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그러진 얼굴로 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드는 오크와 움켜쥔 검과 방패로 오크들의 무기를 밀어내며 전진하던 용병들이 그대로 부딪혔다.
“크악!”
“끄워어어억!”
드넓은 평원에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빛 아래 생채기 하나 두려워하지않고 검을 휘두르는 두 무리는 피비린내를 풍기며 서로를 무참히 베어내기 시작했다.
“끄으으윽, 커어억!”
“꾸륵, 케윽!”
하지만 오크의 공세도 잠시, 노련한 용병들과 간부들의 도움으로 밀리던 용병들이 하나 둘씩 마주본 오크들의 목을 그대로 썰어버렸다. 퉁 퉁 바닥을 구르는 머리통과 물줄기처럼 사방에 흩날리는 핏줄기가 평원 바닥을 물들였다.
“하아, 하아...!”
아무런 마법 처리도 되지않아 찜통같은 갑옷을 껴입고 열심히 검을 휘두르던 소니아도 투구 너머로 하나 둘씩 쓰러지는 오크들을 무참히 베어내며 숨을 고르기 바빴다.
“크윽...”
쉴새없이 흐르는 땀줄기가 눈가를 타고 흘러 시야를 어지럽혔지만 고개를 털면 그걸로 충분했다. 꾸워윽- 몽둥이를 휘두르던 오크의 목젖을 푹- 찌르고 베어낸 뒤 검에 뭍은 피를 깔끔하게 털어낸 소니아는 주변을 둘러봤다.
“으아아아악!”
“꾸륵, 크워어어억!”
바닥을 나뒹구는 오크들의 시체와 살육의 흥분으로 광기어린 웃음을 터뜨리는 용병들, 최소한 용병들이 밀릴일은 없겠다 안심한 소니아가 늘어뜨린 검을 다시 강하게 움켜쥐며 고개를 든 순간 익숙한 인영이 소니아의 앞에 내동댕이쳐졌다.
“씨바아알...!”
저급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풀밭을 나뒹구던 카사노가 부들거리는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소니아가 검을 치켜들고 일어나는 카사노의 앞에 끼어드는 순간 여태껏 들렸던 괴성들과 차원이 다른 울부짖음이 고막을 두들겼다.
“크아아아악!!!”
누린내나는 바람과 함께 징징 울리는 귓가- 저릿저릿한 투기에 겨우 정신을 차린 소니아는 카사노를 향해 다가오는 거대한 오크의 도끼를 그대로 막아냈다.
-카아앙!
별같은 불똥이 타닥 튀기며 욱신거리는 고통이 검을 타고 손목을 찌르르 울려왔다, 하지만 눈가를 파르르 떨면서도 흘렸던 검을 줍고 그대로 달려드는 카사노를 지켜본 소니아는 파들거리는 팔에 그대로 힘을 줘 옆으로 비틀어버렸다.
“크룩!”
도끼를 흘려버리자 자연스럽게 내려찍던 양팔이 옆으로 흘러내렸다. 곧바로 불끈거리는 근육에 힘을 주며 자세를 고쳐잡는 오크였지만 바닥에서 일어난 카사노의 행동이 한발 더 빨랐다.
-푸욱!
“끄으으으으윽!”
목을 찌를 심산으로 내뻗은 검이었지만 온몸을 뒤틀며 힘을 주던 오크의 행동에 카사노의 조준이 흐트러졌다. 힘차게 뻗어나가던 검은 그대로 오크의 어깨죽지를 찔렀고 크나큰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오크였지만 이미 수거한 도끼는 후웅- 허공을 가르며 카사노에게 날아갔다.
-쩌어억!
초록색 피부에 박힌 검을 뽑아내던 카사노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거대한 도끼에 그대로 검을 내뻗었다. 도저히 철과 철이 부딪힌 소리로 느껴지지않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밀려난 카사노는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과 함께 그대로 날아갔다.
-쿠웅!
흙먼지를 일으키며 풀밭에 널브러지는 카사노를 지켜보던 소니아는 깊게 찔린 어깨죽지 탓에 힘을 주지못하는 오크의 빈틈을 그대로 노렸다. 서걱- 도끼를 쥔 채 축 처진 오른팔을 가볍게 베어냈지만 얕았는지 기다란 자상만이 남고 팔은 덜렁거리는 채였다.
