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4 시험 중 (4)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누님이, 다른 남자를 깐 건데.
아니. 깐 건 물론 좋은데.
말투가?
내 상냥하고 다정한 누나 어디 가고 까칠깐깐고압적 귀족 영애가 있지?
순간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단어가 있었다.
누님의 상태창에 있던 「고문기술자」.
거기에 이상하게 랭크가 높던 「헌신」특성.
대충 이해가 되긴 했다.
나는 누님에게 다가갔다.
“누님.”
“아, 스칼렛! 언제 나왔어?”
“언제 나왔어”라는 말이, “다 본 건 아니지?” 라고 자동으로 번역 돼서 들린다.
하긴.
「고문기술자」 특성도 내가 상태창을 봐서 알게 된 거지, 누님은 시치미를 똑 뗐었으니까.
나한테는 보여주기 싫다는 거겠지.
‘근데 봐버린 걸 어떡하지.’
누님에게 나한테 들키고 싶지 않은 면모가 있다.
이해할 수 있다.
고문 따위를 즐긴다거나 하는 걸 누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보여주고 싶을까?
그보다는 못 해도, 다른 사람들한테 깐깐하고 까칠하게 구는 모습도 보여주기 싫을 수도 있다.
사랑하는 남자에겐 항상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으니까.
그런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닌데.
다만.
이미 봐 버렸다.
게다가, 애초에 누님이 변한 것이 나 때문에 각성해버린 「헌신」특성 탓일지도 모른다.
이 세계가 내가 기억하는 「푸른 장미 정원」이 아니라 「푸른 백합 정원」 세계라 정확하진 않지만.
나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은은하게 미소 짓는 누님에게 마주 웃어주었다.
“방금 막 나왔어. 뭐 하고 있었어?”
일단 모른 척 해주자.
누님이 사실은 나한테만 다정다감 자애로운 누나고, 다른 사람들한텐 고압적인 영애라는 사실은 일단 묻어두기로 했다.
원작처럼 완전 악역이 된 것도 아니고, 그 정도는 상관 없지 않나?
“고생했어! 역시 내 동생이야.”
내 옆으로 바짝 붙어서는 어깨에 고개를 기대는 누님.
그래 뭐.
이렇게 귀여운데 나 말고 다른 남자들한테 좀 까칠하면 어때.
따로 패악질만 안 부리면 됐지 뭐.
….
안 하겠지?
“누님.”
“응?”
꼬옥.
나는 누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누구 죽이거나 그런 적은 없지?”
“무슨 소리래니!”
누님이 질색을 한다.
다행이다.
청부살인 같은 건 한 적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내 신변에 위협 같은 거라도 생기지 않는 이상 누님이 흑화하진 않을 것 같긴 하다.
…생각해보니 마왕 때문에 이미 신변의 위협을 받는 중 아닌가?
“누님.”
“으응. 왜애.”
“만약 내가 시련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 하고 죽으면.”
“왜?”
“응?”
“왜─?”
누님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순간 등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낀 내가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니 왜가 아니라. 만약─.”
“왜?”
“만약에─.”
“왜 그런 소릴 해?”
“아니 그냥 만약을─.”
“난 그런 거 싫어.”
누님의 두 눈에서 빛이 흐릿해졌다.
뚝.
쥐고 있던 양산 손잡이가 바스라지고, 잠잠하던 그림자가 요동치며 일렁거렸다.
“왜 그런 소릴 해? 왜? 문제가 생겼니? 그래서 그래?”
“아무 문제 없어.”
“그럼 뭐 때문에? 혹시 황녀가 안 도와준대? 말만 해 그럼 누나가 그 년─.”
“그런 거 아니라니까.”
소리가 새 나갈 일 없도록 미리 차단해둬서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누님의 양 뺨을 손바닥으로 찰싹 때렸다.
아니 때린 게 아니라, 찰진 소리를 내며 움켜쥐었다, 에 가깝게.
“에븝.”
양 볼을 붙잡힌 누님이, 꼭 물고기가 뻐끔대는 것처럼 입을 오므리고 달싹거린다.
“전혀. 아무 문제 없어. 안 죽어. 그냥 해본 소리니까 걱정 마.”
바둥바둥.
놓아달라는 듯 팔을 휘두르는 누님을 놓아주었다.
“…진짜지?”
“진짜야.”
“맹세할 수 있어?”
“어디에 대고 해줄까.”
“음.”
조금 진정 된 듯 한 누님이 입술을 검지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다, 이내 생각났다는 듯 헤실헤실 웃었다.
“나중에 생길 우리 아이 아빠로써의 명예.”
움찔.
생각지도 않았던 단어에 내가 굳어버리자, 누님은 주변의 눈치를 잠깐 살피곤, 양산을 살짝 내려 우리 둘을 가린 다음.
쪽.
“맹세할 수 있지?”
“…소리 차단 해놔서 망정이지.”
“할 수 있지?”
이런 걸 당해놓고 대답하지 않을 남자가 어디에 있을까.
나는 한숨을 쉬며 누님의 머리를 헤집었다.
“그럴게.”
시험장에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지만.
소리도 다 차단해뒀고, 시야도 가려뒀고, 뭐.
괜찮겠지.
아니지. 기회인가?
“누님.”
“응?”
“이참에 저기 골목 가서 한 번.”
“안 해!”
차였다.
낙심하고 있자, 누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 다음에 해. 알았지.”
귀엽긴.
