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넓은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각의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걷고 있었다. 불콰하게 물든 얼굴로 침 튀기며 떠드는 남자들과 찾아오는 밤에 일이라도 하러 가는지 곱게 먹은 화장을 뽐내는 창부들까지. 저런 풍경을 보고 있으면 그제야 내가 정말 다른 세계에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끼익
레미아가 말해준 딸기코의 주점에 도착한 나는 얇은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수라장의 예감에 눈을 질끈 감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고막을 두들기는 고함소리와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피부에 저릿할 정도로 느껴졌다.
-쨍그랑!
“빌! 이 씨발새끼!”
“이거놔, 네가 먼저 삥땅친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이 씨발년들, 고블린 좆이나 빨아먹어라!”
시끌벅적한 주점 안은 조용한 테이블이 단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떠들었고 모두가 화를 내고 있었다.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난폭한 분위기에 어깨를 움츠리며 주변을 살폈다.
“씨발! 또 졌어!”
“저 새끼한텐 안 된다니까. 그냥 술이나 먹자고.”
“씨발 지금 꼴은게 20실버야, 20실버! 포기할 줄 알고?”
저 멀리 주점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펼쳐진 카드 뭉치들, 누런 이를 드러내며 낄낄 웃는 남자들이 카드를 돌리며 난폭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 중앙에 홀로 남다른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로브를 입은 사람. 에릴다가 저기 있었다.
-저벅 저벅
끈적끈적한 시선을 흘려내며 어깨를 움츠린 채 다가간 나는 테이블에 다가오자마자 노려보는 남자들을 피하며 에릴다의 뒤에 섰다.
로브를 뒤집어쓴 에릴다는 내 접근에 고개를 슥 돌리며 후드 속 검푸른 안광으로 나를 빤히 바라봤다. 무언의 압박에 입가를 가린 나는 레미아의 전언을 전한 뒤 그녀에게 물었다.
“여기서 뭐하고 계세요?”
“카드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한 에릴다가 가냘픈 손가락에 집힌 카드를 툭 테이블에 던졌다. 깔끔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간 카드가 에릴다가 깔아둔 카드 옆에 안착했다.
“씨발, 또야?”
“남창 같은 새끼 데려와놓고 돈도 가져가? 개호로새끼구만!”
아무런 룰도 모르는 나는 그냥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구경했지만 도박꾼들에게는 재앙이었나 보다. 에릴다는 말없이 중앙에 놓인 은화더미를 슥 긁어 가져온 뒤 주변을 둘러보고 은화 하나를 턱 얹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륵
“그럼.”
청아한 목소리와 함께 등을 돌린 에릴다가 테이블에서 벗어나자 남아있던 도박꾼들은 분통을 터뜨리며 눈앞의 술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특히 20실버나 뜯겼다던 늙다리는 시뻘건 얼굴로 무심하게 떠나는 에릴다의 뒷모습을 뚫을 기세로 쳐다보고 있었다.
-타다닥
가만히 서 있다가 뼈와 살이 분리될 것 같은 분위기에 서둘러 에릴다를 뒤따랐다. 앞장서던 에릴다는 자신의 등에 바짝 붙는 나를 흘겨보고는 더 빠른 걸음으로 주점을 벗어나기 시작해 나도 속도를 높여 에릴다를 졸졸 따라다녔다.
-끼이이익
낡은 문을 열고 딸기코의 무덤에서 빠져나온 나는 아무 말 없이 걷기 바쁜 에릴다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따라갔다. 말이라도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짜증이 났지만 나는 그녀의 부사수였기에 덤벼들면 기껏 들어온 용병단에서 쫓겨날게 분명했다.
-저벅
“언제까지 쫒아올겁니까?”
한참동안 구불구불한 뒷골목에 들어가던 에릴다가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단호한 목소리에 깃든 피곤함에 괜히 주눅이 들었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당당하게 나가기로한 나는 고개를 뻣뻣이 들며 에릴다에게 말했다.
“부사수가 사수를 따라다니는 게 잘못입니까?”
“저는 자유시간입니다. 당신은 내일부터 용병단 잡일을 하면서 지내야 할 텐데, 지금이라도 푹 자두세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느 집단이던 막내의 숙명은 가혹했기에 내일부터 쏟아질 심부름과 잡일, 선임들의 장난과 구박을 생각하니 지구에서 있었던 일들이 떠올라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렇기에 가만히 숙소에 누워서 하루를 보내기엔 시간이 아까웠다.
“...가만히 숙소에 있기도 그렇습니다. 뭐하는지 구경하고 싶습니다.”
