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컷 노예들의 주인이 됐다-140화 (140/395)

페리샤에게 이끌려 드넓은 정원으로 끌려 나온 나온 나는 강아지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정원에 관해 설명하는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이게 제가 성인이 됐을 때 기념으로 심은 묘목! 빈델과 둘이서 땅을 파 열심히 심었답니다!”

“귀여운 나무네요.”

이제 막 자라는지 쭉쭉 뻗어가는 가지를 쓰다듬으며 페리샤를바라보자 환한 미소를 지은 페리샤가 붕붕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죠?! 후후, 아는 분께 받은 복숭아 묘목을 심어서 곧 맛있는 복숭아를 먹을 수 있답니다.”

이게 다 자라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페리샤는 잘 모르는듯해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호응했다. 내 칭찬에 신이 난 페리샤는 잔뜩 들뜬 강아지처럼 재빠른 걸음으로 정원 이곳저곳을 누비며 내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건 어머님이 아끼시는 꽃밭이랍니다. 매일 매일 물을 주고 다정한 말을 건네며 돌봐주시죠!”

“아, 이건 아버님이 선물 받은 묘목이네요. 부귀영화를 부른다는 좋은 선물이죠.”

흥미 있는 이야기는 잔뜩 들떠서 이야기하면서 흥미가 없거나 잘 모르는 건 확연히 가라앉은 톤으로 설명하고 넘겨버렸다. 참 보이는 대로 행동하는 아가씨의 모습에 큭- 웃음을 터뜨리자 의아한 눈으로 말똥말똥 바라보던 페리샤는 아! 탄식과 함께 내게 손짓하며 어딘가로 뛰어갔다.

“오...”

장미 덩굴에 뒤덮인 작은 정원에 들어선 페리샤는 작게 차려진 티테이블을 가리키며 먼저 자리에 앉고는 나를 불렀다. 페리샤의 손짓에 따라 의자에 앉자 들뜬 목소리로 지저귀던 페리샤가 미안하단 얼굴로 내게 사과를 건넸다.

“손님을 모셔놓고 차 한잔 대접하지 않는다니, 죄송하네요...”

“아닙니다, 아가씨가 이것저것 알려주셔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더 감사하네요! 자, 선물 받은 장미 차랍니다.”

달칵- 찻잔을 내 앞에 얹어준 페리샤가 쪼르르륵- 기다란 차 줄기를 따르며 의기양양한 얼굴로 바라봤다. 그래도 손님이 온다고 미리 준비한 걸 보니 마냥 덜렁이는 아가씨는 아닌 것 같았다.

“흐음...”

코끝을 맴도는 짙은 장미 향에 미소를 지으며 페리샤를 바라봤다. 스스로 자신의 잔에 차를 따른 페리샤는 우아한 손놀림으로 찻잔을 들고 내게 눈웃음을 보낸 뒤 그대로 우아하게 한 모금 차를 들이켰다.

-호록

“후흥, 이 진한 향을 맡다 보면 지금 보내는 시간이 너무 즐거워요, 마치 제 몸에서 장미가 피어나는 거 같아 신기하답니다.”

혀끝과 입안에 맴도는 진한 장미 향에 혀를 굴리며 고개를 끄덕인 나는 한모금 맛볼수록 장미 향이 진하게 풍기던 미네르바의 체향이 떠올라 음흉한 생각이 들었다.

-달그락

서로 찾아온 침묵을 즐기며 차를 넘기는 소리만이 가든에 흘러넘쳤다. 잔을 전부 비웠는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놓은 페리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눈썹을 쫑긋 이며 내게 물었다.

“카사노님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혹시 실례가 안 되면 물어도 될까요?”

무슨 질문을 하려길래 그러는 걸까? 정말 무례를 저지르는 게 아닐까 걱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페리샤의 표정에 마음이 풀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서 질문해보라고 종용했다.

“아, 정말요?! 그럼, 그 혹시 시에라님과는 연인... 사이인가요?”

“연인, 이요.”

껄끄러운 단어가 혀 위에 데구르르 굴렀다. 텁텁한 모래를 삼킨 것마냥 걸리적거리는 단어를 곱씹으며 페리샤를 바라보자 붕붕붕- 양손을 흔들던 페리샤가 당황한 얼굴로 나를 말렸다.

“불편하시면 말씀하시지 않아도 된답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랬으니까요!”

“서로 사랑하는 사이죠.”

거짓말은 안 했다. 쉽게 내뱉지 못하는 단어에 자신이 조금 혐오스러워져 인상을 찌푸리다가 눈치를 살피는 페리샤의 행동에 금세 얼굴을 풀고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랑하는 사이라는 대답에 페리샤는 아이처럼 신나 작은 손으로 짝짝- 손뼉을 치며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그럴 줄 알았답니다! 후훗, 제가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거든요- 두 분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 건 보자마자-”

자신의 예상대로 들어맞았다는 생각에 들뜬 페리샤가 밤낮을 구분 않고 지저귀는 종달새처럼 조잘조잘 자신의 대단함을 한참 동안 설파했다. 조금 지쳤다는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여주자 헙- 하고 자신의 입을 막은 페리샤는 일초 이초 삼초,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가 아주 천천히 손을 떼고 늘어지는 말투로 내게 물었다.

