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이 항구에서 가장 큰 광장입니다. 길을 잃어도 이곳을 기점으로 이동하거나 주변 지리를 익히면 길 찾기가 수월할 테니 기억해두시길 바랍니다.”
“아, 네.”
사수에게 일을 배우는 부사수의 마인드로 아르실의 뒤를 쫓은 지 1시간, 그녀 혹은 그는 중성적인 목소리로 쐐기 이빨 항구에서 조심해야 할 것과 여러 가지 특징, 그리고 해적들의 생태를 내게 낱낱이 알려주었다.
“무법 항구란 곳이 대개 다 그렇지만 특히 이곳은 해적과 선원들의 드잡이질이 매우 빈번히 일어납니다.”
“살인까지 자주 일어납니까?”
스윽, 스윽- 내 질문에 고개를 내저은 아르실이 로브 깊숙이 숨어있던 주황빛 동공으로 나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이곳의 영주 티치는 모든 걸 묵과하지만 단 하나, 살인만큼은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 뭐, 살인으로 번지기도 전에 항구가 시끄러워지면 차세대 소드마스터 소리까지 듣는 티치의 딸, 필리아가 나타나니 그럴 일은 없습니다.”
“필리아, 아까도 그 이름을 들었는데…”
“필리아도 이곳 쐐기 이빨 항구에서 조심해야 할 인물 중 하나입니다.”
풀썩, 지나가던 길 꾀죄죄한 분수대에 걸터앉은 아르실이 톡, 자기 옆자리를 두들기며 나를 바라봤다. 곧바로 옆에 주저앉고 슬쩍 바라보자 큼, 헛기침을 내뱉은 아르실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차세대 소드마스터 소리를 듣는 강자답게 매우 호전적이고 난폭합니다. 특히 레지나를 죽일 듯이 증오하는데, 그녀의 눈에 상처를 입힌 게 레지나이기 때문입니다.”
“아, 그래서 안대를 끼고 있군요.”
“소문으로는 남장한 레지나에게 멋모르고 부비적거리다가 베였다- 라고 하지만 필리아 앞에서 그런 소리를 했다간 알몸으로 항구에 널려 물고기들과 같이 말라죽을 테니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흉악하군요.”
“그래도 아비의 뜻에 따라 살인은 저지르지 않는… 소위 말하는 선은 지키는 폭군이라 생각하면 편합니다.”
선은 지키는 폭군이라니, 전혀 안 맞물리는 단어에 피식 웃자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 아르실이 고개를 돌렸다.
“다시 보니 카사노님은 필리아가 꽤 좋아하겠군요. 소문으로는 남탕에서 하도 굴러대 눈이 낮아진 필리아는 잘생긴 남자만 보면 관심을 가진다고 합니다.”
“묘하게 말투가 걸쭉하시군요.”
“…이곳에 오래 잠입한 여파입니다. 제 본래 말투는 그리 천박하지 않습니다.”
스윽, 분수대에서 일어난 아르실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재빠른 걸음걸이에 피식 웃은 나는 작은 어깨에 손을 올리고 넌지시 말했다.
“귀엽다, 라고 하기도 그렇고 자연스러워서 건넨 칭찬이었어요.”
“노, 놓으시게.”
움찔, 어깨를 떤 아르실이 알 수 없는 말투를 하며 나를 흘겨봤다. 이건 또 골릴 맛 있는 사수구만. 히히덕거리며 묘하게 씩씩거리는 아르실을 뒤쫓기를 한참, 허름한 여관 앞에 도착한 아르실이 반쯤 부서진 간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이 한동안 머물 춤추는 소라게입니다. 카사노님을 태울 배에 있는 선원들과 선장, 병사들이 머무는 여관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곳에 안 머무나요?”
내 질문에 피식 웃은 아르실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법 항구라지만 이곳의 시설과 건물들은 제법 발전했습니다. 광장 근처에만 해도 좋은 여관과 숙소가 널렸기에 이런 변방 숙소에는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끼익, 문을 밀자 녹슨 경첩 소리가 귀를 두들겼다. 아르실 또한 듣기 싫었는지 양손으로 후드에 덮인 귀를 덮고 어깨로 문을 밀며 들어갔고 뒤따라 들어간 나는 깨끗한 여관 내부를 구경하며 감탄했다.
“관리가 잘됐군요.”
“비록 정식으로 황자님의 이름을 앞세워 임무를 수행 못 한들 이곳은 황자님의 명을 받고 모인 자들의 장소입니다. 이건 당연한 겁니다.”
