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턱을 뒤덮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이러다 바닷놈이 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들었지만, 힐끔- 갑판을 보면 걱정이 아닌 현실임이 느껴졌다.
“잘 가라, 씹새끼야!”
-풍덩!
“끄아아악!”
자기 팔을 베어버린 해적을 통에 넣고 바다에 빠뜨리는 선원이 있는가 하면
“릴라이들 밥줄 시간이 됐구만.”
“벌써 그렇게 됐어?”
-퍼억!
“끄흐으윽! 살려줘어어!!!”
카득, 카득, 릴라이, 그러니까 지구로 치면 상어 같은 놈들에게 해적들을 밀어 넣으며 낄낄대는 선원들까지.
“내 탓인가…?”
보름 내내 해적들과 부딪히고 뒤엉키고 나를 따라 전투를 치른 선원들 전부 하나같이 유사해적이 돼버리다니.
착실하고 성실하던 선원들이 왜 저렇게 됐나 고민하던 그때 어느 때와 같이 후드를 푹 눌러쓴 아르실이 후드 안에서 눈을 빛내며 내게 다가왔다.
“왜 그러십니까 검은 수염.”
“아 제발.”
거기다가 보름간 해역을 오가며 의뢰를 수행하고 현상금 붙은 해적들을 넘기며 나에게 별명이 하나 붙었다.
레지나와 만난다거나 해적들 상대로 쫄지 않으려면 별명 하나쯤은 있으면 좋다 생각했지만 내게 붙은 별명은 무척이나 단순하고 또 좆같았다.
“씨발, 검은 수염 난다고 검은 수염을 붙이다니.”
“몇 번이나 이야기했지만, 무척이나 좋은 이명입니다. 이근방 해역에 해적들은 검은 수염 이야기만 들으면 항해를 멈추고 보트를 탄다고 합니다.”
그걸 믿냐? 순진한 아르실의 머리에 턱, 손을 얹은 나는 그녀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착한 일도 많이 했는데…”
“웃, 그건 그렇습니다.”
꾸욱, 고개 숙인 아르실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아무도 이쪽으로 다가오지 않는 걸 알고 펄럭, 후드를 벗었다.
여관에서 로브를 낼름 벗기에 몰랐지만 요 보름간 아르실과 어울린 결과 아르실은 자기 모습을 남에게 보이는 걸 무척 싫어했다.
그런데도 첫날 신뢰를 다지기 위해 내게 모습을 보여준 그녀의 행동을 생각하니 조금 감동하기까지 했다.
“무차별로 해적들을 소탕하기보단 상선을 약탈하는 해적들 위주와 불법 노예선만 소탕했는데도 소문이 안 돌다니, 누군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막는 느낌입니다.”
아르실의 말대로 약탈하는 해적들도 많이 소탕했지만, 핵심은 노예선이었다.
여성과 수인 노예를 가득 태운 노예선을 몇 번 털어먹고 구출해준 여자 중에 몇몇을 대표로 뽑아 오베론에게 연락책으로 보내 그들의 후처리까지 부탁했다.
그 정도의 선행인데 악명만 나돌다니, 이곳 쐐기 이빨 항구는 선한 자에게 불친절한 개좆같은 항구였다.
“두목! 다음 행선지는 어디입니까?!”
아르실과 떠들며 갈라지는 바다를 구경하던 그때 텅, 텅, 갑판을 뛰어온 바크문이 내게 다가왔다.
후드를 눌러쓰는 아르실을 흘겨본 나는 듣기 싫은 호칭을 고치지 않는 바크문을 향해 타박을 주며 선원들을 가리켰다.
“두목 말고 그냥 이름으로 부르라니까요. 선장이 두목이라 부르고 자꾸 저한테 물어보니까 선원들이 전부 이상해지잖습니까.”
“하지만, 선원들이 여태껏 상선 호위만 하던 지루한 항해보다 두목, 아니 카사노님을 따라 싸우고 선행을 베푸는 걸 좋아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또 그렇긴 한대.
“그리고 이 정도 위명이면 요근래 떠들썩한 해적들과 현상금 사냥꾼 사이에서도 단언컨대 가장 위입니다.”
“그, 그래요?”