“그으,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같이 있고 싶겠죠?”

“...떨어지고 싶지 않죠.”

마을에 있는 여인들이 생각났다. 나만 믿고 후회 없이 뒤따라온 레이첼과 나만을 바라보는 츠루카와 에루카, 지금도 저택 곳곳을 구경하면서 나와 연결되있는 운디네. 하루나와 미네르바도 있지만 사실 그녀들은 딱히 내게 종속된 느낌이 크지 않았다. 연세가 많은 분이라 그런 걸까?

페리샤의 순수한 질문에 머리가 맑아진 걸 느낀 나는 사소한 것에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났다. 덕분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페리샤를바라보자 양손의 검지를 꼼지락거리며 눈동자를 굴리던 페리샤는 딱 붙은 입을 천천히 떼며 내게 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사실, 저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아버님이나 어머님껜 말씀 못 드렸답니다...?”

“아가씨가 말씀드리면 두 분 다 환영하지 않으실까요?”

남작 부인은 만난 적도 없고 들은 이야기도 없었기에 확언하긴 좀 어려웠지만, 휘슬 남작은 직접 만나 이야기해본 결과 페리샤를 상당히 아끼는 게 보였다. 금지옥엽처럼 기른 딸이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하면 두 손 들고 환영할 사람 같았기에 나는 머뭇거리는 페리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줬다.

“그게, 으음...”

눈썹을 잔뜩 찡그리고 볼을 부풀렸다 꺼트렸다 반복하던 페리샤는 결국 슬픈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드륵- 허리로 의자를 밀고 일어난 말괄량이 아가씨는 대뜸 내 뒤쪽을 가리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사랑하는 시에라님이 오고 계시네요! 저는 이만 가볼 테니 두분이서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애써 밝은 척 하는 듯한 페리샤는 내가 뭐라 말을 붙이기도 전에 재빠른 걸음으로 가든에서 벗어났다. 토끼처럼 날쌘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으니 멀리서 다가오던 시에라가 또각- 또각-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와선 대뜸 물었다.

“무슨 이야기 했어요?”

“그냥 이것저것 이야기했어요, 정원에 대해서나 사랑하는 사람이라던가...”

“그런가요? 저는 그새 아가씨한테 눈독 들여서 손이라도 댄 줄 알았어요.”

그래서 그렇게 서둘러 온 건가? 흥- 콧방귀를 끼면서 고개를 돌린 시에라는 의자에서 일어난 내가 한 걸음 다가가자 홱 고개를 한 번 더 돌리며 가든에서 벗어났다.

“질투했어요?”

팔짱 낀 채 도도하게 서 있던 시에라를 뒤에서 확 끌어안은 나는 품 안에 딱 들어맞는 그녀의 몸매를 쓰다듬으며 쪽- 그녀의 귓가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 불만이 가득했는지 입을 꾹 다물고 끝까지 대답하지 않는 시에라였지만 꾸욱- 강하게 배를 끌어안으며 그녀의 머리에 뺨을 문지르자 불퉁한 목소리가 나를 제지했다.

“...그만해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어쩌긴요, 서로 사랑하는 사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

화악- 귀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시에라가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내 팔에 손을 얹고 푹- 고개를 숙였다. 남작의 앞에서 당당하게 대답할 땐 그렇게 커다랗게 보이던 여인이 지금은 한없이 작았다.

가녀린 시에라를 행여나 부수진 않을까 걱정이 들어 손에 힘을 살짝 푼 나는 여전히 얼굴을 붉히고 있는 그녀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다정하게 속삭였다.

“사랑해요.”

“...이러고 아가씨한테 어물쩍 손대는 거 아니죠?”

“아니에요, 제가 무슨 발정 난 짐승도 아니고...”

시에라의 말에 강하게 부정하려다가 문득 처음 나타날 때 페리샤의 승마복 차림이 떠올랐다. 탄탄한 허벅지를 감싼 흰색 승마바지는 매력적이었었다. 뭐라 따지려던 사람의 입이 꾹 닫히자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는 시에라였지만 이내 살짝 상체로 그녀의 머리를 누르고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악, 무거워! 비켜요!”

“슬슬 저녁 식사 시간 아닌가요? 옷도 갈아입고 해야겠죠?”

“아...”

내 질문에 자신의 차림새를 훑어보는 시에라, 이틀간의 상행에 대비해 입은 가죽 갑옷과 걸친 망토는 출발할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킁킁- 땀 냄새가 나려나 생각이 들어 코를 벌름거리자 퍽- 내 가슴팍을 밀친 시에라가 망토를 움켜쥐곤 새빨갛게 물든 얼굴로 내게 소리쳤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아니 그냥 궁금해서...”

