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5 펠그리온 (5)
‘…아.’
여긴 어디지.
나는 분명 흑룡과 싸우고 있었는데.
아무 것도 없는 세상에서, 아이리스는 생각했다.
축복 받은 이만이 도달할 수 있는 무(武)의 영역.
그것은 찰나의 순간.
현실의 시간과는 괴리된 정신세계.
아이리스는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아르카디아 제국칠검.
제 일검(第 一劍) 구름 베기.
위에서 아래로 내려베는 일검.
촤악!
지금껏 수백, 수천, 수만 번은 휘둘러 왔을 ‘구름 베기’다. 그럼에도, 아이리스는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게 아닌 것 같은데.
조금 더.
무언가, 간질거리는 느낌.
어딘가 막힌 듯 갑갑한 느낌에, 아이리스의 검격이 이어진다.
아르카디아 제국칠검.
제 이검(第 二劍) 수면 가르기.
벤다.
베고, 찌른다.
지금껏 아무렇지도 않게 휘둘러 왔던 모든 과정에서, 아이리스는 미미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답답해서.
몇 번이고.
제 삼검(第 三劍) 땅 긋기.
제 사검(第 四劍) 검의 영역.
오직 마스터만을 위한 검술.
모든 황실의 검사는 마스터가 되었기에, 마스터가 되지 못한 이를 위한 배려따윈 없는 검로.
본디 마스터의 경지에게만 허락 된 제 사검(第 四劍)을, 아이리스가 다룰 수 있는 점에서 그녀의 천재성을 입증하는 것이지만.
아이리스는 만족할 수 없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검을 휘둘러도, 미미한 위화감이 가시질 않는다.
오히려 지금까지 이런 검을 휘둘러 왔다는 것에 스스로 실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조금만 더 하면.
조금만.
그때였다.
“…!”
무아지경에 빠진 채, 자신이 나아가야 할 검로(劍路)를 찾는 아이리스는, 전신을 오싹하게 만드는 마력에, 강제로 무의 영역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조금만 더 하면 된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정신을 차린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전신에서 독기를 줄줄 흘리는 흑룡의 모습이었다.
전신에서 막대한 힘을 줄기줄기 내뿜는 펠그리온의 모습에 아이리스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 빌어먹을 년───!!」
콰아아─!
단순한 포효에도 전신이 저릿거릴 정도의 힘이 담겨있다.
방금까지만 해도, 스칼렛과 루나가 전해준 힘을 다 써 성검의 백업 외에는 별다를 게 없던 아이리스와도 비등하던 흑룡이었다.
그러던 그가, 지금은 처음 그들의 앞에 나타났을 때와 비등할 정도로 막대한 힘을 뿜어내고 있었다.
「네깟년 따위에게, 나의 비보를…!!」
다만, 펠그리온 역시 상당한 출혈을 감수한 상태였다.
저 앞의 진조라면 모를까, 아무리 여신에게 간택당했다한들 아직 제대로 개화조차 못한 풋내기 따위에게, ‘뒤틀린 모래시계’의 힘을 빌려야 한다곤, 생각도 하지 않았었기에.
「죽여버리겠다!」
쾅!!
압도적인 폭력.
아이리스가 눈으로 쫓지 못 할 정도로 빠른 일격에, 그 여린 육신이 바스라질 듯 튕겨나갔다.
“으흑…!”
아이리스의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격통에 팔이 삐걱거렸다. 성검의 빛, 여신의 축복이 용사의 육신을 치유했으나, 고통을 잊게 하지는 않았다.
용사이기 이전에 황궁에서 나고 자란 황녀인 그녀였다.
책임감 있고, 성실하고, 상냥하고 자애롭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고통이란 참으로 낯선 것이었다. 이토록 압도적인 폭력에게 노출되어, 단숨에 전신이 바스라질 듯한 고통을 느낀 적은 그녀의 삶에 없었으니까.
아이리스는 문득 겁이 났다.
겨우 팔이 부러지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금이 간 것만으로도 이다지도 아픈데.
