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7 펠그리온 (7)
「안 돼. 안 돼…!」
펠그리온이 절규했다. 모든 것을 걸고서, 저 가증스러운 것들과 공멸이라도 할 셈이었거늘. 그마저도 실패하고 말았다.
「어째서, 어째서냐…! 왜…!」
어린 날.
제 어미를 죽이고, 그 심장을 씹어먹은 뒤, 어미가 마지막 순간에 건네준 비보로 몸을 숨기며 지금까지 살아 온 그였다.
펠그리온은 자신이 이 썩어가는 몸뚱이를 고쳐내고, 언젠가 로드에 필적하는 힘을 얻고서 언제나 숨어 살기만 하던 과거의 치욕과 굴욕을 씻어내 로드가 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아니. 희망이 아니라 믿음이었다. 흑룡은 자신이 있었다. 그는 스스로 특별하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그 믿음은 박살났다.
펠그리온은 죽어가고 있었다. 누구 하나 그를 동정하는 이 없이 쓸쓸하게.
「나는, 나는 이곳에서 죽어선 안 된단 말이다….」
이미 한계에 가까운 몸이었다. 그렇기에 무리를 감수하고서 화룡의 새끼를 사냥해 그 생명력을 갈취했다.
그렇게 빼앗은 생명력은 저 가증스런 흡혈귀와 정령사, 여신의 앞잡이의 수작으로 모두 소진하고 말았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든 그들을 죽이기 위해 다시 비보를 사용했으니, 펠그리온의 몸은 섭리를 거스른 대가를 치러야 했다.
본디 거대한 마력 덩어리로 변해 자연으로 순환 되어야 할 용의 육신이, 지저분하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블랙 드래곤조차 이런 최후를 맞이하진 않는다. 그들조차 죽음의 순간에는 여타 드래곤들과 다르지 않게 자연의 일부로 돌아간다.
「역겹구나.」
독기를 흘리며 녹아내리는 흑룡을 무심하게 지켜보던 백룡이 뱉었다.
힘 없는 목소리에는 미미한 경멸이 서려있었다.
늙고 노쇠한, 곧 죽음의 순간을 맞이해야 할 고룡의 시선에서 눈 앞의 흑룡이 맞이하는 최후는 모든 드래곤이 기피하는 것이었으니.
「네놈…. 칼리아….」
거의 모든 육신이 녹아내려, 칙칙한 독기를 뿜어내는 흑룡의 눈이 데굴 굴러서는, 늙은 백룡을 응시했다.
「가증스러운… 위선자….」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어떻게든 섭리를 다시 한 번 거스르려던 흑룡의 최후는, 비참하게 끝나고 말았다.
치이이익! 거대한 용의 육신이 녹아내리며 흘러내린 독기가 땅과 숲을 오염시키려 할 때. 백룡 칼리아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도움이 있어서 놈을 찾을 수 있었네….」
화악…. 다시 한 번 엘더급 백룡의 권능이 발휘되었다. 다시는 생명체가 살 수 없을 것으로 보이던 숲이 정화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던 스칼렛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 정도로 힘을 남발하면 수명이 깎일텐데.”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고룡에게, 남은 시간의 하루하루만큼 소중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러나 칼리아는 가당치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디까지나 평온하고 평화로운 마지막을 위해서라네. 놈을 내 손으로 처리하지 못했다간, 마지막 순간까지 후회했을테니….」
그렇군. 스칼렛이 고개를 끄덕이자, 칼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흑룡 펠그리온보다도 훨씬 커다란 늙은 고룡이었다. 단순히 고개를 들 뿐인데도, 대기가 흔들리는 위압감이 들었다.
“윽.”
거의 모든 힘을 소진하고, 억지로 버티고 있던 아이리스의 몸이 휘청였다. 스칼렛이 뒤에서 받아주자, 아이리스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아, 고마워요….”
스칼렛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리스가 은근히 등을 스칼렛에게 슬쩍 기댔다. 그 광경을 보던 루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한 소리해? 말아?’
지금 상황에서 괜히 고생한 애한테 한 소리 했다간 자기만 이상한 사람이 될 것 같았다. 루나는 참기로 했다. 자신은 너그러우니까.
루나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스칼렛이 말했다.
“이봐.”
「뭐지?」
반쯤 감겨 있던 칼리아의 두 눈이 다시 뜨였다. 스칼렛은 내심 이 드래곤이 자기 영역에 돌아가지 않고 여기서 한숨 잘 생각이었음을 눈치 챘다.
마지막 순간이 임박한 드래곤이란 이런 법이다. 움직이기보단 주변의 것들이 변해가는 것을, 가만히 멈춰 서 지켜본다.
시간의 흐름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아무 일 없다는 듯 서서히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거기엔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용들이 자연으로 되돌아가기 직전쯤 되면 현실세계에 반쯤 초연해진 상태가 되는 게 컸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애초에 무관심하게 변하는 것이다.
게다가 세월이 흐를수록 강해지는 종족의 특성상, 지닌 바 힘은 어느 때보다도 거대한 것에 비해, 그 육신은 자연으로 되돌아가기 좋게 쉽게 바스라진다.
단순히 레어에서 몸을 일으켜, 이곳까지 오는 것만 해도 수명을 조금이나마 갉아먹는다는 뜻이었다.
