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샤에게 떠밀려나온 나는 빠른 걸음으로 저택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바쁜 걸음으로 움직이던 사용인들의 인사를 대충 받아넘기며 외곽으로 향한지 몇분이 돼서야 두명의 경비가 굳건하게 입구를 지키고 있는 창고로 도착했다.
“어서오십시오.”
“빈델 집사님은 안에 계십니다.”
나를 발견하자마자 인사와 빈델의 위치를 전달한 두 경비병은 구부정한 허리를 피고 착 착 다리를 모아 성실해보이는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눈에 뻔히 보이는 속셈에 쓴웃음을 삼킨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그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까딱인 후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끼이익- 녹슨 경첩 소리와 함께 퀴퀴한 창고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건 무언가를 손에 움켜쥔 채 오만상을 찌푸리고 혼자 뭐라 중얼거리는 빈델이였다.
“뭐하십니까?”
“흡!”
가벼운 발걸음으로 빈델의 뒤에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질문하자 화들짝 놀란 빈델이 꼬리 밟힌 강아지처럼 튀어오르더니 손에 쥔 무언가와 겨드랑이에 끼워둔 문서를 바닥에 전부 떨어트렸다.
“아...!”
“주워드리겠습니다.”
일단 눈에 먼저 띄는 문서부터 줍고 그대로 빙글 돌리며 빈델에게 건네줬다, 아니 건네주려했지만 그의 손이 문서를 집기 직전 온갖 물품과 수량이 정리된 문서에 일정하게 체크된 표시를 발견한 나는 최대한 집중해 표시된 품목만을 외운 후 빈델에게 건네줬다.
“감사... 합니다.”
조금 티나게 쳐다본걸까? 떨떠름해보이는 빈델은 문서를 잡고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곤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와선 꾸벅 내게 인사를 건넸다. 조금 굳어보이는 그의 얼굴에 풀어줄까 생각한 나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미소를 지었다.
“되게 격하게 놀라시네요, 무슨 죄라도 지으신거 아닙니까?”
“하하, 아무런 인기척 조차 없어 저도 모르게 크게 놀랐습니다. 괜히 멋쩍네요.”
그저 놀랐다는 투로 흘러가는 말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말속에 숨어있는 가시가 툭 나를 긁으며 지나갔다. 하지만 남작의 의뢰로 협업하는 만큼 일방적인 의혹으로 그를 탓할순 없었기에 넘어가기로 했다.
툭-
걸음을 옮기는 와중 무언가 발 끝에 부딪혀 가볍게 굴러갔다. 옆에 나란히 서있던 빈델은 깜짝 놀라 서둘러 허리를 굽혀 내가 걷어찬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가볍게 굴러간 무언가는 빈델보다 내게 가까이 있었기에 호의를 베푸는 척 내가 먼저 손을 뻗어 물건을 주웠다.
“오...”
단단한 원목으로 조각한걸까? 매끄러운 곡선과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진 나무 반지를 가볍게 훑어본 나는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고 있는 빈델의 손바닥에 툭 반지를 얹어줬다.
“아름다운 반지군요.”
“하아... 들키면 곤란한 물건인데...”
곤란하다고 말하는 것치곤 평온한 목소리에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훔친 물건이란 선택지를 지우고 잠시 반지의 정체에 대해 고민해봤다. 일하는 와중 손바닥 위에서 굴리며 사색에 잠길만한 사연을 가진 반지라... 사소한 증거들이 하나로 모이는걸 느낀 나는 여전히 음흉한 미소를 띠며 빈델의 어깨에 턱 손을 얹었다.
“말하시는걸 보니 여자한테 선물할 모양인가 봅니다.”
내 말투에 한 번 더 짙은 한숨을 내뱉은 빈델은 머리를 벅벅 긁고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실직고 말하기 시작했다.
“...네, 제가 직접 조각한 반지입니다, 세공사에게 찾아가 이대로 만들어달라고 의뢰를 맡길 참이었습니다.”
“이야, 누군지 몰라도 무척 좋아하겠는데요? 그런 정성 가득한 반지라면 어느 여성이든 눈물을 흘리며 감동할겁니다.”
