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슬 남작가의 숨겨진 통로는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진 빈델조차 알수 없었지만 이어진 곳만큼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찰박 찰박
월광석을 담은 자루의 무게인지 남작의 물건을 훔쳤다는 중압감인지 모를 압박이 빈델의 어깨를 짓누를수록 그의 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찰박이는 물소리와 함께 통로와 이어진 지하 수로를 끝없이 전진하던 빈델은 수로 중간 중간을 밝히는 횃불을 발견하고는 자루를 움켜쥔 손아귀에 힘을 더욱 주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끄윽, 크으으...”
“제발, 제발 한 푼만...”
아무것도 없던 지하 수로를 전진하면 전진할수록 수로 바닥에 널브러진 부랑아와 환자들이 질퍽이는 더러운 물을 기어오며 빈델에게 엉겨 붙기 시작했지만 참혹한 수로의 현실에 적응한 그는 눈길 하나 주지 않고 더욱 빠르게 발을 놀려 수로를 지나쳤다.
수로 벽에 군데군데 피어오른 횃불들의 간격이 좁아질수록 부랑아들의 숫자는 줄고 후줄근한 천막이나 가판이 수로 곳곳에 자리 잡기 시작했고 그것이 곧 목적지에 다와 간다는 뜻임을 알고 있던 빈델은 어깨에 멘 자루를 슬그머니 옆구리로 옮겨 꽉 끌어안은 채 익숙한 발걸음으로 가판 사이로 숨어들었다.
“크으, 좆같은 냄새 때문에 코가 썩을거같구만.”
“얼른 처리하고 나가자고.”
깊이 들어올수록 지하수로는 수로라는 본연의 목적과 멀어진 모습으로 수많은 인파들을 담아내고 있었다. 툭 툭- 불만어린 욕을 뱉는 잡배들과 부딪혀가며 구불구불한 수로에 숨어들어간 빈델은 저 멀리 모루 위에 걸터앉은 외팔이 드워프를 발견하곤 와글와글 모여 있는 인파를 뚫고 나아갔다.
“씨발 앞 좀 보고 다녀!”
“조용히 안 해?”
“이 새끼가 지금 뭐라고 지껄인 거야?”
황제의 무관심으로 제국 안의 이곳저곳 떠돌던 떨거지들과 세를 넓히려던 뒷세계 인간들이 모인 지하 수로였기에 사소한 이유로 피 터지게 싸우는 건 일상이었다. 그렇기에 자신 때문에 아무에게나 시비 걸던 잡배 하나가 싸늘한 시체가 되어 쥐들의 먹이가 된 다해도 휘슬 남작의 장물을 처리하기 급급한 빈델에겐 관심 없는 이야기였다.
-턱
모루에 걸터앉아 발끝을 껄떡이는 드워프 앞에 자루를 내던진 빈델은 끈을 풀고 내용물을 보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부 월광석.”
빈델의 말에 눈썹을 까닥인 드워프는 곧바로 외투를 걷고 모루에서 내려와 자루를 툭 발로 걷어차 보곤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잘려나간 손목에 연결된 갈고리를 지휘자처럼 휘저으며 말했다.
“안오는줄 알았어, 두 번 기다리다간 눈깔 빠지겠네.”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은 드워프는 덜렁거리는 끈에 갈고리를 걸고 홱 잡아당겨 발치에 있던 상자에 그대로 자루를 뒤집었다.
-콰르르르르
탁한 공기에 묵직한 광물냄새가 뒤섞여 퍼지면서 요란한 소음을 만들어냈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은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지켜보던 빈델은 드워프가 광석을 뒤집어가며 확인하는 게 끝나갈 때 쯤 말라붙은 입술을 열고 질문했다.
“값은?”
빈델의 질문에 콧방귀를 뀐 드워프는 털이 수북이 자란 입가를 쓰다듬다 돌연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며 오른팔의 갈고리로 월광석이 담긴 나무 상자를 텅텅 두들긴 후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정도면 300골드는 쳐주지, 안 그래도 노예해방단들이 월광석을 싹다 쓸어 담고 있거든.”
“노예 해방단?”
금시초문이란 빈델의 태도에 킁- 콧방귀를 뀐 드워프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물었다.
