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에 들어가 지하수로만 다녀왔을 뿐인데 바깥은 어느새 오후가 다 지나가 있었다. 뉘엿뉘엿 산맥 너머로 숨는 해를 바라보며 저택으로 향할 무렵 청아한 목소리가 나를 불러세웠다.
“안녕하십니까.”
청아하면서도 단호한, 잘 벼려진 칼 같은 목소리에 나는 몸을 돌려 마찬가지로 꾸벅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용무는 잘 끝마치셨습니까?”
“네, 실마리가 잡혀서 이제 끝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거 다행입니다.”
그럼 이만- 메이드복 끝자락을 살짝 움켜쥐고 들어 인사를 건넨 카트라는 후회 한점 없는 또렷한 눈매로 내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다 조용히 걸음을 돌렸다.
조용히 떠나는 카트라의 뒷모습에 곧 다가올 이야기에서 한걸음 물러나는 듯한 태도가 느껴졌다. 확실히 카트라가 이 이야기의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기에 나 또한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쫒을 뿐 붙잡진 않았다.
터벅- 터벅-
창문 너머로 불빛이 일렁이는 저택을 바라본 나는 품에서 남작이 준 양피지를 꺼내 하나하나 있었던 일을 써 내려갔다. 의뢰주인 남작에게 보고하기 위함이었지만 나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남작과 빈델, 빈델과 페리샤, 페리샤와 나. 남작가에서 얽히고 섥힌 이야기가 점점 끝을 향해 다가왔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종막을 향해 달리는 것, 그뿐이었다.
29
타닥! 타닥! 파삭- 찌익- 지익-
“흐으, 흐으, 후웃!”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찬공기에 부딪힌 이가 시려오고 노출된 혀가 이리저리 흔들리며 톡톡 이를 두드렸지만 입은 여전히 다물어지지 않았다.
“저기 있다!”
천둥 같은 고함 소리, 파삭-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선명히 울리는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 지익- 훤히 드러난 갓길보다 풀숲 사이를 헤집은 탓에 가지에 걸려 옷이 찢어지는 소리까지.
살면서 한 번에 들을 일 없는 온갖 소리가 뒤엉키며 빈델의 숨통을 옥죄여 왔다. 심장은 쿵쿵쿵 미친 듯이 뼈를 두드렸고 등골과 이마를 적시는 식은땀은 온몸을 흠뻑 적셨다.
두두두두- 멀리서 들리지만 귓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한 우레 같은 발소리가 온 숲에 울려 퍼졌다. 병사와 기사들의 걸음이 땅을 울렸고 빈델 또한 울렸다. 주륵- 자신도 모르게 흘린 눈물이 침에 뒤섞여 뚝- 턱 끝에 모였다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왜-“
한참을 입 벌린 채 달려서 그런 걸까? 자신이 낸 목소리지만 자기 목소리가 아닌 것만 같은 쩍 갈라진 목소리가 울렸지만 도저히 하늘에 대고 묻지 않곤 이해하지 못 할 일인지라 빈델은 갈라진 목소리로 다시 한번 되물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쿵쿵쿵- 턱 끝까지 쫓아온 발구르는 소리에 겁에 질린 사슴처럼 땅을 박차며 달리는 빈델은 자신이 물은 질문의 해답을 떠올리며 미약한 불빛에 의지해 어두운 숲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
“그래, 백작 부인께서 다른 말씀은 없으셨나?”
빈델의 손에 쥐인 편지를 낚아채듯 잡아낸 남작은 편지칼을 꺼내며 그에게 물었지만 딱히 들은 이야기 없던 빈델은 고개를 주억이며 공손히 손을 모은 채 남작에게 대답했다.
“네. 전언이나 안부는 전부 편지에 부치셨다 하셨습니다.”
“흐음, 그래. 수고했다.”
그게 전언이지 않냐- 나 쓸모없는 놈 같은 호통이 돌아올 줄 알았던 빈델은 고개를 살짝 숙여 대비했지만 예상 못 한 친절어린 대답에 당황했다. 하지만 당황도 잠시 꾸벅 허리를 숙여 대응한 그는 자세를 낮춰 남작의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이만 물러나도 좋다. 아- 창고의 도둑에 관해서 이야기할게 남았군.”
