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 영애의 남동생이 되었다-53화 (53/140)

EP.53 설원의 공주 (2)

긴 설명이 끝났다.

“….”

처음엔 단순히 내가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 라는 줄로만 알고 반발하려던 안나는, 내 설명이 끝나 갈 무렵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안나의 옆을 지키던 사샤는, 지금의 얘기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맞는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이다.

하긴.

크게 보자면 제국, 그것을 넘어서 대륙과 세계의 안위와 명운이 걸린 일이기도 하니까.

“…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 겁니까?”

너무 많은 정보에 혼란스러워 보이는 안나를 대신해 사샤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나는 잠시 정보를 정리했다.

일단 나, 누님, 데이지에….

성국의 교황과 성녀, 용사인 아이리스와, 황제. 거기에 테일러 영지에 있을 누나까지.

“일단 제가 알기론 일곱 명입니다만.”

“일곱….”

“크로이체프 대공과 프리드리히 공작이 알고 있을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아버지가 언급 되자 고개를 든 안나가, 제 입술을 손가락으로 톡톡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그런 것을. 제게. 해주셔도. 되는겁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런 얘기라도 해야 납득해주실 것 같아서요.”

나는 이미 마음에 품은 여자가 여럿 있다. 더 많은 여자를 들이는 것은 그들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다.

아이리스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런 논지로 안나에게 답했다.

다만 안나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그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뭔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체페슈 공작에게 어중간한 저주 따위가 통할 리 없다. ‘마왕’씩이나 되는 존재가 건 것이기 때문에 통한 것이다.

적어도 대륙 내에 그것을 해주할 수 있는 성직자는 없다.

적어도 그 정도의 설명은 해주어야, 안나가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

납득한 기색은 아니었다.

다만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릴 느낌도 아니었다.

“….”

물론.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소녀의 첫사랑을 매몰차게 거절해버린 것이니까.

그래도 이 정도면….

“납득 못하겠습니다.”

“…네?”

“공녀님…!”

이 정도면 됐겠지, 라고 생각할 때.

고개를 당당히 들고, 아까까지 침울하고 심각하던 표정은 온데간데 없이 되려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말한 안나가, 기겁하며 달라붙는 사샤를 옆으로 꾹 밀었다.

“납득. 못하겠습니다.”

“공녀…? 무엇을요?”

“받아달란 것이 아닙니다.”

안나의 가라앉았던 눈빛이 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그녀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올곧고, 당당한 기세에 잠시 말문이 막히자, 안나가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받아주실 때까지. 옆에만. 있겠습니다.”

“공녀님!”

그게 무슨 소리시냐고, 크로이체프의 후계자가 어찌 그렇게 스스로를 낮추시냐고, 기겁을 한 사샤가 안나의 귀에 속닥댔지만.

안나는 대답 대신 사샤를 다시 꾹 밀었다.

아까도 분명 곁에만 있게 해달라 하긴 했지만…. 나는 아이리스처럼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기 위한 교제 신청이리라 생각했다.

세상 어느 공녀가, 굳이 마음을 받아줄 필요도 없으니 옆에 있게만 해달라고 말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의 태도는 실로 진지했다.

진지하게, 대륙의 균형을 이루는 제국 3대 가문 중 하나의 후계자인 몸으로, 비굴하게 내게 매달린 것이다.

그 자세와 태도는 일견 당당하고 올곧아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겉보기일 뿐이다. 그녀의 말은, 그녀에게도 더 없는 치욕이고 수치일 터.

솔직히 당황스럽다.

그렇다고 티를 낼 수도 없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서.

“공녀. 그건 너무….”

“첩이라도 상관 없습니다. 다섯 번째든. 아니면 여섯 번째, 일곱 번째도. 괜찮습니다.”

“아니.”

“공녀니임…!”

나는 오랜만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이건 받아도 문제고 안 받아줘도 문젠데.

받아주면, 차기 북부 대공을 대여섯번째 첩으로 들였으니 문제고, 받아주지 않으면 이 정도까지 굽히고 들어오는 여인을 모욕한 것과 다름 없다….

이게 의도한 건지, 아니면 그냥 너무 솔직하게 들이박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슬쩍 사샤를 흘겨보자 그녀 역시 안색이 파리하게 질린 상태다.

“…사샤.”

“네, 네! 전하!”

“일부러는 아니죠?”

“그럼요!!”

음.

그렇군.

고의는 아니라고….

“하하….”