더 싸우게 된다면, 분명 이 상처는 ‘따위’로 보일 정도로 아프게 될텐데.
….
아랫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이리스가 자세를 추스르기도 전에, 펠그리온의 육중한 꼬리가 그녀의 위로 내리쳐졌다.
파앗─!!
순간 성검이 빛을 발하며 그녀를 지키는 배리어를 둘렀다.
콰앙!
쾅!
꼬리가 연달아 배리어를 두들겼다. 쉽사리 깨질 듯 불안하게 흔들리던 배리어의 모습에 아이리스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쾅!
콰앙!
콰아앙…!
….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굉음이 울리는데도 배리어가 깨지지 않는다. 의아한 아이리스가 고개를 들자, 익숙한 회색의 정령이 거대한 몸체를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옵시디안.
루나 테일러가 계약한, 결계와 배리어를 다루는 최상급 정령.
그가 펠그리온의 일격을 모두 받아내고 있었다.
계약자인 루나가 거의 모든 힘을 써버려서, 옵시디안에게도, 루나에게도 모두 무리가 가고 있을텐데도 묵묵히.
순간 아이리스의 두 눈이 떨렸다.
안일했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따라왔다. 벽을 넘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나섰다.
그럼에도 이런 꼴이다. 민폐만 끼쳤다.
이러다간 그녀 뿐 아니라 모두 죽고 말 것이다. 마왕을 죽여야 한다는 사명을 받은 그녀와, 마왕의 숙적인 스칼렛과 루나가 여기서 죽는다면 대륙은 어떻게 되는가.
뒤늦게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아이리스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생각이 짧았었다. 용사니까, 세상을 구원할 거니까.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었다.
부러져도 된다?
부러지더라도 나섰을 것이다?
아니다. 그러면 안 됐다. 아이리스는 부러져선 안 됐다. 그녀는 용사였다.
용사가 부러진다는 것은, 대륙의 끝과도 같았다.
아이리스의 두 눈이, 자신에게 모두 믿고 맡겼을 두 사람을 찾았다.
정말, 정말 죄송해요….
아이리스는 두 사람을 찾았다. 흑룡의 위협으로부터 몸을 피한 두 사람은, 마력 탈진으로 지친 몸을 겨우 회복하고 있었다.
그녀는 죄책감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두 사람을 보게 되면, 너무나 죄스러울 것 같았다.
스칼렛이 때마침 고개를 들었다. 떨리는 눈으로 두 사람을 응시하던 아이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
순간, 어쩔 줄 몰라하던 아이리스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할 수 있 어.
빙그레 웃으며 입을 달싹이는 모습.
자칫하다간 모두 죽을 상황인데도, 스칼렛은 아이리스를 믿기로 했다.
가진 힘을 모두 다 쓰고, 옵시디안이 몸으로 받아내주는 상황에서 무력하게 지켜보고 있기만 하는 그녀를.
….
왜?
왜 나를.
나보단, 오히려 당신이 더 용사에 걸맞지 않아요? 그런데 왜 여신님은 나를 택한 걸까요.
이상해요.
이상한데.
이를 악물었다. 성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여전히 꺼질 줄 모르고 빛을 뿌리던 성검이 떨려온다.
“바보 같은, 오빠…!”
왜 여신님은 나를 택했을까.
이런 위기에 부러질 것만 같이 흔들린 자신보다는, 오빠가 훨씬 나았을텐데.
용사는 부러지면 안 되는데.
설령 부러져도 싸웠을 거라는 말 따위나 하는 나를, 어째서 여신님은 응원해줬을까.
「왜냐면 말이다.」
줄곧 침묵하던 여신이 속삭였다.
다정한 목소리였다.
「용사는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란다.」
온 세상을 밝히는 낮의 태양처럼.
여신의 목소리가 따스하게 아이리스의 마음을 울렸다.
「네가 부러질 듯 흔들릴 때엔, 언제나 나와, 스칼렛이 있을텐데.」
우리가 있다면, 너는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라 믿는단다.
그러니 너야말로, 나의, 태양의 여신, 미트라의 용사란다.