“네! 저번에는 선원들을 뽑지 않냐며 제게 돈까지 찔러주고 배에 타고 싶어 하는 놈들도 있었습니다. 아 물론 아르실님께 보고하고 전부 거절했지요.”
“그정돈가…”
“카사노님의 실력, 강함, 인품, 그것들이 어우러져 항구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선원들도 그런 점에서 존경하고 따르는 거니 너무 타박하진 마시지요.”
바크문 이 아저씨는 선장이 아니라 청소부인가? 왜 이렇게 잘 빠는 건지. 하지만 적나라한 칭찬도 자꾸 들으니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후우, 알겠습니다. 그래도 선원들한테 너무 가볍게 죽이지 말라고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야이새끼들아-! 물러난 바크문이 갑판에 나타나자마자 고함을 내지르며 선원들을 불러 모았다. 저게 옳게 된 선장이지- 감탄하던 그때 툭, 아르실이 내 옆구리를 찔러왔다.
“오늘은 이제 어쩔 계획입니까? 한 번 더 의뢰를 나갈 겁니까? 목록을 전부 뽑아뒀습니다만…”
촤르륵, 겹쳐둔 양피지와 편지를 내미는 아르실, 하지만 이미 지치기도 했고 또 하루 쉬어주기도 해야 저 폭력에 찌든 선원들이 얌전해질 거라 생각이 든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거절했다.
“아뇨, 오늘은 좀 술도 걸치고 푹 쉬죠. 아르실이랑 술도 마시고 싶고…”
“…셋.”
꾸욱, 내 옆구리를 움켜쥔 아르실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노려봤다.
***
-텅, 텅, 텅, 텅!
“와하하하하!!!”
“이것밖에 안 돼? 너 그 정도 밖에 안되는 새끼야?!”
“마셔, 마시라고!!! 나는 이제 부자다, 부자라고!!!”
“…시끄럽습니다.”
“하하.”
아르실의 타박을 들으며 주변을 둘러본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선원들과 찾아온 ‘인어의 빨통’이라는 이름의 술집. 보기 좋은 가슴 모양의 간판을 보고 골랐지만 천박한 이름답게 손님들의 수준과 분위기도 매우 천박했다.
“두목, 시비라도 걸리면…”
“제가 해결할 테니까 선원들 사고 안 치게 잘 지켜봐 주세요.”
“네!”
텅, 텅, 맥주잔을 테이블에 내려치는 선원들 사이에 끼어드는 바크문, 그의 뒤를 따르는 간부들과 선원들이 어우러지고 잔을 부딪친다.
-촤아악!
테이블에 흐르는 거품 맥주와 말라비틀어진 생선 안주를 구경하며 목을 축이는 그때 아르실이 스윽, 내 옆에 붙었다.
“시끄럽습니다.”
“그런 맛으로 오는 거죠.”
사람 수가 많은 만큼 술집 구석에 자리 잡아, 우리끼리 마시고 있지만 분위기란게 그렇다.
우리 주변에도 해적단이나 상선이 단체로 목을 축이고 있었고 그들이 떠들어댈 때마다 우리들의 대화는 파묻히고 또 잡음에 섞여 흩어져버렸다.
“…이래선 이야기를 나눠도 기억하기 쉽지 않습니다.”
“저는 괜찮아요. 원래 귀도 좋고, 아르실 이야기를 하나도 흘려들은 적 없으니까요.”
“…제가 첩보부에 가장 먼저 들어와서 했던 일은?”
“복도 날아다니면서 액자 닦기.”
쾅! 맥주잔을 테이블에 내려친 아르실이 후드 안으로 두 눈을 번뜩이며 나를 노려봤다.
“다시 말하지만 그건 정말 옳지 못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게말이에요. 이런 인재한테 왜 그리 모질게 굴었는지.”
어릴 적 트라우마를 자극받은 아이처럼 분개한 아르실이 씨익, 씨익, 분을 못 참다가 툭, 내게 살짝 기대왔다.
“시끄럽습니다…”
화려한 조명 탓에 후드 안에 가려진 아르실의 얼굴이 엿보였다.
몇 잔 걸치지도 않았는데 빨개진 얼굴, 조금 풀린 동공과 함께 입술을 오물거린 아르실은 멍하니 나를 응시하다가 내게 한 가지 물어왔다.