내 요청에 에릴다는 후드를 푹 눌러쓴 채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나보다 키가 작지만 꽤 장신인 에릴다였기에 거의 마주보는 각도여서 에릴다의 검푸른 눈동자를 오랫동안 바라볼 수 있었다.
“...조용히 따라오세요.”
에릴다의 입에서 떨어진 허락에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신나했다. 사수면서도 아름다운 에릴다와 친해지고 싶었기에 이런 기회를 놓치면 친해질 기회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허락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 그런데 부단장님이 여관 숙박비가 에릴다님한테 있을 거라고 하던데, 혹시 가지고 계십니까?”
얼마 없는 소지금에 숙박비를 더하면 순식간에 불어난다. 얼른 돈을 모아야 쓸만한 장비를 살 수 있었기에 자금은 귀했다. 내 질문에 조용히 걸어가던 에릴다의 어깨가 순간 움찔거렸고 그 뒤 고개만 살짝 돌려 나를 바라보며 대답해줬다.
“어, 없습니다. 내일 드리죠.”
없으면 없는 거지 내일 주는 건 뭐야? 레미아가 농담처럼 던진 말을 떠올린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검푸른 눈동자를 빤히 바라봤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던 밤하늘 같은 눈동자가 움찔- 흔들렸지만 이내 고개를 돌린 에릴다에 의해 더 바라보지는 못했다.
**
-딸랑딸랑
“어서 오세요!”
활기찬 처녀의 목소리와 함께 왁자지껄한 주점 안으로 들어섰다. 땀내 나는 남정네들이 침 튀겨가며 떠드는 테이블 사이를 요리조리 지나친 에릴다는 딸기코의 주점에 있던 카드쟁이들과 마찬가지로 구석에 박혀있는 남자들에게 다가갔다.
-드륵
조용히 있으라는 에릴다의 엄포에 입을 꾹 다문 나는 자연스럽게 의자를 당겨 앉는 에릴다의 뒤에 딱 붙어 섰다. 빈자리를 채우는 에릴다의 모습에 시시덕거리며 웃던 놈들은 뒤에 있는 나를 노려보더니 엄지로 까딱이며 날 가리켰다.
“이 새낀 뭐야?”
“애송이. 부단장이 맡고 있으라고 해서.”
청아한 목소리가 카드가 오가는 테이블에 툭 내던져지자 카드를 돌리던 젊은 남자가 흥미로운 눈으로 에릴다를 빤히 바라봤다. 날름거리는 혀와 음심에 축축하게 젖은 불온한 눈빛에 욱했지만 가만히 있으라는 에릴다의 엄포가 생각나 주먹을 움켜쥐며 참아냈다.
“뭐야, 목소리는 예쁜데? 얼굴가죽도 예쁜가 한번 볼까?”
“홀먼, 적당히 하고 카드나 돌려.”
“씨발, 나한테 명령하지 마.”
입 꼬리를 비틀며 쏜살같이 손을 뻗는 홀먼, 손의 목적지는 당연하게도 에릴다의 후드였다. 빠른 속도로 뻗어나가는 손을 막기 위해 다급히 손을 뻗었지만 내 손이 닿지 않았다. 저런 새끼한테 에릴다의 얼굴을 보여주기 싫었던 나는 혀를 차며 분해했지만 이내 생각지도 못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득!
“끄악...!”
“병신 같은 새끼, 내가 적당히 하라고 했잖아. 너 같은 새끼가 한둘인 줄 알아?”
“씨이발...! 내팔, 내팔이...!”
-쿠당탕!
의자에서 엎어진 홀먼은 바닥을 닦는 걸레처럼 꼼꼼히 뒹굴며 먼지를 닦아냈다. 익숙한 풍경인지 혀를 찬 아재가 뒤에 서있던 남자에게 고개를 까딱이자 그남자는 바닥에 나뒹구는 놈을 질질 끌고 가게 뒤편으로 향했다.
“미안하게 됐수. 판에 낀지 얼마 안된 놈이라.”
“카드나 돌리죠.”
어떻게 막았는진 모르겠지만 이렇게 될 거라 예상이라도 했는지 에릴다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에릴다의 종용에 카드뭉치를 집어든 아재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카드를 뒤섞으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홀먼이 저렇게 됐으니 자리가 하나 비는데... 우리 친구 한판 할래?”
웃는 낯으로 나를 보는 아재의 친근한 모습에 나는 괜히 고민이 들었다. 에릴다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만 이세계에 와서 처음 보는 제대로 된 놀이였기에 한번은 즐기고 싶었다. 지구에서도 포커나 섯다같은걸 심심풀이로 해본 적 있었기에 그때 느꼈던 즐거움들이 새록새록 샘솟았다.
“그으...”
