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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컷 노예들의 주인이 됐다-106화 (106/395)

촌장과 정해둔 약속장소로 이동한 우리는 이내 주점 중앙 테이블에 앉아서 떠들고 있는 낯선 남자 두 명과 마주쳤다.

“반갑습니다.”

“이야, 반갑습니다!”

진중한 얼굴의 중년 남자와 가벼워 보이는 청년은 각기 다른 어투로 우리를 환영했다. 각각 도미닉과 칼츠라고 소개한 남자들과 손을 맞잡고 인사를 나눈 나는 자연스레 그들의 옆에 앉았다. 내 눈치를 살피던 제미니도 쭈뼛거리면서 그들의 인사를 흘려넘기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카사노라고 합니다.”

“알지 알지, 마을에 온 소문이 돌았는데-”

“칼츠.”

경박하게 웃으며 떠드는 칼츠를 제지하는 도미닉, 여관 주인한테 들었던 이름을 떠올린 나는 이 둘이 에릴다와 나의 밀회를 소문낸 사람들인가- 추측했다.

“죄송합니다, 이 친구가 꽤 어려서요.”

“아닙니다, 맞는 말인걸요.”

“마을에 검푸른 머리칼을 가진 여자는 한 명도 없는데 형씨는 어디서 그런 여자랑 만났데요?”

에릴다의 존재를 모르는지 흥미로운 어투로 질문하는 칼츠, 옆에 앉아 눈치를 살피던 제미니도 의혹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들고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그냥 아는 여자입니다. 마녀인데 생각 난 김에 잠깐 불러서 맛 좀 봤죠.”

“이야, 대단하네. 남자야 남자, 안 그래요 형님?”

“마녀라면 이해가 가는군. 마녀들은 하나같이 도도하고 까칠하다던데, 대단합니다.”

“아닙니다,”

입가에 미소를 걸고 슬쩍 제미니의 눈치를 살폈다. 쉽게 납득하진 못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의심은 거둔 모양이었다. 에릴다는 공간 마법을 쓰는 여자니까 거짓말은 아니었기에 친근하게 구는 둘과 잡담을 나눈 나는 슬슬 본론을 꺼내며 물었다.

“그럼 이렇게 넷이서 가는 겁니까?”

“네, 저희가 발견한 규모로 보면 충분한 거 같습니다.”

“그런데 정찰 중에 발견했다는데 어떻게 산 중턱에 있는 군락을 발견한 겁니까?”

제미니의 말로는 마을 입구에서 세네 시간 올라가야 나오는 곳이라던데, 자경단이 정찰하면서 찾을만한 범위인가? 드는 생각에 묻자 칼츠가 짓궂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사실 마을에 내려오는 고블린들이 간혹 있어서 땡땡이치면서 정찰하러 가는 겁니다- 하거든요. 그런데 진짜 찾아버릴 게 뭐람?”

“하하, 말하기 부끄럽지만 칼츠말대로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농땡이 피우며 어슬렁거리는데 식물을 채집하는 고블린을 뒤따라가니 동굴로 들어가더군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나오는 부연 설명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납득했다. 대화에 끼기 힘든지 넋 놓는 제미니를 슬쩍 흘겨본 나는 내려둔 짐을 챙기고 도미닉과 칼츠에게 말했다.

“그럼 서둘러 올라가죠, 해가 지고 오르면 위험하니까요.”

“읏차, 그래봤자 고블린새끼들인데요 뭐.”

“그래도 조심해야 한다. 상위종이라도 나오면 어쩌려고 그래?”

“저, 많이 위험한가요...?”

조심해야 한다는 경고에 살짝 겁먹은 제미니가 손을 들며 물어왔다. 안면이 있는지 능글맞은 미소와 함께 제미니에게 어깨동무한 칼츠가 걸걸한 목소리로 놀려먹었다.

“에이- 끽해야 고블린 먹이 되는 건데요 뭘- 쫄지 마요 형님.”

“허...”

“너무 걱정하지 마 제미니, 카사노씨 정도 용병이면 충분할 거야.”

마을의 일원끼리 친근하게 대화하는 모습에 어깨를 으쓱인 나는 제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적당히 멋있는 말을 지껄였다.

“걱정 마세요. 전동료의 남편인데 제가 목숨 걸고 지켜드리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뭔가 감동한 표정의 제미니가 두 주먹을 꽉 쥐고 나를 바라봤다. 아내와 붙어먹은 줄 알고 의심하기만 했는데 저런 말을 해주니 꽤 감동적이었나보다.

