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4 계승자 (4)
아이리스는 전율했다. 차오르는 힘이 느껴졌다. 찬란하게 빛나는 성검의 자태. 신성한 힘이 전신을 차올랐다.
직감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비로소 벽을 눈 앞에 두게 되었노라고.
「아이리스. 악마 셋의 소멸을 확인했어.」
파르르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성검을 든 채 숨을 몰아쉬는 그녀에게 여신이 속삭였다. 평소라면 마왕의 터전인 마계를 엿볼 수 없었겠으나, 이렇듯 문이 열리고 스칼렛의 도움을 받아 내부로 이어지는 길까지 터낸 상태였다.
여신의 눈이 마계 전체를 부감했다.
「바알의 상태는 좋지 않아 보이네. 이 상황에도 나서지 않는 걸 보니.」
덤덤하게 상황을 파악하는 여신의 목소리에, 아이리스가 낮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럼 다 끝난 거죠…?”
응. 수고했어.
여신이 상황이 마무리 되었음을 말해주자, 아이리스는 성검을 바닥에 박아넣고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스칼렛이 과부하 될 정도로 마법을 전개했다면, 아이리스 역시 혹사에 가까울 정도로 신성력을 제 몸에 담아내었으니까.
아이리스와 스칼렛 뿐 아니라, 이곳의 모두가 피로해진 몰골이었다.
그나마 덜 움직였기에 육체적으론 무리가 없는 황제조차, 직접 장남의 숨통을 끊어냈기 때문인지, 타오르던 기세가 꺾여 사그라들고 있었다.
“…제노. 오늘은 이만 다들 쉬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먼지투성이의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서는, 그 고귀한 얼굴을 흠뻑 적신 땀을 닦아낸 스칼렛이 황제에게 말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자식을 잃은 황제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여기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아무리 아웅다웅 다투고, 정치적으론 대립하는 관계라 해도, 친구는 친구라는 거겠지.
새삼 아이리스는 자신이 사랑하게 된 남자의 나이가 실감이 됐다.
‘기억을 잃었으니까 오히려 내 쪽이 나이가 많은 거 아닐까?’
「이상한 생각 말고 쉬기나 하렴.」
여신의 타박에, 아이리스가 눈을 감곤 아무렇게나 바닥에 드러누웠다. 이러고 있으면, 오빠가 알아서 일으켜 방으로 옮겨주겠거니 하곤.
“…다들 수고 많았다. 오늘 일에 대해서는, 사흘 뒤에 얘기하도록 하지.”
그런 모습들을 둘러본 늙은 황제가 말했다. 사흘의 시간이라는 건, 그만큼 충분히 회복할 시간을 준다는 것.
그 날의 논공행상을 통해, 새로이 황제의 관을 물려받을 이가 정해지겠지.
스칼렛의 눈이 아이리스를 향했다가, 문득 리하르트를 응시하곤, 다시 아이리스에게 돌아왔다.
그리곤 아무렇게나 누워서는 새근새근 잠든 아이리스에게 다가와 잠든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곤.
칠칠맞기는.
스칼렛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리스를 안아들었다.
“이만 가보지.”
사흘이라.
그동안 정리해두어야 할 게 꽤 많았다.
*
다음 날.
침대에서 꼬박 12시간 가깝게 잠들었던 아이리스가 눈을 떴다.
“끄응!”
굳은 몸을 펴기 위해 쭈욱 기지개를 펴는 아이리스의 도드라진 흉부를 훔쳐보자, 그녀가 슬그머니 제 가슴팍을 가렸다.
“그만 봐요.”
대답 대신 다른 얘기를 하기로 했다.
“아이리스.”
“왜요? 그만보라니까.”
“얼마나 남은 거 같아?”
“….”
투덜거리던 그녀의 입이 다물렸다.
내 눈에는 그녀의 상태창이 떠올라 있었다.
