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억
“씨발 어깨 안접고 다녀?”
“그렇다고 네 어깨를 접을순 없잖아.”
“뭐라는거야 미친년이…!”
텁, 허리에 찬 검 손잡이에 손을 얹고 시비걸린 양아치를 노려봤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덤벼들 기세였던 놈은 내 허리춤에 찬 검과 옆에 서있는 아르실을 보곤 퉷, 바닥에 침을 뱉고 조용히 사라졌다.
“사내새끼가 뚝심도 없네.”
“지금은 시비 하나하나에 반응해줄때가 아닙니다. 선장이 임무를 가져왔다면 그걸 조속히 완수하는게 신뢰를 쌓는데 유효합니다.”
“알았어요.”
엄마처럼 잔소리하긴. 쬐그마한 아르실의 머리를 톡톡 두들기자 퍽, 내 손목을 쳐낸 그녀는 로브속에 감춰진 주황빛 눈동자로 진득하게 날 노려봤다.
“알았어요.”
“…흥.”
푸륵, 그녀의 콧방귀에 맟춰 흔들리는 로브. 그 모습이 귀여워 통통 걸어가는 아르실의 뒤를 따르던 그때 항구 구석 정박된 범선을 발견한 아르실이 척,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저희 범선입니다.”
“괜찮게 생겼군요.”
“배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까?”
적절한 칭찬에 반짝, 눈을 빛낸 아르실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무기만 좋아하는게 아니라 배도 좋아하구나. 끈적한 시선에 부담감을 느껴 고개를 내젓자 실망한 아르실이 축 늘어졌다.
“타면 위계질서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선장과 항해사, 일부 간부들은 황자님과 계약한 사람들이긴해도 저와 카사노님의 명령을 듣는게 원칙입니다. 다만 항해중엔 문외한인 만큼 선장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지시를 따르도록 해야겠죠.”
“하긴, 괜히 전문가가 아니니까요.”
고개를 끄덕인 아르실은 선장에 대해 설명하면서 꾸욱, 내 옷깃을 잡아당기곤 소곤소곤 조용히 이야기했다.
“선장인 바크문은 선량하고 착실하지만 항해중엔 꽤나 엄격합니다. 그가 먼저 위계질서와 선원들에 대해서 이야기할테니 괜한 꼬투리는 잡지 말았으면 합니다.”
“알았어요, 그밖에 주의할건요?”
“없습니다. 바크문에게 어디로 가자, 누굴 쫓자, 누굴 잡으러 가자, 무슨 임무를 하자. 등등 명령은 내릴수 있지만 배에서 그의 권위를 지켜줄 것. 그것만 명심하면 됩니다.”
“아, 알았어요 엄마.”
“저는 카사노님의 엄마가 아닙니다…!”
펄쩍 뛰어오른 아르실이 퍽, 이마로 내 배를 두들겼다. 묘하게 아파 배를 쓰다듬으며 피식 웃던 그때 어느새 범선 앞에 도착한 우리는 시끌벅적한 선원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배위로 올랐다.
“오! 아르실님!”
탁, 탁, 탁, 갑판을 발로 두들기며 이것저것 명령하던 누군가가 나와 아르실을 발견하곤 쏜살같이 달려왔다.
머리에 쓴 선장모와 콧수염, 눈에 띄는 제복을 보고 선장이라 판단한 나는 먼저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카사노라고 합니다.”
“아! 이분이 그?”
“맞습니다. 신원은 제가 보증합니다.”
“하하, 그럴거까지야. 반갑습니다 카사노님, 저는 이 새벽바람호의 선장 바크문이라고 합니다!”
“말씀 잘들었습니다.”
굳은살 박힌 굳건한 손을 움켜쥐고 힘있게 흔들었다. 씨익, 건치를 보이며 웃은 바크문은 아르실과 나를 슬쩍 보곤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아르실님 성격상 오면서 이야기했으리라봅니다만 먼저 이야기하겠습니다. 제가 황자님께 보장받은건 항해에 관련해서는 제 의견이 최우선일 것, 임무나 다른것에 관해 이야기해주시는건 괜찮지만 항해는 오롯이 제 권한입니다.”