“형님! 벌써 쫄면 집에 가서 마누라랑은 어쩌려고 그럽니까?”

“칼츠...!”

유약한 제미니의 곁에 붙어 저급한 농담을 내뱉는 칼츠와 진중한 표정으로 내 뒤를 따르는 도미닉. 생각보다 쓸만해 보이는 파티에 만족한 나는 그들의 옆에 붙어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며 뒷산으로 향했다.

**

-터벅 터벅

“저깁니까?”

“그런 거 같습니다.”

뒷산에 오르길 두시간쯤? 생각보다 체력이 따라주는지 성큼성큼 따라오는 제미니의 속도에 감탄한 나는 더 빨리 산을 올랐다. 그 덕에 예상했던 세네 시간보다 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헤엑... 헤엑...”

매고 있는 짐은 칼츠가 맡은 지 오래고 제미니의 등은 땀에 흠뻑 젖어 퀴퀴한 냄새를 뿜어냈다. 짐 덩이 같은 제미니를 거슬려서 하긴커녕 도와주는 칼츠와 걱정하는 도미닉을 보니 제미니를 데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조용히 합시다.”

“네.”

도미닉이 표시해둔 나무를 쓰다듬으며 자세를 낮춘 나는 천천히 산을 올랐다. 동굴까지 가는 길에 X자로 길을 이어놨다고 했으니 지금부터 쭉 표식을 따라서 오면 고블린이 사는 굴이 나올 게 분명했다.

“끼엑...”

듬성듬성 X표시가 남은 나무를 따라 올라가는 중 낮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앞장선 나는 고블린의 울음소리에 손을 들어 주먹을 쥐었다 폈다 신호를 준 뒤 손을 낮춰 더 숙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저벅 저벅

뒤를 살펴 모두 숙인 걸 확인한 나는 천천히 울음소리를 내며 걷고 있는 고블린의 뒤를 따랐다. 짧은 다리를 내디디며 걷던 놈은 커다란 코를 킁킁이며 주변을 살폈지만 아직 우리를 발견하진 못한 듯했다.

조악한 나무 몽둥이를 바닥에 질질 끌며 다듬어지지 않은 길을 따라 걷던 놈은 중턱쯤에서 낮은 울음소리와 함께 우리를 목적지로 안내했다.

“저기입니다.”

“저놈이 정찰병인가 보네요.”

-저벅 저벅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놈은 우리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목 긁는 소리와 함께 조용히 굴로 들어갔다. 내 허리만큼 오는 고블린이 문제없이 들어가는 입구를 보며 견적을 낸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될지 의논했다.

“그냥 바로 들어가죠.”

먼저 정찰병의 수준을 확인한 나는 바로 토벌하자고 주장했다. 몽둥이 같은 조악한 무기에 작은 입구의 굴이면 안쪽의 크기도 넓은 일은 매우 드물었다. 칼츠도 나와 같은 의견인지 땀을 뚝 뚝 흘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상황을 지켜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진중해 보이는 도미닉은 바로 들어가자는 내 의견에 조심스레 반대했다. 정찰병만으로는 군락의 병력을 가늠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사나워 보이는 고블린의 모습에 겁먹은 제미니는 도미닉의 뒤에 서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편에 섰다.

잠시 생각해보자고 의견을 낸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용병단에서 생활할 때 수없이 겪은 경험으로는 강한 고블린이 있을 확률은 매우 드물었다. 그렇지만 나를 제외한 셋은 그러한 사실을 알지도 못할뿐더러 토벌이라는 상황도 처음일 테니 억지로 끌고 가는 건 좋지 못한 행동이었다.

“일단 대기하죠.”

굳은 얼굴의 제미니와 도미닉에게 대기할 것을 제시한 나는 한 가지를 더 덧붙였다. 두시간 동안 지켜보고 다른 정찰병이나 지나다니는 고블린이 없다면 곧장 굴로 들어가자고 말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신중하게 접근하는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었는지 제미니의 얼굴은 한층 더 밝아졌다. 경박해 보이는 칼츠야 아무 상관 없다는 듯 팔짱을 낀 채 여유 부리고 있었고 제미니만이 아직도 경직된 상태로 우리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털썩

나무 그늘에 주저앉은 나는 쭈뼛거리는 제미니에게 손짓했다. 내가 앉은 걸 확인한 도미닉과 칼츠는 곧장 바닥에 앉으며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결국 눈치 보던 제미니도 바닥에 앉고 나서야 우리는 사소한 잡담으로 분위기를 환기할 수 있었다.