으쓱, 묘하게 자랑스러워하는 아르실이 가슴을 내밀며 으쓱거렸다. 내 가슴 정도? 아니 명치까지 오는 사람이 그렇게 구니 귀여워 스윽, 스윽, 후드를 쓰다듬자 타악, 아르실이 내 손을 가볍게 쳐냈다.
“카사노님, 아까부터 무례합니다. 비록 황자님이 보내신 카사노님이 제 상관이지만 엄연히 임무를 먼저 수행한 건 저입니다.”
“죄송합니다. 모습을 꽁꽁 감추고 귀엽게 굴어서 너무 무례하게 굴었군요.”
“귀여워, 하.”
아무도 없는 여관 한복판에 선 아르실이 콧방귀와 함께 화악, 로브를 거둬냈다.
목을 간신히 덮는 옅은 갈색의 단발과 날카로운 맹금류 느낌의 주황빛 눈동자. 앙다문 까칠한 입술과 짙은 눈썹, 거기에 흰색 제복을 갖춰 입고 발을 딱 붙인 채 제식 자세를 잡은 모습을 보니 아르실의 첫인상은 군인 그 자체였다.
하지만 두 가지가 눈에 띈 나는 조금 당황했다 일단 군인치고 무척이나 풍만한 가슴이 눈에 확 들어왔다.
엄청나게 작은 키는 아니지만, 키에 비해 무척이나 큰, 지구였으면 G컵은 될만한 가슴의 크기에 당황했고 펄럭, 펄럭, 로브에 감춰졌던 큼직한 갈색 날개가 바람을 일으키며 먼지가 내 코끝을 간지럽히는 순간 눈물이 차오르고 코가 찡했다.
먼지는 왜 일으키고 난리야?
“어, 그게…”
“수인이라고 저를 모욕하시리라 생각은 안 합니다만, 더 이상 제게 무례를 범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당찬 말투, 올곧은 입술,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녀의 오해를 풀기 위해 한 걸음 다가갔다.
“저는 수인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자주 머무는 마을에만 해도 수인 부인이 3명은 되는걸요.”
“수인 부인이 세 명이라고…!”
타닥, 순식간에 물러난 아르실이 아르르, 이를 드러내고 나를 노려봤다.
“그러고 보니 황자님께서 여색을 밝힌다고 일러주셨는데…!”
아차! 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 아르실은 번뜩이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다가 아주 잠깐 슥, 양팔을 교차해 가슴을 가렸다가 다시 다리에 딱 붙여 차렷자세를 취했다.
“흠, 일단 알겠습니다. 앞으로 같은 임무를 수행할 관계이니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 오해를 해결했으면 합니다.”
오해는 일방적으로 하지 않았나. 은근히 허당 같은 모습에 입꼬리가 씰룩였지만 겨우 참아낸 나는 텅 빈 여관을 둘러보며 아르실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무도 없군요.”
“오늘은 상선 호위를 하러 잠시 떠났습니다. 요 앞 인근 해역까지 호위하니 금방 돌아올 예정입니다. 내일 임시항해를 떠나기 전 모두에게 소개해드릴 테니 안심하시길.”
“아, 네.”
“그럼, 저는 잠시 조사할 게 있어 나가봐야 합니다만, 이곳에 남아계실 겁니까?”
스윽, 스윽, 아르실의 질문에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한 나는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레지나라는 해적에 대해 조사도 하고 이곳 항구의 생태를 파악하는 게 급선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지나에 대해 조사도 하고 사람 구경도 하고 싶군요.”
“좋은 자세입니다. 제가 잠깐 오해했군요.”
임무에 대해 큰 관심을 갖는다 생각한 걸까? 커다란 가슴을 살짝 내민 아르실은 옅은 미소를 띠었다가 크흠, 헛기침으로 덮어버렸다. 일단 광장까지 동행하자는 아르실의 권유를 받아들인 나는 로브를 걸치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웃…”
머리와 날개를 덮고 꾹, 꾹, 로브 밑을 잡고 내리지만, 가슴에 걸린 로브는 쉽게 내려오지 않는다. 거기다가 정면만 봐서 몰랐는데 아르실의 엉덩이는 무척이나 풍만했다. 순산형 엉덩이와 고혹적인 라인을 동시에 떠올리게 하다니, 대단한 엉덩이군.
