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라와 만나기 전, 그녀를 넘어뜨리기 위해 세운 작전을 실행하려면 준비가 필요했다. 먼저 미네르바에게 연락한 나는 마나를 불어넣은 목걸이를 바라보며 미네르바의 응답을 기다렸다.
[네에…]
나른한 목소리, 잠시 쉬고 있었는지 흐아암- 늘어지는 한숨을 내뱉은 미네르바는 다시 한번 대답했다.
[네에에… 무슨 일이죠오…]
“아 미네르바, 다름이 아니라 마을에 있는 감시를 따로 살펴볼 수 있는 사역마나 도구같은건 없나요?”
[으음, 지금 당장은 없지만 만들려면 만들 수 있답니다. 그런데 그런 건 갑자기 왜…]
“아가씨를 위한 선물을 풀어놓으려고요. 그래도 불안하니 감시는 해야 하잖아요?”
[하아, 뭐 주인님 마음대로 하세요…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아니죠오?]
“네, 여유 있게 준비해주세요. 어차피 당분간 계속 붙어있을 생각이니까.”
[…혼난 게 며칠 전인데 또 늘려서 한소리 들으려고요오?]
늘어지는 목소리에 감정이 담긴 순간 약간 쫄렸지만 도리어 당당하게 나가기로 했다.
“그만큼 보충하면 되잖아?”
[…마음대로 하세요오. 나는 몰라.]
웅, 목걸이가 짧게 울리고 그대로 마나가 끊어졌다. 준비를 마친 나는 곧바로 외딴방에 갇힌 메이드를 만나러 발걸음을 옮겼다.
***
“마을을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된다 그 말씀이십니까.”
“정확히는 페리샤 곁에서죠.”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창가에 꼿꼿이 서 있던 카트라의 어깨가 살짝 떨려왔다. 알 수 없는 호의에 겁먹은 그녀에게 나는 거리를 좁혀 그녀의 머리 향기를 맡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다른 사람들에겐 말해뒀습니다. 페리샤한테는 비밀로 했지만… 알게 되면 분명히 기뻐하겠죠.”
“그렇지만, 저는 인질로 잡힌 몸 아닙니까?”
물론 그랬다. 미네르바도 넌지시 넘어간 사실이지만 카트라의 신분은 엄연히 포로, 하지만 그렇다해서 노예해방단과 죽일 듯이 척질 것도 아니고 황자에게 곧바로 넘길 것도 아니지만 그걸 또 그대로 카트라에게 이야기하면 그녀가 어떤 행동을 벌일지 몰랐다.
“가까이에서 하는 감시라고 생각하세요.”
내 큰 목적은 카트라를 꼬드겨 페리샤의 곁에 남게 하고 그녀의 정보도 빼내는 것, 그걸 행동양식으로 삼기로 한 나는 끼익, 경첩 소리 나는 문을 젖혀 열고 그 너머를 가리켰다.
“페리샤와 못다 한 이야기라도 나누시죠.”
“…호의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의아한 눈의 카트라는 결국 성큼성큼 걸어 자신을 가뒀던 방에서 빠져나왔다. 넓은 복도에 나서 주변을 휘휘 둘러본 카트라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고 곧 안내하란 눈빛임을 눈치챈 나는 그녀를 이끌고 페리샤의 방으로 찾았다.
-똑똑똑
[네에-!]
타다닥, 노크 소리에 의심 없이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리고 덜컥, 곧바로 문이 열렸다. 단추도 제대로 잠그지 않고 걸치듯이 입은 잠옷, 호위 기사인 소니아는 어디 간 모양인지 페리샤가 홀로 걸친듯했다.
“잠옷이라도 그렇게 입으시면 감기에 걸리고 맙니다.”
기억 속의 페리샤와 달라진 게 없다고 생각한 걸까? 조금 젖어 든 목소리로 페리샤를 껴안은 카트라는 톡, 톡, 손끝을 움직여 단추를 잠그고 구깃구깃한 잠옷을 손으로 펴며 페리샤에게 핀잔을 줬다.
“카트라아…”
힐끔 나를 바라본 페리샤는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에 곧바로 카트라를 와락 껴안고 그녀의 목덜미에 머리를 문질렀다. 아이처럼 반기는 모습에 피식 웃은 나는 옛 주인과 메이드의 해후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방으로 물러났다.
슬쩍 뒤돌아 바라본 카트라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여러 입장에 놓여 머리를 굴리던 카트라가 아닌 순수한 미소를 지은 한 명의 여인. 그런 그녀를 이용하는 게 크게 내키진 않지만 넓게 보면 그녀도 득이 되기에- 내일을 위해 나는 조용히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평화로운 마을 분위기를 피부로 느끼며 거리로 나선 나는 시에라의 꽁무니를 쫓는 페리샤와 그런 그녀 옆을 지키는 카트라를 발견했다.
“후후…”
사각사각, 손에 쥔 노트에 시에라가 해주는 말을 받아적는 페리샤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카트라, 그 눈빛 끝에 미약한 고민이 담겨있긴 했지만 적어도 내 눈엔 카트라가 행복해 보였다.
“카트라, 잠시 언니랑 상회에 다녀올게.”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다른 도시에 보내는 교역품과 물자를 보여주기 위해 상회로 향하는 시에라와 페리샤, 카트라의 처지를 아는 시에라가 카트라를 바라보며 페리샤에게 눈치를 줬기에 그녀를 잠시 놔두고 둘이서 상회로 향했다.
“후우…”
상회 입구 근처에 선 카트라서 처마 아래에 숨어 햇빛을 피했다. 조금 지쳤는지 한숨을 내뱉으며 지나가는 수인족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곧바로 성큼성큼 카트라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웃.”
