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0 천칭 (7) - 1부 완(完)
길었던 의식이 끝났다.
“으흑.”
누님이 잘게 몸을 떨었다. 그 안에 한가득 받아낸 씨앗을 흘리지 않으려 애를 쓰며, 끙끙 앓는 소리를 흘렸다.
때마침 천칭이 내려준 빛무리가 누님과 나의 몸에 스며들었다.
“괜찮아?”
“갠차낫….”
안 괜찮은 것 같은데. 그래도 잠시 기다려주니, 금세 회복하고 일어서서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그래봤자 얇은 드레스 한 벌 뿐이지만.
쿠우웅.
땅이 흔들렸다. 의식이 끝났으니, 제 역할을 다 한 제단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다.
“손 잡아줄게.”
“으응.”
이미 평범히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이 된 게 보이는데도, 누님은 굳이 내 손을 피하지 않고 마주 잡았다.
제단이 무너지기 전에 내려온 우리는, 천천히 가루가 되어 다시 천칭으로 회수되는 제단의 모습을 지켜봤다.
“끝났어?”
때마침 안팎을 격리하던 결계 역시 허물어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누나와 아이리스가 다가왔다. 다가오는 두 사람을 본 누님이, 픽 웃더니 나와 깍지 낀 손에 힘을 줬다.
손깍지 끼고 있는 모습 같은 걸 자랑하고 싶은 걸까.
그걸 지켜본 두 사람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한 소리 하려는지 누나가 입을 열려던 찰나, 천칭이 소리를 냈다.
키이!
천칭으로부터 울려퍼지는 소리. 마침내 균형을 이룬 천칭으로부터, 아득한 힘이 우리에게 내려졌다.
“윽.”
지끈거리는 두통과 함께, 두 눈이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비틀거리니, 나와 손을 마주 잡고 있던 누님이 다급히 나를 부축했다.
“스칼렛, 괜찮아? 어디 아파?”
나는 신음을 삼켰다. 두 눈을 태우는 듯한 작열통에, 식은땀이 등을 적셨다. 이를 악물었다. 누님과 마주 잡은 두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내 손이 누님의 손등을 긁어대고 있음을 알고 있는데도, 고통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두 눈을 떴을 때.
「왔는가. 나의 대적자.」
익숙한 목소리.
온 몸이 칠흑같은 어둠으로 뒤덮인 채, 붉게 빛나는 눈동자만이 선명히 보이는 자.
세계의 종말.
마왕 바알이, 나와 마주보고 있었다.
“…여긴.”
「나와 같은 곳에 올라온 것을 환영하마.」
느긋한 목소리로, 바알이 나를 향해 말했다.
나는 그제야 내가 보고 있는 풍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방금까지 서 있던 「세계의 이면」과 마찬가지로, 우주를 배경 삼은 순백의 공간.
「이곳은 ‘근원’이다.」
근원.
생소한 단어에, 내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자 바알이 말을 이었다.
「그대와 나. 혹은 천계의 신들만이 오직 이곳에 발을 들일 수 있지. 정확히는, ‘볼 수’ 있게 되는 거다. 그대가 얻은 그 ‘천리안’으로 말이야.」
바알의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내 눈가를 만졌다. 작열하듯 뜨겁던 두 눈동자가 멀쩡했다. 오히려, 훨씬 더 선명해진 듯 했다.
「애초에 극복하라고 내린 시련이 아니었거늘, 기어코 극복해내 짐과 같은 위치까지 올라왔단 말이지….」
쯧.
바알이 혀를 찼다. 그는 못 마땅하다는 듯 나를 노려보다가도, 이윽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러니 나의 대적자인 거겠지. 용사보다도 더더욱 나의 숙적에 걸맞는 자여.」
마왕은 그리 말하곤 등을 돌렸다.
숙적인 나를 앞에 두고 당당히 등을 보이는 모습에 뒤를 찌르기 위해 마력을 돌리는 순간, 바알이 등을 돌린 채 말했다.
「어차피 이곳에서 우리는 서로 공격할 수 없다. 순순히 따라와라.」
그 말대로였다.
이곳은 말 그대로 ‘보기’ 위한 장소라는 듯, 언제나 내 뜻에 따라주던 나의 마력이 몸 안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바알의 뒤를 따랐다.
‘천리안’으로 보는 세계.
이곳이 ‘세계의 근원’이라던 바알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듯, 바닥의 빛이 나무 뿌리처럼 갈래갈래 나뉘어져 있었다.
「그것이 바로 분기점이다.」
세계의 분기점. 각각의 다른 선택으로 나뉘어지는, 세계의 갈래.
나는 의문이 들었다.
이 갈래들이 각각 평행세계라고 한다면, 그 숫자가 너무 적지 않은가?
「분기점이라는 게 그리 쉽게 나뉘는 줄 아는가.」
바알은 코웃음을 쳤다.
「세계의 변혁을 일으킬 수 있는 자들.」
마왕의 눈이 나를 향했다.
「흐름을 바꾸고, 새로운 분기점을 만들어내, 마침내 세상을 바꾸는 자들.」
다름 아닌 바로 너희잖느냐. 천칭의 무게를 기울이는 자.
「됐으니 따라오기나 하도록. 그곳에서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마왕이 알려준 사실에 일순간 멍해졌던 것도 잠시, 재촉하는 목소리에 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보게 된 것은.
“…이건.”
불타버린 것처럼 끊어진 뿌리들.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버린 세상의 잔해.
「저것이, 세계의 말로다.」
심드렁한 마왕의 목소리에, 나는 되물었다.
“…어차피 저것들 모두 평행세계의 네가 저지른 짓이 아닌가? 이런 걸 보여준다고 내가….”
「글쎄.」
“뭐?”
「아무튼 보여주려던 것 이게 끝이다. 이 정도 보여줬으면, 내가 할 도리는 다 한 것이지.」
마왕이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의 숙적이여.」
「언젠가 내 목을 치러 와라.」
「나 역시 네 영과 육을 앗아가, 비로소 내 비원을 완성할테니.」
「서로 죽고 죽이는 날을 고대하고 있으마.」
그렇게.
나는 다시 원래의 세상에서 눈을 떴다.
“스칼렛! 괜찮아?”
쓰러져 있던 나를 옆에서 간호하고 있던 것인지, 누님이 바짝 다가와 내게 물었다. 나는 살짝 고갤 돌려 누님과 눈을 마주했다.
“…다른 두 사람은?”
“방금 막 교대했어. 한 사람씩 옆에 있기로 했거든.”
“…얼마나 쓰러져 있었지?”
“반나절 정도….”
길게도 쓰러져 있었군.
나는 누님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대체.’
나는 ‘세계의 근원’에서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타오른 세계의 갈래, 남아 있던 것은 그 잔해 뿐….
그것이 이 세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말하는 듯한, 마왕의 말.
나는 눈을 감았다.
“누님.”
“응?”
“반드시, 내가 지켜줄게.”
“…갑자기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응. 기뻐.”
내 품에 안긴 레티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다짐했다.
바알의 뜻대로 두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