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내, 내, 내 먹이야! 상관하지마!”
‘너, 너무 싸가지없게 대답했나?!’
앙칼진 필리아의 대답에 피식 웃은 카사노는 거리를 벌린 필리아에게 툭, 다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위해 속삭이기 시작했다.
“여린 아가씨가 저런 악적하고 홀로 싸우는 걸 마냥 지켜볼 남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놈들은 사내 실격이지요.”
나한테 맡겨요- 후우, 뜨거운 숨결을 조금 갈라진 귓볼을 향해 내뱉은 카사노는 멀리서 발을 쿵쿵 구르는 레지나를 향해 한걸음에 날아갔다.
-카아아앙!!!
“반갑네.”
“카사노오오… 이 씨발새끼가아…!”
부글부글, 낮게 가라앉은 느글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열불이 뻗친 레지나는 캉, 캉, 캉, 도끼질하듯 카사노의 검을 두들기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내뱉고 내뱉고 소리쳐도 속에 피어오른 불길은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 마나까지 일으키며 카사노를 파도로 뒤덮었다.
-쏴아아아아!!!
“으아아악!!!”
“끄아아아악!!!”
어찌나 센 파도를 일으켰는지 검을 맞댄 채 쏟아낸 파도는 카사노를 뒤덮고도 넘쳐흘러 구경하던 필리아의 선원들을 바다에 빠트렸다.
그 모습을 보고 동료들을 구하러 풍덩, 풍덩, 빠지는 선원들의 소리가 음악처럼 깔릴 무렵 홀딱 젖은 카사노가 젖은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이죽거렸다.
“이런 개같은 년…”
얼마나 날아온 거야? 파도에 밀려나 쿵, 배에 등을 부딪친 카사노는 아려오는 몸을 뿌드득, 풀며 일어났고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몸을 돌렸다가 조금 놀랐다.
핑보, 아니 필리아가 부르르르- 물에 젖은 개처럼 머리를 털며 바닷물을 뱉어내고 있었다.
“베에에엣! 퉤엣, 퉤엣! 흐으으으…”
커다란 파도에 뒤덮여 꾸르르륵- 헤엄치다 날아온 필리아는 짜디짠 바닷물을 내뱉으며 킁, 코를 훌쩍였다. 그러다가 느껴지는 인기척에 몸을 돌렸다가 딱붙은 카사노를 바라보고 화들짝 놀랐다.
“꺄앗!”
“잠시만요 아가씨.”
스윽, 품 안에 손을 넣은 카사노는 젖어든 아공간 주머니를 탈탈 털고 안에 손을 넣어 뽀송뽀송한 손수건을 꺼냈다.
“응? 으응?!”
가슴에 딱 달라붙은 옷가지가 찝찝해 카사노가 보지 않는 틈에 펄럭, 펄럭, 가슴골을 드러내며 말리던 필리아는 다가오는 손에 깜짝 놀랐다가 톡, 섬세하게 뺨을 두들기고 귀를 아주 다정하게 어루만지는 손길에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도와드리겠습니다.”
“됐어, 됐다구우우…!”
꾸욱, 꾸욱, 물먹은 솜 같은 팔로 카사노를 밀어냈지만 밀리지 않는다. 당황한 필리아는 부하들과 레지나, 그년의 똘마니- 거기다 카사노의 선원들까지 지켜보는 앞에서 아이처럼 다뤄지는 게 부끄러워 반항했지만 어째선지 카사노는 전혀 밀려나지 않았다.
“상처에 바닷물… 덧나지 않게 잘 관리하세요.”
톡, 손수건으로 닦아내 뽀송해진 뺨에 얹어지는 커다란 손바닥.
손바닥의 주인이 그윽한 검은 눈동자로 들여다보는 순간 헤에, 멍청하게 벌어진 입에서 흐르는 침을 느낀 필리아는 황급히 스읍, 침을 삼켰지만 이미 카사노가 그걸 보고 피식 웃었다.
‘부끄러워, 더러운 여자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제발!’