움찔, 죄지은 아이처럼 귀엽게 놀란 카트라가 나를 흘겨봤다.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 떨떠름한 눈빛에 나는 곧바로 거리를 접혀 잘록한 카트라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윽!”
툭, 허리를 꿀렁이며 내 손길을 피한 카트라가 놀란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기겁하는 반응에 조금 상처받았지만 다시 한번 달라붙은 나는 작은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며 조용히 속삭였다.
“페리샤를 기다리나요?”
“…그렇습니다. 그것보다 놔주시지 않겠습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좋아서 그러는데.”
“…제가 좋지 않습니다. 떨어져 주세요.”
툭, 힘없이 내 손을 쳐낸 카트라가 가슴께를 손으로 덮고 나를 노려봤다. 경계하는 눈빛에도 나는 끝없이 카트라에게 달라붙어 그녀의 눈을 바라보거나 손을 잡는 둥 끝없이 치근거렸고 참다못해 터진 카트라가 날선 목소리로 내게 소리쳤다.
“적당히 하십시오. 더럽혀져도 참아내겠다 했지만, 아가씨가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데 저를 욕보이려는 겁니까.”
아가씨와 사랑하는 사이 아니냐, 는 고리타분한 잔소리. 카트라의 의중을 파악한 나는 코웃음과 함께 거리를 좁혀 코가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하고 카트라에게 속삭였다.
“카트라씨가 너무 아름다워서 참기 힘든걸 어떡합니까?”
“듣기 싫은 농담입니다.”
“매력적인 여성에게 다가가는 게 죄악은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사락, 미처 넘기지 못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톡, 그녀의 귀를 매만졌다. 조금 달아오른 귀에 손길이 닿자 귀 끝이 빨갛게 물들고 카트라의 볼이 조금 빨갛게 물들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적의가 가득했다.
“아, 아가씨가 볼지도 모릅니다. 떨어져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더 억지로 다가갔다간 완전히 터지겠네. 카트라의 한계점을 파악한 나는 곧바로 거리를 벌렸고 상회 문 너머 터벅거리는 걸음 소리를 듣고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흠…”
대놓고 찝적거렸는데 반응이 생각보다 괜찮았다. 허리에 손댔을 때만 기겁하고 벌레 보듯 바라볼 뿐, 머리를 만지거나 어깨에 손을 얹을 땐 별말 없는 걸 보니 천천히 다가가면 될듯했다. 노선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후퇴한 나는 이후 마을에 머물며 카트라와 만날 때마다 오늘 있었던 일을 반복했다.
시에라와 페리샤가 수인족들이 들고 온 물건을 거래하는 걸 구경하러 갔을 때 홀로 남은 카트라에게 다가갔다.
“후우, 너무 친근하게 다가오지 마십시오.”
이른 아침, 혼자 씻어보겠다며 끙끙거리는 페리샤를 불안해하며 문밖에서 기다리는 카트라에게 다가가자-
“곧 있으면 아가씨가 나오십니다.”
너무 차갑게 반응하는 거 아니냐며 슬쩍 어깨에 손을 얹자 홱, 가볍게 고개 돌린 카트라가 내 눈을 바라봤다.
“……”
종국엔 무시까지. 일단 카트라에게 알짱거리는 건 끝맺기로 한 나는 페리샤의 방 근처에서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다. 늦은 밤이 되자 끼익, 페리샤를 재우고 방에서 나온 카트라는 총총걸음으로 복도 외진 곳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고 텅, 힘없이 닫기는 순간 나는 카트라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누구십니까?]
“누굴까요?”
끼익, 곧바로 열린 문 틈새로 빼꼼히 고개를 내민 카트라가 불퉁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왱왱거리는 날파리처럼 자기를 귀찮게 하는 게 짜증 났는지 적나라한 얼굴로 맞이한 카트라는 결국 한숨과 함께 나를 방안으로 초대했다.
“들어오시죠.”
쿵, 가볍게 닫힌 문에 등을 기댄 카트라는 방 한가운데 선 나를 바라보며 날선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일로 오셨습니까. 또 시답잖은 이야기면…”
“그냥, 여러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어서요. 혼자 적적하기도 하고 카트라 씨 이야기도 듣고 싶어서요. 안됩니까?”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카트라의 눈을 바라봤다. 예상보다 진지한 대답에 당황했는지 빙글, 빙글, 좌우를 살피며 대답을 고른 카트라는 결국 힘없이 대답을 내뱉었다.
“…안될 건… 없습니다.”
“잘됐네요. 제 이야기도 하고 카트라 씨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꼭 듣고 싶었거든요.”
“좋은 추억은 없습니다. 남에게 이야기할만한 것도 없고요.”
“그래도 괜찮아요. 이야기를 듣는 게 중요하니까.”
“…제 이야기가 그렇게 필요합니까?”
끈질기게 요구해서 그럴까? 카트라는 불편하단 얼굴로 까칠하게 말했지만 원했던 대답을 들은 만큼 나는 준비했던 대답을 뱉으며 성큼, 카트라에게 다가갔다.
“관심 있는 사람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게 이상한 건 아니잖아요.”
“관심, 말입니까.”
쫑긋, 쫑긋, 카트라의 귀가 살짝 떨렸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과 갈 곳 잃은 눈을 응시한 나는 턱, 문을 등진 카트라의 몸을 에워싸고 조용히 속삭였다.
“안될까요?”
“좋습… 니다.”
꿀꺽, 목울대를 꿀렁이며 고인 침을 삼킨 카트라는 후우, 솜사탕 같은 숨결을 내뱉으며 나를 올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