조렸다.
“죽어라, 체페슈!”
“──「신속」”
푹. 푸욱ㅡ, 푹.
“커, 억…?”
느릿하게, 먹잇감이 다가오길 기다리던 그림자들을 경계하듯, 놈은 멀리서 이쪽을 향해 바람의 칼날을 날렸으나,
“이건, 이게…?”
음속조차 돌파한 그림자의 칼날이, 한 수 더 빨랐다.
놈의 바람 칼날이 손에서 쏘아지고, 동시에 나의 그림자가 바람을 가르고ㅡ, 놈의 손목의 힘줄을 끊었다.
“느리더군.”
“크, 윽!”
근성은 있다고 해야할지, 포기를 모르고서 바람의 탄환을 만들어내는 놈.
실제 원소가 어떻든, 마법으로 불러들인 마법은 마력속성 탓에 색깔을 지닌다.
반대로 실제로 원소의 힘을 빌리는 정령술로 불러들인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는 그렇다.
“「부여」”
놈이 열두개의 탄환을 나를 향해 쏘았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그림자가 순식간에 나를 감싸는 장막으로 변했다.
“「반사」”
놈의 탄환 열두개가 고스란히 반사되었고, 놈은 이번엔 아예 정령을 현신시켜 그것을 급하게 쳐냈다.
물론 가만히 지켜볼 생각은 없었다.
나는 손바닥 안에 흑점을 띄웠다.
“「부여」”
손가락을 놈을 향해 내밀었다.
놈을 능욕하기에 무척 좋은 방법이 떠올랐기에.
“「관통」”
타앙─.
마치 총소리처럼, 귀가 얼얼해지는 소리와 함께, 손 끝에 맺혔던 점이, 어느샌가 하나의 선이 되어 놈의 우측 어깨를 꿰뚫었다.
“크윽! 크아악! 스칼레에에엣…!”
나는 멈추지 않았다.
“「부여」”
몇 번의 교전만으로 만신창이가 된 놈이, 처절하게 내게 달려든다. 원거리에서 붙어봐야 승산이 없다는 건가.
나는 픽 웃었다.
“「마비」”
탕!
다시 뻗어나간 선이, 놈의 복부를 뚫었다.
우뚝. 「마비」에 당한 놈의 몸이 굳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지금쯤이면, 네놈의 고향도 불타고 있을테지.”
거짓말이다. 교역만 끊었다 뿐이지, 무력적인 보복은 아직 하지 않았다.
하지만 놈에게는 잘 먹힌 모양이었다.
“무슨, 무슨, 크흑! 무슨 소리냐, 그게!”
입에서 피를 토하면서도, 이를 악 물고서 내게 소리친다. 근성 하나는 훌륭한데.
그 근성을 악마와 계약하는 쪽으로 쓰려하던 게 문제지만.
“네놈이 제일 잘 알터인데. 그렇지 않나?”
“씨발, 씨발! 내가, 크흡…! 널 모욕한 것, 때문이냐?”
물론 그것도 있고.
나는 놈에게 다가갔다. 놈은 원하던만큼 내가 거리를 좁혀줬음에도, 되려 뒷걸음을 치려했다.
마비 때문에 그마저도 못 했지만.
나는 놈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것 뿐이었다면 네놈의 목 하나로 끝났을 것을. 어찌 악마 따위와 계약을 하려 했느냐. 더럽고 추잡한 것.”
“…!”
놈의 눈동자가, 드디어 공포로 물들었다. 그것을 어찌 알았느냐는 것이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준비해온 것은 이게 끝인가? 아직 계약을 진행하지는 않은 모양이군.”
그렇다면 여기서 결투는 끝이다.
놈을 기절시키고 구속해 마무리 하려던 그 때였다.
“크, 크크. 전부, 전부 알고 있었나?”
당했다는 듯 웃는 놈. 마비가 풀린 듯, 온 몸에서 넘실거리는 마기를 통제하지 못하는 듯 줄줄 흘려대며, 놈이 소리쳤다.
보아하니 이미 악마와 계약을 끝낸 지 오래인 듯 했다.
“네놈 때문에 내 계획이 전부 망했다! 레티시아를 데려가 악의 모태로 삼으려 했던 것도! 왕국을 이어받아 대수림을 악의 수동으로 만드려 했던 것도!”
….
“부알님의 권능이라면! 레티시아가 내게 반하게 하는 것도 가능했을텐데! 어째서지? 어째서 통하지 않았지? 아아! 이제야 알았다! 그녀는 바로 너를ㅡ!”
스걱───.
놈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 했다.