꿀꺽-
침 넘기는 소리가 들린 게 아닐까 걱정이 들 정도로 긴장한 빈델은 공손히 모은 두 손을 꽉 움켜쥐며 남작의 입술만을 바라봤다. 평온을 가장한 빈델의 긴장을 읽은 남작은 사전에 약속한 대로 천천히 이야기를 풀었다.
“카사노, 그남자가 잡아냈더군, 그간 경비들 여럿이 작당해 대놓고 물건을 빼돌린 모양이야. 그거에 대해 네놈도 처벌을 좀 받아야겠다.”
“네, 네?”
“못 들었나? 멍청한 것. 네놈이 알선한 경비들이 물건을 빼돌리다 걸렸단 말이다!”
빈델을 향한 노기를 경비에게 틀어 남작은 콧김을 쒸익- 내뿜으며 빈델을 바라봤다. 노기어린 눈총에도 불구하고 도둑에 대한 화살이 경비에게 향했다는 사실에 빈델은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내쉬며 꾸벅- 다시 한번 허리 숙여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한낱 경비들이 대놓고 물건을 건드리기에 네놈이 뒤에 있나 싶었지만- 그남자가 샅샅이 뒤져 봤지만 아무 증거가 없다더군.”
오싹- 안도도 잠시 뒤에서 자신을 조사했단 사실에 소름 끼친 빈델이었지만 어떻게든 흔적이 없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안도하며 남작에게 허리 숙여 사과만을 전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 그놈들이 영악하더군. 광석 양이 아니라 상자 수로 세는걸 보고 마차에서 옮길 때 빼돌렸다니 잡지 못할 만도 하지.”
“그런 짓을 하다니…”
“시에라양과 논의해 상자양에 광석 수량을 재 기입한 후 한 번 더 검수하는 방식으로 얘기했으니 그렇게 알고 있어라.”
“그러면 같은 수법은 무리겠군요, 남작님의 지혜는 대단하십니다.”
이전이었다면 거슬릴게 없었겠지만 도둑이란 걸 알게 된 후 빈델의 입발린 칭찬이 거슬린 남작은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저었다.
“… 이 일은 불문율로 부치고 도둑들은 다른 죄목으로 사형이다. 괜히 백작 부인의 귀에 들어가면 나도 한 소리 들을 테지.”
“알겠습니다.”
“물러가라.”
남작의 축객령에 꾸벅- 허리 숙여 인사한 빈델은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나지막이 뱉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한 빈델의 태도에 추악함을 느낀 남작은 이를 뿌득 갈며 판을 엎을까 생각도 들었지만 카사노와 협의한 게 있었기에 분노를 억누르며 응접실을 벗어나는 빈델의 뒷모습을 눈으로 쫒을 뿐이었다.
감히 개가 주인을 물어? 감히? 솟구치는 분노를 더한 분노로 다듬은 남작은 제발 이 분노를 빈델의 등에 꽂을수 있길 기도하며 일이 그르치지 않길 빌었다.
달칵-
“후우-“
응접실 문을 닫고 그대로 뛰듯이 걸으며 방으로 도망친 빈델은 쿵- 닫힌 문에 등을 기대며 여태 참은 숨을 한 번에 내쉬었다. 폐가 그대로 쏟아지는 듯한 괴로움에 눈을 질끈 감은 빈델은 정말 들키지 않은 건가 끝난 건가? 안도의 한숨과 여러 질문을 스스로에게 내던지며 생각을 정리했다.
‘걸리진 않은 것같지만 안심하긴 이르다. 이번에 잡힌게 그놈들일뿐 창고 안 수량이 안 맞는 게 걸린다면 꼼짝없이 잡히겠지.’
빈델은 경비들이 잡히고도 자신에게 화살이 향하지 않았단 사실을 떠올리며 자연스레 카사노를 떠올렸다. 게으르고 능글맞은 그 낮짝을 보니 경비들이 도둑임을 확신한 후 창고에 손도 안댄 게 뻔했다. 그랬으니 자기 꼬리가 밟히지 않은 거겠지.
‘이럴 땐 게으른 용병인 게 도움되는군. 이번만큼은 쓸모 있었어.”