+++++
아이리스 아르카디아
근력▶ 103
민첩▶ 134
체력▶ 112
내구▶ 99
마력(신성력)▶225
특성: 「공주기사(B+)」「천부적 전투감각(A)」「황실의 꽃(A)」「신성력(S)」
고유 특성: 「용사(SS)」
+++++
전체적으로 급격하게 오른 스탯. 한층 넓어진 그릇에, 여신의 총애로 가득 찬 신성력.
순수하게 신성력 수치만 따지면 누님의 마력 수치를 상회한다.
용사이니만큼 어쩔 수 없긴 하지만.
그래도 누님 역시 꾸준히 전체적으로 밸런스 있게 스펙이 올라서, 평균 스탯이 200이 넘게 됐다.
누님과 아이리스가 붙을 경우엔 십중팔구 누님의 승리일 터.
다만 그런 식으로 누님과 아이리스가 비교가 가능하다는 시점에서 아이리스가 얼마나 강해진 건지 실감이 됐다.
나는.
+++++
스칼렛 체페슈
근력▶ 135
민첩▶ 151
체력▶ 125
내구▶ 131
마력▶ 394
긍정 특성: 「진조(SS)」 「공空(SS)」 「가주(S+)」 「아크 메이지(S)」
부정 특성: 「기억 상실(B)」 「천칭의 시련(SS)」
고유 특성: 「부여(S)」 「연결(S)」 「조율(S)」
+++++
스펙이 오르긴 올랐으나 누님이나 아이리스에 비하면 그 폭이 크지 않았다.
대신이라고 하긴 뭐 하지만 마력만큼은 눈에 띄게 오르긴 했다. 조만간 400을 넘지 않을까.
이게 다 이번에 여신을 통해 빡세게 마력 회로를 혹사 시킨 덕이다.
게다가 잃어버렸던 마력 지식도 어느 정도 보충해서, 「아크 메이지(S)」 특성이 살아나기도 했고.
기억을 되찾으면 아마 그랜드 메이지로 특성이 승격될 것이다.
잠시 내가 상태창을 훑어보고 있으니, 아이리스가 손가락으로 내 어깨를 콕콕 찔렀다.
“오빠.”
“아. 응.”
“제 말 안 들었죠.”
눈을 샐쭉하니 뜨곤 나를 노려보는 아이리스. 나는 변명하는 대신 고개를 숙였다.
“오빠가 물어봐놓고서─, 읏.”
쪽.
가볍게 입맞춤으로 불만을 잠재우고 나니, 아이리스가 투덜거리면서도 타박을 멈췄다. 이 흐름을 살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래서. 뭐라고 말했는데?”
“…조만간일 거라구 말했어요.”
‘그렇구나.’하고 답해주며 아이리스의 등을 토닥인다. 어린데도 벌써? 대단하다. 따위의 말을 덧붙이자, 아이리스가 기분 좋은 얼굴로 내 가슴팍에 뺨을 부볐다.
“으응. 그래서 말인데요.”
“응?”
잠시 내 품에 안겨 만끽하던 아이리스가 조심스럽게 나를 빼꼼 올려다보곤 말했다.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을 오물거리던 아이리스가 내 옷자락을 꼭 잡았다.
“같이 가면 안 돼요?”
어딜?
하고 묻지는 않았다. 대신 입을 다물고, 아이리스와 눈을 마주했다.
“너, 네가 지금 어느 위치에 있는지는 알지?”
“1순위 계승권자요.”
“그런데 지금 이 시기에 나랑 같이 대륙 동쪽 끝으로 가겠다고?”
내 질문에 아이리스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용의 산맥에서면, 저도, 어쩌면 벽을 넘게 될 지도 모르잖아요.”
“굳이 조급해 할 필요는 없는 일이야.”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마, 아이리스에게 다른 이유가 있으리란 짐작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 짐작대로였는지, 아이리스는 조용히 내 품에 고개를 묻고 조곤조곤 내게 속삭였다.
한참이나 그녀의 얘기를 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네가 원한다면.”
