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컷 노예들의 주인이 됐다-122화 (122/395)

“오! 우리의 영웅 카사노 아니신가!”

론다와 나란히 붙어 스프 그릇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남자가 나를 발견하고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왔다. 다른 지역에서 의뢰를 받다가 합류한 레인이라는 친구였는데 나보다 한기수 선배라고 볼 수 있는 론다의 동기였다.

“영웅에게 스프 한그릇 부탁드립니다.”

아직 그와 어색했던 나는 말을 놓지 않았기에 보글보글 끓고 있는 솥 옆에 앉으있는 그에게 정중하게 식사를 부탁했다. 어깨를 으쓱인 레인은 푸짐하게 퍼올린 스프를 내 앞에 내려놓으며 그대로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엉겨 붙었다.

“아직도 그렇게 딱딱하게 말하네, 말 편히 하라니까?”

“그래, 나한테는 반말 찍찍 내뱉으면서 레인한테만 격식 챙기고 지랄이야?”

보자마자 인사도 없이 걸쭉한 욕설을 내뱉은 론다는 애꿎은 나무그릇 바닥만 숟가락으로 벅벅 긁으며 눈가를 꾹꾹 마사지해주고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은 나는 레인의 팔을 그대로 밀어내고 한숟갈 퍼올리며 말했다.

“친근하다는 뜻이지~ 레인씨는 저보다 형님이시니까 말놓기가 좀 그래요.”

“오! 영웅다운 마음가짐이군, 우리 억척스러운 론다양도 보고 배우려면 좋으련만.”

-뻐억!

“끄,흐윽...!”

식탁이 덜컹이고 부랄이라도 얻어맞은 듯한 표정의 레인이 입가를 오므리며 정강이를 부여잡았다. 앙칼진 표정의 론다는 그대로 숟가락을 내려놓고 콧방귀를 뀌고는 드륵-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말했다.

“저 병신보고 엄살 다피우면 나오라 그래, 아침에 단장이 너빼고 싹 다 불러다가 물자 정리하라고 시키더라.”

“나빼고? 그걸 대놓고 말했다고?”

“영웅대접은 해줘야 하지 않겠냐고 하던데? 아무튼 적당히 쉬다가 오라고.”

“그래, 고맙다. 눈치 보면서 쉬다가 슬쩍 도우러가야겠네.”

마음 같아선 다시 천막에 들어가 푹 쉬고 싶지만 선임들이 나와서 일하는데 쉬라고 했다고 진짜 놀고 자빠진다? 불려가서 온갖 욕이란 욕은 배터지게 먹을게 분명했다. 나는 찔끔- 눈물까지 흘리는 레인의 등을 토닥이며 그를 일으켰다.

“혼자 느긋하게 밥 먹게 얼른 나가주세요.”

“영웅의 뜻이 그렇다면 그렇겠지. 오! 영웅이여, 단장이 내려 준 꿀맛같은 휴식을 맛보길!”

끝까지 우스꽝스러운 연극톤으로 놀리던 레인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그대로 론다의 뒤꽁무니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피식 웃은 나는 식어가는 스프를 퍼먹으며 단장의 의중을 이해할 수 없어 지끈거리는 머리를 데굴데굴 굴렸다.

“아오 씨발...”

기사들과 간부들의 술자리가 끝나고 로널드의 행패를 지켜볼수 없었던 나는 고주망태가 돼서 바닥에 널브러진 레미아를 대신해 단장을 찾아갔다. 불콰하게 취한 얼굴로 딸꾹거리며 “영웅이 오셨군!” 하고 반기던 단장은 내 의견을 듣자마자 손뚜껑만한 손바닥을 휘둘러 내 골통을 후려갈겼다.

그러고선 면전에다가 침 튀겨 가며 지껄이는 말이 가관이었다.

“네가 그 아가씨가 다 잡은 거에 칼 끄트머리만 얹었어요~ 백작님 제말 좀 들어 주세요~ 하면 들어 주겠냐? 응?”

