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근, 잘근, 침묵이 이어질수록 카트라의 이빨이 자기 입술을 짓이겼고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카사노가 화두를 던지며 다시 한번 그녀를 캐물었다.
“후우, 저번에 다친 거 기억해요?”
“네, 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 카트라는 꽈악, 카사노의 옷깃을 움켜쥐고 그의 입술을 바라봤다.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노심초사하던 그때 온몸의 피가 싸하게 식는 차가운 목소리가 쏟아졌다.
“어디서 들었는지 노예해방단이 찾아왔더군요. 지하수로에서 봤었던 단장은 없었지만, 당신 급은 돼 보이는 사람들이 노예들을 구출하고 제국 병사들과 저를 막으면서 노예시장을 습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리가, 아니- 가능은 했다. 카트라는 머릿속에 있는 시장들의 장소를 떠올리며 카사노가 말했던 성국경계 근처를 떠올리고 입술을 짓이겼다. 그곳은- 습격 장소로 포함돼있던 장소였다.
“그게, 그러니까. 아! 오늘 아가씨와 밀림에 소풍을 다녀왔답니다. 거기서 아가씨가 찾은 꽃이 있는데, 너무 아름다워 몇 송이 가져와 부인들께 나눠드렸습니다. 레이첼 마님도 그렇고, 또오…”
“카트라 씨.”
“네, 네…”
꾸욱, 눈앞이 뿌예졌다. 왜 차갑게 이야기하는 걸까, 품 안에 안겨있는데도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거리감에 슬퍼할 무렵 사락, 머리카락을 쓰다듬은 커다란 손이 뺨을 찹, 덮었다.
“사랑한다고 했었잖아요?”
“사라, 사랑합니다…!”
어눌한 사랑 고백, 감정이라면 뒤처지지 않는다는 듯 당차게 대답하는 카트라의 모습에 피식 웃은 카사노가 쪽, 그녀의 이마에 입 맞추고 조용히 속삭였다.
“저도 카트라 씨를 사랑해요, 너무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페리샤의 곁에 없어선 안 될 소중한 사람 중 한 명이란 걸 느껴요. 그리고 제 마음속에도 점점 깊숙이 들어오고 있고요.”
“카사노님…”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다니, 카사노의 고백에 뭉클해진 카트라는 입술을 달싹이며 똑같이 고백하려 했지만, 이윽고 내뱉어진 카사노의 목소리에 얼굴을 굳히며 움켜쥔 옷깃을 더욱 억세게 움켜쥐었다.
“그런데 카트라 씨는 절 별로 생각하지 않는 거 같아요. 그냥… 어쩔 수 없이 여기 머물고 있는 거죠.”
“그으, 그흑…”
아니라고, 그런게 아니라며 대답하려 했지만 카트라는 목, 아니 입 안이 물로 차오른 것 같은 무력감에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삼켰다. 그 모습에 흐름을 탄 카사노는 뺨에 얹은 손을 떼며 조용히 속삭였다.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버림말. 아니, 그냥 정보를 빼내려고 남아있는 건가?”
“애초에 여기에 온 것도 제 뒷조사 때문에 온 거잖아요.”
깨끗하지 않은 과거, 하지만 이렇게까지 말해야 하는 걸까? 쏘아붙이는 카사노바에 대한 야속함에 주륵, 눈물을 흘린 카트라는 그럼에도 대답하지 못하는 자신이 더 야속했다.
“왜, 왜 그렇게까지 말씀하십니까… 그냥 안아주세요, 어제처럼, 오늘처럼 키스해주십시오…”
투둑, 뚝, 투명한 눈물방울이 발치에 떨어져 찰랑, 흩어졌지만 카사노는 도리어 그런 카트라의 어깨를 움켜쥐고 시선을 맞추며 한 번 더 그녀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카트라, 저도 울고 싶어요. 나중에 이야기 마저 해요.”
울고 싶다며 지은 슬픈 미소, 카사노의 능글맞던 미소, 환한 미소만 기억하던 카트라는 그가 처음 지은 슬픈 미소에 크게 충격받고 떠나는 그를 붙잡지 못했고- 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방문이 굳게 닫히며 불어온 바람이 살랑- 그녀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카사노님, 카사노니임…”
떨리는 입술, 말려들어 가는 가느다란 손가락, 주륵,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턱 끝에 맺혀 툭, 툭, 떨어질 때마다 카트라의 머릿속은 미친 듯이 요동쳤다.
“나는, 나느은…”
흐윽, 헛숨을 들이키며 주륵, 다시 한번 눈물을 쏟아낸 카트라의 머릿속을 헤집던 생각들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상처 입고, 피가 흐르지만 한번 연결된 생각들은 서로를 깎아내리고 마음속에 스며들며 카트라를 더욱 어지럽게 했다.
나를 구해준 단장.
나를 사랑하는 카사노.
나를 사랑하는 페리샤.
내가 사랑하는 페리샤.
내가 사랑하는 카사노.
내가, 내가-
‘단장, 단장은 어디 계세요…? 제발, 제발, 구해줘요… 아니면, 차라리 저를-‘
텅 빈 검은 눈동자가 창밖을 향했다. 달밤을 유난히 좋아하던 그녀, 부단장에게 항상 고맙다고, 도와줘서 감사하다고. 왜, 그런 말을 해놓고 찾아오지 않는 거야?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깊어지는 고민과 깊어지는 절망, 두 감정이 소용돌이치며 카트라의 몸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늪에 빠트리기 시작했다.
