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컷 노예들의 주인이 됐다-305화 (305/395)

첫날밤, 카트라는 창문 너머로 비치는 달빛을 얻어맞으며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거겠지. 처음 찾아오고 한 번도 안 온 적은 없었으니까…’

대외적으로 히네라 마을의 족장이란 신분을 가진 남자였다. 거기다 황자의 돈을 받아먹는다 하지 않았나? 황자의 부하로서 임무를 받고 어딘가로 떠난 걸 수도 있었다.

‘그래도, 한마디 말쯤은 해줄 수 있었을 텐데.’

시답잖은 이야기는 어깨를 붙잡고 늘어지게 내뱉으면서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어설픈 남자라며 홀로 중얼거린 카트라는 내일이면 찾아오겠지. 막연히 생각하며 억지로 잠들었다.

이틀째-

그 남자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그래, 정보를 빼내려고 찾아왔던 거겠지. 여러 이야기를 나누면서 거두었던 의심을 다시 꺼내들은 카트라는 까득, 이를 갈며 카사노를 욕했다.

“친근한 척 굴어대며 외모, 행동을 칭찬하고 내 마음을 뒤흔들고 이런저런 이야기 하며 말 붙인 것도 전부 정보를 위해서.”

모든 게 허황된 거짓말이었구나. 달콤한 거짓말에 속아버린 거야, 듣기 좋은 말이라고 깜빡 넘어간 내가 미련한 거지- 홀로 속삭인 카트라는 창밖 너머 변함없는 은빛 달을 바라보며 카사노에 대한 증오를 조용히 불태웠다.

그렇게 사흘째. 카트라는 아예 불퉁한 얼굴로 아가씨의 뒤를 뒤따랐다.

“카트라…?”

“네, 아가씨.”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나 차가운 목소리, 내가 왜 이렇지? 조금 놀란 카트라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지만 조금 상처 입은 듯한 미소의 아가씨가 손을 거두며 말했다.

“오늘 조금 무서워…”

마치 베일뻔했다는 듯, 손을 거두며 두려워하는 아가씨의 모습에 카트라는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수없는 잠입 활동 중 유일하게 온기를 느끼게 해준 아가씨에게까지 폐를 끼치다니. 뒤늦게 정신을 붙잡고 옅은 미소를 띤 카트라였지만 이미 상처받은 페리샤는 조용히 거리를 벌렸다.

“뭐, 뭔가 힘든 게 있나 보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시에라 언니한테 가봐야 해- 묻지도 않았는데 홀로 덧붙여 말한 아가씨가 이미 저 멀리 뛰어갔다. 상처 입은 아가씨의 뒷모습에 자기혐오에 빠진 카트라는 까득, 이를 갈며 홀로 생각했다.

‘나는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

‘이렇게 처량하게 남아있는 바엔, 차라리…’

‘아니, 내가 나갈 수 있긴 할까? 나를 붙잡은 마녀가 뻔히 지켜보고 있는데도?’

마을에 나설 때마다 느껴지는 시선, 마녀의 사역마가 자길 관찰한다는 것쯤은 진작 눈치챈 카트라는 홀로 마을을 정처 없이 떠돌았다. 이리저리 골목을 돌며 카사노의 여인들과 스치듯이 지나가는 자신.

“아.”

그러다 옛 고용주, 스텔지아를 발견했지만, 카트라는 얼굴을 굳히며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자신을 저버리고 여인들과 뒹굴고 있을 카사노를 멋대로 상상하니 속이 뒤틀린 탓이었다.

카사노의 흔적이 가득한 마을을 가로지른 카트라는 조용히 자신의 방에 돌아와 쿵, 문을 닫고 힘없이 침대에 몸을 던졌다.

-풀썩!

‘도망치기만 한다면 렐님이…’

‘아니, 해방단에 간다고 해도…’

‘해방단이 카사노처럼 나를 버릴 수도 있는 거잖아, 아니-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라 이미 버렸을 수도 있어. 그래…’

울컥, 카트라는 결국 한참 동안 외면한 감정에 맞닥뜨리며 젖은 목소리로 홀로 중얼거렸다.

“나는 또다시 혼자인 걸까…”

-덜컥!

미처 잠그지 못한 문이 열렸다. 늦은 밤 찾아온 불청객을 맞이하기 위해 튀어 오르듯이 일어난 카트라는 턱, 열리던 문을 붙잡아 막고 살짝 열린 틈새 너머를 바라봤다.

“핫…!”

그곳엔 카사노가 서 있었다. 다만 굳게 서 있는 것과 달리 여기저기 온몸이 베여 미약한 상처가 많았고 갈려 나간 것처럼 너덜너덜한 옷가지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읏…”

할 말이 많았는데, 화낼 게 많았는데- 문 너머 능청스러운 검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카트라의 입이 쉽게 벌어지지 않았다.

“아…”

“미안해요.”

카사노는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쫑긋거리는 카트라를 보고 눈썹을 찌푸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단 감정을 담은 옅은 미소, 그 모습을 보며 흠칫 놀란 카트라는 뒤이어 들린 목소리를 듣고 벌컥, 문을 열었다.

-쿵!

후우, 한숨을 나지막히 내뱉으며 문에 기댄 카사노는 자신을 노려보는 카트라의 눈빛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솔직히 이야기할게요. 황자님의 명령으로 잠시 임무를 다녀왔어요.”

“그게 저랑 무슨 상관입니까.”

그렇게 나오나- 귀엽게 구는 카트라의 대꾸에 피식 웃어버린 카사노는 다시 굳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톡, 자기 입을 때리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성국경계 근처에 있던 노예시장이었는데- 당신 말대로 상처 입은 노예들이 많더라고요. 황자님의 이름을 대 그들에게 자유민의 신분을 줬어요. 이전과 똑같은 삶은 아니겠지만- 각자의 삶을 되찾을 순 있겠죠.”