나는 사샤가 타 온 커피를 홀짝댔다.

안나의 시선이 불안으로 떨렸다.

사샤의 눈동자는 더더욱 떨렸다.

….

“공녀?”

“네.”

“솔직히 방금 공녀가 한 말에는 문제가 꽤 많아요.”

“그렇습니까…?”

옆에서 사샤가 발을 동동 구르니 일단 이 문제는 넘어가자. 사샤가 알아서 설명해주겠지.

나는 안나 믿어. 원래 사랑은 허리케인이라고 하잖아. 눈이 멀어서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게 됐을 뿐이야. 설명해주면 이해하겠지….

“이 얘기는 우리끼리의 비밀로 하죠.”

“네….”

시무룩해진 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볍게 한숨을 쉰 내가, 등받이에 등을 천천히 기댔다. 조금 무례하게 보일 수도 있어도, 안나도 사샤도 딱히 그것을 지적하진 않았다.

“후.”

흠칫.

한숨소리에 둘의 어깨가 떨린다.

“…일단. 네…. 공녀의 뜻은 잘 알았습니다만.”

“….”

눈망울이 그렁그렁 하다.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약해지긴 한다. 이렇게까지 매달리는데 계속해서 쳐내야 하나 싶고….

결국. 타협안을 내밀기로 했다.

“일단은 시련부터 극복하고 생각합시다. 이미 아이리스…, 황녀 전하와 서로 알아가기 위한 교제 중인데, 여기서 새롭게 여자를 들이는 것도 못 할 짓이니까요.”

“아, 네. 그럼….”

“얘기가 잘 되든 안 되든, 그건 그 이후에 봅시다. 그 전까지는 그냥…, 이전까지처럼. 아시겠죠?”

아주 만족스럽진 않더라도, 아까보단 한층 펴진 표정으로 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얘기는 이쯤 할까요. 다음에 또 차 마시러 오겠습니다.”

안나가 일어서려 하길래 손을 저으며 다시 앉혔다.

허리를 꾸벅꾸벅 숙이는 사샤가 처량해 보였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사샤의 어깨를 토닥이고 말했다.

“잘 설명해줘요.”

“네. 네에….”

아무래도 좆 된 거 같다.

사샤의 얼굴에는 꼭 그렇게 쓰여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둘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괜스레 두통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갑자기 확 피곤해지는 것 같아, 나는 누님과 데이지가 잠들어 있는 사이로 꾸물꾸물 몸을 구겨 넣었다.

한숨 자자….

*

꿈을 꿨다.

밤과 그림자의 주인인 흡혈귀가 꿈이라니.

아무튼 꿈을 꿨다.

“병신고자새끼.”

대뜸 꿈 속에서 전생의 누나가 나를 욕했다.

내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돌았냐며 중지를 쳐들었음에도, 무지한 축생은 입을 나불댔다.

“에휴, 병신. 그러니까 얼굴값 못한다는 소리나 듣지.”

이 개 씨발년.

선빵을 두대나 맞아서 기분이 나빠진 내가 욕을 박자 누나가 거만하게 픽 웃고는.

“맨날 예쁜 여자 따먹고 싶다 노래를 부르던 뇌에 좆 달린 새끼가 이제 와서 여자를 가려? 고추 떼 십쌔야.”

아니.

뭘 안다고 지껄이세요.

짜증이 확 치밀어 한 마디 해주려던 때에.

“읏.”

결국 누나에게 제대로 된 욕도 못 박은 채로 잠이 깨고 말았다.

잠만 안 깼다면 남매끼리 패드립 대전이라도 벌였을지도 모르는데.

“츕, 츄으….”

아랫도리가 축축해 슬쩍 내려다보니, 기둥에 뺨을 비비며 혀를 낼름거리던 누님과 눈이 마주쳤다.

좀 더 아래 가랑이 사이로는 데이지가 파고들어서 쪽쪽 거리고 있었고….

“깼니?”

“깼어.”

츕.

가볍게 첨단을 문 누님의 구강 봉사에, 내가 자는 사이 꽤 오래 자극이 됐는지 빠르게 사정감이 올랐다.

“삼켜.”

“으붑.”

그대로 혓바닥 위로 사정.

아침 일과를 끝내곤, 헐벗은 두 여자를 차례대로 안아주었다.

섹스 말고 허그로.

“앗. 커졌다.”

“아프시죠 주인님? 빨리 가라앉혀드릴게요.”

