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락, 누운 침대 위에 몸을 굴린 백작 부인은 딱딱딱딱- 창문을 두드리는 부리 소리에 꾸욱, 침대를 누르고 일어났다. 끼익, 창문을 열자 분홍빛 새가 딱딱딱, 발목에 묶인 통을 쪼곤 머리를 부르르 털었다.
스윽, 손을 뻗어 통을 뜯은 백작 부인은 펼치자마자 눈에 보이는 익숙한 문장에 코웃음을 치며 편지를 읽고 팍- 구기며 중얼거렸다.
“하찮은 노예 출신이 점점 기어오르네…”
툭, 바닥을 구르는 편지에서 시선을 거둔 백작 부인은 검지로 새의 목을 살살 긁어줬다. 하지만 자신의 권위에 진흙 발을 내민 노예해방단에게 분노한 백작 부인은 결국 꾸득-! 새의 목을 부러뜨려 그대로 내던졌다.
사라락-
밤하늘에 흩날리는 꽃잎을 지켜보며 쿵, 창문을 닫은 백작 부인은 침대에 걸터앉아 고민하다 아- 탄식을 내뱉었다.
“카사노군한테 관심이 많아 보이던데… 한번 시험해볼까?”
떠오른 생각을 바로 행동으로 옮긴 백작 부인은 등불을 켜고 구석에 놓인 의자에 사뿐히 앉곤 편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편지의 내용은 해방 단장과 측근이 관심을 가지던 카사노가 몽환의 밀림, 그가 머무는 마을에 주민들이 노예와 관련된 것 같단 추측, 이라는 이름의 거짓이었다.
이런 내용이라면 휘슬 남작가에 잠입했다던 그 측근이 사실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찾아가겠지. 사락, 사락 편지를 곱게 접은 백작 부인은 편지 봉투에 편지를 밀어 넣고 능숙하게 촛농을 부어 꾸욱- 인장을 찍었다.
“메어리.”
“네, 주인님.”
스윽, 어둠에서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 메어리라 불린 메이드가 백작 부인 앞에 부복했다. 툭, 편지를 건네준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었고 메어리는 조용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흐음, 성욕은 충분한 것 같던데, 왜 그냥 돌아갔을까?”
스윽, 풍만하고 음탕한 자신의 몸을 주무른 백작 부인은 이를 갈며 떠난 카사노를 떠올리고 콧소리를 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자지를 빳빳이 세우고 여체를 탐하던 그 성욕이면 유혹에 넘어올 줄 알았는데- 이계인이란 정체를 들춰내자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갔었다.
‘그냥 평범한 남자 수준인 걸까?’
모시는 아가씨와 정령, 시에라와 관계를 나눴단 것만 귀로 들은 백작 부인은 카사노의 성욕을 제대로 인지 못 하고 이계인이란 사실에 분노하던 카사노의 심리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다른 이계인과 만난 적 없던 카사노와 다르게 백작 부인은 이 자리와 그전의 생활로 수많은 이계인과 만나고 대화도 나눴었다. 물론 그녀가 카사노의 정체를 알게 된 건 노예해방단의 도움이 컸었지만 그들의 힘도 자신의 힘이라 생각한 백작 부인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러고 보니 수도에 있는 중견용병단과 노예시장 습격을 계획한다고 했었나?’
백작 부인은 노예해방단의 행적을 떠올리며 탁, 탁- 책상을 두들겼다. 노예해방단을 맛있게 키우려 했지만 그들의 범죄행각은 점점 대담해지고 있었다.
황제가 노예제를 폐지한 후 불법으로 이루어지는 노예시장을 급습하고 전부 털어가는 노예해방단. 그들은 경제력까지 챙겨 이젠 아예 귀족들을 매수하는 수준까지 가버렸다.
귀족들의 재화로 엿먹이고 불법으로 풀린 돈을 챙겨 귀족들의 권위를 넘보기까지. 은인인 6황자가 처리한다면 그만큼 값진 공적이 되겠지만 그들은 점점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그 크기를 불려 나갔다.
‘조만간 정리해야겠네… 건방진 노예년…’
까득, 도도한 척 비싸게 구는 건방진 다크 엘프를 떠올린 백작 부인은 이를 갈며 분노를 갈무리했다. 모든 건 자신을 구해준 황자님을 위한 일이었다. 하아, 달콤한 한숨을 내뱉은 백작 부인은 문득 희중시계를 확인하고 살랑, 손가락을 휘저었다.