“끄워어어어억!!!”
주로쓰는 팔까지 당하자 제대로 열받았는지 오크가 누런 송곳니를 훤히 드러낸 채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흐으으...”
뜨거운 태양 아래 달아오른 갑옷 탓에 푹 찌는 열기가 소니아를 덮었다. 벌어진 입사이로 제어할수 없는 바람 빠지는 소리만이 투구 안에 후욱-후욱- 맴돌았다.
-카앙! 카앙! 카앙!
선공을 했다간 남은 체력마저 다 사용한다는 계산을 마친 소니아는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오크의 공격을 기다렸다. 자신을 깔본다고 생각했는지 핏발선 눈으로 노려보던 오크는 사방에 침튀겨가며 그대로 소니아에게 달려들어 폭풍같은 도끼질을 선사했다.
“크윽...!”
막을수 없는 정도의 힘은 아니었지만 한방 한방 막아낼때마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지속된 전투로 인한 피로와 카사노를 구하기 위해 달려들 때 갑작스런 움직임에 몸이 뻣뻣한 듯 했다. 도끼를 막아낼때마다 조금씩 밀려나던 소니아는 반격에 나서려는 순간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철퍽!
미처 파악하지 못한 오크 시체의 팔을 그대로 밟은 소니아의 시야가 갸우뚱 기울었다. 기우는 몸과 함께 비틀어지는 시야 속에서 마지막으로 보인건 정확히 정면으로 내려찍히는 오크의 거대한 도끼, 투구 너머의 광경을 지켜보던 소니아는 한마디 유언조차 나오지 않는 지금의 사태를 멍하니 받아들였다.
-쿵! 푸우우욱!
단단한 시체 위에 넘어짐과 동시에 커다란 소리가 울리더니 살을 가르는 처참한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베인건가? 찔린걸까? 푸른 하늘만을 바라보던 소니아는 예상했던 고통이 찾아오지 않음을 깨닫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흐으, 후우우...! 씨이바알...!”
벌어진 소니아의 다리 사이에 내리꽂힌 거대한 도끼와 울컥- 피거품을 흘리며 꿈틀거리는 거대한 오크, 그리고 그 뒤에 통나무같은 오크의 목을 다리로 조르며 검을 움켜쥐고 있는 카사노가 보였다.
-주륵
송곳처럼 뒷목을 뚫고나온 검이 오크의 주둥이 너머로 튀어나온게 무슨 통돼지 바비큐 같은 몰골이었다. 오크 꼬치구이를 만든 요리사 카사노는 잔뜩 고여 꿀같은 점성을 보이는 침을 입가에 질질 흘리면서 넘어져있는 소니아를 향해 소리쳤다.
“소니아님 괜찮아요?!”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눈에서 느껴지는 걱정과 불안함, 자기도 힘들었을텐데 남 걱정부터 하는 그의 마음씨에 따스함을 느낀 소니아는 조금 찢어진 입술을 달싹이며 그에게 그대로 속에 담아뒀던 말들을 내뱉으려 했다.
“오크 족장이 죽었다아아!!!”
하지만 소니아의 입에서 감사인사는 나오지 못했다.
상스러운 욕설과 온갖 시끄러운 음성이 퍼지던 전장 한가운데에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전열부터 후미까지 안들릴수가 없는 쩌렁쩌렁한 외침에 전투가 끝났다고 판단해 갈무리하던 용병들과 한창 마지막 오크까지 썰어넘기던 용병들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뭐야, 족장이 있었어?”
“그 왜 옆 산맥 아래 화전민 마을 습격한 도끼 들고다니는 그새끼말이야.”
“아, 제법 유명하지. 그새끼가 여기 있었어? 누가 잡았데?”
“몰라, 기사님이 잡았다는거 같은데.”
해냈다, 해냈어...! 그런 이름있는 놈이었다니, 하긴 다른 오크에 비해 폭발적인 힘과 덩치를 직접 느꼈던 소니아는 상대하면서도 제법 거물인 오크라고 느꼈었다. 그런 녀석을 카사노와 둘이서 잡아내다니. 벅차오르는 감동과 함께 선배들에게 자랑스레 말할수 있는 공적을 쌓은걸 기뻐하던 소니아는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서둘러 일어났다.
