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3 시점─루나 테일러 (3)
쿵 쿵.
루나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괜한 소리를 했다. 내가 미쳐가지고. 입을 다물었어야 했다고, 몇 번이고 생각했는데, 결국 내뱉고 말았다.
긴장으로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살짝 축였다.
“….”
순간 따라붙은 스칼렛의 눈동자. 루나는 냉큼 혀를 집어넣었다.
키스할까? 하고 물어놓고 혀로 입술을 핥다니, 아무리 그녀가 의도하지 않았어도 꼭 유혹하는 꼴이 아닌가.
루나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워낙 하얗던 피부라, 붉어진 피부가 도드라졌다.
“…왜, 왜 대답이 없어?”
한참동안의 침묵이 거북했는지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스칼렛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루나는 그 모습이 괜히, 뭐라고 하는 게 좋을까. 마치 꼭 자신의 보호자 행세를 하던, 기억을 잃기 전의 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녀 역시 기분이 복잡했다.
기억을 잃은 게 자신의 탓이라 생각하면, 가슴 속에서 거뭇한 죄책감이 뭉개뭉개 피어나기도 했다.
백 년의 기억을 잃어버린 스칼렛은 전생의 성격과 가까워졌다.
그녀가 가장 그리워 하던 모습이다. 달라져 버린 동생에게서 언제나 떠올리던, 이제는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하던 그 모습.
루나는 늘 그 때의 스칼렛을 그리워 하곤 했다. 재회했을 때의 스칼렛도 좋았지만, 사람은 언제나 과거의 것에 묘한 향수를 느끼는 법이니까.
하지만 전생과 가까워진 동생을 보고 마냥 좋아할 순 없었다.
그래선 안 되는 것이다.
그녀는 기억하고 있다.
자신을 감싸던 그의 모습을. 그녀를 대신해 제 목숨을 걸었던 그를.
죄책감, 친애, 후회, 기타 등등의, 떠올릴 수 있을 법한 온갖 감정이 휘몰아친다.
“…키스?”
스칼렛이 되물었다. 못 들은 것 같진 않았다. 루나는 왜 또 묻느냐며 한 소리 하려다, 그의 눈빛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차분히 가라앉은 선홍의 눈동자. 루비를 박아넣은 듯 아름다운 눈동자에 사로잡히는 기분이었다.
동생이 진지하게, 정말로 그걸 바라는 게 맞느냐 물어보고 있음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래.”
하지만 뭐.
키스, 할 수도 있는 거지.
그보다 더 한 것도 이미, 해본 적 있지 않은가.
애초에 지금은 진짜 친남매도 아니고.
그렇게, 키스 정돈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 정도쯤은 이제 누워서 떡 먹기라고 스스로 다독이던 루나에게 스칼렛이 조용히 물었다.
“키스만?”
순간 루나의 말문이 막혔다.
겨우겨우 대답했는데, 이번엔 그것보다 훨씬 크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되돌아 온 게 아닌가.
키스만?
그게 무슨 뜻이지? 뭐가 더 있나?
…아니. 그야 뭐가 더 있겠지. 순간 현실도피를 하려던 루나의 사고가 다시 정상적으로 되돌아왔다.
키스 말고.
더?
루나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눈꺼풀이 몇 번 감겼다. 무의식적으로 제 옷섶을 여몄다. 정말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몇가지 살색의 광경들에 저도 모르게 그만.
“대답.”
스칼렛의 눈동자가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했다.
루나는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얘가 왜 이러지? 말도 짧고, 분위기도 차분하고.
꼭 기억을 잃기 전 같은 모습이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막 뛰는 게 느껴졌다.
뭐라고 대답 해야하지?
눈 앞이 핑핑 돌았다. 입술을 다물었다. 아랫입술을 잘근 씹자, 스칼렛이 손을 뻗었다.
“쯧.”
톡. 가볍게 혀를 찬 스칼렛의 길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왜 입술을 씹고 그러냐, 하고 묻는 듯한 손길이었다.
더 이상 입술을 짓씹지 못하도록 누른 그가 다시금 말했다.
“대답하기 싫어?”
루나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녀의 입이 열리기도 전이었다. 입술을 누르던 손가락이 뒤로 향했다.
달큰한 체향이 확 풍겼다. 그녀의 몸이 급격히 쏠렸다. 무엇인가 생각하기 전에, 그녀는 자신이 스칼렛의 품에 안겼음을 깨달았다.
“대답하기 싫으면, 뭐.”
희미하게 웃는 동생이 보였다.
새삼 자신의 뒷머리를 감싼 그의 손바닥이 참으로 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루나는 침을 꼴딱 삼켰다. 얘가 정말 왜 이러지 싶어서.
굳게 닫혔던 입이 더듬더듬 열린다.
“뭐, 뭐냐? 이거 놔 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상하게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그녀가 코 끝을 찡긋거렸다. 자신이 왜 이러나 싶었다. 눈 앞의 이놈도 이상했고, 거기에 제대로 반항하지 못하는 자신도 이상했다.
“키스하자며.”
딸꾹.
루나의 몸이 떨렸다. 자기가 뱉은 말이긴 하지만, 막상 이렇게 들으니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슬쩍 동생을 올려다봤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선홍빛 눈동자가 마치 사냥감을 보는 뱀의 그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게, 내가 한 말은 맞는데….”
지금 상황에서 했다간 정말 돌이킬 수 없지 않을까.
이미 선을 넘었다면 넘긴 했지만.