머뭇거리며 빈 의자를 잡으려는 순간 에릴다가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내 손을 쳐냈다. 얼얼한 손등을 쓰다듬으며 에릴다를 바라보자 내 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은 에릴다가 아재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구경하러 온 사람이니까 빼고 합시다. 카드나 돌려요.”
“쯧, 알았어- 거 참 빡빡하게 구네-”
궁시렁거리며 휙휙휙- 카드를 나누는 아재. 당황스러운 상황에 땀을 삐질 흘리며 가라앉은 분위기의 테이블을 구경하고 있자 에릴다가 고개를 살짝 돌린 뒤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괜히 없는 돈 꼴지 말고 구경만 해요. 여기만 하고 갈거니까.”
“아, 네.”
“......”
사수와 부사수라지만 그건 레미아가 붙여준 형식적인 관계였다. 멀게만 느껴지는 에릴다의 반응에 괜히 섭섭했던 나는 발끝으로 바닥을 긁으며 도박판을 구경했다. 계속 집중해서 관찰하니 같은 무늬와 숫자를 모으면서 카드를 내고 까는걸 보니 포커와 유사해보였다.
“오...”
에릴다가 들고 있는 패는 가장 큰 숫자. 테이블에 깔아둔 숫자들과 이어지는 카드였기에 에릴다는 곧바로 옆에 덮으면서 토독토독- 테이블을 두들기며 여유를 즐겼다. 진짜 잘하네- 같은 단순한 감상을 속으로 뱉으며 구경하는데 머리를 벅벅 긁으며 고민하는 아재들의 머리 옆에 무언가가 보였다.
“응...?”
보라색이라고 해야 하나? 알 수 없는 덩어리가 둥둥 떠다니며 아재들의 머리맡에 맴돌고 있었다. 에릴다에게만 없는 덩어리를 꾸준히 관찰하며 시간을 보내는데 쿵! 테이블을 갈기는 소리와 함께 에릴다가 쌓여있는 돈에 손을 뻗는 게 보였다.
무심한 모습으로 카드를 확인하고 카드를 내고, 카드를 확인하고 카드를 내고. 수없이 반복하며 돈을 쓸어 담는 에릴다의 모습을 구경하다보니 그녀에 대한 동경심이 조금 샘솟았다.
저렇게 주변에서 이를 악물고 욕을 지껄이면서 압박하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다니. 이세계에 떨어져 남들 눈치나 살피며 지내던 나와 현저히 다른 모습이 무척이나 멋있어보였다.
-콰아앙!
“그러다 부서져요!”
“아, 갚으면 되잖아!”
부숴지는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강하게 테이블을 내려치자 지나가던 종업원이 앙칼진 목소리로 주의를 줬다. 짜증어린 목소리로 소리친 아재는 텅텅 빈 테이블과 지친 아재들을 둘러보더니 체념한 목소리로 에릴다에게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수고했습니다.”
-드르륵
[씨팔-]
[에이 좆같게-]
무심하게 일어선 에릴다는 빠르게 테이블에서 빠져나왔다. 멀어질수록 미약하게 들리는 욕설과 뒷담에 괜히 아재들을 흘겨보며 에릴다를 뒤따르자 주점에서 벗어난 에릴다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칙- 불을 붙였다.
“응?”
지구에서나 보던 필터담배와 아주 비슷해 보이는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에릴다를 바라봤다. 이세계에 떨어지고 가장 많이 생각난 물건중 하나인 담배를 여기서 보다니! 에릴다의 손가락에 집힌 담배와 후드 너머로 살포시 드러나는 분홍빛 입술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으니 에릴다가 조용히 내게 물었다.
“피고 싶습니까?”
“아, 그게 본적이 있는데. 보니까 신기해서요. 피고 싶은 게 아닌 건 아니지만 신기하니까-”
“풋-”
순순히 피고 싶다 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기에는 그건 내 진심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갈팡질팡하며 말꼬리를 흐리니 에릴다가 아주 작게 웃으며 입가를 가렸다. 그리고 이내 손을 내리며 품에서 한 개비를 꺼내더니 내게 내밀었다.
“부사수가 된 기념으로 하나 빌려드리겠습니다.”
“빌, 빌려요?”
“꽤 비싼거라서요. 저도 얼마 못 피는 물건입니다.”
=후읍
도톰한 입술이 하얀 필터를 물고 쪼옥- 오므려졌다. 골목 사이로 비치는 달빛에 밝혀진 에릴다의 하관은 내가 봤던 모든 조각상보다도 아름다워 보여서 감탄을 흘리며 받은 담배를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입에다 가져다댔다.