-스윽
“웃! 고맙, 습니다.”
낑낑거리며 로브를 입지 못하는 모습에 결국 밑단을 잡고 훅 내려줬다. 한 번에 로브를 걸치는 데 성공한 아르실은 조금 우물쭈물한 얼굴로 내게 감사 인사를 하곤 푸욱, 후드를 끝까지 뒤집어쓴 후 먼저 문을 열고 앞장섰다.
***
“그럼, 부디 사건과 연관되지 말고 조용히 돌아오십시오.”
꾸벅, 후드를 깊게 눌러쓴 아르실이 인사와 함께 어딘가로 사라졌다. 야행성이라면서 안 졸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 감탄한 나는 드넓은 광장과 수많은 가판대, 그리고 수레에 실린 물고기와 교역품들을 구경하며 조용히 휘파람을 불었다.
“많네, 많아.”
까맣고, 하얗고, 붉고, 다양한 머리색과 피부색이 뒤엉킨 길거리를 구경하며 인파에 몸을 맡긴 나는 고래고래 소리치는 상인들과 가격을 깎는 선원과 해적들의 실랑이를 구경하며 미소 지었다.
폭력적이긴 해도 재미는 있네.
퍽, 퍽, 손에 사슬을 휘감고 물건을 빼돌리던 상인을 쥐어패고 교역품을 빼돌리고 도망치려던 선원의 손목이 잘린다. 물고기들의 배를 가르고 현상금이 걸린 해적들의 수급을 챙겨 영주성으로 뛰어가는 사냥꾼, 모든 인간군상을 구경하던 그때 쩌렁쩌렁한 고함이 모든 인파를 불러세웠다.
“아이고오오!!! 제발, 제발 그만하십쇼오, 네에…!”
삭삭삭삭, 바닥에 무릎 꿇은 노파가 바닷물에 절여진 까만 얼굴로 손바닥을 비비고 있었다. 노파의 애원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여자들은 걸치듯이 입은 옷들을 펄럭이며 퍼억, 퍼억, 쨍강! 가판을 때려 부수고 바닥을 나뒹구는 주머니를 챙겼다.
“푸른 파도 해적단이다.”
“악독한 년들…”
푸른 파도 해적단이라는 이름이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순간 웅성거리던 인파들이 하나같이 조용해졌다. 그 모습이 만족스러웠는지 수십 명이 떼를 지은 여해적들이 깔깔 웃으며 주변을 둘러봤고 개중 한 명은 아예 인파를 향해 소리쳤다.
“졸았냐? 사내새끼들아? 좆달고 아가리 닫을 거면 그 좆 나한테 주지 그래!”
“하하하하하!!!”
“저, 저, 씨발년들…”
“듣겠어! 그만해!”
“에이…”
바닷사람들답게 몇몇이 발끈하고 눈을 부라렸지만, 동료나 옆에 서 있던 시민이 붙잡아 말리기 바빴다. 처음엔 왜 그런지 몰랐다만 모든 인파의 시선은 한곳에 집중됐고 자연히 그 눈초리를 받는 한 사람을 발견한 나는 조용히 감탄했다.
삐딱하게 머리에 걸친 해적모, 파도처럼 흘러내린 기다란 파란색 머리칼이 풍만한 엉덩이를 덮고 있었다. 신비스러운 푸른 눈동자가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오뚝한 콧날과 갸름한 입술은 그녀의 미색을 증명하기 충분했다.
얼굴 자체도 대단한 미인이지만 압권은 몸매였다. 몸에 쫙 붙은 흰색 셔츠와 어깨에 걸친 검은 제복, 아이 머리통만 한 젖가슴과 잘록한 허리, 손에 쥐고 쓰다듬고 싶어지는 음탕한 엉덩이까지.
허리에 걸친 은빛 커틀라스는 햇빛을 받아 자연스레 빛났지만 흥미로운 건 손잡이와 장식이 산호와 소라로 이루어져 있었다. 손잡이에 감긴 가죽 덕에 휘두를 수는 있었지만 누가 봐도 저 커틀라스는 장식품 같았다.
마무리로 커틀라스 반대편 허리에 찬 검은 막대기, 익숙한 모양과 길쭉한 형태에 총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드문드문 들리는 소식으로 크래프톤에서 아직 총을 개발하진 못했다고 했다. 대포야 있지만 저것도 머스킷 정도겠지- 라고 생각한 나는 주의해야 할 사항으로 기억에 남겨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