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2 드라쿨레아 (5)
루펭.
드라쿨레아의 새로운 가주.
그는 옛날부터, 체페슈의 어린 남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가 세기의 천재란 말인가?
채 백 살도 되지 않은 어린 것들이, 뭐 그리 대단하단 말인가?
“남매가 나란히 마스터가 되었다지? 하여간 대단해.”
“그러게 말이야. 부모란 것들은 체페슈라는 이름이 아까울 지경인데, 그 둘 사이에서 어떻게 그런 남매가 태어났는지.”
늙은 부모가 미웠다.
어찌 드라쿨레아의 가주가 되어서, 체페슈의 후계자를 칭찬한단 말인가?
버젓이 그들의 자식이, 후계자가 이렇게 눈 앞에서 듣고 있는데.
이를 부득 갈았다.
어린 놈년이 주제를 모르고 설치는 게 꼴같잖았다.
동시에, 그렇게 나대고 다니니 조만간에 큰 화를 치루리란 생각도 했다.
이제 겨우 반백년밖에 살지 않은 어린 것들이다.
세기의 천재? 두 번 다시 없을 재능? 그런 게 뭐 어쨌단 말인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이라도, 그것이 피어나기 전에 저무는 일은 흔한 일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 오히려 조심조심 숙이고 살아야지, 저렇게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다니니 무슨 일이 생겨도 생길 터.
루펭은 그렇게 생각하며, 제 안에서 자라나는 부정적인 감정을 억눌렀다.
어차피 자신도 언젠가 드라쿨레아의 가주가 될 몸이니까.
그놈은 앞으로 수백년은 더 지나야 체페슈의 가주가 될 테지만. 자신은 멀지 않았다.
앞으로 길어도 백 년 정도만 더 참으면, 가주가 될 테니까.
참기로 했다.
….
“그 얘기 들었나? 체페슈의 후계자가, 제 부모를 죽이고 가주 자리를 찬탈했다더군.”
“그래. 나도 들었지. 잘 된 일이라고 해야 할지, 안 됐다고 해야 할지. 그만큼 전대 체페슈 가주랑 달리 이번 대의 체페슈 가주는 만만했는데 말이야.”
“뭐, 어린 놈이 가주가 됐으니 제 부모만큼은 아니어도 그리 상대하기 어렵진 않겠지.”
“하긴.”
뭐라고?
루펭은 눈 앞이 어지러웠다.
자신은 아직, 후계자에 불과한데. 그놈이 벌써 체페슈의 가주가 되었더랜다.
어찌?
백살도 되지 않은 어린 꼬맹이가, 어떻게 제 부모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찬탈할 수 있단 말인가?
살아온 세월이 곧 힘이 되는 흡혈귀의 특성상,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 놈이, 그 어린 체페슈가, 수백년은 살아온 흡혈귀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단 소린가?
“하여간 대단하긴 하군. 루펭도 모자라진 않은데, 그놈과 비교해보면 영 어딘가 부족해 보인단 말이지.”
“너무 잘나서 부모 목을 물어뜯는 것보단 낫지.”
“하하. 그것도 그래.”
…어째서!
…아니다.
아니야. 아무리 놈이 대단하다고한들, 드라쿨레아의 늙은 원로들이 말했듯 아직 어린 녀석이다.
그 부모가 살아 생전 체페슈의 이름으로 패악질을 부려온 것에 대해, 그 책임을 추궁하면, 체페슈의 이름값과 영향력도 상당히 줄어들테지.
그렇다면, 언젠가 드라쿨레아의 가주가 된 루펭과, 힘을 잃은 체페슈의 가주. 둘 중에서라면, 당연히 드라쿨레아의 가주가 될 그가 더 대단하지 않겠는가.
루펭은 그렇게 생각하고, 또 참기로 했다.
….
…….
“마냥 어린 놈이라고 좀 무시했는데, 된통 당했어.”
“만만치 않더군.”