-텁
필터를 물자 느껴지는 텁텁한 느낌과 그리움이 순식간에 몰려왔다. 물기만 해도 좋은 이 순간을 음미하며 조용히 눈을 감고 있자 에릴다가 웃음기서린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불은 안 붙입니까?”
놀리듯 히죽 웃는 입 꼬리로 내게 묻는 에릴다, 차가워보이던 그녀가 싱긋 웃으며 사소한 농담을 던지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에 쥔 담배를 이리저리 옮기며 당황하고 있을 찰나에 에릴다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쭉 빨아 당기세요.”
-치익
입술에 문 담배 끝자락에 타는 소리와 함께 담배향기가 물씬 풍겼다. 필터를 입에 문 채 내 담배 끝에 갖다 대는 소위 담배 키스를 실현하는 에릴다의 행동에 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후읍- 숨을 들이켰다.
파스스 타들어가는 담배 끝과 함께 매캐한 담배연기가 폐부를 깊숙이 찔렀다. 얼마 만에 느끼는지 모를 편안함과 묵직한 담배연기가 지구에서 맛봤던 맛과 유사한 게 느껴져 매우 신기했다.
“우와...”
짧은 감탄을 뱉으며 입에 문 담배를 맛있게 빨아먹으니 쿡쿡- 웃은 에릴다가 짓궂게 농담을 던졌다.
“누가 보면 담배를 처음 보는 촌뜨기인줄 알겠군요.”
“아, 신기하네요. 이렇게 피기 편한... 담배라니.”
용병들을 따라다니며 놈들이 피던 담배를 떠올려봤지만 그들이 피는 건 파이프 담배 따위들이었다. 에릴다는 어떻게 지구에나 있던 필터 담배와 유사한걸 구한 걸까? 의아한 눈으로 물어보니 에릴다는 쪼옵- 홀쭉해진 볼을 만들어 입 안 가득 들어찬 연기를 굴리다가 후욱- 내뱉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크래프톤에서 비싼 돈 주고 구해왔습니다. 뭐, 다른 세계에 온 사람이 개발했다던가 터무니없는 소문이 도는 물건입니다.”
-후욱
에릴다의 달콤한 한숨과 함께 하늘하늘 회색빛 연기가 골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덧없이 흩어지는 담배연기를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별거 아닌 듯이 말하는 에릴다의 말을 곱씹으며 환희에 물들었다.
나 혼자 떨어진 게 아니었다. 이정도의 물건을 만들었다면, 지구 사람들이 꽤 많이 떨어진게 아닐까? 알몸으로 허허벌판에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고향사람을 찾은 듯한 기분에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을 쭉 빨아 삼키며 타들어가는 꽁초를 틱 버렸다.
“꼭 피워본 자세로군요.”
본인 몫의 꽁초를 부츠로 짓밟던 에릴다가 나를 보고 흘러가듯 말했다. 그렇지만 여기선 피워봤다거나 익숙하다고 말하면 그녀에게 꼬투리가 잡힐 것만 같아 나는 곧바로 어리숙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렇게 버리는 거 아닌가요? 짐꾼으로 일할 땐 다 이렇게 버리던데.”
“음, 아닙니다. 그냥... 후우- 돌아갑시다.”
숨을 고른 에릴다는 흐트러진 후드를 여미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나는 바닥을 나뒹구는 꽁초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에릴다의 뒤를 따랐다. 아직까지 입안에 느껴지는 매캐한 담배연기를 곱씹으며 향수에 잠긴 나는 먼저 들어가라는 에릴다의 종용에 지친 몸을 끌고 숙소로 들어갔다.
-풀썩
여관과 별 차이 없는 낡은 침대에 몸을 내던진 나는 방안을 맴도는 옅은 사과향을 맡으며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꿈만 같은 하루였기에 명상이라도 하지 않으면 머리가 어지러워 한숨도 못잘 것만 같았다.
갑자기 용병단에 채용되질 않나, 예쁜 엘프가 내 사수고 나 혼자 이 세계에 떨어진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이 더 있기까지. 1년간 구르면서 얻은 것보다 오늘 하루 얻은 게 더 많아서 괜히 허탈하기까지 했다.
-끼익
“안잡니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에릴다, 매캐한 담배향이 흐릿하게 느껴지는 걸보니 혼자 한 대 더 태우고 들어온 모양이었다.
“이제 자려고 했습니다.”
“내일부터 바쁠 겁니다, 잡일도 하고 아마 간단하게 실력 확인도 할 테고.”
“그런걸 보통 들어오기 전에 하지 않습니까?”
“부단장의 속은 아무도 모릅니다. 뭐, 잘버텨보세요.”
