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페리샤?”
백작 부인의 방에서 나온 나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페리샤의 방에 도착했다. 인기척이 느껴져 노크와 함께 페리샤의 이름을 불렀지만, 방 안에 있는 누군가는 저벅, 저벅- 제자리를 맴돌 뿐 문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페리…”
[와악!]
벌컥, 문을 열고 달려든 운디네는 껌딱지처럼 포옥, 내 얼굴을 끌어안고 매달렸다. 아무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말캉한 배에 얼굴을 문지르니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번엔 빨리 돌아오셨네요?”
또각또각 구두소리와 함께 다가온 페리샤가 꾸욱, 내 팔에 매달리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늘어지는 페리샤의 무게와 말캉이는 젖가슴이 팔뚝에 닿을 때마다 자극이 된 나는 꾸욱, 드레스째로 두툼한 엉덩이를 움켜쥐며 말했다.
“금방 해결됐네요. 방으로 들어가요.”
“네에에…”
흐응, 야릇한 비음과 함께 좀 더 가슴을 붙인 페리샤는 내 팔을 이끌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꾸욱, 얼굴에 매달린 운디네의 포옹이 강해진 걸 느낀 나는 붕붕, 머리를 미친 듯이 흔들며 운디네를 괴롭혔다.
[우워, 우워, 우워~!]
오뚝이처럼 붕붕 흔들린 운디네는 귀여운 비명과 함께 꺄르륵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스윽, 팔다리를 놓고 하늘로 떠오른 운디네는 빙글빙글 하늘을 날며 내게 말했다.
[다음에 또 해줘! 재밌다!]
씨익 웃으며 다가오는 운디네의 볼을 움켜쥔 나는 지익, 볼을 잡아당기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짤짤짤- 위아래로 흔들며 운디네의 귀여운 표정을 감상하고 있을 무렵, 우웅- 우웅- 목에 건 목걸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응?”
찰그락, 목걸이를 옷 밖으로 끄집어내고 붉게 빛나는 보석을 쓰다듬으며 마나를 일으키자 훅, 훅-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들리나요오-]
늘어지는 미네르바의 목소리에 싱긋 웃었지만 이내 들려오는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에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수상한 사람을 붙잡았는데요, 주인님을 계속 찾네요?]
“누가요? 아니, 일단 그쪽으로 가야하나?”
이제 막 도착했는데 다시 히네라 마을로 갈 생각을 하니 골치가 좀 아파졌다. 하지만 여인들이 있는 마을에 대놓고 침입자가 들이닥쳤다는 사실을 듣고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웬만하면 오지 말라 하고 싶지만, 주인님이 아니면 입 열 생각도 없어 보이고 간단하게 괴롭혀도 쉽게 입을 열지 않아서요오… 꽤 익숙해 보이네요?]
“알았어요, 일단 그쪽으로 가죠.”
[마을로 가게? 나도 같이 갈까?]
순간 고개를 끄덕일뻔했지만 바라보는 페리샤와 운디네를 그녀 옆에 붙여뒀던 이유를 떠올린 나는 고개를 저으며 운디네에게 설명했다.
“아니, 평소처럼 페리샤를 지켜줘, 그리고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응, 해결할 수 없다면 카사노를 찾아갈 것. 기억하고 있다구!]
텅, 텅- 가슴팍을 두드리며 자랑스럽게 대답하는 운디네의 머리를 쓰다듬은 나는 힐끗힐끗 쳐다보는 페리샤의 이마에 쪽- 키스했다.
“잠시 다녀올게요.”
“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순박한 페리샤의 미소를 바라보며 품에서 공간이동 주문서를 꺼낸 나는 그대로 부욱, 주문서를 찢고 일렁이는 시야 너머 나를 응시하는 페리샤를 지켜봤고 이내 공간이 일렁이며 화악- 커다란 빛무리에 나는 잡아먹혔다.
텁, 흐릿한 시야 너머 발을 뻗자 주변 주민들이 갑자기 생겨난 나를 바라보며 웅성거렸다. 개중에 몇몇 익숙한 안면이 있어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인사를 받아준 주민들이 뭉친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 이야기하더니 그대로 흩어졌다.
터벅- 터벅-
광장을 가로질러 새로 생겨난 수많은 건물을 지나치자 츠루카의 자택이 금방 눈에 띄었다.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고 쿵쿵쿵 계단을 오르자 이층에 있던 인기척들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드르륵!