“쯧. 이번엔 좀 굽혀줄 필요가 있겠는데.”
“휴우. 그래도 뭐, 체페슈면 우리가 좀 굽힌다고 크게 위신이 상할 일은 아니지.”
“그래. 체페슈니까.”
원로들의 대화.
가주인 아버지와, 늙은 원로들이 한숨을 내쉬며 체페슈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루펭은 드라쿨레아의 후계자로 이 자리에 참석했다.
그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버지.”
“뭐냐.”
“체페슈라는 게….”
“그래. 얼마 전에 제 부모를 물어죽이고 가주가 된 그 꼬맹이 말이다.”
그놈이 왜.
루펭의 얼굴에 떠오른 의문을 읽었는지, 그의 아버지가 안면을 쓸어내렸다.
“솔직히 좀 만만하게 봤는데, 쉽지 않더구나. 이대로 갔다간 우리 쪽의 피해가 아주 클 거다.”
그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 어린놈이, 수백년에서 수천년은 살아온 드라쿨레아의 원로들을 상대로 이겨냈다는 뜻이 아닌가?
단순히 무력 뿐 아니라, 머리를 쓴 주도권 싸움에서조차?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아무튼 그렇게 됐다. 조만간 놈이 찾아올 거다. 휴전 협정을 위해 말이야.”
루펭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그리고 얼마 뒤.
저벅, 저벅.
마침내 드라쿨레아의 정원에까지 당도한 남자가, 그를 내려다보았을 때.
“뭐냐. 이 놈은.”
그저 무심한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을 뿐인데, 루펭은, 그만 전신이 바짝 굳고 말았다.
“아아. 내 아들이라네. 조만간 자리를 물려줄 생각이지. 인사라도 하겠나?”
루펭을 소개해주는 아버지. 루펭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분명, 만나게 된다면 한 마디 해주려고 했었다.
어린 놈이 나댄다.
그렇게 살다가 후회하게 될 거다.
뭐 그런.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광경인데, 정작 입 밖으로 나온 것은 다른 것이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무척 굴욕적이었다.
참을 수 없이 수치스러웠다. 고개를 숙인 채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그래도, 그는 체페슈의 가주였다. 여기서 괜히 들이받는 것보단, 이 편이 굴욕적이더라도 잘 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가.”
…그 말이 끝이었다.
저를 소개시켜주었던 아버지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무심히 그리 한 마디 내뱉고는, 지나가 버린 것이다.
“어, 어어. 그래. 들어가서 얘기하지.”
아버지 역시 그런 체페슈의 무례에도 당황하기만 할 뿐, 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향해 눈짓 한 번 주지 않고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
아무도 없이 정원에 혼자 허리를 숙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
이를 악물었다.
언젠가, 언젠가 오늘의 굴욕을 되돌려주리라.
반드시.
….
그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반드시──!!”
루펭의 주먹이 쇄도했다. 콰앙! 바닥에 내리꽂힌 주먹에, 지축이 뒤흔들렸다.
“쯧.”
간편하게 회피한 스칼렛.
드워프의 완벽한 설계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땅이 흔들렸지만, 잠시 뿐.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았다.
“보물고의 보물이 아깝지 않나본데.”
전신의 마력을 활성화 시킨 루펭을 본 스칼렛이 중얼거렸다. 순간 머리에 화가 뻗쳐서 주먹을 내질렀다가 아차 했던 루펭이 이를 바득 갈았다.
“그대가 같잖은 도발만 하지 않았어도.”
“내가?”
픽. 스칼렛이 코웃음을 쳤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들었다는 기색이다.
“이봐.”
오싹.
루펭은 저도 모르게 자세를 다잡았다.
직후.
콰앙! 거대한 물리력에 루펭의 몸이 튕겨나갔다.
“커헉!”
루펭이 숨을 토했다. 전조 없이 발휘된 무형의 힘에 타격 당한 몸이, 보물고의 벽을 부수고 밖으로 튕겨 나왔다.