“정말로 그럴까요.”
자조어린 목소리와 함께 우중충한 표정을 짓는 빈델의 모습에 나는 턱을 검지로 문지르며 머리를 굴렸다. 페리샤 쪽에선 빈델을 사랑하는 게 확실해 보였지만 지금 반응으로는 빈델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쉽게 들진 않았다. 저런 궁상맞은 얼굴로 다른 여자를 마음에 두고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누구한테 선물하려는 건가요?”
“하하, 거기까지 말씀드리긴 조금 부끄럽습니다.”
가볍게 선을 그으며 대화에서 한발자국 빠지려는 시도였지만 나는 빈델이 그은 선에 발을 뻗어 침범한 채 미소와 함께 물었다.
“페리샤 아가씨한테 드리려는 겁니까?”
“하하... 제가요?”
“두 분이서 어릴 적부터 같이 자랐다고 들어서... 혹시나 해서 물어봤습니다.”
“아가씨는 휘슬 남작가의 정통한 후계자이자 장녀이신데 한낱 집사가 그분의 배필 자리를 노리겠습니까?”
자신이 내뱉는 모든 단어에 가시가 잔뜩 심어져있는걸 빈델은 알고 있을까? 자격지심과 우울감에 젖은 단어를 음미한 나는 빈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후 그가 듣고 싶어 할만한 이야기를 전해줬다.
“걱정도 많네요.”
“네, 뭐... 네?”
내 대답에 반사적으로 대답한 빈델이 어이없다는 듯 혀를 굴리며 무어라 내게 뱉으려는 말을 곱씹다가 그대로 똑같은 질문을 내뱉었다. 어리둥절하면서도 기분이 상한 듯한 그의 얼굴에 나는 진한 미소를 띠며 한 번 더 말해줬다.
“걱정도 많다 이말 입니다.”
“하하, 아무리 손님이라지만 조금 무례한 언사가 아닐까 싶군요.”
최대한 고압적이지 않은 단어로 풀어 내게 주의를 던지는 빈델이었지만 그의 주의를 순순히 받아넘길 생각이 없었던 나는 묵직한 콧김을 후욱 내뱉는 황소 같은 빈델의 앞에 한걸음 더 다가가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빈델씨는 여인의 마음에 대해 아는 게 없나봅니다.”
님이라는 격식 있는 칭호도 아까울정도로 답답한 남자기에 자연스럽게 님에서 씨로 격하가 됐지만 빈델은 그깟 호칭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성큼 다가와 나를 올려다보며 강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는 카사노님은 얼마나 잘나셨기에 제게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적어도 속에 담아둔 말은 제대로 꺼내니 당신보단 낫겠네요.”
“하, 너무 무례하다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적나라한 증오를 띠며 나를 쏘아붙이는 빈델을 향해 어깨를 으쓱인 나는 매끄럽게 혀를 굴리며 대답했다.
“제 여인이 아가씨의 손님으로 있으니 제가 좀 내조를 해줘야 기가 살지 않겠습니까?”
“카사노님이 무슨 내조를 한단 말입니까.”
내조라는 단어에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끼는 빈델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목을 집중시킨 나는 서로가 피하던 주제를 툭 내던졌다.
“당신이 페리샤 아가씨에 대한 마음을 숨긴다는 사실을 파헤쳐 당신의 입으로 아가씨께 고백하게 하면 그게 내조 아니겠습니까.”
“하하, 하...”
스윽- 내 뻔뻔한 대답에 영혼 없는 웃음을 내뱉은 빈델은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몇 번이고 반복하며 얼굴을 문지르더니 조금 발갛게 물든 얼굴을 살짝 내게 들이밀며 악에 받친 목소리로 물었다.
“카사노님의 말이 맞다 쳐도 제가 무슨 낯짝으로 아가씨께 사랑을 속삭이겠습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
“휘슬 남작가의 집사라지만 이제 막 집사가 됐을 뿐인 평민입니다. 그런 제가 아가씨를 사랑하겠습니까?”
