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컷 노예들의 주인이 됐다-311화 (311/395)

“정말 많이 알고 있구나.”

톡, 톡, 톡, 양피지에 빼곡히 적힌 수많은 정보를 보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들뜬 목소리로 카트라를 칭찬하고 바라봤지만, 맞은편에 앉은 카트라의 얼굴은 힘이 없어 보였다.

“카트라, 후회해?”

“아니, 아닙니다. 하지만… 제 은인인걸요.”

추욱, 은인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자 그녀의 어깨가 더 내려앉았다. 단장 생각을 많이 하나 보네, 그래도 그 단장을 뒤엎을 만큼 나와 페리샤를 생각했단 사실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스윽, 그녀의 손위에 내 손을 덮고 나긋하게 말했다.

“이 정도로 협조했으면 황자님도 카트라의 이야기를 들어줄 거야, 내가 꼭 이야기할게.”

“단장님을 설득할 기회만 만들어주신다면, 제가 확실히 설득할 수 있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 뭐 나도 렐이란 여자에게 은혜를 입은 것도 있고 로브에 감춰진 음탕한 몸매를 떠올리자 죽이기 아깝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황자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꺼내기로 협의한 나는 양피지를 주르륵 읽어보며 렐이 적어준 내용들을 살펴봤다.

“은신처, 정보 거래하는 상인과 제국 귀족들, 노예 상인들의 거점과 노예시장 후보지…”

이렇게 많다니- 한 건 했네, 내심 감탄한 나는 부드러운 카트라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노예해방단의 간부였다고 해도 황자에게 이야기하면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스르륵, 정보를 빼곡히 담은 양피지를 말고 끈으로 묶었다. 흘리지 않게 품에 넣고 카트라를 바라보니 그녀는 여전히 슬픈 얼굴로 책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장 걱정은 하지마, 얼마 전에 소식 들었는데 놓쳤다고 하더라고. 살아있을 테고… 황자님한테 정말 이야기해볼게. 카트라는 걱정 안 해도 돼, 이 정도 정보면 황자도 카트라를 처벌하자고 주장하진 않겠지.”

“만약, 처벌한다고 한다면 그때는 어쩌실 겁니까?”

“막아줄게.”

어떻게든 막아봐야지, 그래도 자기 사람이 되달라고 그렇게 끈질기게 매달린 주제에 날 죽이기야 하겠어? 과거를 근거로 당차게 대답하자 풋, 웃은 카트라는 서글픈 미소로 내게 말했다.

“이번에 떠나면 언제 돌아오십니까?”

“언제든 올 순 있지, 널린 게 공간이동주문서니까.”

“저는,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보고 싶습니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

“네…”

잘근, 새하얀 앞니로 입술을 씹은 카트라가 수줍게 대답했다. 진지함을 가득 담은 애절한 눈빛에 나는 얼굴을 뻗어 쪽, 카트라의 입술에 입 맞추고 조용히 속삭였다.

“철부지 아가씨 좀 잘 돌봐줘, 자주 돌아올 테니까… 알았지?”

“…알겠, 습니다.”

“원망 안 해?”

“원망합니다.”

드륵, 의자를 밀고 일어난 카트라가 미소 지으며 내게 말했다.

“돌아가지 못하게 배신자로 만들고, 그런 주제에 자주 오지도 않을 거라고 말하는 당신을 원망하지만…”

스윽, 치마 끝을 움켜쥔 카트라가 그리운 인사를 내게 건네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몰랐던… 아니- 잊었던 사랑을 가슴에 가득 품게 해준 당신을 사랑해요, 아가씨와 함께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은 절, 사랑하나요?”

툭, 치마를 놓은 카트라가 가슴에 양손을 얹고 내게 질문했다. 사랑하냐니, 카트라에게 접근한 건 페리샤가 아끼는 메이드였고 노예해방단에 오래 몸을 담갔으니 빼낼 정보도 충분하다 생각해 다가갔다.

“사랑하죠.”