“오! 전령에게 들었던 오크와 일치하군. 꼭 잡았어야 했던 놈들인데 잘됐군.”
“로널드경의 고충을 알고 신께서 마중보냈나 봅니다.”
“하하, 다 유능한 용병단을 만나 이런일이 벌어지는거 아니겠는가?”
뒷짐 진 채 여유로운 미소로 터벅 터벅 걸어오는 로널드와 간신처럼 옆에 착 붙어 피를 뚝뚝 흐르는 도끼를 쥐고있는 용병단장까지. 서둘러 투구를 벗은 소니아는 흥미롭게 오크를 바라보는 로널드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오, 우리 소니아경. 고생많았어.”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할 의무입니다.”
“음음.”
대충 흘려들으며 소니아를 지나치고 여전히 오크의 뒷목에 매달려 숨을 고르는 카사노에게 다가간 로널드, 격려의 말이라도 해주려는걸까? 눈을 빛내며 쳐다보던 소니아는 도저히 흘려들을수 없는 말을 듣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뛰어난 용병의 보조가 기사의 의무는 아니지만 뭐, 고생 많았네.”
뭐? 경악한 소니아가 입을 벙끗거리며 로널드를 바라보고 있을 때 오크의 뒷목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던 카사노가 다른 기사들의 손에 이끌려 우악스럽게 끌어내려졌다. 전투의 열기에 취해 핑 도는 시야로 눈앞의 로널드를 멍하니 바라보던 카사노는 입술을 달싹이며 물었다.
“누, 누구?”
“하하, 많이 힘겹나보군. 고생했네!”
-텁
후들거리는 카사노의 어깨를 움켜쥔 로널드가 큼큼- 목청을 가다듬고는 평원에 쩌렁쩌렁 울리는 외침과 함께 전투의 종식을 알렸다.
“붉은매 용병단의 카사노가 족장의 숨통을 끊었다-!!!”
평원에 떨어진 벼락같은 소식이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는 용병들과 오크들에게 전해지자 용병들은 귀가 터질듯한 환호를 내지르고 오크들은 경악과 함께 남은 병력들을 물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의를 상실해 도망치는 오크들은 덫에 잡힌 쥐보다 손쉽게 정리되어 커다란 머리통을 평원에 떨어트렸고 전투는 끝났다.
모두가 전투의 여파를 가다듬으며 휴식을 취하는 동안 오직 단 한명, 소니아만이 멍하니 평원 한 가운데에 서서 기사들과 용병들에게 환호를 들으며 업혀가는 카사노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 씨발 존나 아파...”
“그러게 왜 나대다가 밟혀가지고 그 고생이야?.”
불만을 중얼거리는 용병들의 물결이 소니아를 스쳐지나갔지만 돌덩이처럼 무겁기만한 그녀의 발걸음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뒷정리를 하며 웃고 떠드는 용병들의 목소리를 들을때마다 이래선 안돼, 얼른... 하고 발을 움직이려했지만 땅에 박힌 바위마냥 떨어지지않는 발이 괜히 야속하기만 했다.
그렇게 온몸에 튄 핏자국이 매말라 굳을때까지 평원 한가운데에 서 자리를 지키던 소니아는 모두가 식사를 위해 무장을 해제하며 휴식에 들어가서야 터덜터덜 자신의 천막으로 향했다.
“하아...”
머리는 빙빙 돌고 전투의 여파로 기도가 콱 막힌 것 마냥 숨쉬는 것 조차 힘겨웠다. 멍하니 벌린 입과 코로 숨을 들이킬수록 마개로 막아둔듯한 답답함이 쿵쿵 소니아의 머리를 두들겼다.
“어지러워...”
-철그럭 철그럭 철그럭
힘없이 바닥에 떨어지는 경갑들과 갑옷이 바닥에 나뒹굴었고 격렬한 전투로 인해 갑옷 안에 갖춰입은 옷가지는 이미 땀에 푹 젖어 후끈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입술이 하얘질정도로 깨문 소니아는 흐느적 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야외에 차려진 여성 전용 천막에 들어가 피에 젖은 몸을 천천히 씻어내려갔다.