나는 내 여자에게 약한 성격인 듯 했다.
*
아이리스와 이틀간 푹 쉬었다. 까마귀를 통해 아카데미에 돌아간 누님에게 학장한테 내 휴학을 연장 신청 해달라고 전달했다.
이대로 아카데미에 돌아갈 게 아니라 바로 용의 산맥으로 출발하기 위해서였다.
좀 늦으면 기말고사인 서열전에 늦게 될 테지만. 이제 와 생도 수준의 서열잡이에 연연할 필요도 없고.
그건 아이리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그녀와 겨룰 수 있을 법한 상대가 북부의 안나 뿐이고, 안나가 현재 벽을 넘어 마스터에 다다른 상태가 아니라면 아이리스가 십중팔구는 우세할 터였다.
게다가 용의 산맥으로 가는 길에는 드라쿨레아가 있다.
인간종의 3대 가문이 프리드리히, 크로이체프, 아르카디아라면. 인외의 3대 가문은 체페슈와 노스페라투, 그리고 드라쿨레아가 있었다.
체페슈는 양쪽 모두 발을 걸치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가는 길에 드라쿨레아 쪽에 들러 그들이 지니고 있을 ‘별자리의 뒷편’을 빌려와야 했다.
드라쿨레아 하니 노스페라투도 한 번 손봐줘야 하는데.
할 게 너무 많다.
“오빠. 슬슬 가야 해요.”
“그래.”
아이리스가 나를 재촉했다. 오늘은 사흘 전의 일에 대해 논의하고, 그 날의 논공행상을 다루는 날이었다.
그리고.
음.
“가자.”
아이리스가 내 옆에 팔짱을 꼈다. 누님도 없고, 황궁에서 우리 사이를 모르는 사람도 없으니 아주 과감한 행동이었다.
대전의 앞에 선 우리가 문을 열었다.
옥좌에 앉은 황제.
그 앞에 선 리하르트와, 아놀드. 검독수리 기사단과, 대신들.
사흘 전과 다를 거 없는 풍경이다. 단 하나, 황제의 옆에 서 있던 에드윈이 없어진 것만 제외하면.
나의 시선이 그의 자리를 응시하고 있음을 깨달았는지, 늙은 황제가 입을 열었다.
“뭘 하고 있는게냐. 가까이 오거라.”
아.
황제의 목소리를 들은 나는 깨달았다.
그에게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으리란 것을. 아마 길어도 반년이겠지. 원래라면 좀 더 오랫동안 타올랐을 그의 생명이, 지난 사흘간 순식간에 사그라든 것이다.
생명의 불꽃 대신 심마가 피어올랐는가.
그래도 그 경지가 어디 간 것은 아닌지, 황제는 수척해 보일지언정 심마에 잡아먹힌 얼굴은 아니었다. 그래도 무사히 심마를 몰아낸 듯 싶었다.
나와 아이리스는 황제의 앞으로 나아갔다.
황제, 클라우디우스 2세가 말했다.
“지난 날 죄인 에드윈이 악마와 계약해 여신께서 총애를 내려주신 이곳 황도를 더럽혔도다. 그 날, 그대들의 공이 매우 크다.”
엄숙한 목소리.
친우인 나와 딸 아이리스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의 황제로서 제국의 사람을 치하하는 말.
나와 아이리스는 예법에 따라 고개를 숙였다.
“…허니. 그대들이 바라는 바를 말하라. 아르카디아의 이름으로, 짐이 그대들의 청을 들어주겠노라.”
내가 먼저 한 발짝 나섰다.
“제국의 비보 중 하나를 청하옵니다.”
“좋다.”
시원스러울 정도로 빠른 대답이군.
한 발자국 물러서자, 이번엔 아이리스가 앞으로 나섰다.
아이리스의 입이 열렸다.
“황자 리하르트를, 황태자로 삼으소서.”
대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이리스가 나를 돌아보곤, 싱긋 웃었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하여튼 고집쟁이 아가씨 같으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