덤덤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내뱉는 빈델이었지만 평민이란 악센트가 혀끝에 맴도는 순간 나는 대화 속에 적나라하게 깔린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 살짝 고개를 내저은 나는 여태껏 빈델의 속을 긁은 행위에 대한 사죄로 페리샤와 빈델이 가장 듣고 싶어할만한 말을 전했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다 큰 성인이 서로 사랑하는데 그런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형편 좋은 이야기네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나 믿고 싶은 말 일겁니다.”
차가운 미소와 함께 조롱을 내뱉는 빈델이었지만 그의 눈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흔들리던 눈동자는 한참을 방황하다 제자리를 찾고는 나를 꿰뚫듯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뭐, 듣기에는 좋은 말이군요.”
“오히려 개운해지지 않았습니까?”
“하, 그럴 리가요. 이제 이 이야기는 됐으니 오늘치 보고나 들이시지요.”
“말이 조금 편해지셨네요.”
내 질문에 짧게 콧방귀를 낀 빈델은 여태껏 쓴 친절의 가면은 벗어둔 채 차가운 말투로 나를 툭 쏘아붙였다.
“여태껏 저를 그렇게 도발해놓고 대접받고 싶은 겁니까?”
“어느 누구든 대접받는 삶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있겠습니까?”
싸늘한 빈델의 대답과 함께 우리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서로의 의중을 살피며 긁은 자존심이 메워지는 기분에 만족한 나는 가볍게 턱을 젖혀 빈델에게 보고하라는 몸짓을 취했다.
“후...”
촤락- 촤락- 아까 떨어트렸던 문서를 한숨과 함께 넘기기 시작한 빈델은 빠른 속도로 문서를 넘기며 품목 하나 하나 짚어가며 총 몇 개의 물품이 들어오고 어느 목적으로 사용했는지 설명했다.
“월광석은 10상자가 들어왔지만 세공업자들에게 4상자를 맡겼습니다. 그 외에도 조각용으로 마수의 뼈나 카페트 용으로 가죽 세묶음을...”
최대한 새겨들으며 시에라가 챙겨준 물품 목록을 훑던 나는 지금 빈델이 이야기하는 물품들이 아까 문서에 표시돼있던 물품임을 깨닫고 사용한 개수와 처음 시에라가 들고 온 개수를 비교해 기입했다.
“흠, 오기 전 물품 확인은 전부 끝마쳤습니다. 저는 한 번 더 물품 정리를 마치고 경비와 교대할 테니 먼저 들어가시죠.”
“아뇨, 이대로 돌아가긴 죄송하니 저도 도와드리겠습니다. 저는 오른쪽 선반에 있는 물품들을 확인하죠.”
빈델의 축객령을 흘러 넘긴 나는 월광석과 가죽이 쌓여있는 선반을 가리키며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성큼성큼 움직이는 내 발걸음에 빈델은 잠시 얼굴이 굳었지만 이내 눈썹에 준 힘을 풀곤 어깨를 으쓱이며 내게 말했다.
“그럼 저는 반대편 선반에 있는 물품을 확인할 테니 끝나면 말씀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나와 빈델은 대답한 후 서로 몸을 돌려 선반을 향했지만 빈델은 끝까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를 경계하는 건 내가 물품에 손을 댈까봐 경계하는 걸까 아니면 뭔가 의심스러운 짓을 해 캥기는게 있어 그런 걸까? 나는 피어오르는 의문을 가라앉히며 선반으로 손을 뻗었다.
-달칵
먼저 묶어둔 가죽을 담아둔 나무 상자를 열었다. 쿰쿰한 가죽 냄새를 애써 무시하며 끈을 붙잡고 들어 몇 장이 엮여있는지 센 후 선반에 나무 상자 개수를 세었다.
“하나, 둘...”
시에라가 처음 들고 온 가죽 묶음은 10묶음이었고 지금 선반에 있는 상자는 7상자였다. 빈델의 말대로 3묶음만 사용한 모양이었기에 나는 가죽을 다시 정리한 후 가죽 상자보다 조금 커 보이는 나무상자를 끌어당겨 뚜껑을 열었다.
