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랑, 짤랑, 흥겨운 걸음을 이어 나갈 때마다 품속의 은화가 흔들린다.
“아니 저런 노인네는 어떻게 구워삶았데?”
오베론의 안배에 입꼬리가 절로 씰룩였다. 돈이 없는 건 아니지만, 돈이야 많으면 항상 좋은 거 아니겠는가? 하지만 무법 항구라는 악명이 자자한 만큼 소매치기에 대한 경계가 올라간 나는 꾸욱, 품속 주머니를 더 깊게 숨겨두고 항구 검문소로 향했다.
“아이 씨바알! 좆됐네 진짜로, 물건을 잃어버리면 어떡해?”
“모른다, 물건, 내놔라, 돈.”
“이런 개좆같은년들이, 사람 앞에 두고 뭐라 지껄이는 거야?”
왁자지껄한 검문소 앞, 수많은 짐마차와 짐수레, 그 모든 것들의 주인들이 한마디씩 떠드는 장맛비가 내리는 한가운데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말로 된 비를 얻어맞으며 비척비척 검문소를 통과하는 줄에 서니 킁, 여러 사람이 나를 흘겨보곤 다시 검문소를 바라봤다. 왜 야리고 지랄이야?
근데 무법 항구인데 굳이 검문소가 필요한가? 라는 의문이 드는 그때 빠악, 골통을 제대로 후리는 경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지지지직!
바닥을 긁으며 날아가는 한 인영, 데굴데굴 돌처럼 구른 인영이 쿵, 짐마차에 부딪히고 구르는 걸 멈추자 카악 퉤엣! 가래침이 쓰러진 놈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곱게 꺼지라니까 씨발, 말귀를 못 알아먹네.”
엉덩이를 덮는 분홍빛 포니테일을 틀어 묶은 한 여인이 걸쭉한 욕설을 내뱉으며 다가왔다. 곱게 차려입은 푸른빛 정복이 잔뜩 헤지고 너덜거렸지만 묘한 기품이 엿보였고 흰색 반바지는 육덕진 허벅지를 꽉 조여 건강미를 강조했다.
비록 얼굴에 긴 칼자국과 칼자국을 덮은 검은색 안대가 자리 잡았지만 아름다운 미색을 어지럽히진 않았고 시선을 느낀 그녀는 스릉, 허리춤에 찬 커틀라스를 뽑아 들고 줄 선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씨발 구경났어? 검문 중이니까 앞에 봐 씹새들아, 니들도 검문당하고 싶으면 씨발 계속 야리던가.”
입 참 걸쭉하네, 검문 검문 노래를 부르는데 행색과 행동만 보면 그냥 해적, 아니 깡패 그 자체였다. 그 모습에 관심 끄려고 고개를 돌리는데 내 앞에 선 남자가 중얼중얼, 자기 일행과 함께 여자에 대해 떠벌렸다.
“저 악독한 년, 저런 년이 영주의 딸이라니…”
“시집도 못 가서 저 지랄이라잖아, 그래도 저렇게 강하니 영주가 항구를 딱 휘어잡으니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레지나 그 개미친년이…”
“누구야, 지금 레지나 그 씨발년 이름 얘기한 게.”
터억, 날이 선 커틀라스를 땅에 찍은 여자가 서늘한 목소리로 군중을 압도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떠벌거리며 자기 일 아니라고 넘어가던 수많은 사람이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닫고 데굴데굴, 눈알을 굴리기 시작했다.
“안 나와? 누가 씨발 나랑 레지나 그년을 비교했냐고.”
-찌릿!
저벅, 저벅, 누구냐고 묻는 입과 다르게 그녀의 발걸음은 이쪽을 향했다. 귀도 존나 좋나 보네. 진득한 살기가 나를 핥고 내 앞에선 남자들을 휘감는 걸 구경하니 노인네가 원망스러웠다.
해적이 아니라 이년도 조심해야 하잖아요 어르신.
벌벌벌, 다가오는 여인과 떨어대는 두 남정네. 줄이 줄어들 기미도 안 보이고 이 촌극이 끝나지 않는 이상, 아니- 끝나도 줄이 줄어들지 않을 거 같다 판단이 든 것도 있지만 알 수 없는 직감이 자꾸만 나를 괴롭혔기에 나는 잠깐 견적을 냈다.
릴리아 그 여자보다 강해 보이진 않고, 나랑 엇비슷해 보이는데… 마을에서 몸보신하고 잠도 푹 자니 컨디션이 괜찮았다, 영주의 딸이니 건들고 싶진 않지만… 하고 고민하던 그때 터벅, 발걸음은 더 가까워졌다.