-사락 사락

“안 나오네요.”

“그렇게 말입니다. 준비하겠습니다.”

-철컥

허리에 찬 검을 움켜쥐는 도미닉과 제미니의 어깨를 두들기는 칼츠. 자리에서 일어난 우리는 수풀에서 벗어나 고블린이 들어갔던 굴로 최대한 숨죽인 채 다가갔다.

-저벅 저벅

허리를 숙여야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굴의 높이와 별개로 통로는 넓었다. 먼저 앞장서기로 한 나는 손짓으로 셋에게 거리를 벌릴 것을 명령한 뒤 검을 쥔 채 천천히 전진했다.

코끝을 스치는 흙냄새와 누린내가 심하게 느껴졌다. 좆같은 냄새만 맡아도 여기가 고블린 군락의 냄새임을 확신한 나는 손에서 튕기는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걸어갔다.

“끼르르륵!”

“끼에엑!”

허리를 숙이고 굴을 나아가던 나는 점점 천장이 높아지는 걸 느끼고 허리를 펴며 미세하게 들리는 울음소리에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뒤를 살펴보니 검을 뽑는 내 행동에 움츠리는 제미니와 보조하기 위해 검을 뽑는 도미닉과 칼츠가 보였다. 이대로면 돌파해도 되겠지. 안심한 나는 굴의 끝이 다가오는 순간 머리만 살짝 내밀어 공동을 살펴봤다.

“끼륵, 끼르에엑!”

“끼에엑!”

조악한 나무 몽둥이를 제멋대로 휘두르며 화내는 고블린 두 마리가 서로 마주 보며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비슷한 덩치의 둘을 자세히 살펴본 나는 한 마리는 우리가 쫓았던 고블린임을 알 수 있었다.

-즈륵

발로 땅을 긁은 나는 빈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펴 신호를 주고 바로 공동으로 뛰쳐나갔다. 흙 튀는 소리와 갑자기 튀어나온 내 신형에 고블린의 눈이 커지면서 목이 움찔거렸지만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가로로 검을 그었다.

“끼...!”

온 힘을 다한 가로베기에 누런 이빨을 달싹이던 고블린 둘의 목이 그대로 날아갔다. 작은 머리통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열매처럼 허공을 돌다가 뻑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와 함께 나뒹굴었다.

주륵 바닥에 흐르는 핏줄기를 피해 시체를 잡아끌어 치운 나는 공동을 살피며 이어진 길들을 살폈다. 넷이 눕고도 남는 공간과 쭉 이어지는 넓은 통로. 횃불 같은 것도 없고 아무 장식도 없는 공동의 모습을 보니 지능이 높은 고블린은 한 마리도 없는 게 확실했다.

“이야, 형씨 겁나 빠른데요?”

“칼츠,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에이, 친하게 지내자는 거지.”

능글맞은 미소와 함께 다가오는 칼츠와 그에게 주의를 주는 도미닉, 널찍이 떨어진 제미니는 지금 상황이 얼떨떨한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고블린 시체와 나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일단 쭉 전진하죠, 점점 아래로 기우는 걸 보니 지하에도 있을 듯하네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카사노씨는 고블린 몇 마리 정도 잡아두실 수 있습니까?”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한 도미닉은 진지한 얼굴로 내게 질문했다. 운디네를 만나기 전과 만난 후 어떻게 싸웠는지 떠올리며 가늠한 나는 그에게 대략 예측한 머릿수를 말해줬다.

“아무 방해 없으면 혼자 스무 마리도 더 가능하겠네요. 아마 이 이상은 없을 겁니다.”

“아아, 저랑 칼츠 둘이선 다섯 마리 정도는 감당 될 거 같습니다.”

셋이서 스물다섯 마리라, 이정도 규모의 굴이면 삼십 마리 안팎의 고블린이 머물고 있을 테니 충분하다고 생각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미니를 가리켰다.

“일단 제가 선두를 유지하고, 고블린들이 본격적으로 나오면 칼츠씨가 제미니씨를 보호해주는 거로 갑시다.”

“아, 네 알겠습니다.”

제미니를 언급하자 묘하게 밝아지는 도미닉. 내가 그를 신경 쓰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걸까? 에릴다를 데려가기 위해서도 제미니는 토벌이 끝날 때까지 살아있는 게 중요했다.

“그럼 다시 이동하겠습니다.”