“알겠습니다. 딱히 얼치기선장 노릇도 하고 싶지 않고 배도 잘 모르거든요. 여태껏 해주신게 있으니 잘해주시리라 믿겠습니다.”
“크, 저같은놈에게 그리 깍듯이 대해주다니. 기쁩니다!”
“…? 아니, 아닙니다. 전문가에게 맡기는게 가장 든든하니까요.”
“하하하! 전부 들었나? 나는 오늘부터 전문가 바크만이다!!!”
“우우우우!!!”
“전문가님!!! 럼주가 마시고 싶습니다!!!”
“저는 인어랑 하룻밤 자는게 소원입니다요!!!”
얼빠진 소리를 들으며 피식 웃는 그때 꾸욱, 내 옷깃을 움켜쥐었던 아르실의 손길이 더 강해졌다. 후드 안으로 살짝 엿보인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든걸 보니 저런 농담엔 익숙치 않은 모양이었다.
“그럼 잠시 기다려주시지요. 출항 준비를 마치고 임무와 항구, 항해에서 있었던 일들을 차근차근 설명하겠습니다.”
“아, 그건 아르실에게만 알려주셔도 충분합니다.”
“아! 그렇게 하지요.”
한번 더 진하게 악수를 나눈 우리는 그렇게 흩어졌다. 갑판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선원들과 지시를 내리는 바크문, 곳곳에서 제역할을 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지켜본후 아르실과 함께 선실로 들어갔다.
“후우.”
“보고라면 같이 듣는게 더 좋을겁니다.”
“아르실을 믿으니까요, 그리고 아르실이 더 듣기쉽게 설명해줄거 같고.”
“…저희는 만난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정도면 충분하죠, 착하고 매력있고 의무감도 있고… 또 착실하잖아요.”
“…부인이 세명…”
척, 척, 내게서 조금 멀어진 아르실이 지긋이 노려보다가 훅, 후드를 젖혔다.
땀에 살짝 젖은 연갈색 머리칼 끝을 정리하고 부르르, 머리를 턴 아르실은 빤히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스윽, 눈을 부라리며 노려보기 시작했다.
“할말이 있습니까?”
“너무 경계하는거 아니에요?”
“부인이 셋…!”
“하하, 아. 그러고보니 선장이라지만 저한테 너무 깍듯하던데요? 일개 용병인데 왜그리 저자세로 구는건지.”
“그들은 카사노님을 기사로 알고 있습니다.”
“나를?”
어이가 없는 대답에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되물었지만 아르실은 고개를 갸웃이며 다시 한번 대답했다.
“카사노님을.”
“아니, 기사가 아닌데?”
“제가 기사라고 설명해뒀습니다. 지금 신분이 용병이라해도 카사노님의 실력과 오베론 황자님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면 카사노님이 기사가 되는건 금방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태생이 기사가 아닌데 갑자기 기사라고 해도…”
“그리고 항해를 하게 된다면 기사라는 이름값정돈 있어야 얕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한낱 용병이라고 한다면 바크문 선장이 아까처럼 깍듯이 대했을까요?”
“흠…”
“항해를 떠나는 순간 배는 완전히 고립된 하나의 사회가 형성됩니다. 그 안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도 황자님이 고용했는데…”
“저는 인간을 굳게 믿진 않습니다.”
홱, 고개돌린 아르실이 창밖을 바라보며 어깨를 흠칫흠칫 떨어댔다. 뭘 떠올린걸까, 고민하던 그때 분위기를 잠시 깨기위해 슬쩍 한걸음 다가가 그녀에게 물었다.
“저도 안믿나요?”
“…”
슬쩍, 눈동자만 돌려 나를 바라본 아르실이 휙, 다시 창문을 응시하며 말했다.
“네.”
그렇구나, 안믿으면 딱히 할말은 없지.
“…”
“…”
“…노, 농담입니다.”
“네?”
“아니, 아닙니다.”
큭, 참아야하는데. 결국 웃음이 터져버렸다.
“크흐흐.”