“오...”
코끝을 맴돌다 퍼지는 광물 냄새와 함께 가득 들어찬 월광석이 창고 안의 불빛과 만나 빛나기 시작했다. 정말 달빛 같은 광택에 감탄한 나는 생각보다 가벼운 상자 무게를 느끼며 이래서 귀족들이 여러 가지로 가공해 쓰는 건가 감탄했다.
“흠...”
하나씩 집어 살펴본 후 월광석 무더기를 손으로 파헤치려고 하는 찰나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게 느껴져 나는 월광석을 내려놓고 뒤를 돌아봤다.
“설마 가져가시는 건 아니겠죠?”
이미 물품 확인을 마쳤는지 생긋 웃으며 다가온 빈델은 대뜸 내게 가져가는 건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다. 내가 가져가봤자 뭘 하겠다고, 어이없는 질문에 콧방귀를 낀 나는 상자에 다시 뚜껑을 덮고 진열된 나무 상자를 툭 툭 쳐보며 개수를 셌다.
“제가 가져가봤자 뭘 하겠습니까?”
같은 크기의 상자는 총 여섯 상자, 혹시 몰라 뚜껑을 열어봤지만 뚜껑에 닿을 기세로 잔뜩 쌓인 월광석만이 아름다운 광택을 뽐낼 뿐이었다.
“전부 들어맞는군요. 빈델님도 그렇습니까?”
“네, 문제없습니다.”
척- 미소를 지은 빈델이 문서를 내밀기에 받아낸 나는 아까 물품들에 표시해둔 흔적이 없는걸 보고 그가 새로운 종이에 써 내게 줬단 사실을 알아채고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 그대로 남작님께 보고 부탁드립니다. 저는 야간 경비들이 오기 전까지 창고를 지키고 있겠습니다.”
내 눈빛에 천덕스럽게 눈을 굴리는 빈델의 모습에 나는 의심의 싹을 잠시 파묻은 뒤 그에게 인사를 건넨 후 그대로 창고를 나왔다.
“그럼 고생하십시오.”
“네, 도와주셔서 감사, 하네요.”
한순간 뜸들인 감사가 여러 가지에 대한 감사임을 느낀 나는 그대로 어깨를 으쓱인 후 끝까지 나를 지켜보는 빈델의 시선을 느끼며 그대로 저택으로 향했다.
**
쿵- 낡은 문이 닫히고 창고에 먼지 섞인 바람이 불어 빈델의 바지자락을 펄럭였다. 순식간에 찾아온 침묵에 땀이 맺힌 손바닥으로 자신의 머리를 매만진 빈델은 이내 속에 쌓아둔 한마디를 그대로 내뱉었다.
“저급한 용병이...”
비루한 용병이 되는대로 지껄이던 잡소리를 들을 때마다 꾹꾹 억누른 분노를 마음 편히 내뱉은 빈델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이를 빠득 갈고 방금 전 카사노가 나간 문을 분노 어린 눈으로 노려봤다.
“후우...”
얼떨결에 어울린 대화에서 쓸데없이 내뱉은 말이 너무 많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은 빈델은 감정의 여파를 애써 가다듬으며 최대한 발소리를 자제하며 굳게 닫힌 문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커어... 커어...
-흐으...
문에 귀를 바짝 대자마자 들려오는 맥 빠지는 코골이와 숨소리에 빈델은 경비병들이 그새 벽에 기대 쪽잠을 자고 있단 사실을 알아챘다. 휘슬 남작의 집사에게 경비병들의 창고 경비 순번을 전달한건 빈델 자신이었지만 자신이 창고 정리를 맡았을 때 오는 경비병들이 저렇게 일을 잘해 주리라곤 생각도 못했기에 기쁨의 코웃음을 치며 천천히 문에서 귀를 뗐다.
“잘해보겠다고 큰소리 텅텅 치던 잡놈들이...”