“서방님! 오셨군요!”
“어서와요오.”
“…”
포옥, 내 품에 안겨드는 금빛 머리칼의 츠루카를 쓰다듬어준 나는 묶여있는 한 여인을 에워싼 미네르바와 에릴다를 바라봤다. 꾸벅 인사하는 그녀에게 손을 흔든 나는 고개 숙인 여인에게 한 걸음 다가간 순간 익숙한 분위기와 익숙한 머리칼에 침을 꿀꺽 삼켰다.
꽈아악- 그녀의 입에 묶인 매듭이 강하게 조이고 힘 풀린 두 눈동자에 증오가 깃들었다. 다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에 당황한 나는 스윽, 걱정하는 츠루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매듭을 풀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카트라.”
“퉤엣!”
“꺄악!”
이름이 불리자 오물거린 입술이 걸쭉한 침을 뱉어냈다. 대답할 줄 알고 아무 준비도 안 했기에 그대로 침을 얻어맞은 나는 놀란 츠루카가 건네준 손수건으로 침을 닦으며 카트라에게 말했다.
“인사가 거칠군요.”
“…당신, 백작부인과의 관계가 어떻게 됩니까?”
오랜만에 듣는 카트라의 정갈한 말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씨익 미소 짓는 입꼬리에 카트라는 눈썹을 찌푸리더니 흉흉한 눈빛으로 노려봤고 어깨를 으쓱인 나는 순순히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뱉어줬다.
“별 관계도 아니죠, 당신도 알 거 아닙니까. 페리샤 아가씨를 위해 백작 부인의 개노릇을 하고 있다는 거.”
“…그렇죠. 알고 있었군요?”
운디네를 볼 수 있다는 메이드를 떠올린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 부인의 메이드는 전부 면포와 정해진 메이드 복을 입고 행동했기에 구분하기 힘들었지만 한번 운디네를 목격했다는 특이점이 생기니 구분하기 쉬웠다.
“페리샤가 걱정돼서 지켜보던 주제에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합니까?”
“그럼 저를 여기 끌어들인 목적은 뭡니까?”
내 대답을 깔끔하게 무시한 카트라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다른 질문을 내뱉었다. 붙잡힌 주제에 제멋대로 질문하는 카트라의 꼴이 우스워 나는 잠깐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제가 벌인 일도 아니고, 카트라 당신을 어떻게 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백작 부인의 꾀에 넘어간 거 같은데요.”
“……”
꾸욱, 입술을 깨문 카트라는 결국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가 도끼눈을 뜨며 내게 말했다.
“백작 부인이 이 마을에서 노예 매매가 이뤄지는 거 같다며 단장에게 밀고를 해왔어요. 이후 저는 단장의 명령으로 마을에 잠입해 그 흔적을 수집해오기로 했고…”
“이렇게 붙잡혔군요.”
까득, 이를 간 카트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끝까지 나를 노려봤다. 익숙한 눈매에 남작의 명령으로 지하 수로에 간 날을 어렴풋이 떠오른 나는 입술을 핥으며 카트라에게 질문했다.
“지하수로에서 지나친 여성은 역시 당신이었군요, 그러면 같이 있던 그 음탕한 여자가 혹시?”
“자길 구해준 은인에게 음탕한 여자라니, 당신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닙니까?”
딱히 구해진 적이 없는 거 같은데. 어깨를 으쓱인 나는 대답을 회피했고 크읏, 침음을 삼킨 카트라는 순순히 자신들의 정체를 다시 한번 내게 상기시켜줬다.
“…저는 노예해방단의 중견 단원입니다. 단장의 명령으로 불법 노예들을 풀어주고 해방단에 후원하는 백작 부인의 시종 노릇을 했죠. 휘슬 남작가에 잠입한 것도 같은 이유였습니다.”
순순히 과거를 이야기하는 카트라에게 나는 저택에 남아있을 페리샤를 떠올리며 말했다.
“페리샤도 속인 겁니까?”
“…그렇다고 대답하겠지만, 아가씨에 대한 감정은 진심이었습니다.”
“페리샤가 보고 싶어 하던데요.”
“영민한 아가씨이니 제 정체나 제가 뭘 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겠지요. 육욕에 미친 당신이 아가씨를 더럽혔지만…”
“상호합의하에 가진 관계인데…”
“흥.”