손가락 끝에서 피어오르는 작은 꽃, 비스타 꽃을 움켜쥔 그녀는 꾸욱, 꽃을 쥐어짜 투명한 시약병에 담아냈다.
퐁당! 시약병을 가득 채운 독을 챙긴 백작 부인은 가운을 걸치고 하루의 마무리를 위해 백작의 침실로 향했다.
‘카사노군, 기대할게요. 과제가 끝나고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면 이계인은 누릴 수 없는 최고의 권력을 넘볼 수 있게 해줄 테니까…’
자꾸만 떠오르는 사내의 얼굴을 머릿속에 그린 후 쿡쿡 웃은 백작 부인은 이름뿐인 남편을 위한 홍차에 또옥- 또옥- 비스타 꽃을 짜낸 즙을 떨어트리고 그대로 백작의 방으로 들어갔다.
**
“하아…”
백작부인과의 대화 이후 나는 결국 아침이 될 때까지 한숨도 자지 못했다.
이세계에 떨어졌다는 게 그렇게 큰 위험은 아니지만 내가 경계하는 건 백작부인이 그걸 어떻게 알았냐- 였기에 결국 해답을 찾지 못한 나는 밤새 머리를 굴리며 의미 없는 시간을 보냈다.
탈탈탈-
푹젖은 머리를 말리고 떠날 채비를 마친 나는 든든하게 챙긴 짐가방을 매고 허리에 검을 찼다.
페리샤와 운디네에게 인사하고 떠날까 했지만, 머릿속이 어지러운 지금 괜히 그녀들과 이야기하면 심란한 모습만 보여줄 거 같아 나는 체념하고 주문서를 꺼냈다.
부욱-!
파앗! 일렁이던 에릴다의 주문서와 다르게 내 신형이 단숨에 사라지는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 파악! 한순간에 풍경이 뒤바뀐 경험을 한 나는 사락, 발에 밟힌 잔디를 바라보며 주변을 둘러봤다.
“머, 멈추세요오오!!!”
사박, 잔디를 밟으며 푸른 숲과 거대한 고목이 잔뜩 자란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귀를 찣는 목소리에 어깨를 움츠리며 걸음을 멈췄다.
“거, 거기 남자! 멈추고 손을 드세요! 그래요! 그렇게!”
멈추고 손을 들라기에 순응하자 헤에- 미소 지은 여자가 도도도- 다가왔다. 몸집보다 큰 고깔모자를 푹 늘러쓴 은발의 여인은 운디네와 비슷한 몸집이었다. 슥, 내 앞에 선 여인은 끼익- 걸음을 멈추곤 꾸욱, 모자를 누르며 내게 물었다.
“여, 여기엔 무슨 일로 온 건가요! 인간이 올 수 없는 곳인데요!”
백작 부인의 전언대로 순순히 대답하려던 나는 어설프게 구는 여인의 태도에 씨익, 웃음을 삼키며 일부러 농담을 던졌다.
“정말요? 저, 저는 잘 몰라요. 그냥 약초나 캐려고 들어오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는데…”
“그런…! 하,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이야기인데… 어쩌지, 어떡하지?!”
내 연기에 화들짝 놀란 여인은 발을 동동 구르며 주변을 둘러봤다. 검은 단화가 잔디를 짓밟으며 통통 튀었지만 여인은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했는지 울먹이는 목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어머니이…!”
물기 어린 목소리와 함께 사락- 작은 눈송이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푸욱, 고깔모자를 짓누르는 하얀 장갑과 함께 나타난 여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어머니라 부른 여인을 꾸짖다가 나를 바라봤다.
“라엘라. 스스로 해결하라 보냈것만 나를 부르면… 응?”
끔벅, 끔벅- 차가운 목소리의 여인은 흰 목덜미를 살짝 덮는 흰색머리 단발을 흩날리며 내 눈을 가만히 바라봤다. 익숙한 외모와 도도한 고양이상의 얼굴에 나는 아, 한마디와 함께 그녀에게 인사했다.
“라우라… 님?”
“카사노 아닌가. 미네르바가 보낸 건가? 흠, 하지만 그녀에게 이야기를 들은 건 없는데.”
“아니요, 그- 백작 부인의 심부름으로 오게 됐습니다.”
백작 부인이란 호칭에 움찔- 은색 눈썹이 지푸려졌고 라우라의 쓰다듬을 받던 여인이 폴짝! 뛰어올랐다.