“…”
흉흉한 살기, 나까지 휘말리는 끈적한 시선에 휙, 고개 돌리자 마침 이곳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힐끔, 나를 흘겨보고 돌아가던 눈동자가 턱, 다시 내게로 멈추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찡긋, 그녀를 향해 윙크했다.
“웃!”
턱, 다가오던 발소리가 끊기고 허억, 군중들이 숨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왜 그런가, 하니 살기를 거둔 여인이 화악, 새빨개진 얼굴로 커틀라스를 들곤 휙, 나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 너어!!!”
“저요?”
찡긋, 한 번 더 장난스레 윙크하자 으아악! 펄쩍 뛰어오른 여인이 벅벅벅 자기 팔뚝을 긁고는 널브러진 남정네의 멱살을 쥐고 쿵쾅쿵쾅, 검문소로 도망쳤다.
뭔 시발 남자 알러지야? 웃기는 반응과 싱거운 결과에 코웃음 치던 그때 텁, 누가 내 팔을 움켜쥐었다.
“자, 자네. 정말 고마워!”
“하아, 필리아 저 미친년한테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어…!”
죽을뻔했다면서 끝까지 년 년 거리긴, 바다 토박이들의 말본새에 질린 나는 툭, 움켜쥔 손을 쳐내고 퉁명스레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그냥 윙크 몇 번 한 거로 기겁하면서 가버린 게 왜 제 덕입니까?”
“응? 윙크? 마법을 사용한 게 아니었나?”
“예끼 이 사람아, 검을 찼는데 뭔 마법인가?”
“그럼…”
시답잖은 농담을 나누는 걸 보고 스윽, 몸을 돌렸다. 이런 상황을 겪을 때마다 지구에서 이어폰을 끼고 자리를 모면하던 그때가 그리웠지만, 이곳에는 이어폰 따윈 없었다.
“아니, 아니, 정말 고마워서 그래. 윙크던 뭐든 간에 자네 덕에 필리아가 물러났지 않은가. 아, 잠시… 아! 여기 있군.”
뒤적뒤적, 연신 고맙다며 매달리던 아재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 품 안을 뒤적거렸다. 뭔가를 찾았는지 탄성과 함께 쪽지를 꺼내든 아재는 툭, 내 손바닥에 쪽지를 얹고는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쐐기 이빨 항구 안에 내가 하는 여관 이름이랑 내 이름이야. 지금 말해줘도 왠지 자네는 까먹을 거 같아서, 나중에 꼭 머물러 오게나.”
“이봐, 거긴 …께서 …을 위해 준비해둔 방이잖나…!”
감사 인사를 건네는 아재를 질책하는 아주 미약한 목소리, 누구를 호칭하는진 듣지 못했지만, 어렴풋이 들어도 뭔가 찝찝한 곳이란 게 느껴졌다.
“진짜 괜찮은…”
“은인을 위해서 내준 걸 안다면 카사노 그 남자도 이해하겠지!”
“아이 쓰발, 오늘이면 온다던 사람한테 줄 걸 왜 남한테 주냐고!”
응?
사락, 사락 쪽지를 펼치자 춤추는 소라게라는 이름의 여관 위치와 방, 그리고 주인의 이름 바우가 적혀있었다.
“저기, 아저씨, 아니 바우씨.”
“아, 걱정하지 말게 이 친구가 말한 건…”
“바우씨가 제국 쪽 요원입니까?”
“응?”
“어?”
척, 검지를 내게 가리킨 바우의 옆에 있던 아재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거, 검은 머리칼, 검은 눈, 맞네! 이남자였구만!”
아니 뭔데.
***
검문소장이 없는 검문소를 손쉽게 통과하고 왁자지껄한 인파에 휩쓸려 항구까지 밀려난 나는 두 명의 아저씨와 함께 바다를 바라봤다. 이런 건 여자랑 봐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진지하면서도 얼빠진 이야기를 나누는 만큼 인내해야 했다.
“그러니까…”
척, 바우아저씨를 가리키자 아저씨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현지 협조자.”
“이 아저씨는.”
척, 바우아저씨 옆에서 쫑알거리던 키 작은 아저씨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 연락책일세. 원래라면 자네를 확실히 아는 제국 요원이 자네를 내게 보내면 나는 바우에게 자네를 안내하고 평소에 다른 가게에 있을 바우는 자기 여관을 자네에게 알려주는 거지.”
그러니까, 아재들의 말은 오베론의 명령으로 나를 맞이하는 사람이 나를 털보에게 보내면 털보는 나를 바우에게 보낸다. 하청의 하청을 거듭하는 시스템에 쯧, 혀를 차자 두 어깨가 들썩였다.
“아니 뭐 그렇게 귀찮게 한답니까? 그냥 처음부터 거기로 가라 하지.”
