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4 악마, 부알 (1)
엘프들은 항복했다.
가망이 없음을 느낀 것이다. 최후의 발악으로 상급 정령사 30명이 모여, 대정령술을 사용해 숲을 집어삼킨 어둠을 몰아내려 했으나….
「하찮다.」
남자의 심드렁한 목소리와 함께, 과연 이 정도라면 상대가 누구여도 치명타를 입힐 수 있을 것으로 보이던 정령술조차 어둠으로 집어삼켜 버리는 것을 보곤, 일말의 희망조차 버리고 말았다.
천 년 전부터 살아온 늙은 원로들도, 새롭게 태어난 어린 아이들도 모두 느낀 것이다.
그들의 왕이 돌아온 것을.
“끝까지 항전을 주장한 이들의 목을 바칠테니, 자신들의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남자는, 여왕이 앉았던 옥좌에 거리낌 없이 앉아서, 목숨만은 살려달라 고개를 조아리는 엘프들을 내려다보았다.
남자의 옆에는, 마치 왕을 모시는 시녀와 같이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레티시아의 백금발이 달빛을 받아 은은하고 신비로운 빛을 머금었다면, 그녀의 금발은 햇빛을 받아 선명하게 반짝거렸다.
녹색 눈동자와 오똑한 코. 우유 같은 살결에, 농익은 여인의 몸과, 그 굴곡을 훤히 드러내는 새하얀 드레스.
남자가 앉아있는 옥좌의 원 주인─스카디·아셰라드 여왕.
그녀는 자신의 충직한 신하였던 이들을 경멸하듯 쏘아보았다. 한때 그들을 믿었던 때도 있었으나, 기회가 생기자마자 그녀의 옥좌를 찬탈하려 한 배신자임을 알았기에.
“폐하.”
“음.”
스카디는 남자─, 스칼렛에게 진언했다.
엘프의 여왕인 그녀가 입에 담은 칭호에 스칼렛이 떨떠름한 얼굴을 짓긴 했으나, 그들의 왕을 자처했으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니고,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의 처우를 제게 맡겨주십시오.”
“그리 하라. 헌데….”
그 정도쯤이야 별 문제 없었다. 애초에 스칼렛은 대수림에 군림할 생각이 없었다. 여전히 이곳의 여왕은 스카디일 것이고, 스칼렛은 그녀의 섬김만 받으면 됐다.
그것보단 공손하기 짝이 없는 여왕의 태도에, 스칼렛이 미묘한 얼굴로 물었다.
“그대의 나이가 몇이지?”
“……폐하보다 조금 더 많습니다.”
“그게 얼마인지 묻는 것이다만.”
여왕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자, 스칼렛이 한숨을 쉬었다.
“편히 대하도록. 그대들의 왕이라고 자처하긴 했으나, 나는 딱히 대수림의 통치권에 관심 없다.”
“어찌 제가 진조(眞祖)께 말을 놓겠습니까…?”
“쯧.”
“네, 네…. 아니, 알겠네.”
“됐다. 어색해서 못 들어주겠군.”
이는 스칼렛이 제국의 공작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스칼렛이 진조(眞祖)로써 진정 모든 인외종의 적법한 왕을 자처한다면, 그 영역이 단순 프레이르 대수림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미 체페슈와 동맹인 크레펠트 대수림은 물론이고, 크레펠트와 프레이르를 제외한 나머지 세 대수림과, 그 외 작은 엘프 부족들이 모인 숲.
거기에 드워프 왕국과, 그들의 영토인 광산. 웨어울프의 산맥과 대초원까지.
제국이 삼키지 못한, 대륙의 나머지 영토들이 모두 체페슈의 산하에 들어오게 된다.
그랬다간 제국 내에서 체페슈를 귀족으로 둘 수 없게 된다.
황실과 북부, 그리고 체페슈와 프리드리히의 마탑으로 겨우 균형을 이루던 제국의 권력이 단숨에 무너져버린다.
체페슈가 지금껏 인외종과의 화합을 상징하고, 드워프 광산과 엘프 수림과의 교역을 담당하곤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중개해주는 역할이었을 뿐.
이미 체페슈는 제국 내에서도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귀족가다.
비록 가주가 두 번 바뀌긴 했으나, 그 불멸성에 대한 경외심으로 ‘천년공’이라고도 불리는 게 체페슈였다.
제국에게 체페슈란 너무 커져도, 그렇다고 아예 없어지거나 약해져도 안 되는, 체페슈가 없는 제국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당연하고도 필수적인 존재였다.
그런 상황에서 체페슈가 왕위에 오른다면, 대륙이 두 개로 나뉘는 것은 필연이다.
대륙의 태양인 아르카디아 제국과, 대륙의 달인 체페슈로.
‘대륙이 혼란스러워지면 좋을 게 없어.’
언제 마왕의 잔재들이 나타날 지 모른다.
마왕 본인이 강림하기라도 했을 때를 대비해 있는 전력은 모두 온전히 긁어모아야 할 판국에, 혼란에 빠진 대륙이 제 힘 갉아먹기를 하게 둘 순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옥좌에 앉을 생각이 없으니 그리 알도록.”
그래도 여지를 남겨두기로 했다.
아예 그가 왕위를 거부해버린다면, 그건 스칼렛이 퍼뜨릴 수 있는 영향력을 그 스스로 포기해버리는 짓이었다.
언제고 그가 적법한 군주로써, 대륙의 달로써 떠오를지도 모른다는 말을 해둠으로써, 이미 대부분의 실권을 잃은 채 외세의 힘을 빌려 반란을 제압한 스카디 여왕은 오히려 그 정통성과 왕권이 견고해지게 된다.