쓸데없이 촉이 좋고 가벼운 입을 나불대며 아가씨 곁에 어슬렁거리는 한량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큰 도움됐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한 빈델은 침대에 털썩 누워 숨을 골랐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똑- 똑- 똑- 토독- 토독- 토독-
“하아…”
지끈- 창 두들기는 소리에 머리가 아파져 오는 빈델이었지만 무시할 수 없었기에 떨어지지 않는 발을 질질 끌며 창문을 열었다.
발목에 통을 묶은 회색빛 새가 열린 창틈 사이로 휙 하고 들어왔다.
툭 툭- 손바닥을 두드리는 부리에 창가에 놓인 병에서 밀알을 꺼낸 빈델은 몇 개 정도 손바닥에 뿌린 후 새의 부리에 갖다 댔다.
톡- 톡- 톡- 부리를 쪼며 밀알을 주워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빈델은 식사가 끝내자 머리를 흔들며 발치를 들이미는 새의 발목을 익숙하다는 듯이 붙잡고 통을 열었다.
스윽- 돌돌 말린 종이를 펴자 낙서하듯 휘갈긴 글씨가 빈델을 반겼다. 익숙하면서도 불편한 상황에 눈살을 찌푸린 그는 천천히 종이를 훑어 봤지만 이내 눈을 질끈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쪽지 내용은 간단하면서도 어려웠다. 가져올 수 있는 만큼 월광석 챙겨올 것. 웬만한 양을 사고도 남을 호구를 잡았으니 한탕하고 튀자는 드워프의 제안이었다.
“그게 말처럼 쉽냐고-“
평소 같았으면 거들떠도 안 볼 제안이었지만 여러 상황이 맞물린 지금, 빈델은 솔직히 엄청난 유혹을 느꼈다. 여태껏 벌인 도둑질의 범인이 경비병들이라는 상황과 물건을 찾는 의뢰주가 귀족인것 같다는 추신.
그냥 팔아먹는다면 무시했겠지만 귀족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사치와 허영이라면 목숨 거는 귀족인 만큼 드워프의 말대로 가져온 물량 전부 드워프가 부르는 가격에 매입할게 분명했다. 거기서 몇할을 뗀다해도 잘하면 제국 금화 한 장정도 챙겨 갈수도 있을 테지.
‘하지만 섣불리 하기엔 남작이…’
방금 전, 백작 부인의 편지를 전해 줄 때 남작의 눈빛을 떠올린 빈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상황이 끝났다고 말은 내뱉지만 남작의 눈은 여전히 차게 가라앉아 있었다. 여러 번 남작의 폭력에 직면해 본 빈델이었기에 가라앉은 눈 너머 도사리는 분노를 읽을수 있었다. 남작은 자신에게 무언가 짙은 분노를 가지고 있었다.
‘이젠 정말 도망쳐야 하나?’
쿡쿡쿡- 자기 손바닥을 찌르는 부리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자칫 잘못해 붙잡혔다간 이깟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죽음이 찾아올게 뻔했으니.
“아.”
죽음이라는 최후를 상상하는 순간 금빛 머리칼이 눈앞을 스쳤다. 태양 같은 금빛 머리칼과 햇볕 같은 향기- 코끝을 간지럽히는 풋풋한 아가씨의 향기가 당장 코앞에 놓인 것만 같았다.
“…아니.”
어차피 포기해야 할 사람이었다. 그깟 여자가 뭐라고 미련이 생길까? 모든 걸 포기하고 페리샤의 손을 잡고 도망친다는 건 미련한 짓이고 만용이고 그녀에 대한 모욕이었다.
어차피 아무것도 아닌 사용인과 귀족의 관계. 어릴때부터 같이 컸다는 사실 하나가 여태 살아온 다른 환경의 간극을 좁혀주진 않았다. 호의를 표한데도 그건 페리샤의 어리광일뿐 벌어진 간극을 메우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추악한 합리화를 마친 빈델은 깔끔해진 머릿속에 감탄하며 조용히 침대에 걸터앉았다. 손바닥을 쪼는 새를 바라보며 다짐한 그는 모든 걸 내던지고 도망치기로 결심한 후 창가 너머로 부리를 다듬는 새를 그대로 날려 보냈다.