-촤악!
양동이 한가득 담긴 물을 뿌려 피를 흘려낸 소니아는 탄탄한 몸을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으며 천천히 몸을 씻어냈다. 흐르는 물과 함께 흘러내려가는 피를 지켜볼때마다 로널드의 우렁찬 외침이 징징 귓가에 맴돌았다.
“카사노가...”
정말 그걸로 끝인건가? 이렇게 허무하게? 위험해보이던 그를 돕고 협동이라 볼 수 있는 행동으로 뚫어낸 난관이 온전히 그의 공적으로 남는건가? 평소 동료들에게 천대받던 그 시선을 바꾸기위해 노력했던 모든게 카사노의 공적이 됨으로 물거품이 되버린것만 같았다.
하지만 분노에 잠식되어 증오로 물들수록 로널드의 치가 떨리는 야비함보단 카사노가 야속해진 소니아는 괜히 죄없는 손바닥을 손톱으로 짓이기며 분노를 표출했다. 거기서 아니라고만 해줬다면, 내가 도왔다고 나서만 줬다면 이런 부당한 일은 피해갈수 있었을텐데...!
부당한 처우를 내린 로널드보다 나름 친하게 지냈던 카사노에게 분노의 화살이 향할수록 강한자에게 꼬리를 말고 약한자에게 짖어대는 자신의 졸렬함이 부끄러운 소니아였지만 한번 피어난 야속함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한참을 흐르는 물에 몸을 맡겨 시간을 보낸 소니아는 해가 지기 전에 들어온 천막에서 해가 진 후에야 빠져나올수있었다.
-까악! 까악! 까아악!
평원을 비추던 주황빛 해가 지자 검푸른 빛 도화지같은 하늘 너머로 까마귀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필시 평원의 시체를 뜯어먹으러 가는거겠지, 꼭 나를 물어뜯는 그치들같네. 혐오감에 젖어든 생각을 머릿속에 굴리며 단정하게 차려입은 천옷을 꾸욱 움켜쥔 소니아는 그대로 천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치고 어지러운 지금, 얼른 침낭에 몸을 던져 잠들고 싶었기에 한시바삐 서두르던 소니아는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온갖 잡생각에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돌렸다.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카사노와 자주 이야기를 나누던 나무 아래에 도착한 소니아는 이미 나무 아래 자리잡은 인영을 발견하고 얼굴을 굳혔다.
“아, 소니아님.”
방금 씻고나온걸까? 촉촉한 머리칼과 함께 수심이 깊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카사노의 표정을 살펴본 소니아는 온몸에 맴돌던 분노와 증오가 스르륵 가라앉는걸 보고 주먹에 힘을 풀며 그에게 다가갔다.
“여기엔 무슨일로...”
“아까 표정이 안좋아보이셔서요, 그리고 할 얘기도 좀 있고...”
“이번 토벌의 영웅이 내게 할말이라니...”
“제발 그런 농담은 하지마세요.”
쉽게 농담을 던지지 않던 자신이 비꼬듯 던진 말에 카사노는 얼굴을 찡그리며 성큼, 소니아에게 다가갔다. 질색을 하면서도 죄책감에 물든 그의 표정을 지켜볼수록 소니아는 그에게 향하던 증오가 옅어지는걸 느꼈다. 그래, 역시 이남자에겐 잘못이 없겠지...
카사노의 얼굴에 피어오른 죄책감과 마주하고 대화를 나눌수록 소니아 안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하나 둘 사라졌다. 멋쩍어하면서 감사를 전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졌고 그를 돕기 잘했다는 생각만이 머리에 맴돌았다.
“아, 저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검푸른 밤하늘이 완전히 어두어질때까지 나무 아래서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던 둘은 카사노의 기상으로 끝이 났다. 그와의 앙금이 해소될수록 즐거워졌던 소니아는 떠나려는 그의 모습에 아쉬움을 느꼈지만 정말 가야한다며 손사래치는 카사노의 모습에 결국 그를 보내줬다.
“하아...!”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상쾌한 밤공기와 함께 맑아진 머릿속을 느낄수록 행복해진 소니아는 가슴 속에 얹혀진 고민을 전부 내던지고 미소와 함께 천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 얘기하면 되는거였어.”