드래곤들이 단순히 움직이기 귀찮아 하는 수준이 아니라, 자신의 레어에서조차 동상처럼 움직이지 않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자신의 수명을 최대한 온전한 채로, 남은 수명을 천천히 받아들이기 위해.
“네 레어에 우리를 손님으로 받아줘. 길게는 필요 없어. 사흘 정도여도 충분해.”
아이리스의 탈력이 심했고, 이번에 벽을 넘었으니 요양을 하며 자기 수준을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스칼렛 본인 역시 펠그리온이 펼친 마법식을 보고 어느 정도의 영감을 받은 상태였다.
루나는 이곳에 와서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정령과 계약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고.
결국 산맥을 넘어가기 전 잠깐의 휴식이 필요한데, 마침 눈 앞에 그것을 요구할 수 있는 상대가 있었다.
「흠….」
늙은 용이 고민하는 듯 했다. 두 눈을 마저 감고 다시 잠들려 하지 않은 점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듯 했다.
원래라면 이곳에서 한숨 깊게 자곤 레어로 돌아갈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곳까지 오는 것만 해도 상당한 수고를 들인 것일테니. 아마 헤츨링이 당한 게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직접 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칼렛 일행은 이 늙은 용에게 나름 심심한 은인에 가까웠다.
아주 고맙지는 않지만, 그 정도쯤은 뭐…. 같은 느낌으로.
「그러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아무리 움직이기 귀찮아도, 레어로 돌아가긴 해야 했으니까.
「타라.」
고룡이 제 등을 내주었다. 용의 등 위를 타는 경험은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아이리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오빠. 들었어요?”
몸에 힘도 없어서 다리가 후들거리는 주제에, 스칼렛에게 등을 기댄 채 팔꿈치로 그를 툭툭 건드린다. 목소리에 신난 기색이 어렸다.
“그래. 어서 타자.”
“와. 드래곤 등에 탄대요. 진짜 완전─ 꺅!”
신난 목소리는 금방 끊겼다. 스칼렛이 그녀를 안아들자, 아이리스의 입이 꾹 다물렸다. 그녀는 깜짝 놀란 얼굴로, 두 손을 모은 뒤 스칼렛을 올려다 봤다.
“왜?”
“…아니에요.”
픽 웃은 스칼렛이 펄쩍 뛰어 백룡의 등에 올랐다. 매끈한 용의 비늘 위에 그녀를 내려다 준 스칼렛이 밑을 내려다봤다.
“안아줄까?”
“…무, 뭐?”
아이리스를 은근히 지켜보던 루나가, 그 말에 화들짝 놀랐다. 그래도 싫다는 말은 안 나오는지 잠시 우물쭈물, 답을 미룬다.
「…안 오르는 게냐?」
결국 지켜보던 칼리아가 한 마디 하자, 그제야 루나가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개 좆같은 새끼…. 지 꼴리는 말 듣고 싶어서 누나를 쳐 놀려….”
“그래서?”
“안아줘 새끼야!”
탁. 다시 용의 등 위에서 내려온 스칼렛이 성큼성큼 루나에게 다가갔다. 루나가 표독스레 스칼렛을 쏘아보아도 아랑곳않고 다가와서는, 그녀를 번쩍 안아든다.
“좆 같은 새끼. 나쁜 새끼. 여자나 존나 후리고 다니는 새끼.”
“맞는 말.”
“처맞는 말이겠지.”
괜히 짜증이 나 발을 동동 굴린다. ‘어허. 얌전히 있어야지.’ 하고 스칼렛이 말하자, 루나는 자기가 먼저 안아달라고 해놓고 여기서 더 발버둥을 치는 것만큼 모양 빠지는 게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결국 입을 삐죽 내밀면서 얌전해지는 걸 택했다.
「다 올라왔나?」
“그래.”
스칼렛이 루나를 안고 올라오는 것을 확인한 늙은 용이 물었다. 조금 기다리는 사이 또 한층 나른하게 잠긴 목소리였다. 더 시간을 끌었다간 정말 자버리겠다 싶어, 스칼렛이 대답했다.
쿠구궁. 잠시 엎드렸던 몸을 일으키자, 땅이 흔들렸다.
“와. 몸을 일으키는데 지진이 나네.”
“영맥이랑 이어진 몸이라 그래.”
사람으로 따지면 기지개를 켜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감탄하는 루나와 스칼렛. 아이리스는 피곤했는지 스칼렛의 품에 기대 어느새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출발하지.」
드래곤의 거대한 등에 배리어가 펼쳐졌다. 스칼렛이나 루나가 굳이 수고를 들이지 않도록 칼리아가 배려한 듯 했다.
드래곤의 거체가 떠올랐다. 날개짓조차 없이 그 거대한 몸뚱이를 순수하게 마력으로 들어올리는 광경이었다.
그렇게 높이 날아오르고 나서야, 날개를 쫘악 펼친다. 그렇게 날개를 펼치고서, 가볍게 날개를 한 번 펄럭였다.
콰아아아!
작은 돌풍이 인다. ‘오.’ 수명이 거의 다 한 고룡의 파괴력이란 이다지도 대단한 것이라, 스칼렛이 작게 감탄했다.
그 상태로 비행을 시작했다. 몇 번의 날개짓만으로도 충분했는지, 이후로는 쭉 마력을 이용해 비행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