하지만 그건 과거였다. 외로움을 타고 고독을 두려워하는 단칸방에 갇힌 카트라를 보면 수많은 감정이 치솟았고 그런 그녀를 품은 것도 내 선택이었다. 정말 정보만을 원했다면 그냥 카트라를 황자에게 보낸 게 제일 빨랐겠지.

휘슬 남작가에 식객으로 지내며 나를 존중해준 카트라에게 존중을 담아 인사를 건넨 나는 풋, 어설픈 미소와 함께 방을 나가는 카트라의 뒷모습을 마지막까지 지켜봤다.

문이 닫히기 전 나는 카트라를 향해 한 번 더 소리쳤다.

“나중에 꼭 같이 가요, 내 은인이기도 하잖아요.”

“치…”

-쿵!

내 농담에 웃음을 터뜨린 카트라가 문을 닫고 저벅저벅, 천천히 떠나갔다. 홀로 남은 방안을 둘러보며 파도 하나를 흘려보냈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인 그때 똑똑똑, 누군가 창문을 두들겼다.

[구우, 구우, 구구, 구우]

톡, 톡, 톡, 고개를 갸웃대면서 창문을 쪼는 순백의 비둘기, 귀여운 울음소리에 피식 웃은 나는 창문을 열고 손을 뻗었다.

[구욱!]

탁, 탁, 손바닥을 쪼고 훙, 훙, 머리를 좌우로 흔드는 비둘기. 카트라와 마음을 터놓고 난 후라 조금 들뜬 나는 손등을 살짝 비둘기의 목에 뻗었고 비둘기가 손길을 피하지 않는 걸 확인해 스윽, 스윽, 부드러운 몸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착하다, 응, 귀엽네- 뭘 가지고 왔니? 응? 누가 보냈어?”

사악, 사악, 비단 같은 몸을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물었지만, 비둘기가 대답할 리 없지, 전서구니 통이 있겠지, 라고 생각하고 다른 손을 비둘기의 발에 뻗었지만 가냘픈 다리밖에 잡히지 않았다.

[구우, 구우우- 황자님의 전언입니다]

응? 비둘기가 갑자기 여자 목소리를 내다니, 귀가 이상해진 건가, 라는 생각이 들어 검지로 귀를 파자 손바닥에 올라온 비둘기가 후웅, 머리를 크게 흔들었다.

-퍼억!

“아!”

내 손등을 세게 쪼아버린 비둘기는 스윽, 스윽, 날개로 부리를 닦으며 다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카사노, 제법 오래 쉬었으니 이제 새로운 임무를 내려도 되겠지, 제국 수도 기준 남쪽으로 계속 향하면 위치한 항구가 하나 있다, 제국도 어느 왕국 소속도 아닌 무법 항구, 이름은 쐐기 이빨 항구. 그곳을 거점으로 제국의 상선만을 덮치는 해적이 있다]

[기억했습니까?]

“네, 네.”

[구우, 제국령이 아니라 제국의 이름으로 잡아갈 수도 없고 제국 함대를 보내 토벌하기엔 빼낼 수 있는 병력이 현저히 부족하다, 그곳에 보낸 요원과 협조할 병사, 선원, 배 모든 게 준비됐으니 쐐기 이빨 항구로 가 해적을 토벌해주게]

[그 해적의 이름은 레지나, 본명인지 몰라도 거만한 이름이지. 그 근방 해역에서 이름을 떨치는 유망한 여해적이라더군, 내 생각에는 해적섬에 있는 무리에게 인정받기 위해 제국에 칼을 들이미는 거 같다만, 세상이 넓은 걸 가르쳐줘야겠지!. 그대만 믿겠네!]

세상이 넓은 걸 내가 왜 가르쳐줘, 해적인데 어련히 항해하면서 알아채겠지. 뭔가 난잡한 황자의 전언에 머리를 갸웃거리는 그때 톡, 톡, 내 팔을 타고 다가온 비둘기가 어깨에 앉고는 구우구우, 울기 시작했다.