-저벅 저벅 저벅

성인 두 명은 지나갈 수 있는 통로를 살펴본 나는 셋과 거리를 벌려 앞장섰다. 아무런 불빛도 없어 어두운 통로였지만 눈에 마나를 두르고 벽을 짚으며 전진하니 막힘없이 나아갈 수 있었다.

“끄르륵...”

꽤나 긴 통로를 지나온 우리는 통로 너머의 공동을 밝히는 형광색 불빛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대화를 나눴다.

“저런 불빛은 처음 보는데 혹시 아는 분 계시나요?”

혹시 아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도미닉과 칼츠를 보며 물었지만 둘은 고개를 저으며 모른다고 대답했다. 고개를 내밀어 살피기엔 불빛이 강해 발각될 수도 있었다. 제대로 된 규모를 파악하기 전에는 불필요한 전투를 펼치고 싶지 않은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들었지만 이내 내 어깨를 두들기는 제미니가 전해준 정보에 미소를 띠며 다시 전진했다.

“그냥 발광 버섯이라는 거죠?”

“네, 네. 동굴에서 가끔 보이는 버섯입니다. 위험한 것도 없고 그냥 밝게 빛나는 게 끝입니다.”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제미니씨.”

“아닙니다, 본 적 있는 버섯이라 다행이네요.”

머리를 긁으며 쑥스러워하는 제미니를 뒤로하고 숨을 가다듬은 나는 그대로 공동으로 뛰쳐나갔다. 타닷- 발걸음 소리와 함께 공동 중앙에 서 있는 고블린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주변을 걸어 다니며 경계하던 놈은 통로에서 튀어나온 나를 보고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곧바로 달려들었다.

-빠아악!

“끼윽!!!”

체급도 생각 안 하고 멍청하게 달려드는 고블린의 머리통을 손잡이로 내려찍었다. 움푹 파이는 골통과 함께 묵직한 손맛을 느낀 나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고블린의 골통을 그대로 내려찍었다.

-푸욱!

퓻- 튀는 핏줄기와 움직임이 멎은 고블린. 시체에서 검을 쭉 뽑아낸 나는 방금 놈이 낸 소리에 다른 고블린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해 검을 치켜든 상태로 경계했다.

아까 지나왔던 공동의 두 배는 되는 공간을 둘러본 나는 곳곳에 피어오른 발광버섯이 은은한 불빛을 내뿜는 걸 보며 주위를 둘러봤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어딘가로 이어지는 넓은 통로와 곳곳에 핀 발광버섯. 생각보다 넓은 굴이지만 적은 고블린 숫자에 의문이 든 나는 뒤에서 주변을 둘러보는 도미닉에게 말했다.

“굴의 크기는 넓은데 고블린이 터무니없이 적네요. 일단 되는 데까지 전진해볼까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네, 저희야 한 것도 없으니 괜찮습니다. 카사노씨가 힘드신 게...?”

“저는 아직 괜찮습니다.”

“칼츠?”

“이제 방 두 갠데 그냥 쭉 쭉 갑시다. 형님은 제가 지킬 테니 두 분이 앞 좀 뚫어주세요!”

분위기를 환기하는 가벼운 농담에 웃음을 터뜨린 우리는 더 나아가기로 합의했다. 제일 후미에 자리 잡은 제미니와 곁을 지키는 칼츠, 선두에서 전진하는 나와 바로 뒤에서 호응할 준비하는 도미닉까지. 포지션까지 완벽하게 나눈 우리에게는 전진만이 남았다.

**

-쩌억!

골통을 가르자 드러나는 분홍빛 덩어리에서 외면한 나는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봤다. 널브러진 고블릿 시체들 사이에는 벽에 기대 숨을 고르는 도미닉과 겁먹은 제미니를 지키는 칼츠가 눈에 보였다.

“다친 데는 없죠?”

여태껏 고블릿 한두 마리 있던 공동과 다르게 열 마리 넘게 모여있는 공동을 습격한 우리는 조악하지만 쓸만한 갑옷이나 검을 차고 있는 고블린들과 마주쳤다. 무지성으로 달려들던 고블린과 달리 무기를 휘두르는 놈들의 저항은 거셌지만 그래봤자 고블린이었다.

“네, 괜찮습니다.”

“형님도 제가 지켰고, 저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후우... 일단, 여기서 좀 쉴까요?”

주변에 튄 핏자국이나 고블릿 시체가 눈에 밟혔지만 넓었던 공동인 만큼 구석에 텐트를 차리면 쉴 수는 있었다. 동굴 안이라 시간이 체감되지 않았지만 무거운 눈꺼풀과 허기가 느껴지는 걸 보니 시간이 꽤 많이 지났음을 확신했다.