아이리스.
검을 쥐거라.
「눈 앞의 거악(巨惡)이, 용사로써 너의 첫 전설이 될 것이다.」
가렴.
아이리스의 입이 꾹 다물렸다.
성검이 미친 듯이 떨렸다.
스칼렛이, 루나가 함께 힘을 전해주었던 때처럼 온 몸에 넘치는 힘은 없었다.
그 대신, 성검의 빛은 어느 때보다 찬란했다.
아.
그 순간.
아이리스는 다시 한 번, 무의 영역에 서 있었다.
‘지금이구나.’
다시 검을 휘두른다.
제 일검(第 一劍), 구름 베기.
검을 천천히 내린다. 자신이 그은 검로(劍路)가 허공에 그려진다.
다시 검을 들었다.
이번에는 아까와는 다른 길이 보였다.
천천히, 길을 따라 검을 움직였다.
제 이검(第 二劍), 수면 가르기.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다음으로 넘어갔다.
미미한 위화감을 느끼기에 앞서, 눈 앞에 새로운 검로가 그려졌다.
검이 움직였다.
그녀는 검을 휘두르면서도 자신의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몰랐다. 그저 길을 따라 검을 그렸다.
그러고 나면, 어떤 식으로 움직였는지, 마치 혼에 각인이라도 된 듯 떠올랐다.
제 삼검(第 三劍), 땅 긋기.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눈 앞에 그려지는 길이 무엇인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이것이 이상적인 검의 길.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이들을 위한 검, 그리고 지금 그녀가 휘두르는 이것이야말로, 그 이상적인 형태.
제 사검(第 四劍), 검의 영역.
비로소, 어설프게 따라하는 게 끝이었던 네 번째 검.
아이리스는 알 수 있었다.
이 다음.
이 다음에도, 손이 닿으리란 것을.
아르카디아 제국칠검.
오의.
제 오검(第 五劍) 영맥 찢기.
닿았다.
오직, 마스터에게만 허락 된, 제 사검(第 四劍) 너머의 영역에.
그녀가 진정 벽을 넘게 되었음을.
아이리스는 문득 깨달았다.
벽을 넘기 위한 조건.
언젠가, 스칼렛이 했던 말.
스스로(自)의 한계를 넘어서, 자신(內) 뿐 아니라 타인(外)과, 한층 더 넘어서 세계(全)에 간섭하는 존재.
그러기 위해 스스로를 완벽히 관조할 줄 알아야 하는 자만이, 마스터가 될 수 있다고.
“아.”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 두려움에 떨었던 자기 자신.
언제나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며, 처음 마주해본 진정한 악의와 폭력에, 저항하는 대신 포기했었던,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
감히 용사라고 부를 수 없는 그 행태에, 어째서 오빠는 웃어주었을까.
“깨닫게 해주려고.”
오직 그녀가 스스로를 완전히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를 관조하고.
나약하고 무력한 자신에게 실망하면서도.
그럼에도.
딛고 일어서. 미트라가, 스칼렛이, 그리고 모두가 믿어주었던 것처럼.
아이리스는 그제야 자신의 몸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 지, 마치 답안이 보이는 것처럼 알 수 있었다.
전신의 세밀한 근육, 마력의 흐름, 바람, 대기, 모든 변수를 두 눈에 담는다.
마스터란.
벽을 넘어, 초월존재에 한 발짝 다가간 이들.
아이리스는, 비로소 벽을 넘었다.
“‘용사’니까.”
여전히 온 몸에 힘은 들어가지 않았다. 눈 앞의 흑룡은 두려웠다.
그럼에도.
어쩐지 이대로 당할 것 같진 않았다.
“보여.”
흑룡의 공격이 어디로 들어올지. 그의 넘치는 힘, 내뿜는 독기, 불꽃 따위가 어디로 어떻게 움직이는 지.
두 눈에 모두 보였다.
아까는 눈으로 쫓지도 못했었다.
지금은 눈에 훤히 보인다.
“그거면 됐어.”
그거면, 지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