그러다 다시 손장난질을 치긴 했지만.

아무튼 떡은 안 쳤으니까 세이브 아닐까?

아마도.

욕실에 들어가서도 손장난질은 계속 이어졌다.

“여기가 좋아?”

“주인님 여기 좋아요?”

뭐 그런.

평생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좋을텐데. 그러려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욕실에서 수 없이 많은 유혹을 받아냈으나 일단 꾹 참고.

“나 오늘 바빠.”

“으으응. 한 번만. 응?”

“어젯밤에 그렇게 해놓고?”

“누나는 그런 거 몰라요.”

누나라.

나는 품에 몸을 비비며 애교를 부리는 누님을 내려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자연스럽게 입술을 포개는 누님의 엉덩이를 토닥여주며, 나는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누나가 누님처럼“나는 그런 거 몰라요~” 따위의 소리를 한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할까?

한 번 상상해보도록 하자.

음.

씨발.

“레티 누님 최고야.”

“갑자기?”

말론 그렇게 하면서 입꼬리가 실룩거린다. 귀엽기는.

“못 참겠다.”

“엣. 앗, 잠깐만. 안 한다며.”

“하자며.”

“그거 그냥 골리려구 장난친 건뎃…, 흐앙!”

결국 욕실에서 해버렸다.

“저도요!”

3P 했다.

아무튼 주말이었기 때문에 시간은 넉넉했다.

나 말고 누님과 데이지는.

나는.

“가볼거야? 테일러 영지.”

누나를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원래는 여름 방학 쯤 만나려 했는데, 루나 테일러가 내 친누나라는 것도 확실해졌고, 천칭의 시련 건도 있으니 빠르게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고개를 끄덕인 내 뺨을 살살 쓰다듬던 누님이, 뺨을 꾹 꼬집곤.

“여자 꼬시러 가?”

나는 잠시 고민했다.

과연 누나를 ‘여자’라는 생물체의 분류 기준으로 분류할 수 있을까?

….

“응. 일단은.”

“질투나.”

누님의 반짝거리는 눈동자에 살짝 음영이 졌다.

누님이 흑화하는 것을 바라지 않던 나는 엉덩이를 살짝 만져주며 속삭였다.

“사랑해.”

“그런 말 나빠….”

그래도.

말을 덧붙인 누님이 내 가슴팍에 뺨을 비비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난 스칼렛밖에 없으니까. 이해할게.”

사람 미치게 만드는 누님 같으니라고.

*

워프 게이트를 탔다.

처음에 테일러 영지와 개통 된 게이트가 없다길래 그냥 그림자 타고 이동해야 하나 했지만, 다행이게도 체페슈 영지에 위치한 워프 게이트가 테일러 영지의 게이트에 연결 돼 있다는 소리에 체페슈 성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으로 다시 워프 게이트를 타서, 테일러 영지로 이동.

변두리 시골 깡촌 농지라더니.

겉보기엔 나름 깔끔하고, 어느 정도 도시 느낌이 났다.

시골 깡촌은 아니고 시골 도시 느낌.

굳이 이 좁은 영지에서 소란을 키울 생각은 없었기에 가슴팍의 휘장을 떼고 대충 얼굴만 가렸다.

그래도 옷 입은 게 귀하니 나름 귀족으로 생각했는지 테일러 영주성이 어디냐 묻는 말에는 다들 고분고분 대답해주었다.

물어물어 도착한 테일러 영주성.

그림자를 넓게 퍼뜨려, 루나 테일러의 기척을 찾았다.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정령이 주변에 많으면 그게 루나 테일러의 기척이니까.

빠르게 위치를 찾아 그림자를 타고 넘어가자, 병상에 누워 있는 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머리에, 자주빛이 감도는 검은 눈동자.

누님처럼 새하얀 피부에, 본디 부드럽고 다정했을 눈매는 날카롭게 반개 해 있었다.

그 주변을 지키듯 포진해 있는 수십의 정령들.

하급 정령 스물 둘. 중급 정령 열. 상금 정령 넷. 거기에 최상급 정령까지 하나.

주인을 지키듯 여인을 감싸 두른 채 나를 노려보던 정령들의 한 가운데에서, 흑발흑안의 미녀, 루나 테일러─, 나의 누나가 입을 열었다.

“존나 늦네.”

나는 거기에 대답하는 대신, 손가락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어떻게 다시 태어나서도 가슴은 A냐?”

“B거든 씨발좆같은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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