‘무슨…?!’
충격 자체는 크지 않았다.
썩어도 드라쿨레아의 가주다. 칠백 년씩이나 묵은 노괴가, 겨우 이 정도의 충격에 당하지는 않는다.
부러진 뼈와, 뭉개진 내장은 순식간에 되돌아온다.
하지만 당혹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전조 없는 공격. 그럼에도, 그의 몸이 저항조차 못 하고 튕겨 나갈 정도로 밀도 높고 강력한 힘.
“큭, 크흐흐. 역시 세기의 천재라는 건가?”
하지만 루펭은 웃었다.
이 정도는 해줘야, 자신이 그토록 원망하고 증오했던 체페슈의 어린 천재라고 불릴 수 있을테니.
불과 몇십 년 전이었다면 전의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나라면….’
거기까지 생각하고, 자세를 다잡았다. 전신의 피가 빠르게 돌았다. 마력이 온 몸을 일깨웠다.
‘정령’의 성질에 가까운 드라쿨레아는, 신체의 변형에 능하다.
웨어 울프의 손톱.
아룡, 와이번의 비늘.
엘프의 눈과, 드워프의 근력.
그 외에도 전신에 정령의 가호를 두른다.
대륙 전체를 통틀어서 손 꼽히는 강자로 불리는, ‘마스터’의 경지.
그 경지에 다다른 루펭은, 호기롭게 웃은 채 자신의 숙적을 맞이했다.
이 상태라면, 놈도 이길 수 있다!
“…끝이냐?”
“…뭐?”
무심한 눈빛.
─그런가.
한 때, 과거에 스쳐지나가듯 들었던 놈의 목소리가, 놈의 무심한 눈빛이 떠오른다.
그때와 다를 게 없는, 지금의 눈빛.
“…네노옴…!”
지금의 나를 상대로,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을 것 같으냐.
죽인다.
죽이고, 네놈의 가증스런 누이를 취한다!
그걸로 네놈에게 복수하리라!
전신에 힘을 준다. 루펭의 몸에 증기가 피어났다. 꾸드득, 뒷발에 힘을 줘 바닥이 뭉개졌다.
그리고, 도약───.
키잉─!
아?
“고룡급만 상대하다 보니까 이제 이 정도 수준은 시시한데.”
털썩.
루펭은 자신의 시야가 낮아짐을 느꼈다.
세상이 높아 보였다. 왜지?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크, 윽…?”
목 아래로 깔끔하게 소멸 된 채, 바닥을 데굴 구르고 있었으니까.
“폐가 날아가도 목소리가 나온단 말이지.”
저벅 저벅. 다가 온 스칼렛이 루펭의 머리통을 짓밟으며 중얼거렸다.
마치 신기한 실험체를 대하는 것 같은 목소리에, 루펭이 이를 악물고 몸을 재생시키려 했다.
삼대 혈귀는 불사에 가까운 존재들이다.
설령 머리가 날아가더라도 부활할 수 있는 존재들.
그런데 겨우 이 정도로, 이겼다고 자만하는 건가?
당장 재생해서, 방심한 놈을 죽여버리겠….
…!
“…네놈!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냐!”
재생이 되질 않았다.
아니. 아예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진즉 모두 재생되었어야 할 몸이, 날아간 목조차 제대로 재생되지 않고 있었다.
이러면, 이대로 가면 아무리 불사의 몸이라한들, 죽어버리고 만다.
흠칫.
죽음의 공포를 느낀, 루펭의 눈동자가 떨렸다.
“아. 이제 좀 겁 먹은 거냐?”
짓밟았던 머리를 마치 공이라도 들 듯 한 손으로 들어올린 스칼렛이, 떨리는 루펭의 눈동자와 마주보았다.
“이제 얘기가 좀 되겠네.”
씨익.
아주 맑게 웃는 그 미소가, 루펭은 두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