-쿵 쿵 쿵

목에 핏줄 세워가며 꿀밤을 후려갈기는 좆장은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진중한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우리도 알지, 하지만 너가 도운 것도 사실이고 그쪽에서 너가 토벌했다고 공표해 버렸는데 우리가 아니라 해 버리면 그놈들 입장하고 이미 네게 포상을 주게 하겠다 약속한 로널드가 어떻게 나올지 생각 안 돼?”

“그치만, 그건 아니잖아요. 제가 한 것도 없는데 남의 공로를 뺏어 버리는 건데!”

-콰악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주무르며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자 저절로 얼굴이 찌그러졌다. 너무 아픈 악력에 단장의 팔을 밀어내며 저항했지만 커다란 도끼를 휭 휭 휘두르는 단장의 팔힘을 이기진 못했다.

“그 아가씨가 억울한 것도 알고, 너가 면목없어하는 것도 알겠는데 우리는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다니까? 그냥 받아들이고 그 아가씨한테 따로 뭐라도 해 줘. 그런 건 도와줄 수 있으니까.”

“아이 씨 진짜 아프다고!”

“아프다고는 반말이고 이 새끼야!”

툭- 거칠게 팔을 밀어내자 그제야 손을 뗀 단장은 한참을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나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내 어깨를 툭툭- 두들기고는 사과했다.

“때린 건 거 미안 하고, 이야긴 여기까지 하자. 이미 기사놈들이 너한테 포상을 주겠다 한 이상, 우리가 할수 있는건 없어.”

“알겠어요, 전부 그 좆 같은 콧수염새끼 탓이죠 뭐.”

“누가 들으면 어떡해 이 새끼야!”

-빡!

“아 씨 진짜 머리 나빠진다고!”

“충분히 나빠 이 새끼야, 아무튼 갈 테니까 포기해라. 혹시, 혹시나 백작님하고 독대할 때 말한다거나 그런 병신 짓은 하지도 말고.”

뜨끔한 나는 눈을 부라리는 단장의 눈길을 피하며 입술을 삐죽였다.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릴수록 얻어맞은 머리통이 지끈거렸던 나는 절반 남은 스프에 눈을 돌리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쩍 가서 일이나 도와야지... 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카사노! 여기 있었구나!”

몇 번 지나가다가 본 선임이 땀방울을 흘려가며 내게 달려오더니 헤엑- 헤엑-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나는 알 수 없는 그의 행동에 의아해하며 숨을 다 고르고 진정할 때쯤 무슨 일인지 물었다.

“왜 그러세요, 뭐 사고라도 터졌어요?”

“아니, 그게... 사고라고 봐야 하나? 아무튼 따라와. 그, 널 찾고 있던데?”

“누가요? 저를요?”

단장이나 레미아인가? 그런 것치곤 선임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파들파들 떠는 입가와 갈 곳잃은 눈동자를 보니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그럼 그 기사새끼들인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서두르는 그의 걸음에 보폭을 맞춰 달리기 시작했다.

“그게, 기사나리던데? 여자말이야.”

“아아, 소니아님이요?”

나는 그제야 선임의 긴장을 알아챘다. 예쁜 여기사가 말까지 걸어 주면서 날 데려오라하니까 긴장한 거지. 어젯밤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잔잔하게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 나는 소니아가 날 왜 찾아왔는지 대충 짐작돼서 피식 웃으며 선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분 착하신 분이예요. 너무 겁먹으신거 아니예요?”

“아니 겁이 아니라, 근데 착하다고? 아침부터 머리부터 발끝까지 갑옷 차려입고 흉흉한 모습으로 다가오던데?”

“그래요? 어디 정찰이라도 가는 건가?”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달려간 나는 인파가 모여 있는 곳까지 와서야 숨을 고르며 소니아를 바라봤다. 물자에 기대거나 잡담을 나누는 선임들과 평원 한가운데 서 있는 소니아를 지켜보며 짐을 나르는 후임들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은 나는 땅에 검을 꽂아 넣고 굳건히 서 있는 소니아에게 그대로 다가갔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세요?”