“자아, 잠시 쉬고 계세요, 레지나는 제가 상대할 테니까요.”
꾸욱, 늘어진 팔을 들고 결투의 중심으로 돌아온 카사노와 필리아.
무언가 불만 가득해 보이는 레지나 앞에 마주 선 필리아는 자신을 살짝 밀어내는 카사노의 손길을 느끼며 그의 그윽한 얼굴을 봤다가 휙, 고개를 돌려 자신의 부하들을 바라봤다.
“왜요 아가씨?”
히죽, 빠지고 깨지고- 난리 그 자체인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는 선원들.
자기 고용주가 물에 젖던 다치던- 좆도 신경 안 쓰는 꾀죄죄한 몰골의 남정네들을 스윽 둘러본 필리아는 성큼성큼 웃는 낯으로 레지나에게 다가가는 카사노를 바라봤다.
세심하고 깔끔하다, 물에 젖어 넘긴 앞머리는 훤칠한 얼굴을 강조하는듯했고 시선을 느끼고 살짝 뒤돌더니 자신을 향해 미소 지으며 손까지 흔들었다.
물론 카사노야 필리아를 골리는 겸 그녀에게 잘 보이면 이득이 많은 걸 알고 대놓고 수작질을 부린 거였지만 남자와 접점이 적고 못난이들과 어울리며 피폐해진 필리아에겐 너무나도 치명적인 수작이었다.
“아으, 아으으…!”
아빠, 남편감 드디어 찾았어요.
“끼야아아아아악…!!!”
지옥에 사는 칠면조가 날뛴다면 저럴까, 제 딴엔 조신하게 비명 질렀다고 생각할 필리아가 발을 구르는 걸 지켜보는 선원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또 꽂히셨네.”
“검은 수염 정도면 잘생겼지. 맨날 우리 얼굴 보다가 저런 얼굴 보면 나 같아도 좋겠다.”
“이런 씨발…”
착잡한 선원들의 대화를 들으며 달려드는 카사노, 하지만 무언가 심통이 가득한 얼굴로 피레아를 높이 치켜든 레지나가 콰아아아-!!! 파도를 쏟아낸 순간 카사노는 다시 파도에 휩쓸려 필리아가 서 있는 그녀의 배 위로 떠밀렸다.
“얘들아! 사다리 쳐내, 거리를 벌린다!”
“네 선장님!!!”
우르르, 갑판을 뛰어다니는 여해적들의 일사불란한 몸놀림과 함께 끼이익, 나무 소리가 울려 퍼지고 고정된 두 배가 흔들리더니 서서히 벌어졌다.
파도를 조종해 자신의 배를 짓누르는 두 배를 밀춰낸 레지나는 천천히 다가오는 안개를 보며 히죽 웃고 콰아아아-! 자신이 파도와 함께 안개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카, 카, 카사노! 괜찮나!”
“브웨에엑…”
씨발, 불가사리 삼킨 거 아니야? 헛구역질이 치솟는 속을 진정시키며 바닷물을 뱉어낸 카사노는 미역처럼 이마를 덮는 머리칼을 뒤로 넘기고 벌떡 일어났다.
물먹은 귀가 우우웅- 이명을 냈지만, 쿵, 쿵, 발을 굴러 물을 빼낸 카사노는 얼굴을 붉히고 있는 필리아에게 성큼 다가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후우, 저는 괜찮습니다. 아가씨는 괜찮으십니까?”
“으, 응, 고마워, 나는 당연히 무사하지…”
삐걱, 삐걱, 갑판을 강하게 누르며 발을 배배 꼬는 필리아. 그 모습에 지켜보던 선원들은 다시 한번 카사노에 대한 평가를 바꿨다.
“저 정도면 그냥 잘생긴 게 아니라 우리를 보다 봐서 천상의 미남으로 보이는 거 같은데?”
“그런가?”
히죽, 이 빠진 미소를 나누는 선원들을 보며 쪽팔림을 감수한 필리아는 파들파들, 움켜쥔 주먹을 떨다가 카사노의 위명을 기억하고 툭,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인사를 건넸다.