남작이 창고의 경비에 심혈을 기울인단 사실을 어디서 듣고 자신을 찾아와 경비병 순번에 넣어달라고 애원하곤 막상 하는 일이 벽에 기대 자는 거라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발전할 의욕도 없고 사태를 해결하려는 노력조차 없는 쓰레기들, 저렇게 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번 더 곱씹은 빈델은 한껏 가라앉은 눈으로 선반에 얹힌 월광석 상자들을 툭 툭 툭 손끝으로 건드리며 개수를 셌다.
“아, 이건가.”
손가락 끝이 다섯 번째 상자를 건드리는 순간 조금 다른 무게감이 손가락 끝에 걸려 맴돌았다. 곧바로 상자의 뚜껑을 연 빈델은 한껏 쌓여있는 월광석 사이로 손을 파고 넣어 자신이 넣어둔 받침대를 겨우 잡아내 그대로 당겨 상자에서 꺼냈다.
“후우...”
풀풀 퍼지는 광물 냄새를 살짝 불어 흩어지게 한 빈델은 받침대 위에 얹힌 월광석을 선반에 잠시 두고 받침대 아래 깔려있던 잡철 무더기를 찡그린 얼굴로 바라보며 그대로 상자를 들어 조용히 바닥에 내려놨다.
“용병 주제에 감은 좋네.”
한창 월광석을 빼돌리는 참에 카사노가 들이닥쳐 잡철 위에 담지 못한 월광석을 얹어놓은게 딱 한상자인데 그걸 열어볼 줄이야. 다시 생각해도 무모한 자신의 행동에 이를 빠득 간 빈델은 받침대 위에 얹힌 월광석을 들어 누가 훔치다 떨어트린 모양새로 바닥에 흩뿌리곤 잡철 상자를 다른 상자가 진열된 선반에 그대로 보관했다.
툭 툭 발끝으로 월광석을 걷어차 좀 더 자연스런 모양새로 만든 빈델은 창고를 떠나기 전 한 번 더 문과 창문에 귀를 갖다 대 누가 근처에 있는지 살폈다.
-커억, 크으... 흐으...
한심한 코골이 소리가 여전히 들리는걸 보니 경비들은 아직도 자는 모양이었고 창가엔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기에 빈델은 조용히 품에서 자루를 꺼내 선반 맨 아래에 숨겨둔 상자를 열었다.
-덜컥
열자마자 화악- 퍼지는 빛무리와 광물냄새에 살짝 코를 찡그린 빈델은 접어둔 자루를 펴고 겉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빈델의 손길에 조용히 번지는 마법진의 빛이 팟- 켜진 순간 펼쳐둔 자루 안의 공간이 일그러졌고 빈델은 그대로 상자에 담긴 월광석을 자루에 붓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하나씩 빼돌려 모은 돈으로 산 공간 주머니의 효능에 만족한 빈델은 월광석 한 상자를 텅텅 비운 뒤 빈 상자를 바닥에 널브러진 월광석 옆에 조심스레 눕히고 받침대까지 자루에 넣은 뒤 조용히 허리를 폈다.
-뚜둑 뚜둑
긴장한 탓에 온몸에 힘이 몰려 뻐근한 몸을 풀어준 빈델은 조금 묵직해진 자루를 어깨에 메고 발끝으로 바닥을 쓸며 천천히 천천히 앞으로 향했다.
턱- 발끝에 걸리는 느낌을 낚아챈 빈델은 곧바로 바닥을 더듬어 고리를 강하게 움켜쥐고 그대로 있는 힘껏 잡아당기며 참았던 숨을 곧바로 내쉬었다.
-끼이이이...
방치된 탓에 녹슨 비밀 문이 싸늘한 침묵이 가라앉은 창고에 불쾌한 소음을 내질렀지만 빈델은 아랑곳하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문을 연후 곧바로 몸을 내던져 안으로 들어간 뒤 안쪽 손잡이에 묶인 끈을 잡아당겨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비밀 문을 닫아냈다.
쿵- 그렇게 문이 닫히고 적막이 퍼지는 순간 나태한 경비들이 지키는 창고 안에는 도둑이 빠져나간 흔적만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