푸드득-
칠흑 같은 밤하늘 사이를 가로지르는 회색빛 깃털 하나가 그대로 창가로 떨어졌다. 툭- 조용히 창밖으로 내던진 빈델은 하늘하늘 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깃털을 바라보다 몸을 돌려 창고를 향했다.
저벅-
미친 듯이 긴장한 빈델은 신발을 신었는데도 흙을 직접 밟는 듯한 감촉에 눈썹을 찌푸리며 나무 뒤에 숨었다. 남작의 목줄에 끌려간 경비들을 지켜본 건지 창고를 지키는 경비들의 눈은 하늘에 걸린 달보다 뚜렷이 빛나고 있었다.
‘어차피 지하 수로로 도망칠거, 당당하게 들어가야 하나?’
하지만 그런 방법을 취하기엔 창고 앞을 지키는 두 경비는 한 번도 본적 없는 병사였다. 필시 남작이 직접 고른 경비들일 테고 남작의 이름을 팔아 창고로 들어가고 몇시간 동안 나오지 않는다면 바로 보고가 들어갈게 뻔했다.
그렇게 되면 병사와 기사를 풀어 수색할 테고 자신은 제국에서 평생 쫓기는 신세가 될 테지. 머리를 흔들며 포기한 빈델은 숨죽인 채 나무 뒤에 숨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생기길 기도하며 경비들을 주시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창고 앞에 놓인 횃불이 아니면 앞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어둠이 깔릴 무렵 저벅- 저벅- 경비들이 창고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꾸욱- 나무 기둥을 움켜쥔 채 경비들을 향해 귀를 기울인 빈델은 낮은 목소리로 오가는 대화를 훔쳐듣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럼 나는 저택 쪽 갓길을 둘러보지.”
“또 내가 창고 뒤? 몇 번째야 도대체.”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며 헤어지는 경비들을 끝까지 지켜본 빈델은 저벅저벅- 그들이 약속한 장소로 사라진 순간 쏜살같이 창고로 달려가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그대로 온몸을 내던지듯 안으로 들어갔다.
쿵- 미약하게 닫히는 문소리와 함께 터벅터벅 여러 발소리가 창고를 애워쌌지만 온몸을 내던진 빈델은 그 소리도 듣지 못한고 스스로 창고에 갇힌 꼴이 돼 버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빈델은 그저 풀풀 풍기는 먼지를 손으로 휘저으며 날려 보낸 후 굳게 닫긴 문손잡이를 꽉 움켜쥔 채 하아- 하아- 숨을 고르다가 천천히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후우-“
괜한 긴장탓에 들어찬 숨을 한 번에 내뱉은 빈델은 이후 망설임 없이 품에서 자루를 꺼내 입구를 살짝 말아 스스로 벌어지게 고정한 후 쓰다듬어 마법을 발동했다. 직후 선반에 있는 상자들의 뚜껑을 벗겨 그대로 쏟아 내기 시작했다.
우르르르- 마치 바위가 굴러가는 듯한 소리가 창고에 퍼졌지만 빈델은 개의치 않고 상자를 좀 더 자루에 가까이 한 후 안에 있는 월광석을 모조리 부었다.
툭- 툭- 툭- 발치에 쌓인 빈상자가 빈델의 키만해질 무렵 자루를 살짝 들어 본 빈델은 묵직한 감각에 이 정도면 됐다- 며 홀로 속삭인후 그대로 자루를 어깨에 걸쳐맸다.
“후욱-“
공간 마법을 사용했음에도 어깨에서 느껴지는 묵직함에 후회한 빈델이었지만 여태껏 받아온 고통과 치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 다짐한 후 질끈- 눈을 감으며 동여맨 자루를 꽉 움켜쥔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끼이익- 쿵!
익숙한 손길로 비밀통로를 연 뒤 한걸음 한걸음 가쁜 숨과 함께 계단을 내려온 빈델은 오늘따라 한기가 느껴지는 지하수로를 말없이 바라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눈앞의 심연을 향해 자기 몸을 내던졌다.