-풀썩
침대에 몸을 내던진 에릴다는 걸터앉은 채 몸을 덮은 로브를 휙 벗어던졌다. 출렁이는 가슴과 깔끔해 보이는 천옷의 자태에 침을 꿀꺽 삼킨 나는 애써 못본척하며 천장을 바라보며 에릴다에게 궁금했던걸 물었다.
“그런데 이 용병단은 규모가 어느 정도인가요? 제대로 들은게 없는데...”
“하나도 설명 안 해주던가요?”
질린 듯한 에릴다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에릴다를 바라봤다. 식은 눈으로 침대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던 에릴다는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지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저희정도면 수도에서 이름 있는 용병단입니다. 레미아 부단장은 중급 정령 세 마리와 계약한 유명한 정령사입니다.”
“정령이요...”
소설에서나 접했던 정령이란 존재가 쉽게 와 닿지 않은 나는 입에 맴도는 단어를 곱씹으며 에릴다의 검푸른 눈동자를 빤히 바라봤다. 그냥 본 것뿐인데 에릴다는 내 눈빛이 당신은요? 라고 묻는 눈빛이라 생각했는지 묻지도 않은 자신의 실력을 말해줬다.
“저는 공간마법사입니다. 아주 희귀하고 매우 특별한 마법을 다루죠.”
“아, 그런가요.”
“그런가요로 끝날게 아닙니다. 카사노는 아직 풋내기라 제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를 겁니다.”
“마법을 본적도 없어서...”
내가 따라다닌 용병들은 도끼나 검따위를 휘두르는 잡배였다. 고블린 담당일진처럼 고블린을 도살하다가 오크가 떴다하면 도망치는 그런 하찮은 용병들. 그리고 나는 그 하찮은 놈들보다 못한 짐꾼이었다.
“허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에릴다는 불퉁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괜히 더 얘기했다가는 기분만 상하게 할 거 같아 고개를 돌린 나는 잠들기 전 에릴다에게 입에 발린 소리를 한마디 해줬다.
“얼마나 대단한 마법인지 한번 보고 싶네요.”
“흥, 곧 보게 될 겁니다. 안녕히 주무시길.”
-스륵
이불이 끌리는 소리와 함께 풀썩 눕는 소리가 들렸다. 곁눈질로 침대에 누운 에릴다를 바라본 나는 뻑뻑한 눈을 꾹 감으며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내일부터 용병단의 막내로 온갖 일을 해야 한다는 소리를 계속 들어서 그런지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후우...”
그래도 짐꾼보단 낫겠지. 사람 취급도 못 받으며 그들의 짐을 모조리 메고 다니는 당나귀 같은 삶을 곱씹은 나는 몰려오는 수마에 몸을 맡기고 천천히 잠들었다.
**
이른 새벽 고함소리와 함께 깬 나는 자기전 긍정적인 생각을 하던 나를 쥐어 패고 싶은 충동에 휩쓸렸다. 차라리 당나귀가 낫지 씨발.
“빨리 닦아!”
내 옆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고함치는 여자의 목소리를 흘려들은 나는 발치에 널린 방패나 갑옷을 열심히 닦으며 뚝 뚝- 땅바닥에 땀방울을 흘렸다. 적갈색 머리의 까칠해 보이는 여자도 푹 젖은 앞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정리하며 쉬지도 않고 손을 놀렸다.
“다 닦으면 끝나는 겁니까?”
“장난해? 끝나면 연무장 청소해야지!”
“그것도 끝내면요?”
“식당에 식자재 옮기는 거 도와주고 사수 챙겨야지. 너 씨발 들은 거 하나도 없어?”
여기서 들은 게 없다고 하면 뭐했냐고 욕을 먹을 게 뻔했고 그렇다고 들었다고 하면 알면서 왜 물었냐고 말할게 뻔했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할걸 괜히 물어봐서 지옥의 이지선다에 빠져버렸다.
“사수 챙기는 건 들었는데 다른 건 제대로 못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장비 닦고 연무장 청소하고 식자재 옮기는 건 항상 고정이야. 다른 건 다 나눠서 하니까 우린 시키는 거만 하면 돼.”
“넵!”
순순히 사과하고 빠르게 방패를 닦으며 대답하니 불퉁하던 여자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어디를 가던 싹싹하게 굴면 다 돌아온다- 라던 어머니의 말씀을 떠올린 나는 열심히 손을 놀리며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성함도 못 들은 거 같습니다. 저는 카사노라고 합니다.”
“야. 떠들 시간에 닦기나 하지?”
“넵!”
안돌아오네.
