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 영애의 남동생이 되었다-90화 (90/140)

EP.90 검을 든 이유

꾸물거리는 마기가 질척하게 대전의 바닥을 더럽혔다. 질퍽한 점성을 머금은 액체처럼, 철퍽철퍽 떨어져 내린 그것이 바닥에 스며들었다.

〈리하르트으─. 네노옴─!!〉

꾸르릉.

천둥과도 같은 목소리. 악마의 힘을 빌려, 상상 이상의 거력을 몸에 머금은 에드윈의 외침이었다.

〈네놈의 뼈와 내장을 씹어먹어주겠다─!!〉

오라.

악마의 군세여!

쇠를 긁는 듯한 에드윈의 목소리. 바닥을 더럽힌 어두운 마기 속에서, 꾸물텅 거리는 형체가 하나씩 일어서기 시작했다.

악마, 나베리우스의 마족 군단이, 여신이 내려준 황궁의 가호를 넘어, 이 자리에 현현했다.

“진정 더러운 악마를, 마족을 이곳에 들인단 말인가!!”

리하르트가 기함했다. 아놀드도, 기사들의 호위를 받던 귀족들도 경악하였다.

대전의 밖으로 나가려던 귀족들을 막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에드윈이 진정 악마와 계약했음을, 그들의 눈에 똑똑이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나가십시오.”

문을 지키던 기사가 옆으로 피하자, 대신들이 부리나케 밖으로 빠져나갔다.

“전원─!”

아놀드가 외쳤다.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마스터의 내력을 실은 포효는, 마치 짐승의 그것과도 같았다. 그를 따르는 검독수리 기사단이 각자의 무기를 쥐었다.

그리고.

“돌격──!!”

거구의 기사단장의 외침과 함께, 대륙 최고의 기사단이 움직였다.

“죽어라, 마족!”

〈키에에에에엑─!〉

격돌이었다.

검독수리 기사단과 마족 군단. 어느 쪽이든, 벼릴대로 벼려진 날카로운 검과도 같은 정예병이었다.

촤악─.

기사의 검이 마족의 목을 베었다.

〈우오오오오!〉

트롤의 형상을 한 거대한 마족이 육중한 주먹을 휘둘렀다.

“막아!”

콰앙!

방패를 든 기사가, 마족의 주먹을 막아냈다.

방패의 뒷편에서, 기회를 노리던 창을 든 기사가 도약했다.

“흐읍!”

기합과 함께, 단숨에.

푸욱!

〈───!!!〉

마족의 울부짖음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눈을 잃어버렸으나, 창이 얕게 들어간 탓에 절명하진 않은 마족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일렁이는 마기를 몸에 두르고, 이성을 잃고서 광화해 한층 강력해진 몸뚱이를─.

핏.

하고.

육중한 몸뚱이가, 단숨에 갈라져서는, 반으로 뚝 떨어지고 말았다.

쿠웅.

소리를 내며 떨어져 버린 마족의 시체 너머. 마족과 비슷한 거구의 남자가, 맹렬하게 타오르는 오러를 두른 검을 들고선 무심히 말했다.

“다른 마족을 죽이러 가도록.”

기사단장, 아놀드의 명령이었다.

방패를 든 기사와, 창의 기사는 대답 대신 목례 후 자리를 떴다.

전황은 전체적으로 검독수리 기사단의 우세였다. 우선 전체적인 숫적 우위가 기사단에 있었으며, 마족들이 차원을 넘어오느라 전체적인 스펙이 떨어져 있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날 보아라─!!”

강렬한 포효.

거구의 기사단장이, 타오르는 기세를 내뿜으며, 오러를 두른 검을 들고 전장을 전횡무진 날뛰었다.

별다른 지휘관이 없이, 병사들만 소환된 마족의 군단은, 오러 마스터라는 전술병기를 맞상대 할 이가 없으니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전투의 혼란 속에서.

‘쯧.’

황제가 옥좌에서 일어섰다. 노쇠한 오러 마스터는, 검을 들고서 이 상황에 끼어드는 대신 이 상황까지 유도했을 남자, 스칼렛에게 눈을 돌렸다.

‘어찌 할 테냐.’

그랜드 메이지인 스칼렛과, 오러 마스터인 아놀드. 거기에 오러 마스터가 목전에 놓인데다 여신의 가호를 받은 성검을 지니고 있는 아이리스까지.

거기에 검독수리 기사단까지 이곳에 있었다.

늙은 황제가 참전하지 않더라도, 상황은 무리 없이 정리 될 터였다.

실제로도, 마족 군단은 검독수리 기사단과 아놀드만으로 무난히 정리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황제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검을 쥔 채,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게다가.

〈리하르트으!!〉

“크으윽!”

격하게 부딪친 그의 두 아들.

이미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린 첫째와, 그런 첫째를 막아서는 둘째.

범재도 아닌 둔재 수준의 재능으로, 과거의 트라우마를 딛고서, 스스로의 신념을 내세워 검을 든 리하르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네놈이! 네놈이 나를!!〉

싸움은 압도적인 에드윈의 우세였다.

에드윈이 휘두르는, 질척거리는 마기를 뭉쳐 좋을대로 휘두르는 거대한 주먹을 옆으로 흘려보낸 리하르트가 감당할 수 없는 거력에 휘청거렸다.

그 빈틈을 노리고서, 이제 원형이 되는 얼굴조차 남지 않은 에드윈이 주먹을 치켜들었다.

이대로라면, 리하르트가 다진 곤죽이 되어버릴 것이다.