[황자님은 황제 폐하의 명령으로 수많은 악적들을 토벌하고 드래곤의 뒤를 쫓고 있습니다. 부디 황자님을 실망하게 하지 말도록 하세요]

톡, 내 뺨을 부리로 살짝 찍은 비둘기는 그렇게 푸드득, 열린 창문을 향해 날아갔다. 뭔가 들어본 목소린데…

퍼엉, 비둘기가 사라지고 창문을 닫으려는 그때 창문 앞에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작은 종이가 생겼다. 마법 같은 일에 감탄한 나는 종이를 들고 안에 적힌 내용을 읽었다.

“무법 항구에서 조심해야 할 것, 무법 항구에서 얻는 현상금은 개인 소유, 잠입 중인 제국 요원들의 거점, 황자님이 좋아하시는 사치품…”

좋아하는 사치품은 또 뭐야, 척, 척 쪽지를 접고 품에 넣은 나는 뿌드득, 굳은 몸을 풀며 하늘을 바라봤다. 물감을 펴 바른 듯 그림 같은 하늘, 일하러 가기 참 좋은 날씨네.

마녀들이 챙겨준 물건과 물자들, 검과 가죽 갑옷, 공간이동 주문서와 포션, 전부 챙겨뒀으니 몸만 떠나면 되겠지. 유망 있는 여해적이라, 절로 군침이 도는 타이틀에 기대감이 부푼 나는 준비해둔 짐들을 잘 세워두고 방 밖으로 나갔다.

인사는 하고 가야겠지...? 딱봐도 마을에서 또 오랫동안 떠나기에 여인들에게 돌아가며 쥐어짜일 미래가 보였지만 거부할 이유는 없다. 확실한 격차를 새겨주고 가야지- 홀로 다짐한 나는 집에 남아있는 여인들부터 상대하기 위해 천천히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

“손님.”

툭, 투욱, 가벼운 손짓이 어깨를 두들긴다. 들썩이던 짐마차는 어느새 멈추고 마차를 가득 채우던 짐과 용병들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종일 쥐어짜이고 항구로 가는 주문서가 없는 걸 그제야 알아채 뒤늦게 마차를 탔다. 몇 번이나 갈아타고 피곤함에 찌들어 잠깐 눈만 붙였는데 그새 도착하다니…

“참 오래도 자는구만. 도착했슈.”

“쐐기 이빨 항구 맞아요?”

“맞으니까 멈췄지, 내가 사시긴 해도 눈깔 병신은 아니우.”

되물음과 동시에 사시인 눈을 번뜩이며 노려보는 마부, 당찬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품에 안고 있던 가방을 바로 메고 마차에서 내렸다.

“어르신, 깨워줘서 고맙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바다에 가까워지고 마차를 갈아타면서 느낀 건 마부들이 갈수록 거칠어진다는 거였다. 그걸 뼈저리게 느낀 나는 다정하게 깨워준 노인에게 예의 있게 안부를 건넸고 내 호의에 너털웃음을 터뜨린 마부는 내게 몇 가지 조언을 건네줬다.

“이 근방에서 마부로 30년을 지내는데 이런 예의 있는 인사는 참 오랜만에 듣는구먼, 친절한 젊은이가 객사하는 걸 보기도 그러니 하나 좋은 거 알려주지.”

“서비스까지?”

“서비스? 뭐,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이근방 해적들을 조심하슈, 해적섬에 사는 미친 해적들이 이곳에 몰려들고 있어. 그중에는 소드마스터도 있다는 소문이 도니까 목 간수 잘하라고.”

소드마스터? 해적 따위가 무슨 소드마스터…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요즘 들어 생각이 바뀌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생각도 못 할 황자랑 같이 일하고 있는데 소드마스터가 있을 수 있지.

“감사합니다. 근데 저한테 그런 걸 알려주시는 이유가…?”

“황자님의 은혜를 입었으니 그러지. 여기, 황자님이 주신 선물일세.”

휙, 묵직한 주머니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주머니를 열자 눈이 부실 정도로 가득한 은화가 반짝였고 주머니를 품에 넣은 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감사 인사를 건네려 했지만, 노인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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