***
하늘 정중앙에 걸린 은빛 달, 눈이 멀 지경의 달빛을 보며 혀를 찬 렐은 사방에서 고함치는 병사들의 목젖에 단검을 내던지며 가슴까지 오는 풀숲에 몸을 숨기고 앞으로 내달렸다.
‘거래를 하는 게 아니었는데!’
제국 변두리, 용병이 스물도 안되는 용병 길드와 거래를 튼 지 사흘 만에 제국에 들통났다. 말도 안 되는 금액을 후려치기에 한번 거절했더니 해방단과 거래해놓고도 제국에 신고하다니-
‘멍청한 새끼들!’
멍청한 거래자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렐은 현명한 거래를 해야 했었다고 자책하면서도 떠오르는 한 사람의 얼굴을 곱씹으며 퍽, 자기 머리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카트라…”
그 아이를 구해야하는데- 속으로 다시 한번 그녀를 구할 것을 다짐한 렐은 카트라가 잡혀가기 전 넌지시 제안했던 걸 떠올리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거래가 틀어진 이상 새로운 거래를 시작해야 했다.
‘수도로 돌아간다, 이번에야말로 그자들의 마음을 확실히 사로잡아야 해.’
제국 수도 용병 길드의 새로운 길드 마스터, 새로 부임해온 인원인 만큼 유혹하기 간단할 수 있다. 제국의 법이란 틀에 묶여 더 높은 곳을 바라는 인간들일수록 금은보화를 탐하는 법이니까- 몇백 년을 살아가며 깨달은 이치를 되새긴 렐은 파악! 단검을 하나 더 쏘아 던진 후 자기 부하를 떠올렸다.
‘카트라- 금방 구해주마. 조금만 기다려다오.’
“여기다!!! 이쪽이야!!!”
“황자님께서 지켜보고 계신다, 반드시 잡아내야 해!!!”
“간악한 깜둥이년, 감히, 감히 제국에 칼을 겨눠!”
분개하는 제국 병사들의 고함을 흘려들으며 귀를 쫑긋이던 렐은 자신을 모욕하는 저열한 단어에 피식, 싸늘한 비웃음을 날리고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꼭 구하러 가마- 카트라.
**
카트라의 생각과 달리, 슬픈 미소로 떠났던 카사노는 이전처럼 매일 밤 그녀의 방을 찾았다. 하지만 어젯밤 나눈 대화 이후 그녀와 카사노 사이에 처진 벽은 예민한 카트라에게 더 차갑게 느껴졌다.
“…”
사랑을 속삭이지도 않고 안아주지도 않는다, 벌린 거리를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일 뿐, 이야기를 경청하는 자세는 화자를 기쁘게 하지만 오롯이 이야기만 듣는 그 모습은 카트라의 가슴을 문드러지게 하기 충분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연례행사처럼 이어진 이야기 들려주기, 오늘 있던 일과 예전에 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꺼내면 카사노 또한 그에 상응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전에만 해도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만으로 심장이 뛰고 행복을 느꼈는데-
텅, 문이 닫히고 카사노가 채워주던 미약한 온기조차 사라졌다. 싸늘한 방 안의 공기를 들이켜며 후우, 한숨을 내쉰 카트라는 퀭한 눈으로 자책하기 시작했다.
‘내 탓이야… 내가, 내가, 제대로 결정하지 않아서- 그래서 카사노님이…’
꾸욱, 가슴팍을 움켜쥐며 자기혐오에 잠긴 카트라는 방안을 비추는 달빛을 보다 문득 창문 너머 마을의 풍경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발견하고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내밀었다.
“아.”
-살랑살랑
창문 밖 풍경에 홀로 서있던 페리샤가 배시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늦은 밤에 뭐 하시는 거지- 잠든 걸 확인하고 나왔음에도 밖에 나온 페리샤가 살짝 걱정됐지만 웃으며 손 흔드는 귀여운 광경에 카트라 또한 미약한 미소를 짓고 손을 흔들었다.
-그때였다.
와락, 아가씨를 안아 드는 커다란 인영, 난데없는 괴한의 등장에 카트라는 드륵,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려 했지만 마을에 설치된 가로등이 반짝이며 괴한을 비췄다.
“흐흥, 카사노니임, 놀랐잖아요.”
“쉿.”
-쪽, 쪼옥, 쭙, 쪼옵, 쪼옥
자신에게 해줬던 진한 키스, 꽈악, 자신을 끌어안던 것처럼 부술 듯이 온몸으로 끌어안는 강인한 포옹.
허리를 손으로 감고 남은 손으로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페리샤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는 애틋한 눈빛이 오가는 순간 쪼옥, 그의 입술이 아가씨의 입술을 덮어버렸다.
“나는, 나느은…”
꽈아악, 창틀만을 강하게 움켜쥐며 자책하는 카트라, 그녀가 바라보는 풍경은 미약한 등불에 의지하는 사랑스러운 연인, 저 자리가 자기 자리였는데. 자기가 모시는 아가씨에게 마저 질투심을 품은 카트라는 퀭한 눈으로 두 남녀를 지긋이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