스칼렛과 아이리스는 에드윈과 연결된 악마와의 고리를 추적하는 중이었고, 아놀드는 마족 군단을 학살 중이었으니 당장 이곳까지 와 리하르트를 지켜낼 순 없었다.

그러니 황제가 나서야 했을테지만.

〈죽여버리겠다!〉

허나.

그럼에도.

“뻔뻔하기 그지 없구려, 형님!”

리하르트의 두 눈이, 투기와, 열정과, 그리고 신념으로 타오르고 있었기에.

황제는 움직이지 않았다.

보았다.

리하르트의 자세가 자연스럽게 바뀌어 가는 것을.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는, 첫째와는 달랐던 둘째에게 기대를 걸어 몇 번이고 직접 검술을 지도했을 때에도.

그 구결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 했던 아들에게 얼마나 실망했던가.

황실의 비전 검술조차도 아니었다.

첫째를 가르칠 때에, 첫째의 재능을 보고 새롭게 창안해낸 기초 검술의 구결이었다.

범재에 불과한 첫째조차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저잣거리의 삼류 수준밖에 되지 않는, 그런 검술.

그나마 저잣거리 삼류 검술과의 차이점이라면, 안 좋은 습관 따위를 들여 상승의 경지로 갈 때에 발목을 잡을 수도 있는 저잣거리의 물건과는 달리, 적어도 그런 부작용은 없다는 것 정도.

겨우 그 수준이었다.

겨우 그런 수준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무작정 검을 휘두르기만 하던 아들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지금.

“아이리스가, 체페슈공이, 나를 믿어주었소…!”

이를 악물고서, 리하르트가 에드윈의 검을 한 차례 다시 흘려냈다. 한 번 힘에 밀려 풀렸던 자세로, 한층 불리한 상태에서, 제대로 된 자세였던 아까보다도 훨씬 부드럽게 받아낸 모습이었다.

〈이… 놈…! 네가 어찌!〉

평생을 깔보던 동생이, 자신의 등을 찌르고, 이제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진 자신의 일격을 흘려내기까지 한다.

그것도, 방금까지만 해도 버거워 했으면서, 한 순간에 성장해버려서는.

“누구도 나를 그렇게 믿어주지 않았다!”

악에 받친 목소리였다.

사십 년간의 세월간 쌓인, 설움과 분노가, 리하르트의 목소리에 담겨있었다.

그간 사람 좋은 황자로, 평생을 검술에 바쳐왔으나 보답 받지 못했던 남자의 외침이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황실의 황자로 태어나, 이다지도 처참한 수준의 재능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노라고!”

리하르트가 일어나 자세를 잡았다.

에드윈이 주먹을 휘두르고, 리하르트가 다시 한 번 흘려냈다. 아까의 그것은 확실히 요행이었는지, 리하르트의 몸이 살짝 휘청거렸다.

하지만.

‘요행 뿐만이 아니다.’

황제의 눈이 리하르트의 등을 응시했다.

비록 방금 전의 완벽한 흘려내기가 요행이었을지언정, 지금의 리하르트는 분명 성장해 있었다.

그 증거로.

〈네놈이! 뭘! 잘났다는 듯! 지껄이는! 거냐!〉

쾅! 쾅! 쾅!

몇 번이고 몰아치는 에드윈의 주먹을, 몇 번이고 흘려내면서, 휘청거리기만 할 뿐 침착하게 모두 받아내고 있었으니까.

단 일격에 주저 앉았던 불과 몇 분 전을 생각한다면, 괄목할 정도의 성장이었다.

“형님이 깔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형님이 두려웠소!! 형님 탓에 생긴 등의 화상이 아직도 욱신거릴 정도로─!”

게다가.

‘지금도 조금씩이지만 성장하고 있구나.’

조금씩, 조금씩.

리하르트의 자세가 수정되어간다. 무게중심이 적절한 위치를 찾아가고, 조잡하던 근육의 움직임도 한층 보기 좋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러 마스터인 아놀드와 황제, 그리고 머지 않아 그들과 같은 경지까지 올라올 아이리스가 보기엔 지금도 조잡하기 짝이 없다.

지금 분수에 맞지 않는 힘을 얻어 날뛰는 중인 에드윈조차도, 그들이 나서면 세 합이면 충분할 것이다.

저기 있는 스칼렛 공작이라면, 일격으로도 충분할테지.

아마 에드윈과 계약한 악마들조차, 에드윈이 이 정도까지 비루하리라 생각하진 못했을 것이다.

대대로 오러 마스터의 핏줄을 타고나던 황가의 직계가, 사실은 평범하디 평범한 범재라니.

하지만.

그럼에도, 범재조차 되지 못했던 리하르트가, 힘을 얻은 에드윈을 상대로 선전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지만! 두 사람은, 두 분은 나를 믿어주었소! 내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형님이, 내 검 앞에 상대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내게 말해주었다!”

순간, 리하르트의 검 끝이, 일렁거렸다.

공간의 굴절.

그것을 본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니!”

다시 한 번.

검 끝에, 미약하게 피어오르는, 마력의 형상.

오러(Aura).

“그 믿음에….보답해야 하지 않겠소!”

리하르트의 몸이, 사십 년의 인생 중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움직였다.

검을 휘두르는 그조차,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검을 휘둘렀는지 모를 정도로.

그리고.

“형님을, 쓰러뜨리는 것으로──!”

──서걱.

미약하게나마 오러가 서린 검이, 마기로 부푼 에드윈의 상반신을 갈랐다.

결투.

리하르트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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