“카사노! 그게, 고맙다! 아버님을 대신해 감사를 표하지, 하, 항상 우리 영지를 더럽히는 쓰레기들을 청소해준다지!”
“아가씨! 그런 말을 하면 별로 좋아하지 않슴다! 좀 귀엽게, 귀여운 말투로!”
“득츠 쓰블 새끼들아…”
부르르, 이를 갈며 욕지거리를 내뱉은 필리아는 뭉개진 발음으로 경고하고 순진한 미소를 가장해 카사노를 바라봤다.
아르실을 보내 현상금을 여러번 타왔던걸 떠올린 카사노는 손을 내저으며 겸허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영주님의 은혜와 아가씨의 관심 덕에 그런 업적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텁!
“응흣?!”
자연스럽게 움켜쥐는 손.
“아~ 배고프다.”
“아~ 졸려.”
“아~ 가씨 부끄러워하시네.”
-빠악!
“그윽!”
땀에 젖은 필리아의 손을 움켜쥔 카사노는 옅은 미소와 함께 굳은살과 부드러운 손등을 쓰다듬으며 필리아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봤고 그 모습에 원으로 둘러싼 선원들은 재빨리 흩어졌다.
-쪽!
힘없이 이끌리는 손등을 바라보며 미소 지은 카사노는 부드러운 손등에 짧게 입 맞추고 고개를 들었다. 손등의 주인이 무슨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 고개를 들었던 그는 예상외의 반응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으흐흐흐흣…!”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무척이나 기뻐하는 필리아, 잘생긴 남자를 선호한다는 근거 없는 소문의 근거를 채워주는 미소를 보이던 그녀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툭, 카사노를 밀어내곤 새침한 목소리로 키스에 대한 보답을 내뱉었다.
“크흠! 도, 도와줘서 고맙다. 물론 나는 그 미친년 상대로 밀리진 않았지만, 당신의 호의였으니까…!”
자존심 세우겠다 이거지? 필리아의 속마음을 읽은 카사노는 곧바로 허리를 펴고 필리아의 시선을 맞추며 겸손하게 대답했다.
“하하, 알고 있습니다. 이건 순전히 아가씨를 돕고 싶어 제가 나섰던 거니까요.”
‘미쳤어, 미쳤어어!’
그윽하게 쏘아지는 카사노의 눈빛, 그대로 얻어맞은 필리아는 심신미약 상태임에도 무척이나 좋아하며 발을 쿵쿵 구르고 기뻐했다.
“하하.”
숙맥처럼 모든 반응을 보이며 기뻐하는 필리아, 격식도 가식도 없는 날 것 그대로의 반응에 귀여움을 느낀 카사노는 큭큭 웃으며 넘어가려다가 괜히 심술이 나 필리아를 더 골려주기로 했다.
“그래도 보답을 주시면 거절하진 않겠습니다.”
“으, 응. 당신을 위해서라면 보답 정도 얼마든지 가능하지!”
“보답이라면, 아가씨와 단둘이 식사자리라도 한번 가지고 싶은데…”
“그, 그걸로 충분하다면 부디이이…”
푸시익, 말끝을 흐리며 얼굴을 붉히는 필리아. 연기가 나는 게 아닐까 싶은 정도로 빨개진 얼굴을 마주 본 카사노는 분홍빛 머리칼을 찰랑이며 순진한 반응을 보이는 필리아에게 한마디 하려다가 후욱, 온몸을 짓누르는 존재감에 얼굴을 굳히며 몸을 돌렸다.
-피잉! 피잉! 피잉! 퍼어어어엉!!!
지난번에 목격한 신호 마법과는 궤가 다른 커다란 마나 반응.
바다를 울리는 마나의 파도에 필리아와 카사노, 아르실의 얼굴이 구겨졌고 화악, 어느새 배를 둘러싼 안개가 걷어지고 배가 엄청난 폭으로 출렁이기 시작했다.