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6 펠그리온 (6)
「꼬리 만 개처럼 떨던 년이 주제 파악도 못 하고…!」
펠그리온이 분노로 목소리를 떨었다.
이번에야말로 이 작은 인간을 뭉개버리리라.
쐐액! 흑룡의 팔이, 그토록 거대한 둔기가, 믿기지 않을 속도로 눈 앞의 인간을 다진 육편으로 만들기 위해 휘둘러졌다.
“흐….”
아이리스가 낮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여전히 몸에 힘은 빠진 채였다. 성검을 쥔 팔이 떨렸다. 그럼에도, 성검을 고쳐 쥔 다음.
아르카디아 제국칠검.
제 삼검(第 三劍) 땅 긋기.
재빠른 횡베기, 내리쳐 오는 거대한 용의 팔을 받아넘긴다. 아이리스의 두 눈이 그 모든 궤적을 담아내고서, 발을 놀렸다.
아르카디아 제국칠검.
제 이검(第 二劍) 수면 가르기.
아래에서 위로, 촤악! 용의 비늘이 갈라졌다. 비보 ‘뒤틀린 모래시계’를 통해 막대한 힘을 얻어낸 펠그리온이었으나,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진 몸이다.
안 그래도 생명력을 보충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잡아먹던 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억지로 힘을 끌어다 쓰는 그 몸뚱이가, 오러를 두른 게 아니라면 흠집조차 나지 않는다는 용의 비늘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크아아악!」
고통에 찬 신음. 용의 두 눈이 희번득 뒤집어졌다.
「죽인다─!」
다중 마법 전개.
촤라락. 아까 스칼렛이 고정 포격 마법진을 펼쳤던 것처럼, 흑룡의 주변으로 수십 개의 마법진이 허공을 수놓았다.
하나하나가 블랙 드래곤의 정수를 담아낸, 독과 저주의 대마법.
본디 성검을 지닌 아이리스에게 어중간한 독과 저주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주 될테지만, 그것도 펠그리온쯤 되는 블랙 드래곤이 양과 질 모두를 앞세워 퍼붓는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
펠그리온 역시 그것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마법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숨어서 기회를 노리고 있을 진조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힘을 다 쓴 척, 회복에 전념하는 척 하면서도, 눈 앞의 어린 인간 여자가 위험한 순간일 때마다 교묘하게 간섭했음을.
눈 앞의 여자는 모르는 듯 했지만. 흑룡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그러니 가급적 견제책으로 마법의 사용은 아껴두려 했으나.
결국 피를 보고야 말았다. 이제 겨우 약관을 넘긴 듯 한, 인간의 기준으로도 까마득히 어린 것의 검에 베여서.
그것이 펠그리온의 눈을 뒤집어지게 했다.
「너부터 죽이고, 음험하게 숨어서 수작을 부리는 혈귀 놈도 씹어먹어주마.」
파앗! 수십 가지의 마법진이 불길한 독기를 줄기줄기 뿜어냈다. 두 자릿수에 달하는 모든 마법진이 제각각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포격.
저주.
역병.
펠그리온은 그 자신이 떠올릴 수 있는 마법을 순식간에 조합해내서, 가장 아이리스의 발목을 붙들고 데미지를 줄 수 있는 조합식을 만들어냈다.
용사는 이를 악물었다. 성검을 쥔다.
아르카디아 제국칠검.
제 사검(第 四劍) 검의 영역.
벽을 넘기 전에는 어설프게 따라하는 게 다였던, 벽을 넘은 자에게만 허락된 오의.
아이리스를 반경으로, 무형(無形)의 영역이 펼쳐진다.
동시에, 질척하고 더러운 어둠이 움직였다.
수십 가지의 마법. 하나하나가 대마법의 일종이었다. 그것들 모두가, 아이리스를 죽이기 위해 가동했다.
「죽어라…!」
펠그리온이 으르렁 대었다. 단순히 마법을 뿌리기만 하는 것으로 눈 앞의 잡것이 죽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썩어도 준치고, 여신의 앞잡이였다. 지금도 이렇게,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지 않았는가.
그러니 그 역시 전력을 다 한다. 전신에 거대한 마력을 두르고, 그 압도적인 질량을 내세워 아이리스를 향해 쇄도했다.
그리고.
키잉!
무언가, 금속이 부딪치는 듯 한 소리. 펠그리온이 눈을 굴리기도 전에, 이미 순식간에 가속한 몸이 아이리스의 목전에 닿았다.
그래.
이대로 눈 앞의 것을 뭉개 죽여버린다면, 아무 문제 없다.
그런 펠그리온은, 아이리스가 입술을 달싹이는 것을 보았다.
오의.
제 오검(第 五劍) 영맥 찢기.
순간 오싹한 기분에 펠그리온이 가속을 위해 터뜨리려던 마력 방출을, 대신 배리어를 두르듯 전신에 겹겹이 둘렀다.
직후.
「크아아악!」
쩌적! 배리어가 갈기갈기 찢기며, 펠그리온은 전신의 마력 회로가 날카로운 날붙이에 난도질 당하는 듯 한 격통을 느꼈다.
영맥 찢기.
영역에 들어온 적의 흐름을 통제하고, 마력의 흐름을 찢어버리는, 검으로 만들어 낸 결계.