수십 개의 방패와 갑옷을 닦은 뒤 연무장으로 향한 나는 정말 당나귀 시절이 그리웠다. 그때는 정신 놓고 짐만 옮기면 됐지, 지금은 어디다 뭘 갖다놓고 땅도 고르고 별 씨발 놈의 짓거리 천지였다. 가슴팍을 전부 적시는 땀에 정신 못 차린 나는 혀를 내빼물고 헤진 허수아비에 짚을 덧댔다.
“흐으, 흐으...”
“고생 많네요.”
노끈으로 짚을 묶으며 허수아비를 꽁꽁 싸맨 나는 눈가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뒤돌았다. 비싸다던 담배를 뻑뻑 피던 에릴다가 후드를 꾹 눌러쓴 채 호선을 그리는 입 꼬리를 달싹이며 내게 말했다.
“바쁘다고 했죠?”
“네헤에. 바쁘네요.”
저 멀리 땅을 고르던 여자는 손이 놀고 있는 내게 한마디 하려고 다가오다가 내 앞의 에릴다를 발견했는지 분통어린 얼굴로 그대로 뒤돌아 하던 일을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그만 떠들고 얘기하라고 하면 에릴다에게 뭐라 하는 것처럼 돼 버리기에 체념한듯했다.
“그럼...”
“아! 저 근데.”
후우- 연기를 내뱉으며 돌아가려는 그녀를 불러 세운 나는 벌어지지 않는 입술을 달싹이며 에릴다를 물고 늘어졌다. 사실 바로 일하기 싫어 불렀을 뿐, 용건이 없었기에 쉽게 말이 내뱉어지지 않았다.
“왜 불렀습니까?”
-씨익
내 속셈을 알아챘는지 땅을 툭툭- 두들기며 능글맞은 웃음을 짓는 에릴다. 마냥 차가운 사람인줄 알았는데 저런 모습을 보니 신기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 오늘도 밤에 따라가도 되겠습니까?”
“제가 뭘 할 줄 알고 따라간다고 합니까?”
“또, 그 카드 게임하러 가는 거 아니에요?”
“푸흐-”
내가 생각해도 어리숙한 대답에 에릴다는 선명하게 들리는 웃음을 흘리곤 탁탁- 바닥에 재를 털었다. 아이씨 여기 말고 저기에 털지- 치솟는 짜증을 가라앉히며 에릴다를 바라보니 미소를 띤 에릴다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하세요. 아! 일 다 끝나면 숙소에 있으세요. 부단장이 온다고 하니까...”
그럼- 하고 가볍게 손을 까딱인 에릴다는 손에 쥔 담배를 맛있게 빨며 그대로 가버렸다. 호선을 그리는 매캐한 담배연기를 맡으며 멍때리던 나는 성큼성큼 걸어오는 여자의 모습에 바닥에 널브러진 노끈을 쥐어 다시 허수아비에 감았다.
“야!”
“네?”
일부러 농땡이친걸로 뭐라 하나? 등줄기에서 느껴지는 식은땀을 애써 무시하며 그녀를 바라보니 뭐라 하려는 사람치고는 흥분으로 가득한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너, 사수가 에릴다님이야?”
“아, 네.”
“와- 미쳤다. 나랑 다른 놈들은 등급도 낮은 용병들인데-”
“그렇게 대단한 사람입니까?”
“대단하지! 용병단 유일한 마법산데- 와- 아침부터 그 비싸다는 크래프톤 담배도 피고-”
청소가 다 끝났는지 쫑알쫑알 떠들며 연신 에릴다의 찬양을 내뱉는 그녀의 말을 귀 기울여 들으며 허릴 쭉 폈다. 용병단 유일한 마법사- 쿨하고 비밀주의에 정체를 아무도 모르고- 말도 안했으면 여자인줄도 몰랐다- 등등 신나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근데 갈수록 칭찬이 아닌거같은데?
결국 식당으로 가서 온갖 식재료를 나르는 내내 에릴다 얘기를 들었다. 그래도 하나 얻은 게 있다면 단장과 부단장 말고는 얼굴을 제대로 본 사람이 없다는 얘기, 첫 만남 때 쿨하게 후드를 벗으며 자기 소개하던 에릴다를 떠올린 나는 의아함을 감추며 떠드는 여자의 말에 대충 대꾸해주고 헤어졌다.
-끼익
“후우-”
“아니, 비싸다고 하지 않았어요?”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에릴다, 책상에 앉아 책을 읽으며 담배를 피우는 에릴다의 모습에 순간 치솟은 화를 참지 못하고 생각만 한다는 걸 입 밖으로 내뱉어버렸다.
“오... 비싸긴 합니다, 저는 충분히 지불 가능한 가격이고요.”