“그렇게 하죠. 저랑 칼츠가 뒷정리를 할 테니 좀 쉬고 계시죠.”

“아, 그럼 제가 텐트를 피고 있겠습니다...!”

우리의 대화를 듣던 제미니가 나서서 매고 있던 배낭에서 텐트를 꺼냈다. 이런 건 눈치가 빠른 그의 행동에 흐뭇한 미소를 지은 나는 제미니의 어깨를 두들기며 벽에 기대 잠시 휴식했다.

“후우...!”

발밑에 걸리적거리던 고블린들을 걷어차며 대충 치워준 나는 텐트 2개를 피고 숨을 몰아쉬는 제미니에게 다가가 고생했다고 말해줬다.

“하하, 아닙니다. 이런 거라도 해야죠.”

“잠시 쉬고 계세요. 식사 준비하고 야영 준비는 제가 하겠습니다.”

“아유, 온종일 고생했는데... 제가 하겠습니다.”

“에이, 앉아 계세요.”

바닥에 깐 모포에 제미니를 앉힌 나는 그가 맨 가방에서 장작 몇 개와 에릴다가 준비해준 도시락을 꺼냈다. 원형으로 모포를 깔고 중앙에 장작을 얹은 나는 지푸라기와 바닥을 구르는 돌 하나를 챙겨 불똥을 일으켜 장작에 불을 붙였다.

-화륵

“읏차...”

“후우...”

모닥불을 피우는 와중 뒤에서 한숨을 내쉬며 도미닉과 칼츠가 바닥에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이 정도면 적당히 가깝고 괜찮네- 만족한 나는 도시락을 셋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일단 식사하고 불침번은 어떻게 하면 할지 의논하죠.”

“오늘은 카사노씨가 고생했으니 쉬시죠. 저희 셋이서 나눠 서겠습니다.”

“그래요, 형씨는 고블린 잡는다고 힘 좀 썼으니 쉬세요.”

“맞습니다. 푹 쉬세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치는 제미니를 본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거절하지 않았다. 정할 게 그것밖에 없었던 우리는 불침번에 대한 의논이 끝나고 곧바로 식사를 시작했다.

만족스러워하며 도시락을 미친 듯이 퍼먹는 둘과 뿌듯한 얼굴로 지켜보는 제미니. 고블린 군락에서의 첫날이 조용히 마무리됐다.

-스륵

불침번 초번은 도미닉이 서기로 했기에 칼츠와 제미니는 초번을 서고 싶었는지 아쉬운 얼굴로 도미닉을 바라봤다. 도미닉과 칼츠, 나와 제미니. 이렇게 짝을 나눈 우리는 웃으면서 모닥불을 바라보는 도미닉을 뒤로 하고 텐트로 들어왔다.

“후우...”

손목에 찬 팔찌로 동굴의 좌표를 확인한 나는 소매로 팔찌를 숨기며 침낭을 펼치는 제미니의 곁에 다가가 침낭을 펴며 장난스레 말했다.

“피곤하죠?”

“아, 그렇긴 한데 제가 피곤해봤자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하하...”

“그런 말씀 마세요. 제미니씨덕에 얼마나 편한데요.”

“다행이네요.”

긴장으로 굳은 제미니를 달래면서 침낭에 들어간 나는 마찬가지로 침낭에 파고든 제미니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며 그와 대화를 나눴다. 대화를 나눌수록 긴장이 풀렸는지 목소리가 밝아지는 제미니와 별개로 그의 대답은 점점 늘어지더니 이내 뚝 끊겼다.

-커어어

온종일 긴장하고 땀도 뺐으니 피곤했을 테지, 코를 골며 잠든 제미니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침낭에서 빠져나온 나는 그를 내려다보며 눈 위에 손을 휘저으며 잠들었는지 확인했다.

“커어어... 컥...”

잠든 지 오분도 안 됐는데 공동에 울릴 정도로 크게 코를 고는 제미니. 이 정도로 깊게 잠들었으면 눈치채지 못하겠지. 확신이 선 나는 팔찌의 좌표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품에서 에릴다가 건네준 공간이동 주문서를 한 장 꺼냈다.

-부욱, 우웅...

일렁이는 공간과 흔들리는 시야. 익숙한 감각에 눈을 감은 나는 깊게 잠든 제미니를 뒤로하고 훅- 사라졌다. 에릴다를 만나고 올 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푹 자고 있을 제미니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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