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 영애의 남동생이 되었다-82화 (82/140)

EP.82 리하르트 (3)

애런의 추악한 행적에 대해서는, 황제가 입을 다물어 사람들에게 상세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되려, “오러 마스터인 황제 폐하마저 입에 담기 꺼려할 정도의 죄를 애런 황자가 저질렀다.”라는 인상을 준 덕분에, 애런을 헛되게 동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렴 아비인 황제마저 두둔하지 않고서 비공식적 자리에서 호로새끼라고 애런을 씹었겠는가.

물론 그 비공식적 자리에서 황제의 욕설을 들은 건 나다.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호로새끼.”

자식농사를 마친 노인네의 울분을 밤새 들어주는 건 꽤 고역이었다.

그리고 또.

사건의 주역이던 리하르트.

그는 안 그래도 궁내 최고의 호감인사였는데, 이번 일로 상당한 지지율을 얻은 듯 했다.

꽤 유의미하게 느껴질 정도의 지지율이어서, 이러다가 자칫 에드윈과 아이리스의 계승권 경쟁의 판도가 뒤바뀌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실제로 아이리스를 위해 에드윈을 찌를 비수로 리하르트를 택한 나조차 계획을 수정해야 하나 싶었으니까.

하지만 기우는 기우였을 뿐.

내가 나서기도 전에, 리하르트가 아이리스를 찾아왔다.

검독수리 기사단의 갑주를 입고서, 아이리스의 앞에 선 리하르트가, 얼떨떨한 얼굴의 아이리스에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오라버니…!”

아이리스도, 설마 리하르트 쪽에서 먼저 굽히고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던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내게서 황제가 되어란 말을 듣기는 했어도, 아버지 뻘인 오라버니가 무릎을 꿇는 상황까지는 생각한 적 없는 듯 했다.

깜짝 놀란 아이리스가 리하르트를 다시 일으키려 했지만, 그는 묵묵히 기사의 예를 다 했다.

“…아이리스.”

다만.

아이리스를 잘 아는 리하르트였기에, 지금의 그가 기사의 예를 다 해, 아이리스를 주군으로 모신다고한들 아이리스가 받아들일 리 없다는 것쯤은 리하르트 역시 잘 아는 듯 했다.

그러니, 그 자세만큼은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기사의 예를 다하되, 그가 내뱉는 말은 기사의 충언이 아닌 오라버니로써 동생에게 하는 조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고 따라와주고 있지만, 나는 내게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단다.”

자조적인 목소리였다.

누구보다 오랫동안 자신의 형인 에드윈이 분수에 맞지 않는 지위를 붙잡고 발버둥치다 추하게 망가진 꼴을 보았으니 더더욱이나 생각이 확고해진 듯 했다.

물론 리하르트의 성격상, 에드윈과 같은 모습을 보이진 않겠지만.

리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많은 생각을 했다.”

아무리 벽을 뛰어넘은 초인이 될 경우 일개 인간이 백년이 넘는 세월을 건장하게 살아가는 시대라한들, 대부분의 인간에게 있어 사십년의 세월이란 거진 삶의 모든 시간과도 같다.

주름이 깊어지고, 머리는 빠지고, 배는 불러오는 그런,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

비록 리하르트가 그간의 꾸준한 단련으로 건장한 몸을 유지하곤 있다 하나, 세월의 흐름을 피할 순 없었다.

눈가에 새겨진 주름과, 점점 하얗게 변해가는 머리칼과 수염.

중년의 남자는, 지난 삶을 회고하듯 말했다.

“나는 내 삶에 한 치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것은 삶의 궤적을 통틀어 단 한 순간도 게으르지 않았던 자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한점 후회 없이 살았노라 자부하는 나의 삶이기에.”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던 리하르트가, 고개를 들어 아이리스와 눈을 마주쳤다.

두 눈에 담긴 것은.

“이번에도 후회 없이 내게 자격이 없노라 말할 수 있겠구나.”

비록 수십년을 바쳐온 일생에 이렇다 할 성과조차 없으나, 되려 그 수십년의 과정 자체를 자부심으로 삼은 남자의 굳건한 신념이었다.

“재능이 없는 나. 노력하는 나. 그 모두가 나이기에, 나는 감히 내게 자격이 있다 말할 수 없다. 다른 무엇도 아닌, 이 제국을 이끄는 황제라는 자리란 범상한 자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너는 알지 않느냐.”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 하고, 멍하니 리하르트를 내려다보는 아이리스를 향해, 그가 웃으며 말했다.

“만약 내가 나에게 황제가 될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나를 향한 기만이 된다. 재능 없고, 노력 하는 황자 리하르트를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것이 바로 나인데, 어찌 그런 내가 재능 없는 리하르트를 황제 리하르트로 만들 생각을 하겠느냐.”

아이리스는 리하르트가 결코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였는지, 잠시 멍하니 그를 내려다보다,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리하르트 오라버니의…, 아니,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엄숙한 목소리.