“그것도 모르나? 제국 암시장에 암암리로 팔리는 노예들을 털어먹는 놈들 말이야.”
“...한번도 들은 적 없는데.”
“뭐, 그깟게 뭐가 중요해? 300골드나 벌었단 게 중요하지 안 그래?”
휙- 조롱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날아온 주머니를 받은 빈델은 끈을 풀어 주머니에 담긴 아주 얇은 금화를 확인하고 이를 빠득 갈며 조용히 품에 집어넣었다.
“그래봤자 이 더러운 암시장에서밖에 못 쓰는 돈을...”
말은 300골드지만 제국 금화의 시세에 맞추자면 3골드도 얼추 안 되는 금화, 거기다 제국 암시장에서나 쓸 수 있는 무쓸모인 금화를 짤랑 흔들어본 빈델은 더욱 깊숙이 금화를 쑤셔 넣고 한걸음 물러섰다.
“크크, 그 더러운 돈 몇 푼 모으려고 주인님 창고나 뒤지는 주제에.”
나는 너희와 다르다- 라는 태도를 취하는 빈델이 아니꼬웠던 드워프가 비꼬는 말투로 빈델의 속을 헤집었지만 길러왔던 인내심으로 꾸욱 화를 억누른 빈델은 이를 갈며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 거리듯 말했다.
“주인? 기르는 개보다 못한 취급으로 대하는 주인을 누가 모셔?”
어릴 적 페리샤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하인들의 몽둥이에 얻어맞았던 그 순간을 떠올린 빈델은 벌레처럼 웅크리고 있는 자신을 하찮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휘슬 남작의 눈빛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이를 악물었다.
“그런 것치곤 계속 데리고 있는걸 보면 꽤 예쁨 받는 거 아니야?”
속도 모르고 능청스럽게 내뱉는 드워프의 주둥이를 한 대 갈기고 싶었지만 빈델은 치솟는 분노를 애써 억누르며 몸을 돌리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몇 번이나 찾아온 청년이지만 정붙이기 어렵다며 혀를 내두른 드워프는 잠시 후 찾아올 노예해방단에게 물건을 주기 위해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쁨? 개좆같은...’
담담하게 물러났지만 헤어지기 전 드워프가 내뱉은 속편한 소리가 가뜩이나 화가 난 빈델의 머리에 통통 튀어 다니며 그의 정신을 헤집기 시작했다. 남작은 그저 빈델이 자신을 향해 짖지 못할걸 알기 때문에 방치하는 거였다. 어릴 적부터 개처럼 기르며 자신에게 반항하지 못하게 교육했기에 자신이 이를 드러내지 못할거란걸 맹신할 뿐이었다.
‘페리샤... 아가씨...’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페리샤를 밀어냈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은 복잡해졌고 얽히고설킨 잡생각은 냉정한 빈델의 머리를 곤죽으로 만들기 충분했다. 그 탓에 오늘 쓸데없는 말들을 잔뜩 내뱉게 돼버렸고 빈델은 후회하는 중이었다.
‘어차피 뜰 몸이니 걱정 할 필욘 없지.’
남작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반항은 지금처럼 물건을 빼돌리며 도망칠 자금을 모으는 것뿐이었다. 남작의 개로 사는 것도 잠시, 다른 나라로 잠적할 돈만 모이면 암시장 어딘가의 중개상과 만나 제국을 뜨면 그만이었다.
‘후우...’
그렇지만 카사노와의 문답에서 내뱉은 심란함과 진심은 거짓이 아니었다, 자신이 무슨 불운한 연극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마냥 이것저것 내뱉은 건 다시 생각해도 멍청했지만 조금 개운해진 것도 사실이었기에 크게 후회하진 않았다.
“거기 총각!”
페리샤를 어떻게 대할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와중 빈델은 자신을 향해 꽂히는 앙칼진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 인상을 쓴 채 그쪽을 바라봤다.
“눈을 왜 그렇게 부라려? 그렇게 아니 꼬아?”
“...무슨 일이십니까.”
자신을 부른 게 늙어빠진 노파였단 사실에 놀란 빈델은 노파의 가게를 보고 더 크게 놀랐다, 판자로 만든 가판대나 수레로 만든 노점대가 판치는 지하 수로에 번듯하게 차린 목재 건물은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그냥- 딱봐도 지하수로 놈들은 아닌거같아서 물건 좀 사가라고.”