언젠가는, 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시련의 남은 기한을 따져보면 조만간에 벌어질 일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음의 준비라는 게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지금은 의식에 필요한 것도 다 안 모였고….”
“꼭 그때가 아니어도 되잖아.”
갑작스럽게 들어오는 직구에 다시 말문이 막혔다.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루나의 입이 다시 열렸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어? 너랑 왜. 왜 하는데 그걸.”
자기가 들어도 꼴사나울 게 뻔 한 목소리였다. 말하고 나니 수치심에 괜히 눈물이 찔금 날 것만 같았다. 이런 씨발. 아무튼 동생이 개새끼여서 그렇다.
속에서 무언가 울컥하는 게 올라오려는데, 차가운 손바닥이 그녀의 뺨을 감쌌다.
“하여간에.”
뭐 하는 짓이냐, 하고 따지기도 전에.
쪽.
닿았다. 부드럽고, 촉촉하고, 말랑한 것이. 괜히 밀려오던 서운함과 섭섭함 따위는 온데간데 없이, 루나는 머릿속에 폭죽이라도 터진 것만 같았다.
길진 않았다. 스칼렛의 입술은 금방 떨어졌다. 다만 가까이 붙은 얼굴만큼은 떨어지지 않고 밀착해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오늘 몇 번이나 마주 보는 붉은 눈동자.
아까는 먹잇감을 노리는 뱀이 연상되었다면, 지금은 꼭 사냥감을 눈 앞에 둔 맹수의 그것처럼 느껴졌다.
차분하고 조용히 수풀 속에서 기회를 노리는 뱀이 아니라, 당장에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어뜯을 듯 흥분한 맹수와 같은 눈동자에 루나는 헛숨을 삼키고 말았다.
꼭 정말 잡아먹힐 것만 같아서.
다만 그렇게 강렬한 눈동자와 대조적으로, 스칼렛의 목소리는 평탄했다.
“나는 한 번만 하고 끝낼 생각 없었는데.”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이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해서.
“너, 너. 이 자식아. 누나한테 못하는 말이, 없, 없어…. 어? 누나가 한 번이라도 해주면, 그걸로 만족할 줄 알아야지!”
더듬더듬. 겨우 말이 나왔다.
사실 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사실 한 번이라도 해주는 걸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도 정상적인 대사는 아니었으니까. 다만, 시련의 극복을 위해서라는 변명거리라도 있으니까.
그래서, 그래서 딱 한 번만이라고.
그렇게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바보 같은 동생이, 차곡차곡 쌓아둔 마음의 벽을 멋대로 부수고는, 제멋대로 말해버리니까.
정말로. 아주 미칠 것만 같았다….
루나는 그래서 동생이 뭐라고 대답이라도 하길 바랐다. 그렇게 티격태격, 말다툼 따위를 하면서, 쿵쿵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은 진정시키고 싶어서.
그런데.
“흠.”
스윽. 뻗은 손이 루나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물끄러미 저를 보는 눈길에, 루나는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주지.
왜 저렇게 보기만 한단 말인가.
결국 참을 수가 없어져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 읍.”
다시 한 번, 다가온 숨결.
맞닿은 입술.
루나는 눈을 부릅 뜨곤, 아주 뻔뻔하게 또 제 입술을 훔쳐간 이 동생을 혼내주려 했다.
꾸욱. 두 팔에 힘을 줘 밀어낸다.
….
왜, 왜 안 밀려?
“흐읏….”
바르르 팔을 떨면서도 힘을 주던 그녀는, 이윽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
깜짝 놀라서 뒤로 달아나려는 그녀의 몸이 단단한 팔에 갇혔다. 도망갈 구석조차 없이, 동생의 팔에 붙들려서는.
츄웃.
참으로 부끄럽고 민망한 소리에, 그녀의 귀까지 붉어지고 말았다.
아까처럼 입술만 대는, 뽀뽀나 다름 없는 입맞춤이 아니었다.
동생의 송곳니가 그녀의 아랫입술에 닿았다. 벌린 그의 입술이, 그녀의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을 약하게 물었다.
쭙….
침묵이 감도는 와중, 선명하게 들려온 그 소리. 루나는 정말로 미칠 것 같았다. 분명 그만둬야 하는데. 차라리 이놈의 입술을 깨물기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런데.
힘이 안 들어간다. 저도 모르게, 입술이 벌어져서는, 저 발칙한 놈의 침입을 허용하고 만다….
“응….”
달콤한 숨이 새어나온다. 이게 정말 자신의 숨소리란 말인가? 루나는 화들짝 놀라면서도, 저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제 숨소리가 부끄러웠다.
왠지, 동생 손에 꽉 잡혀서, 움직이지 못하는 꼴이 되니까….
…조,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아랫배가 화끈거렸다.
생경한 감각이었다. 홀로 스스로 위로할 때조차 이런 감각은 없었다. 이렇듯 아랫배가 화끈거리고, 당기고, 꾹꾹… 눌리는 듯한 느낌은….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원래부터 잔뜩 빨개진 채라 크게 티는 안 났지만.
루나는 눈을 슬쩍 감았다. 이제 저도 모르겠다 싶었다.
“츄읏….” 새어나온 소리에, 스칼렛이 루나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꽉 조여오는 팔이 갑갑하면서도, 괜스레, 어딘가 설명할 수 없는, 이상야릇한 기분이 든 루나는 저도 모르게 허리가 움찔 떨렸다.
그러다 스칼렛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자기가 힘을 세게 준 것을 깨닫고 힘을 좀 빼주면, 되려 루나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만다.
아. 조금 더 해주지….
숨이 달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