“…이번 임무가 끝나면, 카사노님은 어디로 가는 겁니까?”
“저는 히네라마을로 돌아가야죠. 거기에 두고 온 사람들이 많아서.”
“…바람둥이입니다.”
“사람을 좋아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
“…맞습니다…”
딸꾹, 작은 몸을 들썩인 아르실이 헤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상체를 휘청거렸다.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이러다 넘어지겠네.
-꾸욱
“아으…”
작은 어깨를 움켜쥐고 내 쪽으로 잡아당기자 꾸욱, 아르실이 내 갈비를 정수리로 누르며 나를 올려다봤다.
조명에 비친 아름다운 주황빛 눈동자, 맥주 냄새를 풍기며 할짝, 마른 입술을 핥는 아르실의 유혹에 나는 아무도 우릴 바라보지 않는단걸 알아채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우웃…”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진 것처럼 아르실의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천천히 다가오는 내 얼굴이 그녀의 눈동자에 비췄지만 커다랗게 뜬 눈으로 응시할 뿐, 아르실은 나를 막아 세우지 않았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뻐억! 뻐억!!! 뻐억!!!
“죽어! 죽으라고 이 씨발새끼야아!!!”
“죽, 여, 라! 죽, 여, 라!”
“호우우우우우우우!!!”
-뻐억!
“악!”
아르실의 입술과 내 입술이 맞닿기 전, 술집을 가득 메우는 우렁찬 함성에 벌떡 일어난 아르실이 이마로 내 턱을 받았다.
욱신거리는 고통에 턱을 쓰다듬는 그때 이마를 매만지던 아르실이 척, 술집 중앙을 가리키며 말했다.
“싸움이 난 모양입니다.”
사람으로 이루어진 링이 부서진다. 퍼억, 넘어진 남성이 바닥을 뒹굴었지만, 벌떡 일어나 쏘아지듯 앞으로 뻗어나갔고 달려들던 상대가 뻐억, 그대로 얻어맞으며 소리쳤다.
“끄아아악!”
“엄마 젖도 덜 먹은 씹새끼가 어딜!”
어머니를 들먹이는 모욕에 얻어맞은 커다란 덩치가 피식 웃으며 소리쳤다.
“그래도 네 엄마 젖은 내가 더 많이 먹었을걸? 그렇지 않고서야 너 같은 미숙아를 낳을 리가 없잖아. 작작 뺏어 먹을 걸 그랬다 모지리새끼야!”
2m는 훌쩍 넘어 보이는 살덩이 덩치가 남자를 향해 패드립을 하며 껄껄 웃었다. 창의적인 욕설에 감탄하던 그때 엄마 젖을 뺏긴 남성이 빠악, 덩치의 턱을 후렸다.
“애비한테 그렇게 덤비면 쓰나!”
“애비 가랑이 밑을 길 준비는 됐겠지, 씹년아?”
남성의 분투도 잠시, 역시 싸움은 체급을 무시할 수 없었다. 살덩이 덩치가 뻐억, 남성의 머리통을 후려치고 남성이 쓰러진 순간 후욱, 뛰어오른 덩치가 넘어진 남성의 몸을 그대로 깔고 앉았다.
-우직!
“으으…”
“더럽습니다.”
뒤룩뒤룩, 온몸을 뒤덮은 주름진 살에 파묻힌 남성이 끄으으,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흰자위를 드러내고 혼절한 남성의 위에서 일어난 덩치는 꾸욱, 남성의 멱살을 움켜쥐고 후욱! 그대로 던져버렸다.
-다만 날아오는 방향은 공교롭게도 내 쪽이었다.
쿠당탕탕탕!!!
날아온 남성의 머리통이 맥주잔을 정리하고 더러운 몸이 안주를 뒤덮었다. 추가 토핑 같은 모양새에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흐흐흐.”
남자를 내던진 살덩이가 이쪽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고 덩치 뒤에 자리 잡은 여자 몇 명이 찢어지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흘겨보고 있었다.
“이 새끼들 일부러 그랬구나.”
싸움은 체급이지만, 실력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 꾸욱, 남자에게 엎어질 뻔한 맥주잔을 든 나는 덩치를 향해 마주 웃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