“그게, 누가 알아채면 곤란하니까 말이야. 무법 항구라 해도 엄연히 영주가 있는데 황자님께서 영주를 무시하고 자기 부하를 보냈다는 걸 알면 얼마나 열 내겠나?”
“티치 그 작자는 무법 항구에서 벌어들이는 수익과 수완으로 해적과 왕국, 제국에게까지 인정받은 이곳의 영주야. 그자가 문제 삼고 일어서면 자네가 여기서 쫓겨나는 건 시간문제지.”
복잡한 이야기가 갑자기 나오네, 어느 정도 새겨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그때 나는 문득 궁금해져 별 감정 없는 목소리로 둘에게 물어봤다.
“근데 제가 오고 안내받야아하는데 둘은 왜 이제야 줄 서고 있었습니까?”
“그게, 필리아 그년이 아침부터 열불이 뻗쳤는지 빡세게 검문하느라 줄이 밀렸지 뭔가.”
“거기다 받기로 한 물건이 있는데 그쪽 흑인 짐꾼이 물건을 홀랑 잃어버려서 하아, 그것 때문에 고생했지.”
아까 들은 개좆같은 소리 타령이 이 아저씨들이었나? 참 우연이라는 생각에 피식 웃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넘어갔다.
“그런데 두 분을 따로 만나도 되나요? 그 요원도 같이 만나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 질문에 턱, 자기 이마를 손바닥으로 두들긴 둘은 허겁지겁 품을 뒤지기 시작했고 무언가를 찾은 바우가 웃으면서 텁 입에 물었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보게나. 고마워, 잠시만 기다리게.”
-□□□□□!
바우가 입에 문건 피리의 형태였지만 그가 숨을 불어넣는 순간 피리 소리가 아닌 무언가 귀가 멍해지는 불쾌한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삐익도 아니고 뭔가… 말로 설명 못할 소리와 함께 귀를 막은 손을 내린 둘은 웃는 낯으로 내게 말했다.
“이제 올걸세, 이게 그분밖에 못 듣는 연락 수단이거든.”
“하, 멀리서는 하나도 안 들리는데 가까이에서 부는 소리만 들으면 귀가 먹먹해진단 말이지. 그래서 귀를 막아야 해.”
“아니 그러면 저도 알려줬어야죠.”
“아이고! 내 정신 좀 보게.”
이 세계는 죄다 치매가 조기에 찾아오나? 불만이 울컥 솟구쳤지만 참아낸 나는 탁, 탁 발끝을 구르며 요원을 기다렸다. 끼룩, 끼룩 갈매기가 날아가고 욕설을 지껄이는 항만짐꾼들을 구경하던 그때 턱, 바닥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그림자가 나를 덮쳤다.
“아, 오셨군!”
“그럼 우리는 이제 쓸모가 없으니 둘이 이야기 나누게. 구해줘서 정말 고맙네.”
아니, 불렀으면 있었던 일을 이 사람한테 얘기해주고 가야지. 짬처리를 맡기고 떠나는 아재들의 뒷모습을 쫓던 그때 톡, 톡, 어깨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고개를 돌렸다.
“반갑습니다. 저는 황자님께 명받고 카사노님을 보좌할 첩보부 소속, 아르실입니다.”
“첩보부?”
“오베론님께선 세 가지 신분이 있습니다, 6황자, 태양기사단의 말단 베론, 그리고 제국 암약의 첩보부장이십니다.”
첩보부라는 것도 있구나, 제국의 생태에 감탄하던 그때 꾸벅, 고개 숙인 아르실의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다.
로브를 완전히 뒤집어써서 얼굴이 하나도 보이지 않고 펑퍼짐한 로브 탓에 체형도 가늠이 안 된다. 로브 그 자체인 모습에 혀를 내두르는 그때 꾸벅, 또다시 내게 인사해왔다.
“인사는 더 안 하셔도 됩니다.”
“인사가 아닙니다, 야행성인지라… 준비하고 올 줄 알았기에 밤새 임무를 진행하고 잠들었었습니다. 이른 아침 준비를 마치고 찾아왔는데 미흡한 안내 정말 죄송합니다.”
엄청 깍듯하네, 황자가 데려왔다 해도 그냥 용병인데 너무 저자세로 대하는 아르실의 태도는 조금 껄끄러울 지경이었다.
“아닙니다, 일단 그- 어디 다른 곳으로 이동할까요?”
“네, 준비해둔 숙소가 있습니다. 대머리, 아니 바우에게 안내받으신 곳이 숙소이니 일단 그곳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제 뒤를 따라와 주시길.”
펄럭펄럭, 로브가 잠깐 요동쳤지만 추욱, 그대로 멈췄다. 대체 안이 어떻게 됐길래… 절로 식은땀이 흘렀지만 일단 나중에 물어보기로 한 나는 터벅터벅, 아르실의 뒤꽁무니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