방안에 맴돌던 사과향과 뒤섞이는 담배냄새를 맡으며 내 침대로 향했다. 후드를 벗은 에릴다는 연신 히죽이는 얼굴로 맛있게 담배를 빨며 나를 바라봤다.
“피고 싶습니까?”
“...괜찮습니다.”
“푸흐.”
연신 웃으면서 담배를 빠는 에릴다의 모습은 뭔가 속을 살살 긁었다. 아까 들은 얘기로는 쿨하다거나 무뚝뚝하다거나 그런 얘기뿐이었지만 내가 본 에릴다는 첫인상 때나 그랬지 지금은 실실 쪼개며 속을 긁는 영악한 여자였다.
“원래 그렇게 웃음이 많습니까?”
침대에 걸터앉은 채 툭- 내던진 질문에 에릴다는 재떨이에 담배를 내려놓으며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내게 말했다.
“아뇨. 원래 잘 안 웃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에릴다의 입가엔 여전히 미소가 걸려있었다.
“카사노를 계속 보니 정말 풋내기 그 자체 같아서요.”
풋내기면 풋내기지 풋내기 그 자체는 뭐야- 불만어린 눈으로 바라보자 쿡- 한 번 더 웃은 에릴다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다보면 아예 덜렁 수도로 떨어진 사람 같습니다. 모든 걸 처음 보는 어리숙한 그 표정이 저는 익숙하거든요.”
마치 저처럼요- 하고 덧붙인 에릴다는 재떨이에 놓은 담배를 집어 후읍- 한 모금 빨아들인 후 그대로 내뱉었다. 꿀렁이며 흩어지는 연기가 후욱- 내 쪽으로 흩날렸다.
그러고 보니 엘프라고 했었지- 기다란 귀를 껄떡이며 맛있게 담배를 피우는 에릴다를 흘겨본 나는 소설에서나 보던 엘프가 저럴 리 없다고 되뇌며 에릴다의 눈길을 피했다.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 근거를 알 수 없는 호감은 왠지 거북했다.
-벌컥!
“잘 잤어?”
꾹 닫힌 문이 벌컥 열리면서 활기찬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미소 가득한 얼굴로 방안에 들어온 레미아는 이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내가 방에서 담배 피지 말랬지!”
“나가기 귀찮아서요.”
-후욱
입안에 맴돌던 마지막 한 모금을 내뱉고 털털하게 대답하는 에릴다. 이익- 입가를 파르르 떨던 레미아였지만 후우- 한숨을 내뱉고 진정하더니 미소어린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잘 잤지? 다름이 아니라 간단하게 실력 좀 보려고.”
“아, 네.”
“에릴다 할 거 없지? 같이 가자.”
“네-”
일사천리로 마무리 되자 곧바로 방 밖으로 나가는 레미아, 어깨를 으쓱인 에릴다는 벗어둔 로브를 그대로 덮어쓰더니 후드를 눌러쓰고 나가버렸다. 챙길게 없었던 나도 바닥에 널브러진 검 하나를 챙겨 터덜터덜 그녀들의 뒤를 따랐다.
-터벅 터벅 터벅
활달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떠들며 앞장서는 레미아와 후드를 눌러써 입술 한번 뻥긋하지 않는 에릴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나까지. 숙소 근처에 가볍게 몸을 풀거나 떠들며 시간을 죽이던 용병단 사람들이 우리를 흘겨보기 바빴다.
“저기봐, 부단장님이다.”
“항상 같이 다니던 에릴다씨도 계시네.”
“저 뒤에 있는 놈은 누구야?”
“아까 론다가 말하는 거 들으니까 막내라던데.”
무시하려고 해도 귓가에 쏙쏙 박히는 내 이야기를 어떻게든 흘려들은 나는 묵묵히 둘의 뒤를 따랐다. 숙소에서 나와 광장을 지나칠 때까지 별다른 이야기 없이 콧노래를 부르는 레미아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성문을 나갈 때까지 레미아는 어디로 가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자- 도착!”
한참을 뒤따라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옆산이었다. 마수나 고블린 따위가 자주 나와 토벌의뢰가 끊임없이 쏟아지는 골칫덩이 산. 몽환의 밀림과 이어져있고 제국의 경계선에 걸쳐진 곳이라 수많은 용병들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카사노는 고블린 5마리를 잡아올 것!”
“그게 시험인가요?”
고블린, 솔직히 말해서 무리는 아니었다. 떼거리로 달려들지 않는 이상 한 마리씩은 차근차근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레미아에게 그게 시험이냐고 되물었을 뿐인데 내 물음을 들은 레미아는 영악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면 너무 쉽지, 생포야 생포.”
“생포요...”