대기할 때처럼 융통성없는 모습으로 서 있는 소니아의 모습은 참 소니아다웠다. 피식 웃은 나는 더워 보이는 그녀에게 다가가 가볍게 손을 뻗어 악수하려했지만, 이내 묵직한 장갑이 내 손을 쳐 냈다.

“늦었군.”

얼얼한 손등을 쓰다듬으며 사태를 파악하려는 순간 쿵- 건틀렛이 바닥에 떨어졌다. 파릇파릇한 잔디를 짓누르는 건틀렛을 지켜보던 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무어라 입을 열다가 눈앞에 날아오는 무언가에 그대로 얻어맞았다.

-짜악!

“읍!”

미간과 코, 입가를 그대로 후려친 천 조각을 붙잡은 나는 욱신거리는 얼굴을 어루만지며 그대로 떼어냈다. 자수가 그려진 고급스러운 천장갑을 꽉 움켜쥐자 눈앞의 소니아는 투구 너머 보이지 않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결투를 신청한다, 시각은 정오로 하지.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와라 카사노.”

소니아의 담담한 목소리가 평원에 퍼지는 순간 우리를 둘러싼 인파들의 사이에 침묵이 가라앉았다. 온몸을 맴도는 피가 싸늘하게 식어가는 느낌과 당혹스러움에 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 말하려고 했지만 내게 통보를 내린 소니아는 망설임 없이 건틀렛을 주워들고는 인파를 뚫고 빠져나갔다.

-저벅 저벅 저벅

소니아가 떠나자 나를 둘러싼 인파들이 귀청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소란스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자기들끼리 대화를 주고받는 사람들도 있었고 내게 다가와 몸을 기대가며 지껄이는 사람들도 다수 있었다. 그들의 소음이 내 귓가를 두들길 수록 생각의 나락에 빠져든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당혹과 떨림을 느끼다가도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감정이 꽃피우는걸 느꼈다.

그건 분노였다.

융통성도 없고 너무 올곧고 정직해서 피해를 보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저런 부류와 친했던 적이 있었기에 그만큼 소니아가 신경 쓰여서 챙겨 주고 그녀에게 잘대해 줬었다.

이번에 로널드란 기사가 벌인 개짓거리는 당황스러웠다. 떨떠름하면서도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당사자인 소니아를 찾아가 원만하게 대화했다고 생각했다. 분개하면서도 내 입장을 받아들여 준 소니아가 고마웠다. 주제도 모르고 나선 내 뒷수습을 해주고도 조롱당했는데 올곧게 받아들이며 웃어 주는 소니아가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을까? 기분 좋은 이별로 공로에 대한 다툼은 해결됐다고 생각했는데 대뜸 아침에 찾아와서 결투라니. 어젯밤 기사들의 술자리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그들의 마수에 고개 숙여가며 복종해서 넘겼는데 이렇게 나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잖아. 용병 따위가 기사와 백작에게 어떻게 대들겠어? 그냥 똥밟았다 생각하고 받을 거 받고 나눠 주는 수밖에 없잖아.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잖아? 왜 나를 변절자 보듯이 증오스럽게 보는 건데. 왜 배신당해서 상처받은 서글픈 눈망울로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건데?

나도 당신에게 모든 걸 양보하고 싶었어, 날 구해 줬잖아. 날 도와 줬잖아. 왜 내 이야기는 안 들어보고 대뜸 와서는 쓸데없는 짓을 벌이는 거야. 항상 만나던 그곳에서 어제처럼, 오해와 해묵은 감정을 해소하고 좋게 풀어갈수 있었잖아.

왜 모든 걸 바로잡으려고 하는 거야. 부정한 행동에 치를 떠는 건 알겠지만 이건, 이건 불가항력이었는데!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내가 생각해도 참 역겨운 자기합리화를 끝없이 내뱉으며 고민한 나는 나를 둘러싼 인파들을 밀어내고 그대로 벗어났다. 지금은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웅성거리는 인파들을 뚫고 달릴수록 어지러운 머릿속이 더 헝클어지고 복잡해졌다. 소니아의 처지에서 나는 같이 욕해주고 도와주겠다더니 뒤통수치고 공로를 날름 삼켜 버린 배신자처럼 보이는 거겠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좆 같은 이세계에 떨어진 지 2년밖에 안 된 아무 힘도 없는 용병이었다. 상급자들의 압박을 넘길 수 없었다.