로널드의 만행에 분개하면서도 고개숙이던 카사노의 모습은 정말 고마웠다, 자기 일처럼 화내면서도 자신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며 사과하던 그의 마음씨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잠재우기 충분했다.
그래, 나쁜건 그놈들이지. 자신을 조롱하기위해 카사노를 써먹은 기사들의 만행에 이를 까득 갈며 천막 안으로 들어선 소니아는 말끔하게 펴진 침낭에 발을 들이밀며 포옥- 온몸을 덮는 솜의 무게를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피곤하기도 했고 마음의 짐을 덜어낸 탓인지 금세 잠이 솔솔 쏟아지기 시작했다. 꾸벅- 꾸벅- 무거워지는 눈꺼풀과 함께 상쾌한 기분으로 조용히 잠든 소니아는 쌕-쌕- 고른 숨소리를 내며 그대로 잠들었다.
“아...”
둥실둥실- 멍한 상태로 눈을 뜬 소니아는 부스스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침낭에서 일어났다.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이뇨감에 입술을 살풋 깨문 소니아는 가지런히 개둔 겉옷과 바지를 챙겨입고 그대로 천막 밖으로 나섰다.
-화악
천막을 나서자 느껴지는 싸늘한 밤공기와 함께 천천히 공용 변소로 걸음을 옮긴 소니아는 이내 볼일을 마친 후 개운함을 느끼며 다시 천막으로 향하는 와중 왁자지껄한 웃음소리를 듣고 발을 멈췄다.
“늦은 시간인데...”
체감으론 새벽일텐데 아직까지 웃고 떠드는 사람들이 있다니? 평원 토벌을 끝마쳤을뿐 산맥 내부 토벌은 아직 남은상태였기에 눈꼬리를 치켜올린 소니아는 사뿐사뿐 인기척이 느껴지는곳까지 조용히 다가갔다.
“하하하하!!!”
“그때 라델경이 확! 오크놈 모가지를 쳐내는데 글쎄 날아간 대가리가 용병놈 머리통에 얻어맞지 뭡니까?”
“하하, 그거 참 걸작이군. 안그런가?”
“하하하! 그놈도 참 피하기라도 하지 참 재밌네요.”
불콰하게 취한 얼굴로 침 튀겨가며 떠드는 기사들과 거리를 벌린 채 나무잔 가득히 들어찬 맥주를 홀짝이며 구경하는 로널드, 그리고 그 옆에 착 달라붙어 떠들어대는 산적같은 용병단장까지. 토벌대의 중추라고 볼 수 있는 인원들이 술에 취해 떠들고 있는 광경은 소니아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어라...?”
나무 뒤에 숨어 지켜보다가 물러나려는 순간 기사들의 덩치에 가려져 보지 못했던 사람을 발견한 소니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술을 깨물었다. 주눅이라도 든것처럼 잔을 양손으로 움켜쥔 채 붙어다니던 자그마한 여자와 나란히 앉아있는 카사노의 모습은 누가봐도 억지로 붙잡힌 사람처럼 보였다.
“이거, 오늘의 영웅이 왜이리 인상을 쓰고 있는가?”
괜히 집고 넘어가기 그랬는지 모두가 입을 다물고있음에도 여유로운 표정으로 잔을 들고 내미는 로널드의 모습에 떠들어대던 기사들이 맞장구를 치며 카사노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래, 오늘 큰 활약했는데 이렇게 축 처져서야!”
“얼른 잔 들고 건배나 하지. 오늘 고생했어!”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힘없이 미소지으며 잔을 부딪힌 후 꿀꺽꿀꺽 맥주를 삼킨 카사노는 푸흐- 낮은 숨을 내뱉으며 꾸벅 고개를 떨궜다. 피곤해보이는 모습에도 로널드는 말없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그를 지켜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소니아경도 참 아쉽구만. 기사 된자로서 홀로 나서기는커녕 도움이나 받고 말이야.”
“에이, 아비의 후광을 입고 기사된 여자에게 경이라뇨. 너무 과분합니다 로널드경!”