일렁이는 그림자만이, 방금 놈의 성대가 잘렸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나는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말이 많아서 일단 성대부터 잘랐다. 재생할 생각은 말도록. 다시 베어내기 귀찮으니.”
“이. 노옴…!”
놈은 곧바로 성대를 재생시키고, 흘러넘치는 마기를 터뜨려 몸을 부풀렸다.
쯧. 나는 혀를 찼다.
“이제라도 네놈을 죽이고 다시 계획대로 진행하겠다! 죽어라!”
“여전히 수준 차이조차 파악하지 못 하는군.”
──.
툭.
놈의 몸은, 내 코 앞에서 멈춰섰다. 굳었다는 게 정확하리라.
팟, 파앗─.
해체당해, 무너져 내리는 육체.
소리조차 나지 않았던, 수십 번의 난도질.
이게 과연 아까까지의 그 놈이 맞나 싶을 정도로, 육편이나 다름 없게 해체 당한 놈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숨은 붙었나.”
끈질기게도.
그래도 아직 써먹을 구석은 남았으니.
손을 들어올려, 점을 연결해 「선」을 그렸다.
「부여」─「구속」「분리」
구속 대상은 놈의 육체. 분리 대상은 악마와 놈 사이의 계약 관계.
길다란 선이 놈의 몸을 구속했다.
“돌아가지.”
결투는 끝났다.
*
또각, 또각.
체페슈 가의 별관, 그 지하에 위치한 감옥으로 내려가는 계단.
“…흐응.”
오늘 낮, 사랑하는 동생을 모욕했다가, 동생의 손에 의해 제압 되었던 남자가 갇힌 곳.
이미 아카데미에서는 그의 퇴학 절차가 진행되고 있을 터였다.
결투란 그런 의미이니까.
레티시아는 싸늘한 얼굴로 콧소리를 흘리며, 남자가 갇힌 옥 앞에 도달했다.
“상태가 말이 아니네?”
“…….”
간수역인, ‘발톱’의 까마귀가 레티시아를 향해 목례했다.
감옥 안에 구속당한 남자는, 레티시아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레티, 시아. 레티시아…! 나를, 나를 구하러 와주었나…?!”
간절한 부름이었다. 레티시아는 빙긋 미소 지었다.
그리고 옆에 서 있던 까마귀에게 말했다.
“쟤, 왜 성대가 멀쩡해?”
“시정하겠습니다.”
끼익. 철창을 열고 들어간 까마귀가, 손톱을 세워 남자의 목을 긋는다.
찌이익.
순식간에 성대를 다시 잃어버린 남자가,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끄윽 끄으윽 몸부림 친다.
생글생글.
레티시아는 다만 환하게 웃으며 남자의 추태를 지켜보다 말했다.
“내 동생의 자비 덕에 네가 산 줄 알렴.”
“끄으윽! 끄윽, 흐으윽!”
레티시아는 까마귀를 불렀다.
“있지. 나 고문은 처음 해봐. 죽으면 어떡하지?”
“가르쳐드리겠습니다.”
“흐응. 좋아. 스칼렛이 죽이면 안 된다고 했으니까, 똑바로 가르쳐야해?”
그녀가 고문 도구를 들었다.
“아까 보니까 이젠 성대를 회복하는 데에 세 시간쯤 걸리더라? 지금부터 세 시간동안 고문할테니까, 세 시간 후에 질문에 답할 생각이 있으면 말해줘?”
끄아아악ㅡ.
남자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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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티시아 체페슈
근력 ▶ 165
민첩 ▶ 182
체력 ▶ 153
내구 ▶ 161
마력 ▶ 135
상태: 분노, 집착, 헌신, 헌신, 헌신, 집착
특성: 「혈귀(S)」「형形(S+)」「기사(B)」「흡혈공주(S)」「고문기술자(C)」「요녀(C)」
고유특성: 「팔방미인(A)」「경국지색(A)」「헌신(A)」「웨폰마스터(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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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비활성화 상태이던 고유특성, 「헌신」.
오직 사랑하는 동생을 위한다는 마음(獻身). 그것 하나만으로, 원래는 B랭크였던 그것이 A랭크의 고유특성으로 진화했다.
「헌신」의 대상자를 위한 행동을 했을 때, 행위의 숙련도와 특성 획득 확률 증가.
실제로 침대 위에서 동생을 기쁘게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덕분에, 「요녀」특성까지 생겼다.
“이거, 이렇게, 맞아?”
“맞습니다. 소질이 있으시군요.”
뿌득.
레티시아는 생긋 웃었다.
‘누구 맘대로 내 동생을 욕해?’
그게 누가 됐든,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레티시아는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