그래, 얘기해 보자. 다시 얘기해 보고 관계를 바로잡는 수밖에 없다. 소니아를 설득하고 로널드에게 무릎이라도 꿇자. 당사자가 거부한다면 그도 생각을 거둘 수도 있겠지.

미친 듯이 달릴수록 가슴이 욱신거리고 찢어질 듯이 아파왔지만 나는 억지로 버텨 내며 달리고 또 달렸다. 쿡쿡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을 버텨 내 겨우 익숙한 풍경에 도달할 때쯤 나는 그제야 인정했다.

짧은 시간 동안 나눴던 대화로 가까워졌다고 느낀 건 내 착각이였나보다. 흘러가는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 사이 언뜻 엿보이는 나무 기둥에는 흉흉한 글자가 깊이 새겨져 있었다.

[용서못해]

투박하면서도 정직한 글자를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으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북받쳐오르는 감정의 파도가 나를 휩쓸고 나라는 인간을 그대로 수장시키는 듯한 감각에 나는 포기했다.

결국 용서하지 않겠다면 원하는 대로 악인이 되줘야지. 원하는 대로 결투를 벌이고 내 앞에 꿇리면 잘난 그 고집도 꺾고 내 말을 듣겠지? 내 입장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대뜸 결투 신청과 함께 저주하는 편지까지 남겼다는 건 그걸 원하는 거잖아.

우둘투둘한 나무 껍질을 움켜쥐자 갈라진 틈새에서 투둑 나무 조각이 떨어졌다. 바스러진 파편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걸 지켜본 나는 개운해진 머리를 붕붕 흔들고 그대로 천막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정말인가? 그 둘이 결투를 한다고?”

용병단장과 함께 산맥에 남은 오크 잔당들의 토벌에 대해 의논하던 로널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두툼한 턱살을 출렁이는 라델을 지그시 바라봤다. 큰일이 났다며 호들갑을 떨던 그가 전해준 소식은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허허, 이것 참 곤란하군.”

“그러게 말입니다.”

꾸욱- 테이블 위에 얹혀진 주먹을 움켜쥐며 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단장을 흘겨본 로널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라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그에게 안내를 명령했다.

“같은 주군을 모시는 기사로서 무슨 상황인지 동태를 살펴야겠지. 안내해주게.”

“네, 네에!”

헤엑- 헤엑- 푸들거리는 턱살과 함께 숨을 고른 라델은 허겁지겁 달려가며 앞장서기 시작했다. 쯧, 기사된 자가 자기 관리도 안 하고 저딴 품위없는 모습이나 보이다니. 돌아가면 백작에게 기사들의 훈련을 건의해야겠다고 생각한 로널드는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단장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우리 소니아경과 영웅의 결투라, 흥미롭구만.”

“하하, 이런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말입니다...”

“소니아경이 그를 이기고 공로라도 되돌려달라는 말을 해 버리면 참 곤란하겠군.”

빳빳한 수염을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던 로널드는 침음을 삼키며 고민에 빠졌다. 여인의 몸으로 엉덩이에 불붙은 망아지마냥 론델라를 이곳저곳 헤집고 다니는 소니아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녀를 따돌린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실력이 엉망인건 아니었다.

오히려 신체 능력만으로는 백작 아래 기사들 중엔 최고로 쳐줄 수 있었다, 다만 시골 영지의 영애라는 출신탓에 마나를 다룰 수 없어 저 앞에 뛰어다니는 라델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을 뿐.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응? 그게 무슨 말인가.”

“깡다구하나는 끝내주는 놈이라 어떻게든 덤빌겁니다.”

“흠, 그런가... 뭐 자기 자식은 다 이뻐보인다고 한다지.”

짓궂은 농담을 던진 로널드였지만 단장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저 멀리 원으로 둘러싼 인파를 가만히 바라봤다.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 걸린 정오에 묵직한 갑옷을 전부 차려입은 기사가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고 그 앞에는 건들거리는 카사노가 짝다리와 함께 푹- 땅에 검을 꽂고 그녀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시작할 모양이군.”