어찌 진조가 대수림의 통치자로 인정한 여왕의 정통성과 권위를 부정할 수 있을까.
여왕과 피의 맹약을 통한 주종관계만 확실히 해두면 그의 영향력을 상실할 일도 없게 된다.
거기에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한 소문이 알음알음 다른 대수림과 드워프, 웨어울프의 영역에도 흘러들어갈테지.
그 소문이 제국 안으로 들어오면 혼란이 일 수도 있겠으나…, 그 정도 소란까지는 쉬이 잠재울 수 있다.
‘제국 내부로는 황녀와 북부의 검성, 마탑주의 힘을 빌리고….’
어차피 성국에서야 마왕과의 싸움에서 당연히 성녀를 빌려줄 것이다.
그리고 진조(眞祖)인 스칼렛의 명령만 있다면, 원래의 스토리대로라면 아예 접점도 없었을, 힘을 빌려주는 일조차 없던 인외종의 힘을 빌릴 수도 있을 것이다.
원작은 비틀렸다.
허나 스칼렛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아는 정보도 많이 없던 탓이었다.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떠올리며, 스칼렛은 입을 열었다.
“네 아들의 목숨은 아직 붙어있다만, 나는 그것을 살려둘 생각이 없다.”
“예….”
“살려줬으면 하는 마음은 없나?”
스카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들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고민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어떻게 대답하는 쪽이 위대한 진조의 마음에 들지를 가늠하는 눈빛이었다.
그것을 스칼렛이 모를 리 없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 그가 픽 웃었다.
“어설프게 머리를 굴리려는 시점에서 이미 대답은 나왔군.”
“….”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니로써 아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고민한 것이 아니라, 어떤 대답이 권력자의 총애를 받을 수 있을까 고민한 시점에서, 그녀가 아들의 목숨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없음이 드러난 것이었으니까.
“오히려 그 편이 낫군.”
스칼렛의 말은 진심이었다.
만일 그녀에게 모성애라는 인간적인 면모가 남아있었더라면, 언제 어떻게, 아들을 죽였다는 원한으로 배신할 지 모른다.
이 경우는 피의 맹약조차 소용이 없다. 오직 복수를 위해 스스로의 목숨마저 불태울 것이기에.
허나 그녀가 권력을 탐하고, 스스로의 명예를 좇는 부류인 냉혈한이라면, 철혈의 여왕이라면 얘기는 다르다.
피의 맹약을 맺은 순간, 배신이라는 선택지 자체는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오직 그녀의 주인인 스칼렛의 총애를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들놈이 친 사고가 워낙 커서 모성애조차 모두 증발한 것인지, 아님 애초부터 그런 여자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스칼렛이 손을 뻗어, 스카디의 풍만한 젖가슴을 살짝 주물렀다.
움찔. 그녀는 몸을 떨면서도, 쉬이 뒤로 빼지 않았다. 무덤덤하게 눈을 감고 스칼렛의 옆을 지켰다.
‘권력과 사랑에 빠진 여자를 자빠뜨리는 것도 나름 재미있을 것 같고.’
취할 건 취한다.
여왕과 그의 사이에서 사랑따윈 없었다. 그러니 오히려 편했다. 권력을 주고, 받는 대신 충성하는 관계.
그 관계 사이에서 어떤 일이 있든, 그 사이에 사랑이니 뭐니 하는 풋풋한 감정이 필 일은 없다.
그거면 충분했다.
“뒷처리는 맡기마.”
귀족들을 처분하는 것도, 혼란스러워진 왕국을 정리하는 것도.
여왕은 눈을 감고 대답했다.
“네.”
*
귀찮은 일들은 모두 여왕에게 넘겨줬으니, 나는 까마귀들을 부려 궁전을 수색하도록 시켰다.
여왕은 막지 않았다. 막을 수 없었다, 라는 게 더 옳았다.
어찌 그녀가 나를 막을 수 있을까. 이미 모든 주도권이 내 손 안에 있는데.
까마귀들이 궁전을 수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왕자가 악마와의 계약을 위해 사용했던 제물의 유해와, 악마의 환심을 사기 위해 국고에서 훔쳐왔을 보물들이 줄줄이 내 앞에 놓이기 시작했다.
“….”
내 앞이라 티는 내지 않아도, 스카디 여왕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분노가 머리 끝까지 차올랐음에도 내 앞이라고 참느라, 입술을 짓씹은 나머지 선명한 핏줄기가 입가에 흘렀다.
쯧.
이 여자가 무슨 잘못이겠느냐만. 괜히 불쌍한 마음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라, 손수건을 꺼냈다.
“닦아라.”
“…감사합니다.”
“마기가 서린 물건에, 계약자의 가족인 네 피가 묻었다가 괜히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주의하는 것 뿐이야.”
내가 말해놓고도 재수 없는 대사였다.
다만 어디까지나 사실만을 말한것이다. 스카디는 부알의 계약자인 놈의 어미였고, 그럼 부알의 마기가 스카디의 피에 반응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부알을 이끌어내 죽여버릴 계획이긴 했지만….
여기서는 소용 없다. 왕자놈을 데려와야 하니까.
“이게 다인가?”
“예. 심문 과정에서 놈이 말했던 것들은 모두 가져온 듯 합니다.”
탐색에 특화된 ‘눈’이 하는 말이니만큼 아마 사실이리라.
“수고했다.”
그림자가 모아둔 것들을 집어삼켰다. 그것들은 한동안 그림자 속 아공간에 잘 보관 될 예정이었다.
부알을 불러내기 위한 재료가 모두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