“으읏! 먼저 가볼 테니까 알아서 오세요! 저녁 식사 시간엔 맞춰서 제방으로 오고요!”

화는 화대로 내면서 남작에게 누가 되지 않게 약속을 한 번 더 상기시켜주는 모습이란, 앙증맞은 시에라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본 나는 텅 빈 장미 가든에 놓인 티포트를 쥐고 앞으로 살짝 기울였다.

-쪼로로록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흘러내린 진한 향의 찻물이 찻잔에 부딪혀 방울방울 튀면서 그 안에 자리 잡았다. 이미 식을 대로 식은 차였지만 풍기는 향만큼은 그대로였기에 찻잔을 들고 그대로 한 모금에 털어 넣었다.

“음.”

처음 맛본 맛에 어색했었지만 두 번째는 달랐다. 익숙해졌고 경험해본 장미 향이 오히려 내게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사랑을 고민하는 아가씨라, 이주라는 기간을 최대한 즐겁게 보낼 수 있게 해주는 최고의 여흥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그락- 새하얀 접시에 찻잔을 얹은 나는 그대로 가든에서 벗어났다. 싸늘한 정원 공기에 옷을 여미며 저택으로 향하는 그때 토도돗- 무언가가 저 멀리 재빠른 걸음으로 달려갔다.

“응?”

익숙한 드레스 색에 어딘가 익숙한 방향. 점점 저무는 해와 페리샤가 향한 방향을 번갈아 보며 고민한 나는 늦을 일은 없겠지- 안일한 생각을 하며 페리샤의 뒤를 쫓았다.

-저벅 저벅 저벅

뭘 찾았길래 그렇게 서둘러 달려간 걸까? 생각에 잠긴 채 무아지경으로 걷는 중 붉은 지붕의 창고가 눈에 보였다. 제법 커다란 창고 옆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짐마차 세대를 보니 일을 마친 용병들은 잠시 자리를 비운 듯 했다.

“...응?”

기껏 창고까지 왔더니 굳게 닫혀 쇠사슬이 감겨있는 창고 문을 본 나는 그냥 돌아갈까 고민이 들어 몸을 돌리려는 찰나 작은 유리창 너머에 불빛이 일렁이는 걸 발견하고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벽에 붙은 채 유리창으로 접근했다.

-...! ,,,,

-...... ...!

작은 유리창에 귀를 얹자 웅웅 울리는 두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문을 열면 선명히 들리겠지만 그건 나 엿듣고 있소- 대놓고 나서는 꼴이었다. 정황상 창고에 있는 두 명 중 한 명은 페리샤가 확실했기에 나는 눈을 감고 예전처럼 청각에 모든 감각을 쏟아부었다.

머리를 비우고 눈을 감은 채 뱃속의 마나를 끌어올렸다. 내 의지에 따라 온몸을 맴도는 마나들이 내 오감을 강화해줬고 민감해진 오감을 전부 지금 귓가에 들리는 미세한 대화 소리에만 집중했다. 그러자 드문드문 들리던 작은 목소리들이 조금씩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러니까 아가씨가 싫은 게 아니라... 다른 보는 눈도 있으니 오시면 안 됩니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저는 항상 제가 원하는 대로 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행동하고 싶어요.]

[후우... 아가씨.]

[으읏... 알았어요... 다음부턴 일하는 중에 일방적으로 찾아오거나 하지 않을 테니까...]

[잘하셨어요]

또랑또랑한 페리샤의 목소리와 대비되는 어리숙하면서 단호한 청년의 말투, 많이 들어본 목소리였지만 쉽게 확신이 서지 않은 나는 집중을 풀지 않고 대화를 계속 엿들었다.

[...이번에 시에라님과 따라온 남자가 뭐라고 그런 줄 아나요?]

[어떤 감동적인 말을 했길래 우리 아가씨가 여기까지 뛰어왔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은 떨어지고 싶지 않데요- 항상 곁에 있고 싶고 매 두근거리는 순간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거 있죠?]

[...형편 좋은 말이네요.]

[......]

내가 저렇게까지 말했었나? 당황한 나머지 집중이 풀려버려 온몸을 맴돌던 마나가 맥없이 탁- 풀려버렸다. 눈을 뜬 나는 벽에 붙은 채 엿들었던 대화를 머릿속에서 정리하며 조용히 저택으로 다시 돌아갔다.

“재밌겠네.”

남자는 페리샤의 열렬한 구애에도 단호하게 쳐내기 바빴다. 뭐가 그 둘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권태기의 연인인지 신분 차의 사랑인지 알 수 없었지만 방금 엿들은 대화는 페리샤의 대한 관심을 더욱 크게 만들어줬다.

거의 저물어 산맥 너머로 떠내려가는 태양을 바라본 나는 시에라의 불호령을 듣기 전에 서둘러 저택 안으로 들어가 사용인에게 내 방을 물었다. 복도를 청소하던 메이드는 내 물음에 빗자루를 얹어두고 방까지 직접 안내해줬고 덕분에 시에라와 약속한 시각엔 늦지 않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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