“역시 들었잖습니까…!”
꾸욱, 로브밑단을 움켜쥔 아르실이 노려보곤 퍼덕, 퍼덕, 로브 안에 있는 날개를 퍼덕이면서 분개하기 시작했다.
***
-쏴아아아!
아르실과 잠깐의 만담을 즐기고 배가 출항했다. 바람을 가르고 파도를 흔드는 범선 위에 서서 드넓은 바다를 구경하던 그때 후드를 푹 눌러쓴 아르실이 다가왔다.
“첫항해는 어떻습니까.”
“눈이 즐겁네요.”
바다야 뭐 지구에 있을때는 질리도록 봤지만 이곳의 바다는 여기가 처음이었다. 마치 푸른 보석들이 파도치는듯한 아름다운 대해에 감탄하던 그때 아르실이 흥, 코웃음과 함께 조금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륙 안에서만 활동했으니 그럴만 합니다. 알고 있습니까? 이곳의 물고기중 하나는 알이 아니라 새끼를…”
“혹시 바다 위로 올라와서 숨도 들이켜고 다시 바다로 돌아가고 새끼한테 젖도 먹이는 엄청 커다란 물고기요?”
“…그렇, 습니다…”
완전히 고래 아니야?
“그럼 혹시…”
“아! 그런데 저희 선장이 받아온 임무가 뭔가요?”
“…쳇.”
“네?”
“아닙니다. 바크문 선장이 받아온 임무, 아니 의뢰는 물자 운반입니다.”
“물자요?”
고개를 끄덕인 아르실이 척, 드넓은 바다 한켠을 가리키며 말했다.
“좀 더 가면 그곳에 또다른 무법항구가 존재합니다. 지난 항해동안 배가 반파되 수리를 맡긴 상선들의 물자를 대신 쐐기이빨항구에 가져다주는게 의뢰입니다.”
“편한 의뢰네요.”
“물론입니다. 거리도 멀지 않고 쐐기이빨 항구에 있을 상단에만 가져다주면 되니 무척이나 간단하지만- 동시에 귀찮을수도 있습니다.”
“귀찮아?”
“반파가 됐다는건 어찌됐든 물자나 배를 노리고 덤빈 적이 있다는게 됩니다. 항구에까지 찾아온다해도 상단에서 해적들을 막아낼순 있겠지만 항해중에는 상단이 믿을수 있는건 오로지 저희뿐입니다.”
“음, 이미 반파됐으니 확실히 노리는 놈들이 있긴 하겠네요.”
“어쩌면 이미 항구에 정박해 저희가 물자를 싣는걸 지켜보고 바로 뒤따라올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출항하고 따라붙어 곧바로 약탈할수도 있기도…”
“에이, 그래도 제가 첫항해인데 그리 재수없는 일이 일어나겠어요?”
“그렇, 습니까.”
“제가 생각보단 운이 좋아서요. 한번 믿어보세요.”
“후, 그렇다면 믿어보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당당하니 안믿겠다 할수도 없군요.”
***
-퍼어어어엉!!!
콰직!
“씨바아알! 빨리 좌로 틀어!!!”
“안됩니다!!! 바로 붙었습니다. 싸워야합니다 선장님!”
“이런 개새끼들, 제대로 준비하고 기다렸구나!”
“…”
펑, 펑, 이곳저것 대포터지는 소리와 함께 범선들이 아작났다. 바크문의 지시에 해적선 하나가 작살나고 불이 붙었지만 우리 범선보다 좀 더 커다란 덩치의 해적선이 쿵, 부딪혀왔다.
“씨이바아알!!! 넘어옵니다!!! 넘어와요!”
“전투 준비!!!”
“와아아아아아아!!!”
“…”
“그만 봐요, 제가 앞장 서면 되잖아요.”
운이 좋긴 지랄이.
결국 싸우기 위해 허리춤에 찬 검을 뽑고 로프와 판자를 던져대는 해적들을 보며 이를 드러내자 옆에서 아르실이 피식 웃었다.
동료의 비웃음을 무시한 나는 곧바로 해적들에게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