풍채좋은, 아니 말이 좋아 풍채가 좋다지 뒤룩뒤룩 살찐 기사가 턱살을 흔들며 거칠게 반론했다. 어이가 없어 콧방귀가 절로 나오는 광경에 이를 빠득 갈며 지켜보던 소니아는 텁- 카사노의 어깨를 짚으며 말을 거는 로널드의 횡패를 보고 치솟는 분노를 쉽사리 가라앉히지 못했다.
‘지위를 앞세워 힘없는 용병을 핍박하다니, 거기다... 날 조롱해?’
아버지의 지인인 백작의 은혜를 입은 것 맞다. 그들의 말이 틀림은 없었지만 그들이 추레한 살집을 흔들며 웃고 떠드는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한건 자신이었다. 저렇게 술자리 안주마냥 조롱당할 노력이 아님에도 술에 젖은 수염을 휘날리며 떠드는 그들의 모습에 분개한 소니아는 꽈악- 손바닥을 파고드는 손톱의 감촉을 느끼며 말없이 지켜봤다.
“아무튼 고생했네, 맥없이 쓰러진 소니아경을 대신해 오크 족장을 물리친 공로는 백작님께서 충분히 치러주실걸세.”
“네?”
-꾸우욱
타들어가는 모닥불 불똥만이 튀는소리가 야영지에 울러퍼졌다. 술을 들이키며 떠들던 기사들은 단번에 입을 다물고 눈알을 굴리며 로널드를 지켜봤다. 지금 한 말은 아까 전투에서 사기를 돋구기 위해 내뱉은 말과 차원이 다른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지금 로널드는 오크 족장을 물리치는데 큰 역할을 다한 소니아를 지우고 그 자리에 카사노를 앉히려는 속셈이었다. 가당치도 않은 짓거리에 주륵- 손바닥에 흐르는 피도 알아채지 못하고 눈이 빠지지않을까- 싶을 정도로 노려보던 소니아는 자신의 어깨에 얹혀진 로널드의 손을 붙잡는 카사노의 행동에 힘을 풀고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그렇겠지. 저런 허무맹랑한 말을 들을 필요는 없잖아. 자신과의 의리를 지켜주는듯한 그의 행동에 안도한것도 잠시 이내 그의 입에서 내뱉어진 대답에 소니아는 턱-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그저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감사...합니다.”
그만둬, 그렇게 대답하면... 정말 당신이 한게 되버리잖아. 아까는 아니라고 했잖아. 같이 화내줬잖아? 올곧고 부당함에 대항하는게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소니아의 입장에서 카사노의 대답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며 꾸욱- 어깨를 짓누르는 로널드의 행동에 위압감을 느낀 카사노는 아까까지 웃고 떠들기만 하던 술자리가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조여오는걸 깨닫고 이내 포기했다. 여기서 소니아의 편을 든다거나 거부했을 때 어떤 불이익이 내려질지도 몰랐고 한낱 용병의 입장으론 할수있는게 없었다.
“그나저나 소니아경도 똑똑해, 자신의 힘으로 안될걸 알고 유망한 용병을 이용하려하다니.”
-꽈악!
“그러게 말입니다. 덕분에...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어깨를 그대로 짓이기는게 아닐까 싶을정도로 아찔한 악력에 눈을 질끈 감은 카사노는 결국 로널드의 조롱에 동참했다. 그래, 이 자리만 넘기면 어떻게든 되겠지. 소니아에게 이실직고 말한뒤에 그녀를 돕자.
처음엔 마음에 걸려 도왔던 소니아였지만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누면서 금세 마음속에서 존재가 커져갔다. 내버려두기도 그런 올곧은 그런 누나같은 소니아를 배신하는 행위가 너무 미안했지만 당장은 이 자리를 벗어나는게 가장 중요했다.
카사노의 선택은 어쩔수없었다. 용병의 입장에선 까마득한 상급자의 압박은 쉽게 이겨낼수 없으니까, 상황에 벗어나 부당한 대우를 받는 소니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게 더 빨랐을게 분명했다. 다만 그녀가 지금 이 자리를 지켜보고있다는사실이 이 모든 상황을 어지럽히는 요소로 작용할 뿐이었다.
“카사노...”