“후우, 후우…”
공간 마법을 사용했음에도 그 이상의 무게를 담은 탓에 어깨를 짓누르는 중량이 어느 때보다 힘겨웠지만 빈델은 가쁜 숨을 내쉬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벅- 저벅-
수십 번을 오간 통로가 유독 낯설었지만 자루의 무게탓에 아무 생각 없이 걷던 빈델은 눈앞의 일렁이는 불빛에 어느새 도착했단 사실을 깨닫고 까득- 이를 악물고 처진 다리를 힘차게 옮겼다.
“아아…”
“흐윽, 제발, 제발…”
빈델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앙상한쪽 팔을 휘적이며 구걸하는 걸인들을 피하며 앞으로 나아갔지만 한걸음 한걸음 걸인과 인파를 지나칠 때마다 오싹한 불안감을 느끼곤 천천히 걸음을 늦췄다.
‘뭔가, 이상해…’
피어오르는 불안감과 정체 모를 긴장감이 지친 빈델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지만 여기서 멈추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한걸음 내디딘 빈델은 오늘따라 어두운 통로에 침을 꿀꺽 삼키고 그대로 나아갔다.
싸아-
평소라면 시정잡배와 양아치로 가득했을 통로가 한산했다. 힐끔힐끔-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통로를 오가는 주민들을 조심스레 훔쳐본 빈델은 괜히 자신에게 온 이목이 집중되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드워프의 가게를 향했다.
저벅- 저벅- 저벅-
걸으면 걸을수록 겹치는 발소리와 작은 눈을 찢어가며 흘겨보는 지하 주민들의 태도에 빈델은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 한 방울 한 방울을 선명히 느끼며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이제 와서 돌아갈순…’
자신을 흘겨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바닥을 보며 걷던 빈델은 쿵- 발끝에 부딪힌 모루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항상 모루위에 걸터앉아 있던 드워프가 없었지만 어깨를 짓누르는 무언가를 떨쳐 내고 싶던 빈델은 서둘러 모루 위에 주머니를 얹었다.
“하아아…!”
주머니를 내려놨음에도 여전히 어깨를 짓누르는 중압감에 짙은 한숨을 내쉰 빈델은 결리는 어깨를 돌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몇 번의 거래가 오갔지만 드워프가 이렇게 조용했던 적이 없었기에 빈델은 통로에서 느꼈던 불안감도 잊은 채 천천히 가게 문을 향해 걸어갔다.
“어디 있는 거야?”
이마에 맺힌 구슬 같은 땀을 손등으로 닦은 빈델은 흠뻑 젖어 갈라진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정리하며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문손잡이를 움켜쥐었다.
텁- 손바닥을 타고 흐르는 싸늘함에 문고리를 돌리자 철컥- 쇠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돌아갔다.
문이 열린 걸 확인한 빈델은 문이 열리는데 주인은 어디로 갔나- 라는 새로운 난제 앞에 눈을 굴리며 고민했지만 시간을 끌수록 위험해지는 건 자신이었기에 결국 벌컥- 문을 열고 쏜살같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뭐가 이렇게 어두워?”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불안 함에 안달 난 빈델은 괜히 혼잣말을 내뱉으며 천천히 가게 안을 둘러봤다. 가게라곤 지칭했지만 사실상 드워프의 집인 장소였기에 빈델은 괜한 물건을 부수지 않았으면 해 발끝을 세워 최대한 조심히 발을 옮겼다.
자박- 자박-
마치 도둑질하는 도둑처럼 발끝을 세워 걷던 빈델은 어둠 속에서 미약하게 보이는 랜턴을 발견하고 땀으로 데워진 품속에 손을 넣어 그대로 성냥곽을 꺼내 불을 켰다.
화악- 코끝을 스치는 탄내와 함께 손을 내밀던 빈델은 문득 텁텁한 공기를 느끼곤 한탄을 내뱉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아무도 없는데 왜 이렇게 숨 막히는건지…”
후욱-
책상에 놓인 랜턴에 불이 붙으면서 타닥이던 성냥이 훅- 꺼지고 말았다.
좁은 가게를 훤히 밝히는 불빛을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던 빈델은 힘이 풀릴 것만 같은 다리를 애써 움켜쥐며 자기도 모르게 저벅- 뒷걸음질 쳤다.
밝게 빛나는 랜턴 너머, 죽어 가는 시체를 보듯 싸늘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작의 눈빛으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