“밧줄은 우리가 줄 테니까- 생포만 하면 성공이야. 나랑 에릴다가 계속 따라다닐 테니까 안심해.”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둘에게 다가가자 싱긋 미소 지은 레미아가 툭- 팔꿈치로 에릴다를 두드렸다. 멍하니 서있던 에릴다는 레미아의 신호에 로브 안에서 기다란 밧줄을 꺼내더니 내 손에 얹어주며 조심하라고 덧붙였다.
“생각보다 반항이 심할거에요.”
“네, 감사합니다.”
걱정해주는 에릴다가 고마워 그녀에게 가볍게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를 건넸다. 검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며 마음을 정리한 나는 건네준 밧줄을 허리춤에 묶은 뒤 망설임 없이 나무 사이로 뛰어 들어갔다. 간단한 시험이라고 했지만 실패하면 용병단에서 쫒겨나는건 기정사실임이 분명했기에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
“바로 들어가 버리네-”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고 숲으로 뛰어 들어가는 카사노를 바라보던 레미아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산 입구였지만 조금만 집중한다면 주변을 돌아다니는 고블린들의 기척을 살펴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게요.”
어떻게 보면 멍청한 선택이었지만 에릴다는 오히려 그게 마음에 들었다. 정찰은 의뢰의 기본이지만 카사노는 그걸 제대로 숙지 못했을 뿐, 의뢰에 대한 주저는 없을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싹수는 있어보여서 다행이다.”
“부단장은 카사노의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 데려온 겁니까?”
“응?”
의아한 눈빛으로 끔뻑끔뻑 시선을 마주치는 레미아, 용병길드에 가볍게 소문난 카사노를 직접 찾아가 데려온 주제에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눈빛이 참 음흉하다고 생각한 에릴다는 큼큼- 헛기침을 내뱉고 다시 말했다.
“직접 만나로 갔었잖아요. 뭔가 보여서 데리러 간거 아닙니까?”
“아아- 그런 질문이었어?”
으응- 검지를 입술에 얹고 울리는 소리를 내며 시간을 때우던 레미아는 해맑은 미소와 함께 툭- 대답을 내던졌다.
“그냥 얼굴이 반반하다 길래- 한번 보고 싶어서 데려왔지. 확실히 땀내 나는 아저씨들보단 훨씬 낫더라.”
실력도 아니고, 깡도 아니었나. 쓴웃음을 지으며 무어라 말하려던 에릴다는 이내 들리는 레미아의 대답에 다시 입을 꾹 닫았다.
“그런데 싹수가 좀 보이네. 끈기도 있어 보이고- 꽤 마음에 들지도.”
“...마음에 안 들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핥짝
“맛만 보고 내쫒아야지.”
“악취미네요.”
“부사수 돈으로 도박하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오늘 제대로 늘려서 돌려줄거에요.”
지루한 숲에서 빠져나와 화려한 인간세계를 맛본 에릴다는 문득 풋내기 같은 카사노의 모습이 처음 인간 세계에 나온 자신 같아서 동질감을 느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눈망울과 어설픈 태도. 괜히 챙겨주고싶은 모습을 떠올리며 떠오른 후드를 꾹 가라앉힌 에릴다는 쿡쿡 웃기 바쁜 레미아에게 말했다.
“이제 쫒아가보죠.”
“솔직히 실패하진 않을거같은데.”
“...끈기 있는 남자에요.”
“그걸 어떻게 알아?”
“아침부터 열심히 하는걸 봤으니까요.”
“켁- 그걸 도망도 안가고 끝까지 했다고?”
용병단 전통의 신입 골려먹기, 용병들이 다 같이 당번제로 돌아가면서 하는 일을 신입들의 업무라고 몰아주는 행위였다. 레미아는 띨띨한 론다만이 속아서 2일째 하고 있다는 걸 알고 돌아가면 안 해도 된다고 알려줄 생각이었는데 건들건들 거리던 카사노가 첫날부터 무사히 끝마쳤다는 소식에 살짝 놀랐다.
“나였으면 선임들보고 싸우자고 했을 텐데.”
“부단장 성격이 더러워서 그렇죠 뭐.”
“에릴다도 안하고 도망갔잖아.”
“저는, 고급 인력이잖아요.”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떠들던 둘은 부스럭거리는 숲을 흘겨보며 서로를 마주봤다. 약속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숲으로 들어간 둘은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카사노를 집중해서 지켜봤다.
열심히 바닥을 뒹구르며 고블린에게 밧줄을 꽁꽁 묶고 있는 카사노의 모습은 어설프기 짝이 없었고 정말 풋풋한 새내기 같은 느낌이 가득했다. 둘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 큰소리로 웃으며 자신의 손목까지 묶고 있는 풋내기 카사노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