격통을 느끼면서도 주위를 둘러본 흑룡은, 자신이 전개했던 마법진들이 모두 갈기갈기 찢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빌어먹을 미트라…!」
펠그리온은 분통을 터뜨렸다.
이제 갓 마스터의 초입인 아이리스가, 아무리 그 육신의 내구성이 닳고 닳아 상처 입기 쉽다지만, 고룡에 가까운 힘과 마력을 지닌 그의 배리어와 마력 회로까지 찢어버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용사만 아니었다면.
악(惡)을 상대할 때에 있어서는, 용사란 가공할 정도의 힘을 발휘하는 존재다.
게다가.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진조놈…!!」
저 뒤에서, 그의 마법진을 절묘하게 흐트러뜨린 진조.
모든 상황이, 펠그리온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이곳이 그의 무덤이라는 것처럼.
“….”
하지만 아이리스의 상태도 멀쩡하진 않았다.
어설프기만 하던 검의 영역을 완전히 전개해내고, 그 상태에서 고룡급의 배리어와 마법진들을 수십 개씩이나 찢어발겼다.
갓 경지에 오른 몸으로, 몸이 견딜 수 있는 이상의 것을 억지로 실현해버린 것이다.
파열 된 전신의 근육을 신성력이 치유하고, 활력을 북돋아 주는 것에도 한계는 있었다.
“후우으.”
숨을 몰아쉰다. 가슴에 찌르는 듯 한 통증이 느껴진다. 긴장했던 전신에 격통이 이어졌다. 아이리스의 눈가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아팠다.
무서웠다. 두렵다.
하지만.
성검을 쥔 두 손을 꽉 잡고서, 다시 한 번 악룡을 올려다 보았다.
절대 쓰러지지 않겠다는 듯이.
「크흐, 흐하, 흐하하.」
웃음소리였다.
이미 갈려나간 비늘은 모두 재생된 상태였다. 찢어진 마력 회로도 금세 되돌아 오고 있었다. 펠그리온은 그럼에도 이 상황이 너무나도 굴욕적이었다.
상처는 회복될 지언정, 상처 입었다는 사실은 없던 일이 되지 않는다.
진조에게 당한 것은 괜찮다. 만일 저 진조놈이 완전한 상태였다면, 자신은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을 생각한 채 숨었을테니까.
그나마 미성숙한 상태였으니 다행이라고.
하지만 눈 앞의 인간은 무엇이란 말인가.
미트라의 사도? 그것이 어쨌단 말인가. 겨우 약관밖에 안 되는 애송이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가소롭고 하찮은 미물이었다.
그런데, 겨우 몇십 분만에, 아무리 진조의 일격과, 여신의 백업이 도운 성검의 권능에 약해진 상태라한들 그 자신이 위협을 느낄 정도로 용사는 성장했다.
그 불합리함.
부조리의 극한을 눈 앞에서 본 것 같아, 펠그리온은 웃음이 나왔다.
「이런 게 용사라니. 마왕을 죽이기 위한 비수로 똑같은 괴물을 만들어낸 것 아니냐?」
펠그리온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펠그리온은 마왕을 잘 모른다. 차원 너머로 접촉한 적은 있지만, 그것은 그저 그의 목적을 위해서였을 뿐이다.
마왕 바알은 언젠가의 침공의 때를 위해 적당히 펠그리온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펠그리온은 마왕을 로드와 동격으로 여겼다. 그리고 자신은 그 바로 아래, 엘더급 정도는 될 거라고.
성대한 착각이었으나, 흑룡은 그를 몰랐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뭘 모르나본데.”
「뭐라?」
힘도 거의 다 빠진 채. 소녀 용사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우리 오빠가 나보다 훨씬 세거든?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비웃음이었다.
“마왕 목소리는 들어본 적 있어? 난 들어봤는데.”
너 따위보다 훨씬훨씬 무서웠어.
이죽거리는 목소리.
펠그리온은 분노했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해오던 것을, 망상이자 착각으로 치부한 것이었으니까.
흑룡의 드래곤 하트가 거동하며, 막대한 마력을 압축하기 시작했다.
브레스의 전조.
펠그리온을 도발하던 아이리스가 긴장한 기색으로 성검을 들어올렸을 때였다.
화아악…!
“이건…!”
「…!」
흑룡의 힘으로 오염 돼 썩어버린 땅이 천천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반전(反轉)의 이능.
화이트 엘더 드래곤이 벌이는 기적.
“됐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스칼렛이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크아아…!」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자, 펠그리온이 제대로 모이지도 않은, 최대한 압축한 숨결을 통제하는 대신 폭주하기 시작했다.
엘더급에 가까운 고룡의 하트가 폭주한다면, 여기 있는 일행은 물론이고 산맥의 절반이 쑥대밭이 될 것이었다.
“…!”
드래곤 하트가 터지기 직전.
당황한 아이리스가 나서기도 전에.
「이제야 찾았구나.」
늙은 고룡이 지긋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섭리대로 따르거라.」
따악─!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금방이라도 터질 듯 폭주하던 마력이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았다.
「안 돼…!」
펠그리온의 비명. 온 몸의 회로를 폭주시킨 대가로 자멸해가던 흑룡이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다시 한 번 드래곤 하트를, 회로를, 모든 것을 폭주시켜 폭발시키려 해도, 미동조차 않았다.
섭리를 거스르는 모든 것을, 섭리대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질서의 수호자로써 엘더급 드래곤이 지닌 권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