로널드와 단장이 인파에 이르자 눈치를 보던 용병들이 자연스레 물러나 자리를 만들어줬다. 당연하다는 듯 인파를 지나쳐 맨 앞까지 당도한 둘은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노려보는 카사노와 소니아를 말없이 지켜봤다.

-콰악!

바닥에 꽂힌 검의 손잡이를 으스러지라 움켜쥔 카사노가 그대로 뽑아 들고 소니아를 향해 겨눴다. 망설임 없는 행동에 잠시 흠칫한 소니아였지만 이내 똑같이 검을 뽑아든 소니아는 마찬가지로 카사노를 향해 검을 겨누며 환호하는 용병들의 함성에 묻힐 정도의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보고왔나?”

“...봤습니다.”

“돌려받고 말겠다.”

“지금이라도 물러납시다.”

-후웅!

단호한 카사노의 대답에 소니아는 말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커다란 파공음과 함께 살랑이는 바람이 카사노의 앞머리를 흩날리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늦었단 걸 알지 않나?”

“...아주 조금만이라도 기다려서 제 얘기를 들어 줄순 없었습니까?”

검을 겨눈 채 입술을 달싹이는 둘의 모습에 용병들은 야유와 조롱, 얼른 붙으라는 고함을 내질렀지만 서로의 대답에 집중하는 둘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았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대화를 계속 나누기 시작했다.

“무슨 대답이 돌아와도 이미 늦었다. 내 권리를 그대가 가져간 이상 되찾는 수밖에...”

“진짜 고집 존나 쎄네...”

“뭐, 뭐?”

“그냥 머리 한번 숙이면 안 돼요? 시키는 대로 하고, 아무리 억울해도 대들지말고 그냥 넘어가면 되잖아요.”

“정당한 내 권리를 빼앗아가는데 가만히 지켜만 보라고? 그런 멍청한 짓을 왜 해야하는 거지?”

“무슨 짓을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잖아, 대들수록 나만 손핸데 그냥 허리 한번 굽히는 게 그렇게 힘들어?”

“본색을 드러낸 건가? 흥, 뭐라 말해도 나는 듣지 않겠다. 그대가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그대가 가져간 권리는 내가 되찾겠다.”

“하아! 미치겠네, 그래. 이기면 가져가요. 근데 내가 이기면? 내가 이기면 어쩔 건데?”

카사노가 이긴다고? 용병인 그를 쓰러트리고 공로를 되찾을 생각뿐이었던 소니아는 그의 대답에 잠시 고민했다.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자신이 이기면 어쩔 거냐고 되묻는 그의 모습에 괜히 투쟁심만 끓어오른 소니아는 참지 못하고 되는 대로 내뱉고 말았다.

“그대 마음대로 해라, 그대가 이긴다면 나를 굽든 삶든 마음대로 해!”

“그래요, 한번 봅시다.”

[그만하고 싸워라!]

[계집애마냥 중얼중얼 뭐라 하는 거야!!]

둘의 대화가 끝내갈 때쯤 결국 참지못한 관중들의 욕설과 조롱이 우레같이 내려쳤다. 개 중에는 휴지쪼가리나 쓰레기를 집어 던지는 지독한 용병들까지 있었기에 그대로 얻어맞은 카사노는 이빨을 빠득 갈면서 그대로 소니아에게 소리쳤다.

“끄아아아악!”

울분과 짜증이 서린 고함 소리가 그대로 소니아에게 내리꽂혔다. 귓가가 징징 울리는 고함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정직하게 내려꽂히는 검로를 지켜본 소니아는 그대로 팔을 휘둘러 체중을 싣은 카사노의 검격을 받아 냈다.

-카앙!

타닥 튀기는 불똥과 함께 관중들의 환호가 평원에 울려 퍼졌다. 각자의 생각과 고민을 떠안은 결투가 시작되자 지켜보던 기사들과 용병단 간부들은 저마다의 생각을 정리하며 둘의 결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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