농담을 내던지며 대화의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지자 카트라의 표정도 편해졌다. 벼려진 칼처럼 날을 세우던 카트라는 조금 눈빛을 가라앉히고 담담하게 대답하며 대화를 이어 나갔고 이내 백작 부인의 수작질에 당한 걸 확신했는지 힐끔, 내 여인들을 바라보며 둘이서 대화하고 싶다는 눈짓을 보냈다.
“츠루카? 미네르바, 에릴다.”
꾸욱, 품에 안긴 츠루카를 쓰다듬으며 다른 여인들의 이름을 부르자 끄덕인 여인들이 조용히 방에서 나갔다. 에릴다와 미네르바는 걱정이 됐는지 계속 나를 힐끔대며 바라봤고 츠루카는 문지방 너머에 서서 꼬리를 세차게 흔들기 바빴다.
“괜찮아요.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탁, 미닫이문이 닫히고 힐끔, 정보를 요구하는 카트라의 눈빛에 나는 순순히 그녀에게 설명했다.
“백작 부인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여기 주민들은 태생이 수인족입니다. 지금에야 마을을 개방하고 인간 용병들이나 모험가, 다양한 사람들이 정착하고 있지만요.”
점점 넓어지는 마을, 늘어나는 인간에 혼란도 많고, 이야기도 많았지만, 가끔 전해 듣는 이야기론 츠루카와 하루나가 주민들을 잘 휘어잡고 인간들도 잘 다독이는 모양이었다. 자랑스러운 어투로 이야기하자 카트라는 확실히, 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예 출신의 주민 같아 보이지 않았고 츠루카라 불린 여인도 당신을 굳게 따랐죠. 그건 확실히 이해했습니다.”
“여기서 머리나 식히고 있어요. 백작 부인에게 찾아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고 올 테니.”
화난 낯짝으로 씩씩거리더니 뒤로는 이런 일을 꾸며? 능구렁이 같은 여자인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런 짓은 쉽게 용납 못 하기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갈무리한 나는 포박된 카트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제가 이대로 벗어나지 못하면 단장이 저를 찾을 겁니다.”
“그건 그거고, 마을에 침입한 대가는 치러야 할 거 아닙니까. 침입자가 뭐 이리 뻔뻔해요?”
“크윽…”
찌릿, 나를 노려보는 카트라의 눈빛에 미소 지으며 몸을 돌리는 순간 우웅, 주변 공간이 일렁이며 퐁퐁퐁- 물방울이 생겨났다. 운디네가 등장하는 전조에 표정을 굳힌 나는 스윽, 품에 손을 넣고 주문서를 꺼냈지만, 호르미아로 향하는 주문서가 동난 걸 보고 머리를 감쌌다.
[카사노! 큰일이야… 이상한 기사들이 나타나서 언니를 꽁꽁 묶기 시작했어!]
흐물흐물, 형태가 일그러진 운디네가 다급하게 외쳤다. 운디네의 마나가 텅 빈걸 확인한 나는 홰액,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고 미닫이문을 거칠게 열며 일 층으로 내려갔다.
쿵쿵쿵!
내 거친 발걸음에 모여있던 여인들이 문을 열고 나를 바라봤다. 츠루카, 에루카, 하루나, 레이첼. 에릴다가 없는 걸 확인한 나는 하루나에게 손을 내밀며 큰 소리로 외쳤다.
“하루나님, 제가 줬던 주문서를!”
“음.”
홱, 품에 손을 넣은 하루나가 재빨리 두루마리를 내게 던졌다. 기사들에게 거칠게 반항했는지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운디네가 보기 안쓰러웠던 나는 스윽,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잠시 쉬고 있어. 가서 일이 해결되면 부를 테니까.”
[아니, 가서 언니 구하는 거 도와야지. 언니들! 나중에 봐!]
꾸욱, 앙증맞은 손을 움켜쥐며 열의를 불태우는 운디네의 대답에 나는 웃으면서 주문서를 찢었다. 일렁이는 시야와 붕 뜨는 공허감, 찰나의 순간 화악! 풍경이 뒤바뀌고 익숙한 저택 앞 다리가 나를 반기고 있었다.
처억, 처억-!
창을 뽑아 든 경비병들이 나를 발견하고 정문을 막아 세웠다. 나를 보자마자 취하는 자세에 그대로 자극받은 나는 꾸욱, 손바닥을 손톱으로 짓이기며 분노를 원동력 삼아 그대로 그들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