누님이랑 같이 다른 생도들이 시험 치는 모습을 지켜봤는데, 누님과 나와는 달리 대부분 오거 수준은 나오지도 않았다.
최상위권 생도에게는 오거를 소환해주기는 했는데, 그들 역시 누님이 했던 것처럼 일격사 시키지는 못 하고 차근차근 발목 힘줄과 안구 같은 부분들 위주로 공략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오거는 저렇게 상대하는 건가봐.”
“그러게.”
“처음 알았어.”
“강의 중에 가르쳐주긴 한 내용인데 그렇게 말 하면 안 되지 않을까, 스칼렛?”
그 외에도.
의외였던 점은, 누님 같은 아예 경지가 다른 정도의 생도를 제외하면 최상위권과 중위권, 하위권 사이의 격차가 그리 크지 않다는 점?
물론 한참 높은 경지인 나와 누님 시야에서나 그렇지, 정작 생도들이 느끼기엔 최상위권과 상위권, 중위권 사이사이에 드높은 벽이 있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을테지만.
아무튼 막상 놓고 보면, 한 번의 깨달음 정도만 있으면 하위권의 생도도 단숨에 중상위권까지는 쉽게 올라갈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깨달음이라는 게 말로는 어려운 것 같아도, 일단 여기 생도들이 다들 어느 정도 재능은 받쳐주는 이들이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일생을 살면서 한 번 정도의 깨달음은 얻지 못 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즉 상위권과 그 아래 생도의 차이는 살면서 한 번쯤은 얻을 법 한 깨달음을 얻었느냐, 아님 아직 얻지 못 했느냐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
“누님. 저기 봐봐.”
“와.”
나는 누님과 나란히 시험장에서 분투하는 생도들을 구경하면서, 이따금 그런 ‘깨달음’을 얻은 생도들이, 단숨에 시험을 통과하는 광경도 몇 번 봤다.
“확실히 다들 재능이 있긴 해.”
“그러게.”
그렇게 ‘마물의 생태와 습성’ 시험이 일단락 되고.
이후의 시험들도 차례차례 마무리 되었다.
크게 어려울 건 없었다.
다들 실기 시험이었어서.
실기 시험이라고 해도 ‘마물의 생태와 습성’처럼 다 치고 받고 싸우기만 하는 시험인 건 아니었다.
‘마력의 회로’ 시험에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마력에 대한 제어력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사용할 수 있는 아티팩트를 통해 시험을 치뤘다.
아티팩트 자체는 단순히 발광 아티팩트였는데, 시험을 위해 특수 제작한 물건이라고.
더 복잡하고 섬세한 제어가 가능할수록 발광하는 빛이 찬란해진다고 하던데.
당연히 내가 낸 빛이 제일 밝았다.
누님은 나 다음. 나랑 비교하면 확연히 손색이 있긴 했지만, 다른 생도들에 비하면 그마저도 압도적이었다.
시험을 모두 끝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와 누님과 침대에 누워있던 내가 문득 생각난 것을 물었다.
“누님.”
“으응?”
“우리 때문에 원래 수석이었을 생도가 수석이 못 됐다고 생각하니 좀 찝찝하지 않아?”
우리 남매가 아카데미에 입학한 건 배움에 뜻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우리 부모님이 싸질러놓은 사건들을 수습하고 이미지 회복용이었을 뿐.
‘체페슈의 가주 남매가 직접 아카데미에서 수학할 정도로 체페슈와 제국은 사이가 좋다!’
뭐 그런 선전용이었으니.
아무리 우리가 흡혈귀 치곤 어리다한들, 정말로 백이십 살의 흡혈귀가 열두살짜리 인간이랑 비슷할 리가 없지 않은가.
“으음. 하지만 어쩔 수 없잖니. 나나 스칼렛이 수석이 아니면 그건 그것대로 말이 나올걸?”
그것도 그런가.
“우리한테 밀린다고 억울해 할 사람은 없어. 그야, 체페슈잖니.”
누님은 그런 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뻗어 내 가슴팍 위를 살살 간지럽혔다.
막 씻고 나와 목욕 가운을 걸친 채,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머리칼을 내 어깨에 드리워선, 손가락을 사용해서 내 가슴팍을 꾸욱 꾸욱.
문질문질.
간질간질.
“간지럽게.”
“좋으면서…, 꺅!”
미묘한 자극에 내가 픽 웃곤 누님을 왁 덮치자, 누님이 깜짝 놀란 척 히죽 웃으며 받아줬다.
흐트러진 백금발, 반짝이는 적안.
암컷의 부드러운 살내음과, 은은한 향수 냄새.
거기에 몸을 거의 가리지 않은 목욕 가운과, 그 너머로 언뜻언뜻 보이는 여인의 속살.
“요망한 여자 같으니라고.”
“후후. 싫어?”
“아니.”
개좋지.
“각오해.”
“뭐를?”
“임신할 각오.”
“무, 뭐?”
“그러게 누가 애 아빠 소리 하래?”
나는 아까 누님이 얘기했던 ‘우리 아이 아빠’ 소리를 잊지 않았다.
어딜 그런 괘씸하고 요망한 발언을.
혼내줘야겠다.
“그, 그건 그냥 미래의 얘기….”
“지금 만들면 미래에 태어날 거야.”
“맞는 말이긴 한데! 그렇긴 한데! 꺅!”
그렇게 누님과 침대 위에서 뒹굴면서도, 자꾸 묘한 생각이 내 머릿 속에 맴돌았다.
굳이 계속 아카데미에 다닐 필요가 있나?
그런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