내가 기억하던 자애롭고 다정한 황녀 아이리스가 아니라, 제국을 이끌기 위한 군주의 위엄을 갖춘 모습.

아이리스가 성검을 들었다.

환한 빛무리가 그녀와 리하르트, 그리고 나를 감쌌다. 절로 거룩한 마음이 들 정도로 신성한 빛의 커튼 아래, 아이리스가 말했다.

“충성의 맹세를.”

“…예. 주군.”

리하르트는 그렇게 아이리스의 기사가 되었다.

*

리하르트의 일은 이렇게 일단락 되었지만, 아직 모든 일이 마무리 된 것은 아니었다.

애런은 결국 에드윈의 끄나풀에 불과하고, 결국 에드윈의 일까지 처리가 되어야 비로소 황궁 내 불안요소를 모두 제거했다고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애런이 숙청당하는 것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져 뭔가 행동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에드윈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으니, 먼저 나서서 손을 대기 애매했다.

원래라면 애런의 장부에 적힌대로 노스페라투와 내통하고 있다는 점을 엮어 내란죄로 보내버리려 했더니.

에드윈도 낌새를 느낀 듯 몸을 다시 사리고 있다.

아마 수작을 부리더라도 내가 황궁을 떠난 다음에 하려는 듯 한데.

그렇게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내가 황궁을 떠난 뒤에 수작을 부리려 한다면, 나는 떠나기 전에 수작을 부리면 되는 거 아닌가?

나는 리하르트를 불렀다.

“리하르트.”

“네.”

아이리스에게 충성을 맹세한 뒤, 내게도 한층 더 예의를 차리는 리하르트였다. 아놀드도 그렇고, 리하르트도 그렇고, 내가 당연히 아이리스와 결혼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새였다.

물론 하긴 할 거지만.

“만일 에드윈이 내란을 일으키려 한다면, 어떨 것 같나?”

“…아무래도, 태자의 지위가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그 말대로다.

태자가 자신의 정치권력을 위해 내란을 일으키려 하다가 걸린다면, 오히려 그 정치적 생명을 위협받게 된다.

즉, 정치생명만 위험할 뿐 태자 본인의 생명이 위험해지진 않는 것이다.

안 그래도 애런의 일로 황자가 숙청당한 직후인데, 태자까지 숙청할 순 없는 노릇이니.

하지만 만약에.

“그럼, 악마와 계약하려다 적발된 경우는 어떨 것 같나.”

“…그건.”

리하르트가 대답을 망설였다.

아무리 애런의 죄악에 눈 감고 동조하기까지 한 에드윈에게 실망했다한들, ‘악마’라는 단어는 쉬이 입에 담을 게 아니었다.

지금까지 수백년간 성국의 교황과 제국의 황제를 비롯한 정점에게만 허락되었던 악마의 존재.

아이리스가 여신의 선택을 받아 용사가 되고, 악마가 대륙에 하나둘 차원을 넘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대륙의 고위층에게 알음알음 정보가 퍼지기 시작한 때였다.

일전의 프레이르 대수림에서 왕자가 악마와 계약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재판 없이 처분 당했던 것처럼.

대답을 망설이는 리하르트를 눈으로 재촉하니, 그제야 그가 입을 열었다.

“…아마도 애런과 크게 다르지 않을 듯 합니다만.”

“그렇군.”

내가 심드렁하게 대답하니, 리하르트가 조심스럽게 나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에드윈 형님이 정말로…?”

아니다. 샅샅히 뒤져보긴 했으나, 딱히 악마와 계약한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리하르트의 걱정은 기우였으나, 나는 되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

경악하는 리하르트.

정말 상상도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그렇겠지. 내가 거짓말을 한 거니까.

그래도 뭐.

실제로도 마왕이 강림하면 냉큼 나라를 갖다바치는 놈이니까,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아주 거짓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호, 혹시 증거가 있습니까? 형님이….”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굳이 증거가 있을 필요가 있나?

증거가 없다면 만들면 되는데.

나는 그림자 속에서 책을 한 권 꺼냈다.

일전에, 대수림의 왕자가 악마와 계약할 때 사용했던 책이었다.

“이것이, 에드윈이 악마와 계약하기 위해 사용한 책이다.”

“에드윈…!”

이제는 형님도 아니고 이름을 부르며 분노하는 리하르트.

나는 그를 속이는 것에 살짝 마음이 아픈 것을 느끼면서도, 큼큼 헛기침을 했다.

비록 지금은 거짓말일지라도 놔두면 나중에 악마랑 계약할 놈이니까.

…잠깐.

그냥 이 책을 정말 에드윈이 볼 수 있는 곳에 놔두면 책을 보고 진짜로 계약해버리지 않을까?

나는 나의 계획에 감탄하며, 분노하는 리하르트를 뒤로 하고 까마귀를 시켜 에드윈이 책을 볼 수 있는 곳에 두도록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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