속으로 되뇌이려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그의 이름. 믿었는데, 믿었기에 지켜봤는데 로널드에게 굴복하며 자신의 공로를 집어삼키는 그의 모습에 소니아는 타다닥- 자신의 천막으로 뛰어갔다.
그녀도 마냥 모르는건 아니다. 그의 진심이 아닐수도 있고 로널드의 압박에 카사노의 뜻과 다르게 내뱉은 말일수도 있다. 하지만 믿었던 그의 입에서 나오는 감사와 부정의 신호탄은 쉽게 받아들일수 없었다.
“흐윽...”
아닐거야, 진심이 아니겠지. 아까 잔뜩 얘기했잖아. 얘기해보는거야. 다시 얘기하면 해결될거야-
권력에 굴복해 자신의 공로를 집어삼킨 카사노와 이야기를 해도 해결이 될까? 머리 끝까지 뒤집어쓴 침낭 안에서 맴도는 뜨거운 숨결을 느끼며 뒤죽박죽인 생각을 정리하던 소니아는 결국 쉽게 결론내지못한 채로 아침을 맞이했다.
믿었던 만큼 느꼈던 배신감과 그를 핍박한 로널드를 향한 증오, 진심인지 아닌지 가늠할수 없는 카사노의 생각과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대꾸였을때와 만약 아닌 경우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도저히 결정할수 없었다.
-소니아님! 세수물을 가져왔습니다!
“들어오렴...”
침낭 가득 들어찬 뜨거운 숨결을 느끼며 생각에 잠겼던 소니아는 고막을 두들기는 지크의 목소리에 침낭에서 빠져나와 그를 맞이했다.
-촤륵
“실례하겠습니다.”
대야에 담긴 물과 함께 인사를 건넨 지크는 부스스해보이는 소니아의 모습에 이를 악물며 입을 열었다. 자신이 모시는 기사님이 당한 부당한 일을 모조리 꿰차고있는 종자는 소니아가 어제 있었던 일로 상심했음을 파악했다.
“말도 안됩니다, 그깟 용병이 공로를 차지하다니.”
“응...?”
멍하니 앉아있던 소니아는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그며 얼굴에 끼얹으려는 순간 지크의 목소리를 듣고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차지한다니? 그런 얘기가 오갔었지. 그런데 그게 벌써 정해진거라고?
떨떠름해하면서도 이해할수없다는 표정을 짓는 소니아의 얼굴을 바라보던 지크는 상황파악을 못하고 아침에 주워들은 이야기를 쉴새없이 떠들었다.
“어제 소니아님과 겨우 물리친 주제에 오늘 족장을 죽였다는 공로로 포상을 받는다더군요. 소니아님이 아니었으면 진작 죽었을 용병놈이 고맙단 말도 없이...”
“그게 정말이니?”
“이, 네. 어 그게...”
얘기가 안됐던거였나? 자신이 실언했음에 새하얗게 얼굴을 물들인 지크는 안절부절하며 소니아의 눈치를 봤지만 오히려 개운해진 소니아는 촤악- 얼굴에 물을 끼얹으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멍청하게 고민하며 밤을 지새우는 동안 막힘없이 이야기는 진행된 모양이었다. 결국 공로를 독차지한 카사노의 이야기가 퍼졌다니, 그렇다면 자신의 공로는 완전히 없던게 되버리는거겠지.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밤새했던 고민이 부질없다고 느껴졌다. 그의 진심을 모른다는 핑계로 외면했지만 그 대가는 참혹했다. 이렇게 된 이상 카사노의 진심이 어떻든 이 부당한 상황을 넘길 생각은 없었다.
“잠깐 나가있으렴.”
“아, 네!”
-철그럭 철그럭 텅!
지크를 내보낸 소니아는 천막 한켠에 놓인 갑옷을 챙겨들어 재빨리 장착했다. 온몸을 옥죄이는 조임과 움직일때마다 느껴지는 육중한 무게는 소니아의 정신을 일깨워주기 충분했다.
되찾아야했다. 로널드의 간계라던가 카사노의 진심이라던가 이제와서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결투로 빼앗긴 자신의 공로를 되찾기로 결심한 소니아의 눈동자는 흉흉한 살기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증오에 물들어 탁해진 소니아의 눈에는 더 이상 예전의 올곧음과 총기를 엿볼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