각자의 삶- 가슴을 울리는 문장에 카트라의 눈에 생기가 깃들었다. 유도한 반응이 나온 걸 눈치챈 카사노는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생각했던 말들을 그대로 그녀에게 전했다.

“노예해방단이 하는 일이 제국의 법도로 나눈다면 분명히 어긋난 행동이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올바르다고 저는 생각해요.”

‘상처받지 않게 돌려 말해주는구나,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됐다고.’

자길 생각하는 카사노의 화법과 마음씨에 며칠 동안 얼어붙은 카트라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지만, 그녀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덥썩 물어 대답했다가 너무 쉬워 보일 거 같기도 하고, 또 여태 마음 앓이를 한 게 괘씸해 능글맞은 얼굴을 보기 싫은 게 그 이유였다.

그때 듣기 싫은 목소리가 툭, 자신을 두드리더니 바스락, 뒤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며 조용히 말했다.

“이거.”

“흣…”

보기 좋게 엮어진 꽃다발, 싱싱한 잎사귀와 줄기, 그 끝을 장식한 푸른 꽃잎이 창가에 비친 달빛을 머금고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흐윽…”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말 지어내기라도 한듯한 카사노의 행동에 카트라는 눈물을 흘리며 흔들리는 꽃다발을 받아들였다.

“아는 사람이 아는 꽃이라고 해서요. 선물로라도 주고 싶어서…”

“히긋, 흐윽, 흐읏, 흐으으…”

훌쩍, 훌쩍, 눈치 없이 흐르는 콧물을 닦고 눈물을 억눌렀지만 한번 터진 감정은 쉽게 정리하지 못했다. 카트라는 추레하게 울어대는 자신이 한심하다 생각했지만, 눈앞의 남자는 생각이 달랐는지 꾸욱, 작은 어깨를 끌어안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정말 미안해요. 그만 뚝 그치고 고개 들어봐요. 저랑 이야기 안 할 거예요? 응?”

스윽, 등을 쓰다듬는 따스한 손길, 꽈악,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실린 듯한 착각을 느낄 정도로 섬세한 포옹에 갇힌 카트라는 꽃다발을 꽉 끌어안으며 어깨를 들썩이다 얼굴을 들었다.

-쪼옥

‘아…’

키스, 해버렸네.

아가씨… 죄송해요…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쪼옥, 자기보다 작은 입술에 열중하는 카사노의 얼굴을 관찰한 카트라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그의 입술을 느꼈다.

침에 젖어 축축하고 뜨거운 혀가 쑤욱, 입안에 밀려들어 와 볼을 핥고 톡, 톡, 앞니를 두드리며 야릇하게 핥아 올렸다. 발끝이 절로 서 파르르, 까치발로 키스를 나눈 카트라는 툭, 꽃다발을 힘없이 떨어트리고 카사노의 넓은 등을 꽈악 끌어안으며 그와 마음을 나눴다.

-그렇게 다시 매일 밤, 카사노가 찾아오게 됐지만 하나 달라진 게 있다. 그건 사랑, 카트라는 자신을 아끼고 관심을 기울여주는 카사노에게 사랑을 느끼고 됐다.

“쭈웁, 쪼옥, 쪽, 쪽, 쪽, 츄웃, 쮸웁, 후읏♥”

하아, 뜨거운 한숨을 내뱉으며 톡, 검지로 늘어난 투명한 침줄기를 끊어낸 카트라는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카사노를 바라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누는 인사, 진한 키스를 마치면 온몸을 가득 채우는 충족감에 저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활기가 샘솟고 끝없는 사랑에 붕 뜬 카트라는 포옥, 카사노의 품에 안겨 그를 올려다봤다.

“기다렸어요?”

“아뇨, 후후, 아가씨가 잠들고 방금 들어왔습니다.”

냉철하고 언제나 무표정하던 메이드의 얼굴은 어느새 녹아내려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 미소에는 끈적한 애욕마저 엿보였다. 여자다운 완벽한 얼굴에 만족한 카사노는 쪽, 쪽, 그녀의 볼에 입 맞추며 카트라를 자극했고 진한 뽀뽀를 받아낼 때마다 카트라는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헤실헤실 카사노에게 안겨들었다.

언제나 차갑고 사무적으로 대했던 그 카트라가, 지금 내 품에 안겨 아양 떨며 사랑을 갈구하다니- 꼴리다 못해 폭력적인 갭에 꾸욱, 카트라의 말랑한 몸에 딱 붙어 그 살결을 즐긴 카사노는 마지막 단추를 위해 넌지시 카트라에게 물었다.

“오늘은 별일 없었죠?”

힐끔, 별일 없냐는 안부에 카트라의 눈이 꽃병에 꽂힌 작은 꽃 한 송이를 향했다가 되돌아왔다. 할 이야기가 있나 보네- 생각한 카사노는 달싹이는 입술을 보며 먼저 선수 쳤다.

“근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요?”

“후읏, 물론입니다. 궁금한 게 대체 뭘까요?”

기운 넘치다 못해 아예 활기가 느껴지는 밝은 목소리, 카트라는 자신의 목소리에 즐거워하며 되물었지만 이내 귓가에 속삭여진 예상치 못한 질문에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해방단은 아지트 같은 게 따로 있어요? 아니면 이곳저곳 옮겨 다니면서 활동하는 건가?”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호기심이라고 지어낸 듯한 목소리와 그렇지 못한 질문에 카트라는 파르르, 기다란 속눈썹을 떨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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