“물건?”
노파의 쭈글쭈글한 손이 테이블 위를 슥 훑으며 빈델의 시선을 빼앗았다. 노파의 손바닥 아래 쫙 깔린 여러 장신구와 보석들이 지하수로의 탁한 공기에 굴하지 않고 반짝이는 모습은 아름다웠지만 이곳이 지하 수로란 걸 다시금 곱씹은 빈델은 눈썹을 찌푸리며 노파에게 말했다.
“가짜도 섞인 거 아닙니까?”
“이자식이 안살꺼면 안산다고하지 왜 부정 타게 그딴 말을 하고 지랄이야!”
부를 때부터 얌전하지 않았지만 한마디에 욕 여러 마디로 되갚는 노파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빈델은 여러 장신구를 가리키며 설명하는 노파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저 쌍놈의 새끼, 어딧놈인지 몰라도 걸리면 잘난 콧대 콱 뭉개버릴겨! 알어!”
괄괄한 노파의 저주를 한귀로 흘려들으며 고개를 들려던 빈델은 아주 짧은 순간 자신의 눈길을 사로잡는 황금빛 보석에 잠시 정신을 빼앗겨 턱- 발걸음을 멈추고 보석을 들여다봤다.
중심부를 향할수록 진한 금색과 외곽부의 샛노란 병아리색의 보석, 테두리를 감싼 반짝이는 황금빛에 푼수 같은 미소로 들판을 뛰놀던 페리샤가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던 모습을 떠올린 빈델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짝!
“예끼! 사지도 않을 거면서 어디서 만지려고 들어?”
따끔한 노파의 핀잔과 손등의 고통에 정신을 차린 빈델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페리샤의 환영을 애써 지우며 내심 기대를 품은 노파에게 질문했다.
“이건 얼맙니까?”
“후후... 자네 물건 잘보는구만, 저쪽 신성왕국으로 건너가는 산맥 알지? 거기 중앙을 떡하니 지키는 골드 드래곤의 레어에서 겨우 훔쳐낸 골든 토파즈라고 하는 거야.”
“아니 얼마냐고요.”
“들어봐! 지금 그 드래곤을 속여먹은 사기꾼이 레어에서 보석을 하나씩 빼돌리는데 이게 세 번째로 빼돌린 귀한거란 말이야.”
누가 들어도 허황된 입발린 이야기임이 분명했지만 말을 타고 들판을 뛰놀며 해맑게 웃는 페리샤의 미소를 떠올릴수록 빈델은 저 보석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달그락- 주머니 속을 구르는 목제 반지를 손가락으로 굴리며 생각에 잠긴 빈델을 가만히 바라보던 노파는 드디어 가격을 말했다.
“30골드야. 진짜 귀한 거라니까?”
“생각보다 싼데? 귀한 거라면서요?”
암시장 금화 30장이라니, 지금 자신이 모은게 2500골드인데 장난하나- 생각지도 못한 보석을 얻을 생각에 신난 빈델은 살짝 미소를 띠며 품에 손을 넣었지만 이내 자신을 꾸짖는 노파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손을 뺐다.
“장난해? 제국 골드인 게 당연하지.”
“뭐요? 이딴 보석이 30골드?”
자신이 가진 골드를 다줘도 살수 없는 가격이란 소식에 반발했지만 노파의 눈은 이미 손님이 아닌 진상을 바라보는 눈이 됐기에 빈델은 순순히 포기하고 한걸음 물러섰다.
“곱상한 놈이라 한몫 단단히 챙겼나 했는데 애새끼였어? 썩 꺼져!”
자기가 부를 땐 언제고 귀를 찢는 듯한 목소리로 내쫓는 노파의 꼴에 화를 낼 법도 했지만 빈델의 정신은 방금까지 봤던 보석에 팔려있었기에 노파의 폭언에 반응하지 않고 터덜터덜 비밀 통로로 다시 돌아가며 보석의 환영만을 곱씹을 뿐이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지러운 머리를 정리할수록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에 황금빛 보석 반지를 낀 페리샤의 모습만이 빈델의 머리에 선명히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