“그런! 백작 부인의 간악한 앞잡웁-!”
조잘조잘 떠드는 라엘라라는 여인의 입을 틀어막은 라우라는 하아, 서리어린 한숨을 내뱉곤 텁- 공중에 손을 뻗으며 내게 말했다.
“일단 손님인 만큼 마을로 모셔야겠지. 같이 가겠나?”
“영광입니다.”
스윽, 허리를 굽혀 인사하자 토닥토닥 하얀 장갑이 내 등을 두드렸다. 허리를 편 나는 화악- 얼어붙는 공기와 함께 드러난 순백의 문을 보며 감탄을 삼켰다.
“우우웁우웃후훗! 우부부붑!”
다만 내 감탄을 눈치챘는지 라우라에게 붙잡힌 여인은 허리를 펴고 어깨를 으쓱이며 입이 막힌 채로 오물오물 무어라 떠들었다. 기고만장한 태도를 보니 대단하죠?! 따위의 반응 같았기에 나는 무시하고 라우라를 바라봤다.
“여기가 입구인가요?”
“그렇다. 평소엔 마법으로 마을을 숨기고 있어서 말이지. 자, 열어주겠다.”
벌컥- 순백의 문이 열리고 달콤한 향기가 화악, 열린 문 너머로 넘쳐흘렀다. 매혹적인 향기에 코를 벌름인 나는 터벅터벅 문 안으로 들어서는 라우라의 뒤를 따라 문 너머로 건너갔다.
쿵!
문이 닫히고 사라졌지만 나는 벽돌로 이루어진 마녀들의 마을에 감탄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지구에서나 봤던 유럽 마을의 풍경- 을 떠올린 나는 몽글몽글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연기와 마을을 걸어 다니는 수많은 마녀에 눈을 빛내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렸다.
“음흉한 눈빛으붑!”
지이- 나를 바라보던 라엘라가 콧방귀와 함께 무어라 떠들었지만, 다시 라우라로 인해 틀어막혀 웁웁웁 소리를 내며 그녀의 품에 안겨있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미네르바와의 섹스를 보여줄 때 입었던 하얀 정장을 그대로 입고 있는 라우라에게 안부를 묻자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아주 희미한 미소와 함께 내게도 안부를 물었다.
“물론, 그대도 잘 지냈나? 생각도 못 한 방문에 깜짝 놀랐군.”
“하하, 하나도 안 놀라신 거 같은데요.”
“…놀라긴 했지. 그대가 알아차릴 수 없을 뿐.”
뭔가 지뢰를 밟았나? 싸늘해진 분위기와 함께 뻐억- 라우라에게 붙잡혀있던 라엘라가 내 다리를 걷어찼다. 처음엔 귀여웠지만, 점점 애새끼처럼 구는 행동에 발끈한 나는 꾸욱- 내민 발을 짓밟고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끼야아아악!”
“하하!”
“…너무 괴롭히지 말도록. 어리숙한 딸이니 이해바라지.”
“딸요?”
내 질문에 좀 더 차가워진 얼굴로 나를 바라본 라우라는 침묵을 유지하다 덤덤히 대답했다.
“딸 같은 아이지. 아끼는 아이야.”
터벅터벅-
투덜거리는 라엘라와 조용히 걷는 라우라의 뒤를 따른 나는 댕- 댕- 댕- 커다란 종탑을 올려다보며 감탄했다. 종탑을 울리는 마녀와 하늘을 빼곡히 채워 날아다니는 수많은 마녀. 축제 같은 풍경에 감탄하자 라우라가 덤덤히 말했다.
“또 한명 임신한 모양이군. 그대덕이야.”
“아, 지금 저게 임신한 분이 나와서 그런 건가요?”
끄덕- 라우라는 고개를 주억거리고 스윽, 종탑을 등진 채 희미한 미소로 손을 내게 내밀곤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녀들의 마을 위치 크래프트에 온 걸 환영하네. 백작 부인의 손님이라면 돌려보냈겠지만, 그대는 우리의 은인, 오늘 밤 황홀한 추억을 대접하지.”
푸른 하늘을 가득 채운 마녀들과 지상의 마녀들이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흥얼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생명의 축복에 기뻐하는 마녀들과 나를 환영해주는 라우라에게 감사를 느낀 나는 쪽- 라우라의 손을 잡고 손등에 키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